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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중원을 찾아서
빛의 염탐꾼 추천 0 조회 12 10.11.28 22: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연평도에서 벌어진 남북한의 대치상황은 오리무중으로 빠져만가고 통일신라시대, 한반도의 중원이었다는 충주땅엔 눈이 내려 시야가 온통 뿌옇기만 하다.... 

 

탄금대에서 본 남한강 1 

 

중원(中原)은 어디인가? 우리들의 답사를 위해 해설나온 해설사가 통일신라 이야기를 하자.... 초등학생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높인다. '남북국시대'라고.... '요즘 초등학교 역사교과서엔 '통일신라'란 말은 수정되었나 보다. 고구려와 발해, 나아가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되어 그렇게 바뀌었나 보다'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참,

 

탄금대에서 바라본 남한강 2

 

기뻐할 일인지? 안타까운 일인지?.... 백제 신라 고구려가 넘봤던 중원땅은 지금의 충주땅이었을까? 아니면 동북아시아의 중심이라는 지금의 중국대륙 어디쯤의 중원이었을까? 백제와 신라의 속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고구려는 대륙의 중원을 꿈꾸었을 것이다....

 

눈만 보면 즐거운 아이들, 11월의 눈에 아이들이 눈뭉치를 만들었다.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하고 지금의 충주땅에 '중원'이라는 자족적이고도 사대주의적인 이름을 붙이고 거대한 탑을 세웠을 것이다. 여기가 또하나의 세상의 중앙이라고.... 중원탑평리칠층석탑, 일명 중앙탑이라고 부르는 통일신라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난 이 이형석탑을  세우면서 강대국의 틈바구니, 고래싸움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반도의 통일에 대하여 자족적인 위안을 삼았으리라.....

 

중원탑이라 부르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 

 

어쩌면 동북공정과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불씨는 이때부터였을지도 모를터.... 발해라는 하나의 거대한 집단을 배제한 자족적인 통일, 그러고보면 동북공정의 핵심이라는 민족개념은 환상에 불과한 것일터..... 민족이라는 개념은 고정된 불변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 발해가 고구려가 중국 동북땅의 소수민족이니 한민족이니 하는 개념은 어쩌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닌가?

 

중원탑이라 부르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 

 

현실적 지배를 벗어나서 이야기하자면 영토도 민족도 경계가 없는 추상의 산물, 그건 그 때 그 때의 정치적 입장과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것이고 보면  그 경계지움이라는 것은 또하나의 왜곡에 불과하리라....

 

중원탑이라 부르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 

 

중원탑이라 부르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 

 

소중화를 외쳤던 병자호란 이후의 골통 조선사대부의 입장도 알고보면 그 경계없음과 경계선만들기란 자기모순을 감추기 위한 자족적인 방편에 불과한 것.....

 

중원탑이라 부르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 

 

스스로 같은 동쪽오랑캐로 자처했던 한 집단이 중원을 장악하자.... 조선사대부들의 중심과 변방이라는 경계는 일시에 혼란에 빠졌다. 해바라기처럼 쳐다보았던 명나라라는 중화가 무너지고 그 중원을 다른 집단이 차지하자(사실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중화는 다른 집단으로 대체되었을 뿐인데) 경계선만들기로 자신들의 통치권력을 유지했던 그들에게 닥친 혼란이란 불을 보듯 뻔한 것....

 

중원탑이라 부르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에서

 

그렇게 중화주의의 이념은 유령처럼 아직도 우리곁을 배회하고 있다.  중원과 중화는 사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강대국의 경계짓기에 아니면 통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경계짓기에 발목잡혀 한반도는 오늘, 뼈솟 깊이 신음중이다.

 

중원탑이라 부르는 중원탑평리칠층석탑에서

 

그렇게 중원은 어디에도 없고 또한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래는 예전에 써놓았던 경계에 대한 단상입니다. 생각의 실마리가 언듯 비슷하여 올려 봅니다. 

 

 

