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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클라우니의 개혁파적 교회론
이제는 하늘(heaven)에 계신 클라우니 교수님의 가장 큰 공헌은 역시 20세기 말의 상황 속에서 가장 개혁파적인 교회론을 제시하셨다는 점일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평생의 개혁 신학적 가르침을 정리하신 레이몬드 교수와 함께 가장 개혁파적인 교회론을 제시한 분으로 우리는 클라우니 교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말이라는 구체적 정황 속에 살고 있음을 명확히 의식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개혁파적인 교회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클라우니 교수의 큰 특성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성경적 교리에 충실한 교회론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이를 다룬 자신의 책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그가 했던 강의 제목과 같이 “성경적 교회론”(the biblical doctrine of the church)에 대한 책이라고 말한다(Edmund P. Clowney, The Church (Leicester: IVP, 1995), 9. 황영철 선생님의 매우 잘된 한글 번역에서는 이 말의 의도가 잘 나타난 있지 않아 아쉽다, 교회 (서울: IVP, 1998). 앞으로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은 논문의 본문 중의 ( ) 안에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9=9). 앞의 숫자는 영문판의 페이지 수이고, 뒤의 숫자는 한글 번역본의 면수이다.).
이런 입장이 얼마나 현대인들의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인지도 클라우니 교수는 잘 의식하고 있다. 그는 20세기 말의 사람들이 자기중심적 종교(feel-good religion)에 깊이 심취되어(attached)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일부 신학자들과 상당히 많은 이들은 배타적 주장을 하는 성경의 신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 신은 이미 오래 전에 정통신학과 함께 죽었고 교회는 그 무덤”이라고 간주한다는 것을(15=15) 잘 알면서도 그리한다. 이 시대에 인기 없는 일을 그는 기꺼이 하는 것이다.
클라우니 교수는 또한 현대 교회의 문제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 출석은 줄었지만 교회의 숫자는 늘어만 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존의 교회로부터 분리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회중을 조직한다. 많은 사교 집단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한다”(99=115). 그래서 참 교회를 찾기도 어렵다. 또한 많은 이들은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제자로 만들려고 한다. 짐 조운스(Jim Jones)의 인민사원이나 텍사스 와코에 있었던 데이비드 코레쉬(David Koresh)의 비극적 공동체와 같은 사교 집단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사람들로 하여금 (지도자인) 자기를 의지하게 만들며, 그들의 성장을 저해한다”(146=165).
또한 오늘날의 교회에는 각 교회의 담임 목사 등이 “교황도 질투할만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을 클라우니는 정확히 지적하면서 “교회가 (회사 조직이나 군대 조직과 같은) 외부의 모델을 따라 조직될 때 성경적 원리를 무시하는 위험이 발생한다”고 경고한다(201f.=226). 그러므로 이런 시대에 성경적 교리에 대한 시리즈를 출판하는 출판사만이 용기 있고 헌신된 출판사가 아니라(9=9), 그런 책을 집필하고 제시하는 여러 필진과 함께 "교회에 대한 성경적 교리“에 대한 책을 제시하는 클라우니 교수도 용기 있고 헌신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는 클라우니 교수님의 개혁파적인 교회론을 찬찬히 제시하는 작업을 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클라우니의 교회론 제시와 우리들의 교회 이해와 교회의 현실을 비교해 보면 우리네 한국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 논문의 일차적인 목적은 클라우니의 개혁파적 교회론을 정리하여 제시하는 것이지만, 부차적으로 한국 교회의 교회 이해와 현실이 클라우니가 제시하는 개혁파적인 교회 이해에 비추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살피는 목적도 지니고 있음을 밝힌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클라우니의 개혁파적 교회론의 특성을 제시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성경신학회에서 발제한 내용을 계속 소개합니다. 클라우니의 <교회론> 중 인용 대목은 논문의 본문 중의 ( ) 안에 제시하고 있습니다(9=9). 앞의 숫자는 영문판의 페이지 수이고, 뒤의 숫자는 한글 번역본의 면수입니다. (저자 주)
1. 하나님 나라적 교회 이해
무엇보다 먼저 클라우니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이해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될 수는 없으나(58=65), 교회는 “성령님을 통하여 이미 현존하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종국적으로 임할 그 나라의 증표”이다(16=16). “교회는 인간의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71=81). “주님이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모아, 그 분의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자의 무리로 만드신다”(159=179). 여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잘 나타나 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심판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 분의 능력과 활동”이다(38=42). 그 나라는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임했다(38=42). (그가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담당하려 오신 때에 이루어진 그 나라는 그가 심판하러 오실 때에 그 심판과 함께 종국적으로 임할 것을 기다리고 있다(39=43). “은혜에 의하여 선 그 나라는 은혜에 의하여 전진해야 하고 영광 가운데 절정에 이를 것이다”(188=213).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상태에 있으므로 이미 말세(the last days)에 있는 것이다(66=76).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 그 사이에 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인 신약의 교회는 “어두움에서 하나님의 빛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그들의 도덕적 고결성을 통해 잘 드러내야만 한다(벧전 2:9-12). 교회의 질서 정연한 교제가 세상에 은혜의 징표가 되어야 한다”는 클라우니의 주장을(16=17, Cf.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질투어린 존경을 이끌어 내고, 놀라운 호기심 혹은 위협적인 적대감을 이끌어낼 만큼 현저한 것이 되어야 한다(벧전 2:12; 3:16; 요 15:18)”(Clowney, The Church, 72=83).) 