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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공광규 호수: 37 [나의 시 나의 삶]휴일, 권태 휴일, 권태 일요일 아침, 아이들은 거실에서 만화영화에 눈이 빠져 있고 나는 안방 문을 잠그고 아주 오랜만에 아내와 그걸 시도한다 덜그럭거리는 아내와 관계에 기름을 쳐보려고 그걸 세우나 오늘도 잘 안 된다 결혼 십 년 만에 물건이 닳은 걸까 아내와 같이 시집 온 물건들도 덜그럭거리기 시작한다 화장실에 갇혀 있는 세탁기는 자기를 수리해 주지 않는다고 가슴을 텅텅 치며 불평한다 비디오 겸용 14인치 삼성텔레비전도 테이프를 뜯어먹거나 뱉어내지 않아 젓가락을 아가리에 찔러 넣고 그것도 아내가 신경질을 부려야 뜯어먹던 콩나물을 꾸역꾸역 토해낸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멈춘 시계는 건전지를 바꿔 끼워도 돌아가지 않는다 음극판이 부식되어 드라이버로 벗겨내도 마누라를 닮아 전류가 통하지 않는다 아랫도리에 코드를 꽂아도 권태의 곰팡이가 슬어 전기가 안 온다고 불만인 마누라 똥과 오줌을 꿀꺽꿀꺽 잘 받아먹던 변기도 과식하거나 체했는지 계속 게워내다 마침내 화장실을 똥 바다로 만들어버린다 자기 똥이 섞인 가족의 똥이면서도 도망치는 아내와 아이들 결국 가장만이 똥과 대결해야하는 비겁한 가족을 거느린 장수의 슬픔 이빨이 빠지고 대가리가 굵어지느라 말을 안 듣는 아들놈 코를 비틀 듯 몇 번 비틀어야 겨우 말을 알아듣는 가스렌지 보일러 모터도 나처럼 힘이 떨어졌는지 겔겔거리다 이내 죽어버린다 수동복귀를 눌러주러 팬티차림으로 보일러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참을 수 없는 번거로움 내 몸에도 수동복귀 단추를 달아 하루 밤에 몇 번을 세웠으면 좋겠다 신혼의 첫 다짐처럼 하얗던 벽지도 때가 탈대로 타고 방구석에는 무관심이 거미줄을 쳤다 부부싸움 때 잘못 들었던 폭언은 아들놈이 몰래 타다 남겨놓은 장판 위 롤러브레이드 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쥐꼬리만한 내 수입에 목구멍을 의존하면서도 나를 쥐꼬리만큼도 존경하지 않는 가족들 정말 돈과 존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속썩이는 남자와 십 년 똥배와 쪼글쪼글한 유방만 남았다고 불만인 아내 시어머니에게 빽빽대는 고장난 스피커 명절과 제사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광신자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여권운동가 일요일에 주부에게 휴식을 달라는 가사노동자 애정이 생길 때까지 별거해보자는 사르트르 애인 가사와 육아를 공동분담하자는 남녀평등주의자 누가 마누라 수리업을 개업한다면 아주 멋진 산업훈장을 받으리라 나는 그게 안 되고 아내는 그것도 못하냐며 핀잔을 주고 나는 더 쪼그라들고 아내는 이내 돌아눕는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나의 무능을 알아차렸는지 깔깔거리며 만화영화에 환호를 보낸다 결혼의 생산품은 저 징그러운 사고뭉치들과 중고 가구와 부서져 가는 관계들 무척추동물처럼 이불에서 빠져나와 후라이팬에 찬밥과 남은 김치를 몰아넣고 참기름을 붓고 깨소금을 뿌린다 부부관계란 이렇게 잘 굽고 잘 섞고 잘 데우고 정성스러워야 하는 건데 요리의 상상력인데 이제는 너무 늦었다 서로 버리는 음식이 되었다. “얘들아, 오늘 아빠 특별요리다” 아이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텔레비전 속의 광고를 먹고 싶다 맛있겠다 한다 돈버는 기계 자본의 소금에 절여진 파김치 밥을 찾아 굽실거리는 벌레 기계와 파김치와 벌레를 아이들이 존경할 리 없다 살림이 싫증난 아내가 운전하는 엉망인 주방 서랍을 뒤지는데 낯선 남자의 명함이 튀어나온다 휴일 아침부터 아내를 바꿔달라는 당돌한 남자의 전화 누워있는 아내를 깨우려다 그만 둔다 허구헌날 문화건달들과 술 처먹고 지껄이다 새벽에 들어와 쿨쿨 자는 아내 여러분, 이 귀한 분을 어떻게 모실까요? 