"3차 호남정맥 환경탐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무주구천동에 들렀지요. 무주하면 구천동이, 구천동하면 무주가 쌍둥이처럼 따라다니는 그런 곳이지요. 서울행 버스를 기다니느라 터미널에서 오십분 정도 머물렀지요. 그런데 그 곳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경상도사투리니 전라도 사투리니하는 토박이말들의 차이는 보통 서로 다른 단어의 차이에서도 나타나지만 그보다는 억양이라고 이야기하는 고저장단과 각종 연결?종결어미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태반이지요. 단어의 차이야 몇 번의 반복 학습으로 가능하겠지만 후자는 왠만한 경우가 아니면 따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중앙탑을 바라보며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참, 이야기가 옆으로 샜습니다. 이야기인즉슨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무주는 분명 전라도인데 말에서는 그러한 느낌이 들지 않더라는 것이죠. 어찌보면 경상도의 냄새도 나고 또 어찌보면 충청도의 느낌이 들기도 하였지요. 잠깐 든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구천동이 있는 무주군 설천면은 오히려 덕유산 동쪽이라 거창이나 김천, 그리고 충북 영동과 아주 가까운 곳이더군요. 어느덧 내 속에도 초등학교 사회교과로부터 시작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라는 국가적 지리개념으로서의 경계가 상징화된 관습으로 입력된 탓이지 싶었습니다. 무주하면 전라도고 거창하면 경상도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관습이 머리에 붙은 무주와 거창이 가깝다는 사실도 모른 채 구천동이 있는 설천에서는 자연스레 전라도식 억양을 기대하고 있었나봅니다. 그렇게 저도 경계라는 선에 막혀왔던 것입니다.  

 

중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위태위태하고 버티고 선 중앙탑

 

경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든 생각은 경계라는 것이 엄연히 우리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무서운 것이라는 것과 경계라는 것은 허상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영남이 노래하는 화개장터의 가사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렇지요. 어느 시인이 노래하듯 휴전선을 포한한 모든 경계에도 꽃이 피니 말입니다. 어쩌면 모든 경계는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강자들의 횡포인 것도 같습니다. 인간의 편리성이라는 허울좋은 가치를 내세우고 말입니다. 

 

중앙탑에서의 탑돌이.... 무슨 기원을 하고 있을까? 다들.....

 

남녀라는 성의 경계가 그렇고 노소라는 세대의 경계가 또한 그러하며 장애아와 비장애를 가르는 장애의 경계, 이주노동자를 착취하는 이주와 비이주의 경계, 정규와 비정규를 가르는 경계, 그리고 남북을 가르는 철조망까지..... 아마 다 헤아리려면 날을 꼬박 세고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누운 놈도 있군요....

 

경계라는 것과 관련하여 지배자와 위정자들의 선전도구로 가장 대표적으로 쓰이는 것이 있다면 색깔론과 지역주의를 들 수 있겠죠. 사실 남북이니 도니 군이니 하는 것은 행정의 편리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건만 이를 악용하여 선거철만 되면 나타나는 색깔론과 지역주의는 일반인들의 의식을 흐리게 하는 수단, 즉 허상의 주술로 작용하니 말입니다.

 

중원고구려비..... 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 유물입니다. 해체수리를 위해 지금은 다른 곳에 있답니다. 이 사진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허깨비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저희들이 어렸을 때에는 술을 잔뜩 먹고 고개를 넘어가는 아저씨가 밤새 힘이 장사인 놈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놀았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지요. 물론 이런류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있는 이야기이고 그 다음날 가보니 사람은 온데 간데 없고 몽당빗자루나 부지깽이 같은 사람의 손때가 오래 묻은 것이 놓여 있더라는 이야기가 어김없이 따라 붙지요. 그런데 허깨비는 겁이 많고 마음이 여린, 게다가 술까지 먹었다면 딱인 그런 사람한테 나타난다고, 그런 사람이 아주 외지고 어두운 곳을 걸어갈 때면 어김없이 나타난다고 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형 중원고구려비 앞에서

 

지역주의와 색깔론도 허깨비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마음은 한없이 여린데 사리분별력은 없는 그런 겁 많은 인간에게 다가와 술을 권하는, 또는 씨름을 하자고 꼬시는 허상의 존재 말입니다. 동서를 가르고, 남북을 가르고. 가르고 자꾸만 가르는 모든 경계.... 또한 허상의 허깨비인지도 모릅니다.

 

벌써 고드름이 얼고

 

자신이 놀았다는 대상이 허깨비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때는 이미 늦은, 이미 놀림의 대상이 되고난, 우습고도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 후입니다. 인생의 고개이든 시대의 고개이든 고개를 넘어갈 때 아니 일상의 거리에서 경계를 지우며 언제나 깨어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요.

 

조동리 선사유적박물관에서....

 

모든 것의 차이는 인정하되 경계를 만들어 차별하지 않는, 모든 경계에도 꽃이 피듯 경계가 허상의 주술임을 알고 허물어버릴줄 아는 자세, 힘겹지만 즐거운 길 아닐까요" (모든 경계는 허상이다 전문, 2005년 4월)

 

 오래된 미래, 경계없는 삶을 꿈꾸어본다.

 

 충주댐 물박물관의 충주댐 모형

 

 충주댐 물박물관의 충주댐 조정지댐의 모형

 

충주댐

 

충주호, 부쩍 흐려있다....

 

역시 충주댐 

 

물박물관과 충주댐을 이어주는 엘리베이터

 

엘레베이터 제일 꼭대기의 전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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