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기 / 이승권 (2023. 8.)
산을 오른다. 곱게 물든 단풍이 눈을 흠뻑 적신다.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색색이 고운 자태에 사로잡힌 나는 걸음 옮기가 마냥 아쉽다. 봄부터 가을까지 땡볕과 폭풍우, 온갖 시련을 견디고 겨울을 준비하며 빚어내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나의 가을도 이런 색깔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잠긴다.
날리는 낙엽 앞에서 문득 나이 사십 때 겪었던 사건이 떠오르며 마음이 아려온다. 늦은 밤 대구에서 구미로 가는 이른바 총알택시를 타고 가다 기사의 졸음운전으로 가로수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엄마와 아내 어린 두 딸과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의식을 잃었다. 장 파열로 인한 과다출혈로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가족의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미쳤는지 어느 순간 깜깜한 어둠에서 희미한 안개가 걷히고 사방이 밝아지며 사물이 눈앞으로 다가와 뚜렷해졌다. 구급차에 실려 간 구미 순천향병원 침대 위였다.
그제야 어제의 사고가 떠올랐고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가족들이 너무나 반갑고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피 한 방울 헌혈한 적 없는 내가 온전히 타인의 혈액을 수혈받아 회생한 것이었다. 의료진들, 문안 오는 사람들 모두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세상은 고마운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겨졌다. 그때부터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고 마주치는 삶에 늘 감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으로 돌아가 몸이 점점 건강을 되찾고 힘이 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일에 매달렸다. 회사 일에도 전보다 열심이었고 남을 대하는 표정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사람은 망각으로 산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초심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한창 젊은 시절이다 보니 금방 다시 옛날의 그 환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 이년 후에는 온전히 예전의 나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의 사고는 까맣게 잊은 채 전과 똑같이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사람들과 다툼을 하는 본래의 그대로였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참 쉽게 변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오래전 산행 중에 황홀한 단풍의 자태에 홀린 나머지 그 옆에 돋아난 작은 곁뿌리를 떼어다가 집 화단에 심었다. 집에서도 멋진 가을을 보고 싶었다. 나무는 바로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 잎이 무성해졌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나의 바람은 빗나가고 말았다. 몇 년을 기다려도 예쁜 단풍을 볼 수는 없었다. 도시의 안온함에 나태해진 탓일까? 산처럼 계절이 명확하지 않으니 화학작용을 잊어버렸기 때문일까? 환경변화에 따라 식물도 이렇게 쉽게 그 생태를 바꾸어버린다. 하물며 여러 사람과 어울려 풍진 속에 사는 마음 약한 나는 그 안에서 얼마나 변덕이 심했던가.
삶의 늦가을에 들어서고 보니 주위의 지인들과 이별하는 순간이 많아진다. 여기저기서 부음이 들려온다. 한창 젊던 시절에는 사람이 죽는 것이 대단히 큰일이 일어난 것으로 여기며 줄곧 심각했었다. 그런 일을 자주 접하는 나이가 되니 생사는 자연의 현상일 수밖에 없고, 거창한 행사도 아님을 느끼기 시작했다. 문득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의미를 되새긴다.
삶의 가치는 누구나 다 귀하다. 어떤 색깔로 빛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일 것이다. 사람은 모두 기본적으로 아름다운 단풍같이 빛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환경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것이리라. 그동안 잊고 지내던 나의 색깔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앞만 보고 살아온 나날들의 성적표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고민에 잠긴다. 나 또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그릇되게 흘러간 일들도 수없이 많았을 터이다.
오늘은 내일의 과거가 된다. 스탠퍼드 대학의 앨리아 크럼 교수는 “우리의 마음은 현실을 바꾼다. 즉 우리가 내일 경험할 일은 부분적으로는 지금 우리의 마음가짐이 만들어 낸다고 했다.” 남은 생에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 했던가. 생각이 깊으면 어떤 방식이든 행行이 그 뒤를 따르게 되리라 여겨진다.
산등성이의 가을을 보면서 많지 않은 앞날을 생각한다. 이제부터라도 가뭇없이 말라버린 누런 단풍이 아닌 곱게 물든 아름다운 색이 되어 가기를 다짐하며 마음에 새긴다. 삶은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소중한 오늘 하루다.
첫댓글 이승권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카페에서 뵈니 반갑습니다.^^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 가는
황혼이기를 희망하며,
늘 오늘이 중요하다고 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