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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전경 |
금양정사, 욱양단소, 금선정에서 선비지혜 배운다 체험마을, 장생홍삼, 금선사과 등 소득자원 발굴
풍기읍 금계2리(장생이)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국도를 타고 풍기로 향한다. 봉현면 오현회전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순흥방향으로 가다가 동양대, 비로사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동양대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원룸촌과 등두들 마을 앞을 지나면 장생이마을의 상징인 장승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금계2리 장생이 마을이다.
마을은 계곡 서쪽 산자락에 옹기종기 자리 잡았고, 계곡 건너 드넓은 산비탈에는 빈틈없이 사과나무가 심겨져 있다. 봄기운이 완연한 지난 8일 장생이 마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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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욱양단소 |
마을 가운데 있는 경로당에서 최중열(60)이장, 황영대(78)노인회장, 조여숙(61)부녀회장을 비롯한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내력과 화목하게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날 최 이장은 마을 곳곳을 안내하면서 마을을 자랑하고 활기찬 모습들을 소개했다.
마을의 역사 먼저 마을의 역사를 살펴봤다. 1849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풍기군지(소수박물관본)와 1899년에 작성(규장각본)된 군지를 보면 장선동(長善洞, 장생이)은 풍기군 서부면에 속했다. 당시 서부면에는 서문리, 북문리, 고로촌리, 신교리(교촌), 구교리(금계1리), 등구리(등두들), 백야동리, 욱금리 등이 있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서부면의 장선동과 구교리를 합하여 금계천(金鷄川)의 이름을 따 금계리라 칭했다. 그러다가 6·25 이후 베이비붐을 타고 농촌 인구가 급격히 증가할 때쯤인 1950년대 후반 금계2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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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상징 장승 |
지명 유래
이 마을은 속칭 장생이, 장선이, 장선동이라 불러왔다. 그 유래는 장승(長生)이 있던 마을이라고 해서 장생이, 지형이 긴 배 모양 같다하여 장선(長船)이, 착한 사람이 많이 나서 번성하라는 뜻에서 장선동(長善洞) 등으로 불렀다 한다. 마을 가운데 있는 금선교를 기준으로 위는 웃장시이 아래는 아랫장시이로 구분하기도 한다. 장생이는 십승지의 관문으로 이 마을을 통과해야 욱금동, 삼가리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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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양정사 |
선비숨결 간직한 금양정사
금양정사(錦陽精舍)는 장생이마을 뒷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있다. 금계를 지극히도 사랑했던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한적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에서 만년에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을 할 곳으로 마음에 두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4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사는 승려 행사(行思)가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역사를 완공하고 관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청백리 목민관 황준량 금계 황준량은 풍기군 서부면 욱금리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 명신이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청백리의 표상이 되었던 목민관이다. 효심과 우애가 크고 민생과 교육에 치중하였으며 학문의 깊이가 탁월한 우리고장의 큰 인물이다.
그는 20여년의 벼슬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을 때, 염습에 쓸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퇴계는 그의 죽음을 더욱 애석해 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은 제문에서 “하늘이 이 사람을 어찌 그렇게도 빼앗는가. 참인가. 꿈인가. 참 황하여 목이 막히네. (중략) 슬프다! 금계여! 한 번 가면 돌아오기 어려운데 끝이났네, 끝이났네. 슬프고, 슬프도다”라며 통곡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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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욱양단소 |
퇴계와 금계를 모신 욱양단소
욱양단소(郁陽壇所)의 전신은 욱양서원으로 욱금리에 있었다. 1662년 창건한 욱양서원에 퇴계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를 올리다가 1690년 금계 황준량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욱양단소로 명칭을 바꾸어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83년 금계저수지 축조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1993년 후손들의 노력으로 금양정사 옆에 단소를 복원하고 매년 3월 중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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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선정 |
아름다운 정자 금선정
이 곳은 금계 선생이 사색을 즐기던 곳으로 기암괴석과 송림이 우거져 영남의 아름다운 누정 중 열손가락 안에 든다. 1757년(영조 33년) 군수 송진계가 계곡 바위에 금선대(錦仙臺) 3자를 새겼고, 1781년(정조5년) 군수 이한일이 이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錦仙亭)이라 이름했다. 1785년(정조9년) 군수 이대영이 목사 조윤형의 글씨로 금선정이란 현판을 걸었다.
