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서른 두번째 강연이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김해숙님과 친구분이 오셔서 아침식사를 준비해주셔서 저희들은 7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분들은 2012년에는 뉴욕 스님 희망콘서트에도 참여하셨고, 또 2013년 토론토 희망세상만들기 강연회에도 오셨던 분들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몬트리얼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꼭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고 싶다고 하여서 이렇게 하룻밤 묵게 되었습니다.
원래 일정은 오전 7시에 몬트리얼 시내를 둘러보고 갈 예정이었지만 스님께서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 오전 일정을 취소하고 각자 맡겨진 업무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숙소와 식사준비를 해주신 전민락님과 김해숙님께 반야심경 이야기 책을 선물로 드리고 아드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전민락, 김해숙님 가족>
두 분은 스님께서 이곳까지 방문하셨다 가시니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여 삼배를 드렸습니다. 스님께서는 따뜻한 환대에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하고 박지나 대표님의 언니인 박소영님 댁으로 출발하였습니다.
10시 30분에 박소영님 댁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공양을 한 후에 12시 30분에 오타와로 출발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출발하기 전에 오늘 점심공양 준비를 해주신 박소영님께 사인한 책을 선물로 드리고 박지나 JTS 대표님과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하였습니다. 박소영님은 스님께서 몬트리얼에 오시게 되어 이렇게 박지나 대표님도 만나고 스님 공양 대접을 할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도 너무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박소영님은 현재 몬트리얼의 한글학교 교장선생님입니다.

<박소영님>
그리고 아침에 일찍 오셔서 어제 행사 자원활동을 하고 오늘 함께 박소영님과 식사준비를 해주신 권남수님은 13년 전에 한국에서 깨달음의 장과 나눔의 장을 하고 캐나다인과 결혼하여 현재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데 한글 학교 교감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몬트리올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 강연 덕분에 스님과 정토회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너무 기뻐하면서 이곳에 정토회 모임이 생길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행사도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권남수님께도 사인한 책을 선물로 드리고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권남수님>
몬트리얼은 캐나다 최대주이며 불어를 사용하는 퀘백주에 있으므로 교통도로 표지판이 온통 불어로 되어 있어 표지판을 보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아 운전하는데 조금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김명호 거사님의 운전 덕분으로 편안하게 오후 4시에 오늘의 숙소인 오타와의 노향숙 보살님 댁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는 퀘백주인 Gatineau시에 있었고,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호수변에 집이 있었습니다. 오타와는 캐나다의 수도이며, 온타리오주에 위치하여 영어를 사용하지만 리도우나 강을 사이에 두고 퀘백주와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영어와 함게 불어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리도우나 강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UNESCO Rideau Canal 이 있으며 캐나다의 아름다운 관광지 중의 하나인 천섬까지 연결된다고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휴식을 취한 다음에 죽으로 간단히 공양을 하신 후 6시에 32번째 강연이 열리는 Dominion Chalmers United Church로 출발하였습니다. 오타와도 몬트리얼과 마찬가지로 정토 열린법회도 없고 정토회와 인연이 없는 곳이지만 세계 100회 강연을 기획한 다음에 홈페이지에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홍보를 하여 임신효씨를 중심으로 하여 자원봉사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행사를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행사를 진행한 교회도 아주 큰 외국인 교회였는데 강연은 교육관에서 하도록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행사장인 Dominion Chalmers United Church>
오타와는 캐나다의 수도로서 인구는 약 121만명 정도이며 외교부 통계자료에 따르며 한인들은 약 2,700여명 거주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에는 한 100명 정도 오지 않겠느냐고 예상했습니다. 6시 25분경에 스님께서 강연장에 도착하니 길가와 주차장에서 부터 안내를 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오늘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젊은 청년들이었고, 행사 총괄을 맡은 임신효씨도 곧 결혼을 앞둔 청년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6시 50분에 강연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오타와 강연에는 150개의 의자를 마련했는데 약 180명이 참석하여 행사장을 가뜩 채웠고, 자원봉사자들은 강연이 시작되자 행사장으로 들어와서 모두 바닥에 앉아 강연을 들었으며, 나중에 오신 분들은 모두 뒤에 서거나 옆에 서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니 청중들도 반갑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합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유럽을 순회강연을 하는 중 감기몸살로 목을 다쳐서 목소리가 거북하니 양해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토론토는 여러번 왔다 갔는데, 이곳 오타와에 오기는 처음입니다. 