우리는 의미 깊게 들어야 한다. 이와 같이 클라우니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로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클라우니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나름대로 이해하면서 “구원은 기독교회에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온다”고 하며, “모든 사람은 그 나라로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교회로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하나님 나라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클리우니는 오히려 (성경을 따르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모이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165=186). 예수님을 따라서, 선교에는 구별하는 요소, 분리의 측면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이해에 근거해서 클라우니는 구약의 하나님 백성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이야기를 다룬다(28=28). 따라서 클라우니는 교회는 신약 시대에 오순절에서 비로소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클라우니는 “오순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하였다”고 선언하면서(53=60), 이방인인 우리가 이스라엘의 갱신에 포괄된 것이고, 이를 위해 오순절에 이방인의 방언이 사용되어 그 징표가(사 49:6) 실현되는 것임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교회가 하나님 백성이요(제2장), 그리스도의 몸이요(제3장), 성령님과의 교제(제4장)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이렇게 정식화할 때 개혁파 교회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성례전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그리고 재세례파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교회를, 그리고 오순절 교회는 성령의 교통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였다는 레슬리 뉴비긴의 말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인용하면서 활용하고 있다. Cf. Leslie Newbigin, The Household of God (London: SCM Press, 1953), 30f. 그러나 이런 구별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너무 구별하는 문제를 드러내기 쉽다. 이 책에서 클라우니 교수가 잘 드러내듯이 개혁파 교회는 이 모든 특성을 잘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는 클라우니의 논의는 매우 성경신학적이다. 다음과 같은 요약적 진술은 이를 보여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누가 언약의 후사인가? 그리스도는 언약의 후손이요(창 3:15), 아브라함의 씨요(창 12:1-3), 다윗의 아들이다(삼하 7:12-16). 그만이 언약을 파기한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오직 그만이 합법적인 후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연합한 자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후사가 된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 대한 부르심을 성취한다. 그에게 연합한 자들은 바로 이 사실에 의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다(갈 3:29; 4:21; 롬 15:8).(43f.=48f.)
이와 같은 논의에 근거하여 클라우니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거듭난 개인이 아니라 한 가족이요, ‘영적인 종족’(spiritual ethnics)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다”(44=49). 이런 신약 교회는 “구약의 레위족속처럼 ...... 주님을 우리의 유산으로 소유한다(민 18:20: 신 10:9)”(61f.=70).
이와 같은 교회는 “다른 자발적 사회 조직들과 달리 교회는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족장적 가족과 언약의 나라처럼 그 기본 구조가 신정적이다”(192=216). 따라서 신약의 교회는 “영적인 의미에서 가족과 나라이기는 하지만 교회는 족장적 가족적 형태를 취하지 않으며, 세상의 국가들 중에서 기독교 국가로 그 자리를 대체하지도 않는다”(192=217). 따라서 “미국이나 영국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호의와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기독교 국가라고 보는 애국주의는 오도된 것이다. 그런 주장은 명백하게 거짓이며, 이상으로도 부당한 것이다”(195=220).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배타적인 기독교 정당을 형성할 자유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의를 이 세상 나라와 동일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행동은 그 때 그 때 같은 직접적 목적들을(the same immediate objectives)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과 협의 하에서 추구되어야 한다.”(193=218, 영어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을 재조정했다. 클라우니는 이런 주장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각과 실천과 대립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카이퍼가 처한 상황과 클라우니가 살았던 미국의 차이를 잘 느끼게 한다. 우리나라는 다원주의적 미국 정황에 더 가까울 것이다.).
2. 성경과 특히 성경의 충족성에 충실한 교회 이해
클라우니는 “하나님의 진리만이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6=17).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진리는 성경이고, 이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한다. “언어 계시의 객관적 권위가 일단 상대화되면 성경이 아닌 교회가 진리의 궁극적 기준이 된다”(21=22f.). 그러므로 오히려 그 성경을 교회가 굳게 잡을 때만, 즉 교회가 말씀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Word)가 될 때에만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된다(16=17). 교회가 교회의 주인이신 분께 신실하려면 교회는 먼저 교회를 향한 그 분의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17=17). “교회를 세운 사역은 말씀의 사역이다(엡 4:11)”(102=119).
따라서 교회는 그 가르침과 조직과 활동의 모든 것을 성경으로부터 가르침 받게 된다. “교회 정부는 (성경에) 무엇을 제하거나 더함으로써 말씀을 수정할 수 없다(계 22:18-20, 갈 1:8, 12). 교회의 군력은 입법적이 아니라 선포적이기 때문에,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거나 성경적 근거가 없는 실천을 요구할 수 없다”(202=227, 강조점은 필자의 것임).