결혼을 해서 십 년쯤 되면 아이들이 만화영화에 빠질 나이가 된다. 이때쯤 되면 아내와 거시기 하는 것도 재미가 없다. 그렇더라도 아내와 사이가 벌어졌다 싶으면 거시기로 다시 용접해야 한다. 성욕은 삶의 긍정적 덕목이고 버팀목이지만 오랜만에 시도해 보는 거시기가 잘 될 리 없다. 이때쯤 되면 결혼 무렵 혼수로 산 혼수품들도 고장이 나서 하나씩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아내는 바꿀 수가 없다. 물론 바꾸는 방법이 있긴 하다. 이혼과 재혼. 극성스런 아이들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박고 코와 귀를 비틀어도 그때뿐이다. 식구들은 나를 조금도 존경하지 않는다. 나는 월급 봉투를 내주면서도 욕먹는다. 사이비 페미니스트인 아내는 전통과 관습은 무조건 부정한다. 정말 ‘마누라 수리업소’가 있다면 맡기고 싶다.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광고에 나오는 음식만 찾는다. 그래도 가정을 유지해야 하는 나는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음식쓰레기장 같은 냉장고를 뒤져 이것저것 몰아넣고 볶음밥을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은 텔레비전 광고 음식에만 관심이 있고, 술 먹고 새벽에 들어와 술 냄새 풍풍 풍기며 자는 아내. 살림이 엉망인 아내의 주방서랍에서는 낯선 남자의 명함이 튀어나오고, 휴일 아침부터 아내에게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온다. 지독한 권태. 이것이 나의 경험과 선험이 결합된 상상적 삶이다. 공광규 1960년 충남 청양 생. 시집으로 『대학일기』, 『지독한 불륜』 등이 있다. |
첫댓글 리얼하고, 아픈 시네요!
정말 비감ㅠㅠ.....어째야 할까요? 이 시를 시 그대로 읽어 줘야 하지만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면 중요한 것과 급한 것이란 게 뭘까생각해 보네요. 가족과의 좋은 관계는 중요한 것이고 생계를 위해 일하는 건 급한 것이어서 둘다 중요한 일...그렇게 별다른 노력없이 보낸 세월이었다면 이제는 노력해야 할 때.. 나나생각
삶의 한복판에서 건져낸 詩들은 이렇게 가끔씩은 잠자고 있던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무릎을 치게 만들죠!! ....詩 속에 등장한 많은 삶의 진솔한 세목들이 큰 울림으로 우리의 가슴에 메아리치지 않습니까? - 이것이 바로 살아 움직이는 감동이지요. 헛폼만 잡는 그런 값싼 감동은 분명 아닌 것이지요.....
가을비처럼 음습하네요. 내 나이 저만쯤일 때는 저렇지는 않았었는데, 확실하게 불경기가 맞고요, 사회 변화가 급격하구요,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만은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려.
결혼에도 임기가 있으면 어떨까요 가령 5년은 아니더라도 10년이나 20년 정도^^...(그냥 웃자고 얘기 했습니다) 권화빈 님 아름다운 가을 날 되십시오
파도님! 반갑습니다. 무척 오랫만이네요!.....벌써, 아침 저녁이 서늘해졌습니다.....
권화빈 님 잘 지내시죠 저도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