오타와에 도착하면 바로 시내를 한바퀴 둘러보기로 했는데 건강이 안좋아서 보지 못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나으면 둘러볼 계획입니다." 라고 서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고 등 가슴 아픈 사건사고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여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같은 북미주에 있어 미국하고 캐나다는 그냥 일반적으로 시스템상으로는 구분이 안되는 것 같지만 캐나다는 유럽 쪽의 사회민주주의 개념이 강하고 미국은 신자유주의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젊은이는 세금을 내기 싫어 미국으로 갈려고 하고, 나이드신 분들은 국가가 아들보다 효자라고 생각하고 이곳 캐나다에서 산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사회는 그동안은 주로 미국을 벤치마킹해서 압축성장을 했지만, 앞으로 성숙할려면 유럽과 캐나다의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냐 싶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사는 여러분들의 경험이 한국사회를 발전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해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유럽을 다니면서 느낀 점은 교민들이 이국 땅에서 자기 살기도 바쁘지만 한국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건 등으로인해 비통함에 젖어 있었고, 아직까지도 이 문제가 갈등구조로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프고 국적을 바꿔버리고 싶다고도 하였습니다. 또한 윤일병 사건 등을 보면서 아들의 국적을 바꿔서라도 군대를 안보내고 싶다고 하엿습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교민들에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사는 것도 힘든데 조국까지 자랑스럽지 못하게 해서 미안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지 않겠냐 싶습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보면 한국사회가 문제점도 많지만 좋은 점도 굉장히 많습니다.
한국사회에 대한 긍적적 토대위에서 건설적인 대안을 가지고 비판을 해야합니다. 긍정적인 시각위에 개선점을 제안하고 비판해야 혁신의 에너지가 나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에서 비판을 하게 되면 파괴의 에너지가 나옵니다. 일련의 사건 사고 속에서 감정이 부정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자기 조국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많은 비판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자유롭게 얘기를 해보자고 하시며 청중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8명이 질문을 하였고, 시간관계상 1명은 질문하러 나왔지만 질문을 하지못했습니다.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는데 인문학을 공부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것과 정토세상을 건설하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사이의 고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분, 오타와에서 북한학을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의 학생으로서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본인의 신념을 유지하면서 북한학을 공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 분, 마음한번 고쳐먹으면 극락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고쳐야 현실속에서 실천할 수 있겠는지 묻는 분, 공인의 모습이 아니라 개인의 모습으로 볼때 스님을 제일 잘 연상시킬수 있는 물건이나 사물이 무엇인지 스님께 묻는 분, 다음스토리볼에서 스님을 많이 보았는데 이렇게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강연한 내용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할 생각이 있는지 묻는분, 한국군대에 있을때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어 마음의 벽을 쌓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기가 힘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분, 일베같은 극우보수적인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든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때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하는 분들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원증회고의 불교 교리에 대해 궁금해 한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크리스찬입니다. 그리고 불교에 대한 이해를 하고 싶어서 불교 교리 공부를 독학으로 시작했습니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가 있는데, 고성제의 팔고 중에서 원증회고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많이 와 닿습니다. 체험도 많이 하고 있고요. 혹시 스님께서도 원증회고의 고통을 겪어보신 경험이 있으시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원증회고는 미운 사람과 함께하는 고통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도 다 경험했죠? 제일 심한 것이 부부지간입니다. 회사에 가면 상사와의 관계가 그렇고, 어디를 가도 미운 사람과 같이 살아야 되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남일 때는 쉬워요. 미우면 안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미움에도 불구하고 안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고통이 됩니다.