무엇보다 먼저, “교회는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온 세계에 사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교회가 견지하는 것은 전통 속에 안치된 복음의 기억도 아니고 후대에 맞추어진 새로운 복음도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신약 성경의 사도의 복음이다”(75=85). 클라우니는 “요한 계시록의 최종성은 사도들이 기록한 다른 모든 성경에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75=86, 강조점은 필자의 것임).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를 양보하는 것은 교회의 사도적 기초를 파괴하는 일이다”(76=86).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 주어진 영감을 받은 사도들의 증언은 충분하고도 최종적이다(sufficient and final)”(77=87,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는 한스 큉의 주장도 다음과 같은 주장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보냄을 받은 자라는 점에서 사도들에게는 계승자가 있을 수 없다....... 최초의 목격자들과 전령들이 지녔던 원래의 근본적 의미의 사도직은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Hans Küng, The Church (New York: Sheed and Ward, 1968; London: Search Press, 1969), 355, cited in Clowney, The Church, 77=87.). 성경을 이렇게 중요시하기에 클라우니는 성경을 계시와 동일시하지 않는 입장을 지닌 1967년 신앙 고백서를 강하게 비판한다(105f.=122).
그는 칼빈을 따라서 “성경의 권위라는 교리에서의 공식적 변화는 교회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106=123). 그리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라는 것을 과거 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라서 매우 강조한다: “세상의 소금과 누룩으로서 교회가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은 지대하지만,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의 빛을 높이 들어야 한다”(165=186).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전의 몬타누스주의나 중세의 분파 운동, 종교 개혁 시기의 재세례파(“열광주의자들” 또는 신령파)와 비슷한 갈등을 정통교회에 대해 일으키는 카리스마 운동이 교파의 경계를 넘어서 세계로 퍼져 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 성경에 충실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클라우니는 성경과 개혁파 전통에 충실하게 성경의 충족성에 근거한 입장을 분명히 한다. 모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일일이 나열한 후에 클라우니는 “신자로서 우리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하며(158=178), 그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신학은 무엇인가 하면서 성경의 입장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구약에서도 성령님께서는 온전하게 하나님 백성들 안에서 작용하여 사막에서도 그들을 가르치시며(느 9:20),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살피셨으며(사 63: 10-11; 행 7:51), 그 성령님이 그들 안에 계속해 계신다고 했다(학 2:5)(54=61).
그리하여 클라우니는 “오늘날과 똑 같이 그 때에도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속에 역사하였으며,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그 때에도 오늘 날과 마찬가지로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워필드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소개하고 있다(296=333).
그러므로 본질상 성령님의 사역은 구약이나 신약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 아니하다. 물론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구약 성도들이 성령님 안에서 받고 믿고 고대해 온 그 약속이 성취된 상태에 들어가게 하시는 더 큰 복을 주셨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더 복은 바로 그들이[구약 성도들이] 찾던 복이었으며, 그들이 앞으로 우리와 함께 받을 복인 것이다”(55=63).
둘째로,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도 클라우니는 성경 주해에 근거하여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과 일치하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존 스토트에게 동의하면서,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명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69=79). 왜냐하면 성령 세례는 성령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이라는 최초의 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또 성령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세례와 충만은 새 언약의 인침이고,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모방하여야할 제자들의 영적인 발전의 한 일화가 아니고, 구속사의 새로운 시대 시작을 보여 주는 것이다”(69=79). 또한 성령 충만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충만케 되는 것과 떼어낼 수 없는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충만케 된다는 것이고, 구주와 그의 사랑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70=80).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더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더 깊이 누려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계시적 목적에서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졌던 사도적 이적은 중단되었음(the cessations of the apostolic signs)을 클라우니는 분명히 한다(241-44=269=173. 특히 244-272f.).
물론 성령의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오늘날에도 이적이 있을 수 있지만 오늘 날에 일어나는 이적과 사도적 이적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개혁파 사상에 충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일어 날 수 있는 오늘날의 이적과 성도들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서로를 권면하는 것은 전혀 계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예언의 은사에 대한 클라우니의 이해와 일치하는 것이다. 클라우니는 오늘날에도 예언이 있을 수 있음을 가장 온건하게 주장하는 웨인 그루뎀의 주장을 잘 검토한 후에 그런 주장도 논박하면서 전통적 개혁파의 이해를 잘 대변한다: “그의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계시의 최종성과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궁극적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할 때의 성경의 충족성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는다”(268=300).
그러므로 클라우니는 구루뎀이 말하는 ‘작은 예언’(a small prophecy)이라는 용어를 성령의 조명이라는 고전적 용어로 대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의 조명에 대한 온전한 인식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연구하고 설교하는 일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의 인도를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구하는 빛을 받은 지혜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268=300). 왜냐하면 “성령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지혜의 은사를 통해서 교회를 진리의 지식과 순종의 길로 이끄시기” 때문이다(268=300). 성경의 충족성을 참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새로운 계시가 있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넷째로, 방언에 대해서도 클라우니는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에 충실하게 성경적인 논의를 한다.
