수도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같은 시간표를 사는 형제라해도 개중에는 생활의 리듬이나 색깔이 유난히 비슷한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지금이야 불면증이 심하게 되었지만 젊을 때부터 잠이 없는 편이어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소위 ‘새벽형 인간’ 이었다. 그게 요즈음에는 너무 일찍 새벽 2시나 3시에 깨서 문제지만…….어둠이 조금만 가셔도 나는 더 누워있지 못하고 방을 나와 걷는다, 수도원 앞마당을. 점차 날이 밝아져 열심한 부인들이 십자가의 길을 하러 모여든다. 나랑 생활리듬이 비슷한 형제도 이때쯤 나온다. 그런데 그 형제가 교우들을 대하는 태도와 나의 태도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모르는 교우들이 말을 건네 오면 나는 가능한 한 대화가 더 진전되지 않게끔 단답형으로 응함으로 관계를 맺거나 역이지 않게 대처하는데 반해 그 형제의 대화는 언제나 열려있어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며 지금 여기에 친밀한 공간을 창조하는 것 같다.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가 베엘제블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쫒아낸다고 비난했을 때, 예수는 하느님의 손가락이 지금 여기서 마귀들을 쫒아낸다면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는 것이다 하셨다. 마귀의 나라는 특별히 악한 나라 도 해당되겠지만, 이 문맥에서는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각박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만나서 갖는 관계는 과거의 무한반복이나 답습이 대부분이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관행을 거스르는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 상대방이 현실적으로 받을 위험이나 손해를 무릅쓰고 이런 제스쳐나 이니시어티브를 취해올 때 , 또 그 결과 아주 다른 결말을 가져왔을 때 우리는 흔히 그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한다. 이 신세졌다는 표현은 은총을 입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진정 우리 언어나 문화에 맞게 옮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톨릭 신앙이 이 땅에 뿌리를 박고 나름대로 지역적 특성을 간직한 채 피어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거나 앵무새처럼 동어반복을 하는 이유는 신앙의 중요한 체험을 반영하는 용어들에 대한 진정한 체험이 일천한데다 그마저도 우리 맥락에 맞는 적절한 반성에 따른 맛깔 나는 번역이 부재하기 때문이리라. 신앙체험이 있을 때는 비록 같은 체험을 서술하는 다른 문화의 언어를 읽더라도 그 속뜻을 간파할 수 있을 텐데, 그 원체험의 일천함과 빈곤함으로 인한 용어의 오역이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발상의 전환은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와 같은 가상한 용기가 요구된다. 세자요한은 바로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보인다. 현실의 예수는 그가 한 평생 믿어오고 기다려온 사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럴 때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과감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예수의 첫 제자들이 무서워 감히 묻지도 못하였듯이 어느 정도 깊은 신앙과 신뢰가 있어야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오늘 세자 요한 축일에 한국교회에 세자 요한의 존재이유를 돌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