금선정 인근에 사는 엄재숙(70)씨는 “이곳에는 300여 그루의 노송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장관”이라며 “그런데 그 중 30여 그루가 병이 들어 옆구리가 썩어가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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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치기계 |
소박한 발명가 신영철씨
이 마을 신영철(62)씨는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농부다. 신씨는 선천적으로 과학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각종 농기계를 손수 제작하여 사용할 뿐만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어 낸다. 2011년에는 꺼치기계를 발명하여 시중에 내놓았다. 꺼치기계는 볏짚으로 이엉을 엮기도 하고 인삼경작에 사용하는 꺼치를 엮는 기계이다. 신씨가 발명한 꺼치(이엉)기계는 전국 인삼경작농가 및 민속마을 등으로 팔리고 있다.(문의 054-636-3144)
구증구폭(九蒸九曝) 장생홍삼? 구증구폭이란 아홉 번 찌고(蒸 찔증) 아홉 번 말린다(曝 쬘폭)는 뜻으로 이곳에서 생산하는 장생홍삼의 제조과정이다. 2014년 설립된 장생영농법인(대표 권오성)은 아름다운 금선정 솔숲에 자리 잡고 있어 보기만 해도 힘이 절로 솟는다. 권장일(49) 새마을지도자를 비롯한 젊은 영농인들이 합력하여 생산하는 장생(長生)상품은 장생홍삼엑기스, 사과주스, 금선사과 등이 있다.
금선농원 저장고에서 금방 나온 사과를 한 입 깨물면 ‘아삭하고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하다.
(연락처 010-6262-7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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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생이 녹색농촌체험마을 |
장생이녹색농촌체험마을이 뜬다
금선교를 건너 좌회전하여 100여m 오르면 그림 같은 풍광 속에 장생이체험마을(위원장 권오성)이 있다. 이날도 이 지역 출신 두 단체가 동창회를 여는 등 겨울에도 예약이 줄을 잇는다. 2010년 3월 개원한 체험마을은 2013년 농림축산부가 실시한 전국 농촌체험마을 평가에서 최우수 마을로 선정됐다. 2014년에는 소득자원발굴육성사업으로 천연염색 체험시설과 농산물 가공시설을 완비하여 체험마을과 연계한 공동체 소득증대를 도모하고 있다.
권오성 위원장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지역 특산물(인삼, 사과)을 활용한 체험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찾아오는 체험관이 되게 할 계획”이라며 “2015년에는 원두막음악회, 천년염색체험 등을 통해 장생이를 전국에 알리겠다”고 말했다. (체험마을 054-638-6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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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선정 솔숲 |
장생이 사람들
최 이장은 “금계2리에는 현재 75가구에 170여명이 살고 있다”며 “2001년 이후 초등학생이 없었는데 13년만에 초등학생이 나오게 돼 기쁘다. 현재 초등학생이 4명”이라며 자랑했다.
황영대 노인회장은 “우리마을 노인들은 모두 건강하여 장수마을이 됐다”면서 “80이 넘어도 사과농사, 인삼농사를 젊은 사람 못지않게 잘 한다”고 말했다. 동양대에 입학한 아들 따라 13년 전에 여기 왔다는 조여숙 부녀회장은 “모두가 협력하고 화합하여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어 가고 있다”며 “어르신과 젊은이, 귀촌인과 다문화가족, 귀향식당, 귀촌화가 5명, 요양시설 등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중심에 최중열 이장님이 있다”고 말했다.
안기봉(81) 어르신은 평남 순천에서, 한병준(80) 어르신은 황해도 곡산에서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10승지 마을을 찾아온 정감록파 2세 들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긴 이야기를 들었다. 원희선(78) 어르신은 “이 마을은 60~70년대에는 100호가 넘게 살았고 사람도 500명이 넘었다. 정월보름날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최주열 이장
▲황영대 노인회장
▲조여숙 부녀회장
▲안기봉 어르신
▲한병준 어르신
▲원희선 어르신
▲신영철 발명가
▲엄재숙 할머니
▲권오성 위원장
▲권장일 새마을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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