오순절 때 일어난 방언 현상은 언어적 사건으로써 “성령의 오심이 바벨의 저주를 반전시킨 것이고, 주님의 영광이 (바벨에서) 나누어진 땅의 언어들로 시온에서 선포된 것이다”(254=274).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이 에베소에서도 나타났고(행 19:6), “고린도에서 바울의 사역을 통하여 임한 방언의 은사도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통하여 임한 은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246=275). 특히 방언을 불신에 대한 징조로 언급하는 이사야 28:11에 비추어 볼 때, 이 방언도 언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의 말’이라는 표현도 과장법을 사용하여 “어떤 종류의 언어도 사랑이 없이는 무가치하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247=276).
또한 경험과 체험에 근거해서 반론하는 분들에 대해서 클라우니는 강력하게 “문제는 경험에 호소해서 해결의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249=278). (1) 다른 종교들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의 경험이 있으며, (2) “경건을 표시하기 위한 특정한 말들을 사용하지 않아도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가 있다”(278). 더구나 (3)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의 은사를 가졌다고 확신하더라도 방언으로 말하는 사도적 은사는 얼마든지 중지 되었을 수 있다”고 한다(249=278). 클라우니의 입장은 바울의 입장이다: “바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대해서는 별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고전 14:19)”(251=281).
이와 같이 성경을 따른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 후에 클라우니는 오늘날 방언을 말한다고 하는 분들에 대해서도 매우 관대하게 말하다: “성부와 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여 경건한 태도로 그 일을 실행하는 사람은 그 이름이 불려지고 찬송되는 그분의 능력에 의하여 보호되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확신의 근원이 되거나 영적인 교만의 원인이 되는데서 위험이 발생한다”(252=281). 이것은 성경적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사랑의 마음으로 말하는 매우 좋은 예가 된다고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다섯째로, 성령님의 사역을 너무 확대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클라우니가 아주 강하게 비판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91년 캔버라에서 열린 제7차 총회에서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은 전 우주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과 모든 신앙 안에서 활동하신다”고 선언했다. 또한 ‘일어나기 시작하는 기독교적 목소리의 새로운 문화적 조망’이 이른 바 ‘물려받은 신앙적 선언들’과 갈등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이 총회의 보고서는 새로운 문화적 조망에 대해 “우리는 그들에게 등을 돌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클라우니는 이런 것이 성령님에게 대해 바른 입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여섯째로, 클라우니는 교회 성장에 대해서도 그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바울보다 더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교회 성장에 대한 그의 묘사는 수적인 성장이 아니라, 주의 날을 바라보는 거룩함에서 성장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65=74). 미국의 교회 성장 운동에 대해 우려하면서는 다음과 같이 직접적인 언급도 마다하지 않는다:
몇몇 미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치명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새로운 신자들로 넘쳐나게 되는 위험이 아니라 성장의 방법론에 매혹되어서 교회가 세속화될 위험이다. 예수님은 풍성한 추수를 약속하셨다. 작은 것은 아름답지만 작은 것 자체가 신령함일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크기가 성령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슬픈 경험을 겪고서야 배울 것이다....... 교회가 성결을 추구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주의하고 갈보리를 다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고서는, 더 큰 교회는 단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의 탑을 쌓을 뿐이다(69=78f.)
이 외에도 교회 성장 운동의 어떤 주장은 교회의 보편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옳게 비판한다(97=112).
일곱째로, 교회의 목사와 장로를 여성으로 선출해도 좋다는 논의에 대해서도 클라우니는 현대의 논의를 충분히 검토한 후에 성경적 관점에서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잘 논의한다.
그는 바울의 글 가운데서 사도로서 그가 하는 말과 개종하기 전의 유대교 랍비로서의 견해를 구별하려는 폴 즈웻(Paul Jewett)의 주장도 잘 알고, 디모데서와 에베소서의 구절을 바울의 글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들과 고린도전서 11:13-17이 바울의 것이 아니며, 후에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들을 잘 알고(215=241) 그것들에 대해 깊이 있게 검토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잘 검토한 후에도 클라우니는 “바울은 교회에서 여성이 다스리는 직책이나 가르치는 권위를 갖는 것을 금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린다(216=242).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디모데 전서 2:13 등이 말하고 있는 창조 질서 때문이다(217=243).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창세기의 창조와 타락 기사에서 발견되는 원리에 따라 교회 생활에 대해서 명하고 있는 것이다”(220=247).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고 아내의 복종과 남편의 희생적 사랑이 요구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족을 위해 정하신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정에서와 마찬 가지로, 교회에서도 여자는 남자의 머리됨에 복종해야 하며 남자 위에서 권위를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딤전 2:12; 참고 3:3; 엡 5:22-33).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책은 말씀 사역을 통한 권위의 행사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229=257). 금해진 것은 “교회의 공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229=257). “다양한 비공식적인 상황에서는 여자가 자녀만 다른 여자들이나 남자들까지도 가르칠 수 있다. 단 그 가르침이 사도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는 류의 권위 있는 행동이 아니라면 말이다”(229=257). 클라우니는 이것을 공예배에서의 지침으로 주는 디모데전서 2장의 문맥으로부터 확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하려는 태도와 그런 주해에서 온 것이다.
