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증거 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신앙의 얼 200년 세월 넘어 생생히 전해져
또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덕숭총림 수덕사, 조선 후기 서화가 김정희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추사고택도 예산에 있다.
이번에 시복된 복자 124위 가운데 3위가 예산에서 순교해 내포 신앙의 빛나는 뿌리가 됐다. 예산군 내 예산장터ㆍ대흥ㆍ덕산 순교지다.
한가위를 보내자마자 새로운 순교복자들을 찾아 떠난 순례 길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간 이들을 ‘기억’하는 기회였다.
그렇지만 중인 집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지방 면장을 지낸 김광옥이나 같은 중인 출신인 김정득은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포졸들은 이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낸다.
청주병영에서도 이들은 서로 신앙을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살이의 고통을 견뎌낸다. 이에 다시 한양으로 압송된 이들은
그해 8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해 참수하라’는 선고를 받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그해 같은 날인 8월 25일에 순교의 화관을 쓴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입국하자 직접 찾아가 세례를 받은 그는 1798년 혹은 1799년에 체포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덕산 관아 옥중에서도 그는 용감하게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옥에 갇힌 동료들에게 신앙을 권면했으며, 1799년에 순교한다.
그럼에도 ‘순교신앙의 뿌리’를 찾는 일은 힘겹다. 124위 시복법정 개정 당시 현장조사에 참여했던 윤인규(여사울성지 전담) 신부를 찾아가 관아 터나 옥터, 순교 터를 ‘지번’으로 일일이 확인한 후 찾아 나서니 한결 수월했다.
예당저수지에서 발원해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무한천을 낀 쇠장 일대에서 처형하게 된 것은 예산현에는 사형수를 처형하는 전문 회자수가 없어 소를 죽이던 쇠장의 백정을 임시 회자수로 썼던 데서 유래한다.
어쨌든 처형되기까지 김광옥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끌려갔던 순교 길은 200년이 지난 오늘엔 퇴적된 역사의 지층으로나마 남아 있을 뿐이다.
지번으로 보면 예산군 대흥면 예당로 883(동서리 174-5)이다. 예당저수지와 붙어 있는 순교 터에는 수풀이 무성할 뿐이다. ‘의좋은 형제’상이 곳곳에 세워진 공원을 걷다 보니 의좋은 순교복자상도 세워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덕산관아는 현재의 덕산초등학교 운동장 오른쪽 예산군 덕산면 봉운로 70-9(읍내리 365-4) 건물 뒷편 공터이며, 옥터는 관아터에서 500m가량 떨어진 읍내리1구 마을회관(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봉운로 51-1, 읍내리 361-1)이다.
정산필의 순교경위는 자료마다 달라 정확한 순교위치를 알기가 어렵다.
다블뤼 주교의 기록이나 약전에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형장에서 참수당했다고 기록돼 있으나, 「사학징의」 권1 54쪽에는 ‘정산필이 매를 맞아 죽었으므로
이제 다시 신문할 것이 없다’고 기록돼 있어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것. 윤인규 신부는 매를 맞아 죽었다는 「사학징의」의 기록에 더 신빙성을 두고 읍내리1구 마을회관을 순교 터로 본다. |
출처: 평화와 착함 원문보기 글쓴이: 착한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