이것과 또 하나 있는 것이 애별리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데 헤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부모 자식 간이든 형제 간이든 남북이산가족도 그렇고 연애뿐만 아니라 뭐든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못하는 것이 ‘애별리고’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이 ‘애별리고’라면,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것이 ‘원증회고’입니다. 사람만 꼭 미운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데 해야 되는 것도 ‘원증회고’입니다. 이것은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겪습니다.
사랑하면 꼭 헤어져야 하고 미운 사람과는 꼭 같이 살아야 되느냐?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근본은 내가 어떤 사물과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분과 저하고 둘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이 분을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죠. 그런데 또 상황은 어떠냐? 우리 둘은 만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어요. 나의 주관은 좋아하고 미워하는 두 가지가 있고, 우리 둘 사이에 주어진 객관적 상황은 함께 있는 것과 헤어지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데 만나는 인연일 때는 아무런 고(苦)가 안 됩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데 헤어지는 인연이 되면 고(苦)가 발생합니다. 이 고(苦)를 ‘애별리고’ 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는데 헤어지는 인연이 되면 고(苦)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내가 미워하는데 만날 인연이 되면 고(苦)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원증회고’입니다.
객관적인 주어진 상황, 즉 우리가 만날 인연인지 헤어질 인연인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그렇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상황이 주어질 때 나의 주관으로 보면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고, 헤어지는 상황에서도 내가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는 내가 좋아할 때도 객관적인 상황은 만나기도 하고 헤어질 수도 있고, 내가 싫어할 때도 만나기도 하고 헤어질 수도 있는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사랑하면 괴로워지고 미워해도 괴로워지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랑할 때 헤어지는 인연은 괴로움이 되지만 사랑할 때 만나는 인연은 괴로움이 안 되고, 미워할 때 만나는 인연은 괴로움이 되지만 미워할 때 헤어지는 인연은 괴로움이 안되니까, 네 가지 경우 중에 두 가지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苦)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네 가지 중에 두 가지가 고(苦)가 발생합니다. 좋아하는데 헤어지는 인연이 되면 고(苦)가 발생하고, 미워하는데 만나는 인연이 되면 고(苦)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만나는 인연과 헤어지는 인연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극복하려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울 수 있으면 나는 고(苦)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심명의 제일 첫구절이 “至道無難(지도무난)이요 唯嫌揀擇(유혐간택)이니,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하고 미워한다는 용어를 남녀관계로 해석하시면 안됩니다. 여기서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의 뜻은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으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있어요. 좋아하면 가져야 되고 싫어하면 버려야 되는데, 주어진 객관적 상황은 좋아하는데 가져지지가 않고 싫어하는데 버려지지가 않기 때문에 고(苦)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변화를 안 시키고 그대로 놔두고 바깥 상황을 잡아 당겨 와서 갖거나 있는 것을 밀어내서 버리려고 하는데 이게 뜻대로 안되니까 지금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바깥 상황은 그대로 두고, 만날 인연일 때는 미워하면 고(苦)가 발생하니까 만날 인연일 때는 미워함에 구애를 받지 말고, 헤어질 인연일 때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고(苦)가 발생하니까 사랑하는 마음에 구애를 받지 마라, 이런 얘기입니다.