이를 잘 보여 주는 클라우니의 태도는 성경의 가르침에 유의하면서 여성이 집사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그의 주해에서 나타난다. 그는 로마서 16:1-2에서 뵈뵈에게 적용된 “디아코노스”라는 용어와 관련하여 이 용어가 ‘일꾼’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1) 대개 “to be”라는 현재 분사는 직책을 밝히기 위해 사용된다(요 11:49; 행 18:12; 24:10)고 하면서,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이름을 첨가한 것은 신분에 대한 설명과 잘 어울린다고 하고. 로마서 16:1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형태는 공식적 의미의 집사를 말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크랜필드를 긍정하며 인용하고 있다(232=260).
(2) 또한 디아코노스가 하나의 직책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바울이 계속해서 뵈뵈가 어떻게 그 일을 수행했는지(“교회의 보호자”, prostatis)를 설명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한다(232=260).
(3) 더 나아가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뵈뵈를 천거 하는 내용이 공식직 직책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논의한다(232=260f.).
또한 디모데전서 3:11을 주해하면서 여기 나타나는 여자들은 여집사이든지 집사의 아내들일텐데,
(1) 감독에 대해서는 그들의 아내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2) ‘이와 같이’(hosautos)라는 말이 3:8-10에서 나오고 3:11에서 또 나온다는 점에서, 그리고
(3) 3:11에서 여자들에게 요구되는 목록이 집사 전체에게 요구되는 목록과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에서(233=261) 이는 여집사들에 대한 자격 요건 제시라고 결론 내린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정통장로교회 55차 총회의 소수파 견해에 동의하면서 “바울은 집사 직분에서는 여자를 위한 여지를 마련하며, 뵈뵈가 그 직책에서 일을 잘 했음을 인정한다”고 한다(262). 또한 “오늘날의 교회도 교회 내의 뵈뵈들을 인식하고 그들의 사역이 전진하도록 돌보아야 한다”고 말한다(235=263).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은 항상 있어 왔고, 조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꼭 여성이 목사와 장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목사와 장로로 봉사하도록 하려는 것은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 불복종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이 목사와 장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여성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순전히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노력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의 교회 사역을 최대한 신장하면서도 오직 성경의 가르침 때문에 목사와 장로직은 여성이 감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성경적 기독론의 토대에 서 있는 교회론
예로부터 항상 바른 교회론은 항상 바른 기독론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클라우니의 교회론은 성경적 기독론의 토대 위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의 건전하고도 성경적인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충실한 것에서 뿐만이 아니라, 현대적 상황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면서 제시하는 그 모습에서 도 찾아 질 수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서 계셨던 감람산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갈릴리 호수가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생선을 구워주시던 것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논의하고 있다(Cf. 49=55). 이런 접근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의 80%를 부정하는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신약 학자들의 접근(9=9)이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12제자를 세우셨음을 부인하는 비판적 학자들의 접근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다.
그는 또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주 혹은 세계의 구조와 동일시함으로써 일반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94=108).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충만한 인간의 실존을 취함으로써 우주와의 일종의 일체 속으로 들어 왔다”고 말하는 덜레스(Avery Dulles)나 그리스도는 물질적 우주와 동연적인 우주적 본성을 지닌다고 말하는 떼이아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견해 등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클라우니에 의하면, “보편성은 넓은 길을 향하여 열린 넓은 문이 아니라 교회의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좁은 문이다”(97=111).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이 환영하는 사람을 배제시킬 수 없고 그분이 배제시키는 사람을 환영할 수 없다”(97=111).
클라우니는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성전의 기능이 끝났다”는 것을 잘 설명하면서 논의하고 있다(45=51). “하나님의 성전의 이미지가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88=101).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의 현재적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성도들은 “그 분의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는 산돌이요, 황소나 양이나 향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입술과 삶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이다(벧전 2:4-5; 히 13:15-16)”(88=101). 클라우니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에 대한 전통적 성경적 개혁파적 이해에 매우 충실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주님의 임재에 대한 사라져 가는 기억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분이 오신 현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50=56). 이와 같이 클라우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통합적 이해에 근거한 이해를 가지고 그것을 자주 언급한다. 예를 들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존재로 만드실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을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의를 공급하며,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158=178).
그러나 이렇게 삼위일체적 사역 안에 있는 “교회는 성육신의 연장이 아니다”는 것을 클라우니는 강조한다(52=59). 이는 일부 신학자들, 특히 천주교 신학자들이 교회를 성육신의 연장으로 제시하려는 시도에 대한 성경적인 강한 반대이다.
4. 성경적 예배에 충실한 교회론
클라우니는 우리의 예배가 우주적인 예배요 천상에 예배에 참여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히 10:22-29을 인용하는 118=134를 보라).
