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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발생
1982. 3. 18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부의 유혈진압을 미국이 방관했다는 이유로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발생 14일 만인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한 데 이어 방화범 3명과 전단 살포범 3명, 의식화학습을 같이 한 3명 등 11명이 검거되었다. 다음날 가톨릭 원주교육원에서 문부식과 김은숙에게 의식화 학습을 지도한 김현장이 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체포되었다. 또한 당시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권의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비롯되었으나 투쟁의 성격이 격렬하고 대담해 국민과 재야운동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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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실각
1890. 3. 18
비스마르크(1880) | 1890년 3월 18일 독일제국을 건설한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의 압력으로 실각했다. 1862년 9월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빌헬름 1세의 후원으로 총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신생 독일 건설에 힘쓴 결과 1871년에 독일의 통일을 이루면서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888년 3월 빌헬름 1세의 죽음으로 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1890년 의회가 사회주의자 진압 법안을 부결하자 그는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의회 해산에 이은 총선거에서 그가 주도한 여러 정당들이 패배했다. 그는 황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내각 총사퇴를 호소했지만 모두 외면했고, 결국 빌헬름 2세의 요구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
디젤 Rudolf Christian Karl Diesel
1858년 3월 18일 태어남 / 1913년 9월 29일 죽음
디젤(1883) |
디젤은 디젤 기관을 발명한 독일의 열(熱)공학자이다. 185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자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다. 1870년 독일로 건너가, 숙부가 교사로 있는 아우크스부르크공업학교를 마치고 1875년 뮌헨공과대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중에 기존의 내연기관에서는 전환된 에너지의 극히 적은 부분만이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열효율이 높은 내연기관 개발에 힘썼다. 1892년 자신의 이름이 붙은 내연기관으로 특허를 받았으며, 크루프사의 지원을 받아 1894년 보다 안정되고 값싼 디젤 기관의 운전에 성공했다. 1913년 배를 타고 영국으로 향하던 중, 갑판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문부식(文富軾, 1959년 ~ )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전 진보신당 대변인이었다.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문부식은 유복한 군인 집안으로, 아버지 문경삼은 육사 8기로 김종필과 동기였으나 1959년 부조리와 이승만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대령으로 전역했다.[1]
부산 고신대 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2년 3월 18일, 전두환 독재 정권과 미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고자 부산 미국문화원에 방화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불순세력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여 문부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6년 9개월만인 1988년 12월 석방되었으나, 7개월 후 한미문제연구소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 형을 받고 만기출소했다.[2]
김은숙과는 1980년 복학하면서 고신대학교 같은 3학년 학생으로 서로 사귀게 되었다. 방화후 각각 군입대 및 노동현장으로 갈 계획이였으나 사건이 의외로 커지고 3월 20일 서정화 내무부장관의 강경한 담화가 발표되자 둘은 일단 도피하기로 했다. 우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지학순 주교에게 갈 목적으로 3월 20일 밤차를 타고 21일 원주에 도착했으나 해외출장 중으로 만날 수 없어 원주교육원의 최기식 신부에게 찾아갔다. 1982년 4월 1일 자수를 두 시간 앞두고 최기식 신부에게 부탁해 성단관리인 문길환과 원주에서 치악산 서점을 경영하던 김영애와 김현장을 증인으로 세우고 김은숙과 결혼식을 대신한 예식을 올렸다.[1]
1995년부터 출판일을 시작해, 도서출판 삼인의 주간과 계간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을 거쳐 꾸리에 출판사 비상근 기획위원으로 일했다. 2011년 12월 5일부터 2011년 12월 30일까지 진보신당 대변인으로 일했다.[3]
2002년 7월 12일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동의대 사건 민주화 인정은 납득할 수 없다>는 제목으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삼인)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지난 4월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에 대해 화재 진상규명을 하기에 앞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것은 성급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민주화운동 인정 여부는 공론 영역에서 충분한 논의를 통해 설득력을 갖추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발표 매체 및 내용을 둘러 싸고 민주화 운동가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다.[4]
이후 같은 매체에 2003년 2월 4일 '슬픔에 관하여- 겨울, 광화문 단상'을 기고하여 광화문의 촛불의 의미를 부정하고 폄하한다는 비난을 받았다.[5]
2011년 12월 29일 택시기사 폭행 및 경찰서 공공기물을 파손하여 진보신당 대변인 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당시 언론에는 문부식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택시기사를 폭행했다고 전해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당 택시기사 이**씨는 "문 대변인이 홍대 앞에서 택시를 탔는데 만취가 돼 있었다. 택시를 타는 곳에 배웅을 나온 사람들과 앞선 술자리에서 괴로운 얘기들이 오간 것 같았다. 그런데, 일산으로 가는 중간에 문 대변인이 나를 아까 술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으로 오해했던 것 같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중간에 갑자기 '00야, 네가 왜 운전을 하고 있냐', '지금 어디로 가는거냐', ' 00야, 네가 왜 택시를 몰고 있냐'고 하다가 (별다른 대답이 없거나 본인의 생각과 다른 대답이 나오자) 갑자기 뒤에서 얼굴을 때렸다"라고 증언했다. 김 진보신당은 즉시 문부식을 대변인직에서 해임했고, 홍세화 대표가 택시기사와 해당지구대를 직접 방문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당 택시기사는 사정을 이해하고 "언론에 보도가 된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밝혔으며, "당대회에도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