그리고 클라우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를 예배로 이끌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예배를 명한다”고 선언한다(120=137). 그는 “참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의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시고 그 분이 계시하신 뜻에 의하여 제한된다”고 말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작성자들에게 동의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 가운데서 예배를 규제하신다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분명히 한다(121f.=138f.).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는 생각이 엘리자베뜨 시대의 청교도들이 만든 원리라고 주장하는 제임스 패커와 의견을 달리한다. 이미 칼빈이 이 원리를 아주 명확히 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클라우니는 이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새 언약 아래서도 옛 언약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으로 예배를 지도하신다”(123=140). “교회에서 함께 드리는 예배에는 은밀한 예배에서 보다 좀 더 질서가 요구된다”(126=143).
그런데 신약 성경은 예배의 원칙을 제공한다(126=144). 클라우니는 과거 개혁파 신학자들을 따라서 예배의 요소들에 대해서는 성경의 규정적 원리를 적용하고, 예배의 정황들(circumstances)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악기는 예배의 요소가 아니라 정황에 속한 것이므로 그것은 우리가 찬양하는 노래의 질서를 잡는데 도움이 된다면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127=144).
장례식에서 가족들이 애도할 수 있는 여유를 줄 수는 있지만 집단적 애도의 시간을 장례 예배에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클라우니는 “동일한 원리가 연극과 춤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127=145). 때로 극적인 요소가 설교에 사용될 수는 있지만 강단을 무대로 바꾸는 것은 선포를 오락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하면서 비판한다(127=145). “연기나 상징적 종교 예식으로서 춤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은 어떤 예배의 정황에서도 지나친 것이다”고 한다(127=145).
이 문제에 대해서 다윗의 춤을 언급하는 이들에 대해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문화적 배경에서 보았을 때 다윗의 춤은 예배의 요소라기보다는 정황으로 보인다....... 신약의 예배에서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실체는, 하나님께 대한 공예배에 오락적 연기를 도입하려는 모든 노력에 대립된다”(129=146f.). 그리고 클라우니는 자신의 제자요 동료였던 죤 프레임에게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 “음악은 그 자체가 예배의 요소라기보다는 기도, 찬양, 선포 혹은 권면의 한 방법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133=151). 그러므로 예배 중에는 시편만이 아니라, 지나치지 않는다면 다양한 문화의 다양한 찬송들이 다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cf. 135f.=153f.)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라우니는 예배는 성령으로, 즉 예수님이 친히 주시는 성령님 안에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바르게 강조한다(46=51, 번역서의 맥락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개역 성경을 따라 번역하므로 주의 깊지 않은 독서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성령님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또한 Clowney, The Church, 124=141도 보라.).
5. 성경적 성령님의 능력 아래 있는 교회 이해
그러므로 클라우니가 앞서 언급한대로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카리스마 운동에 대해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령님에게 충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이지 않은 잘못된 성령 운동을 비판하며 자신과 교회가 진정으로 성경님께 순종해 가도록 하는 일에 개혁파 교회는 항상 관심을 가졌었고, 클라우니 교수의 교회론도 그런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진정한 교회는 성령님의 교회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형성되고 그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기관(institution)이기” 때문이다(58=65, 황영철 선생님의 “제도”라는 번역을 “기관”으로 바꾸고 영어 원문인 institution을 부가했음을 밝힌다.). 우리는 앞으로 극치에 이를 “오는 나라를 기다리는 동안 성령의 임재 안에서 그 영광의 보증금이요 첫 분할금을 이미 받아 누린다”(189=213). 성령님은 우리와 관련하여 과연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몇 가지 요점으로 이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킨다”(64=72).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다”(64=73).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한 유기체로 연합한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거룩하고 신령한 질서가 있다”(72=82). “그리스도의 영은 열심뿐만이 아니라 질서도 가져다 주신다”(199=223, 강조점은 필자의 것임).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성경 말씀이 규정하는 교회 제도와 그 질서를 파악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님은 말씀과 성례와 기도의 “외적인 은혜의 수단을 유효하게 하신다”(89=103).
성령님은 “물이나 포도주나 혹은 떡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으시지만, 자신의 약속을 존중하며 말씀과 성례를 사용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90=103). 말씀의 공적 선포와 성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성례는 공동의 경배(corporate worship)를 요구한다”(272=30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교회 공동체 속에서 거룩해 진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그런데 “거룩해 진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83=95). “거룩성은 하나님 백성의 소명이다. 교회는 미국 삼나무가 우거진 숲이다”(83=96). 이는 패커가 청교도들을 숲의 다른 나무들보다 높이 자라서 태풍과 화재를 견디어 내는 캘리포니아의 삼나무(redwoods)에 비교한 것에 빗대어서, 몇몇 사람만 그런 영웅이 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모두가 다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그러므로 성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다(“The sacraments of baptism and the Lord's Supper are celebrated in the community of the church.” 89=103). 이와 같이 “징계는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애쓰고, 우리가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친구들을 돌보는 데서 시작한다”(90=104).
셋째로, “성령은 하늘의 맛을 보게 해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악을 대적하고 고난을 견디며, 주의 오심을 고대하게 한다”(66=76).
“그분의 발걸음을 따라서 순례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험아래서 순종하는 생활 방식을 요구 받는다”(176=198).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를 주님이 택하셨던 길, 곧 골고다의 길로 이끈다”(Cf. 벧전 2:21)(62=70).
넷째로,“교회가 성경을 좇아서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성령은 계속해서 교회의 증언에 능력을 부여한다(행 5:32)”(47=53).
성령님은 특히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게 해 주신다: 왜냐하면 “복음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열방으로 퍼져” 나기기 때문이다(188=213). 과연 “성령은 선교적 전파에 능력을 주시고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선교사로 준비시키시며, 성도들로 하여금 그 이름을 고백할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만드신다”(162=183).
또한 “성령은 말씀을 검으로 사용하여 신자들의 좌를 꾸짖고 그들을 성화시키신다(엡 6:17, 히 4:12)”(59=67). 그 성령은 “우리보다 무한히 더 인격적이시다”(59=67). 그러므로 성령님은 전인의 인격적 변화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는 자연과 은혜의 대립이 없고, 성령은 인간의 영만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142=161). 이와 같이 하여 “그리스도의 통치는 성령에 의하여 실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눈을 열어 주시고, 변화하는 삶 속에서 그 말씀을 적용할 지혜를 주신다”(202=227).
다섯째로, “우리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따라 섬기는 자들이다”(65=74).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여 섬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은 겸손한 섬김이지 이기적 조작이 아니다”(63=71). 다시 말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은사를 사용하여야 한다. 자신을 섬기거나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거나 심지어 만족과 성취감을 위해서 은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65=75).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90=104). 왜냐하면 “각각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장을 위해 맡아서 할 역할이 있다”(141=159). “은사의 상이성은 바로 교회를 유기체로 자랄 수 있도록 해준다”(141=160). “교회를 세우는 것이 은사의 목적이다”(141=160).
따라서 은사에 따라 감당하는 직임도 섬김을 위해 있는 것이다(206=231); “모든 신자들과 마찬 가지로 교회 직원들의 목적도 권력이나 특권의 행사가 아니라 봉사이다”(206=231). “교회 직책은 주님과 그 분의 백성을 섬기는 자리이다”(206=230f.). 그리고 “교회 통치를 위한 조직(church government)은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섬김을 위해 조직되는 것이다”(206=230).
6. 성경적 사명에 충실한 교회 이해
클라우니는 교회의 사명과 봉사를 세 가지로 요약해서 제시하기를 좋아 한다: “예배로 하나님을 섬기고, 양육으로 서로를 섬기고, 선교로 세계를 섬기는 것이다”(65=74); “진정한 거룩에서의 성장은 항상 함께 하는 성장이다. 이는 교회의 양육, 사역,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성취된다”(89=102). 이 중에 예배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양육과 사역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교회의 양육에 대한 클라우니의 이해는 매우 성경적이고 개혁파적이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교회의 양육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양육이며(138-143=156-162), 그 양육의 장은 교회, 가정, 학교이고(149-153=169-174), 그 양육의 목표는 주님을 아는 것이며(143-44=162-164), 주님의 뜻을 행하게 하는 것이며(144-46=164-166), 주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한다(146-148=166-69). 한 마디로 “양육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140=158). 그리고 그 성장은 공동의 것이다: “그들은 함께 자라간다”(growth together, 141=159). 또한 양육은 선교를 낳고 선교 가운데서 진행된다는 것도 클라우니는 강조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을 구주께로 모으려는 우리의 노력에 자녀들을 참여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을 주님의 양육으로 키우지 못할 것이다”(160=181).
이와 같이 클라우니는 선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사역도 매우 강조한다. 클라우니는 서문에서부터 “2000년대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구도자들의 편의를 추구하는’(seeker-friendly) 데서 더 나아가서 구도자들에게 보내진(Seeker-sent) 교회, 즉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9=9). 때로는 구도자 중심의 노력이 그들의 이의 제기의 대상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잘 지적하는 것이다(117=133).
“보편 교회로서의 교회는,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종족들과 민족들을 사랑의 교제로 묶는 새 인류를 온 세상 앞에 제시하라는 부르심을” 받기 때문이다(92=106, 개혁파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클라우니적 Missio Dei 개념 제시로 Clowney, The Church, 158f.=179, 177=199, 186=209를 보라.).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온 세계를 지향한다. 교회의 정체는 선교를 통하여 보편성으로 귀결된다”(93=107). “선교를 등한히 하는 회중은 쇠약해지고 곧 내적인 불화로 붕괴된다. 그런 교회는 필연적으로 결코 진군하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매일 아침 복음의 나팔 소리를 듣고 환멸을 느끼는 청년들을 잃어버릴 것이다”(160=180f.).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고, 선교 가운데 있는 교회이다. 그런데 효과적인 선교의 방법은 사랑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 주장에 함축된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라: “십자군은 1,000년에 걸쳐 이루어진 이슬람 땅에 대한 선교를 뿌리부터 잘라 버렸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지하드’(jihad) 곧 그리스도 깃발 아래 싸우는 성전(holy war)으로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를 망쳐 버렸다”(187f.=211).
그리고 이 사명(mission)에 대한 언급에서 클라우니는 문화 사명에 대한 강조도 잊지 않는다. 그리하여 클라우니는 “두번째 아담이신 우리 주님은 아담의 임무를 완수하셨고, 우리를 자유케 하셔서 문화적 사명 속에서 주님을 섬기게 하셨다”고 말한다(67=76). 왜냐하면 문화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문화적 존재가 되었다”(173=193).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에게 문화적 사명을 부여하셨다”(173=194).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문화를 드러낼 수 있다: “먼저 그 나라를 구하면 문화적 유익이 따라 오게 된다”(173=194).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문화도 타락시켰다. “타락과 함께 문화적인 배교가 등장한다”(174=195).
다시 말하여, “타락과 함께 문화 명령에 명시된 활동들이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저주조차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여전히 계속됨을 암시한다”(173=194). “심판 아래서도 하나님은 문화를 보존하신다”(174=195); “질서 있는 인간의 문화의 존재 자체가 주께서 죄로 인한 붕괴를 막으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178=199); “사람들이 하나님을 회피하려고 시도하는 만큼 하나님은 그들을 대면하시며, 그들을 자기 형상대로 보존함으로써 문화적 구조가 유지되게 하신다”(180=202). 그러므로 “문화는 피조물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180=202).
그리고 결국 구속사의 절정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가져다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문화 명령의 핵심을 성취하신다”(175=196).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의 문화도 변혁하도록 하는 것이다. “각 문화는 진리의 힘에 의하여 변혁된다”(180=202). 다른 곳에서 클라우니는 같은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아담과 하와에 대한 부르심을 변혁하고 성취하면서 만물로 복종케 하고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창 1:28; 엡 1:21-23; 골 1:15-19). 그리스도께 연합한 자들은 그 분이 주인인 세상에서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140=158f.). 또 다르게는 이렇게도 말한다: “인간 존재와 문화와 하나님의 만남의 역사는 계속되며, 그 역사가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179=201).
이런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우리들의 좀더 적극적인 자세가 요청된다. 1930년대 미국에서의 근본주의적 경건주위의 문화적 소극성에 대한 클라우니의 다음 지적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 행위에 대한 점검표는 그것을 통해 피하고자 했던 바로 그 세속성을 부정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반드시 악하다고 할 수 없는 일들을 피하는 행동이, 삶의 모든 활동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적극적 사랑의 순종을 대체할 수 없다.
세상으로부터의 신비주의적인 도피는, 문화적으로 형성된 금욕 훈련을 조장함으로써 그것이 거부하려던 것을 의지하는 결과를 낼 수도 있다(178=199f.).
이와 같이 말할 때 클라우니는 터툴리안의 몬타누스주의, 영적인 프란체스코주의, 그리고 내적인 빛을 말하는 퀘이커주의의 내재주의적 정신주의를 염두에 두면서, 오늘의 우리도 그와 같은 것의 21세기 판인 문화에 대한 소극적 태도에로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는 피조계에 대한 돌봄도 포함된다: “선교에서의 ‘새로운 조망’은 우리로 하여금 전 인류와의 연대 아니 전 피조계와의 연대를 발견하도록 촉구한다”(158=178f.).
그런데 교회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것이 없으면 외적으로 성경을 따른 것이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클라우니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최선의 교회 정부 형태라도 이 원리가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다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교만한 태도나 사랑이 없고 악의에 찬 정신으로 운영되는 가장 성경적인 교회 정부 형태보다는 그리스도의 헌신된 종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다소 불완전한 교회 정부 형태가 훨씬 더 낫다”(202=226). “그 사랑이 없다면 교회는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악한 형태의 압제가 된다”(206f.=23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에게는 (1) 성경의 가르침과 (2) 성령님에 의해 행함 이라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마치는 말
이 모든 개혁파적 교회론의 특성은 모두가 다 매우 의식적으로 성경적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이 예부터 그리 표현해 온 바와 같이 개혁파적인 것은 성경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 클라우니의 교회론 제시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론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항상 고치려고 노력한다(성경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클라우니의 교회론 제시 과정 가운데서 다시 생각해 볼만한 점들은 이미 이전의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밝힌 바 있다. Cf. 이승구, “현대 상황에서의 개혁파 교회론의 제시를 칭송하며,” <개혁신학탐구> , 특히 469-77을 보라.).
이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교회론과 우리들의 교회 현실이 이런 개혁파적인 교회론에 비추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첫째는 우리의 교회론을 이와 같은 개혁파적인 교회론에 비추어 성경적인 교회론이 되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그런 교회론에 근거하여 우리의 현실 교회를 개혁해 가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이 한국 상황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마치 클라우니 교수가 그의 상황 가운데서 이 작업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과 같이 말이다. 우리 모두가 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 갈 수 있기 원한다.
이승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첫댓글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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