우리는 정반대로 항상 자기 주관을 중심으로 해서 바깥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깥이 내 뜻대로 변하지 않으니까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은 주어진 상황은 그냥 받아들여라는 것입니다. 너의 감정, 즉 ‘갖고 싶다’, ‘버리고 싶다’ 하는 그것을 놓아버려라. 감정은 내 까르마, 업식, 습관으로부터 일어나는데, 그것을 놓아버리게 되면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해탈, 완전한 자유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를 말하거든요. 내가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는 객관 상황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니까 늘 반쪽 자유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완전한 자유가 됩니다. 이것을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로부터의 자유, 즉 자기 까르마, 자기 업식으로부터의 자유, 자기 욕구로부터의 자유,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자유입니다. “밖의 백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자가 더 큰 장부다” 이런 말에서도 자기가 자기를 이긴다고 할 때 그 “자기”는 자기 업식, 자기 감정, 자기 까르마를 말합니다. 여기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 이것이 수행의 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여기서 몸이 안 좋으면 감정은 ‘몸이 아프니까 강의 안했으면’ 이런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강의를 안 할 수도 있죠. 그러나 상황이 강의를 해야 할 상황일 때는 ‘강의 안했으면’ 하는 이것을 빨리 놓아버리고 기꺼이 하는 쪽으로 전환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이 상황에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죠. 여러분들도 부부가 결혼해서 살면서 ‘남편이 싫다’ 할 때 남편을 버리기가 쉽지 싫은 자기 감정을 버리기가 쉬워요? (웃음)
그래서 자기로부터 자기가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좋고 싫고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 습관이에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된장찌게는 맛이 있다’, ‘버터는 맛이 없다’ 할 때 그것은 된장이나 버터에 있는 것이 아니예요. 자기가 습관이 들어있으면 맛있음이 일어나고, 습관이 안들어 있으면 구역질나게 느껴지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으면 법당에 들어가면 뭔가 거부 반응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작동해서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 세계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절에 다닌 사람들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데 교회에 가서 찬송가 부르고 통성 기도 하는 것을 보면 뭔가 안 어울리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까르마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 까르마는 무의식이라 할 수 있고, 습관이라고 할 수 있고,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화를 벌컥 내어 놓고 말을 세 가지로 하지요. 첫째,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 이것은 그 상태에서 의식에 깨어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습관적으로 냈다. 셋째, 무의식적으로 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 습관화 되어 있는 업식을 말합니다. 마치 마약 중독, 담배 중독처럼 습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바탕입니다. 여러분들의 감정이 굉장한 것 같지만 그렇게 형성되어진 것으로부터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이 여러분들 자신이 아니예요. 어릴 때 어떤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의 감정도 그에 따라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감정을 자기가 절대화시켜서 자기 감정에 맞춰서 세상을 바꾸려고 하니까 힘들죠. 감정을 없애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거기로부터 자기가 구애받지 않을 때 자유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도 80년대에 고문을 받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은 고통이지만 지나놓고 보면 밖에서 참선을 하고 명상을 했던 것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깨치고 반성했던 것이 훨씬 더 수행에는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복이 꼭 행운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으로 복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재앙을 복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복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볼 수 있죠. 성경 구절에 “주여 뜻대로 하옵서소”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들 대학시험 걸리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대학시험에 걸리게 해주면 주님의 은총을 받았다, 걸리게 안해주면 은총을 못받았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학 시험에 걸리는 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무지한 내 눈으로는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내 뜻대로 되면 가피를 입었다고 하고 내 뜻대로 안되면 은총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지하고 그분께서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정말 받아들인다면 그분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게 좋으면 떨어지게 하실 것이고, 걸리는 게 좋으면 걸리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수행이란 ‘주님께서 좋으실 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하면 ’자기 생각을 내려 놓는다‘, ‘인연따라 이루어진다’ 는 것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한사람은 질문을 하지못하였지만 마지막 질문자의 질문과 대답이 끝나자 9시 10분이 되었고, 마지막 강연자의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끝나자 참석자들이 큰 박수를 스님께 보냈습니다. 오늘 강연을 마무리하며 스님께서는 이렇게 정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강연 분위기가 좀 무거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개인적인 것도 필요하고 사회적인 것도 필요합니다. 많은 수확을 거둘려면 밭도 좋아야 하고 씨앗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니 개인은 씨앗과 같고 우리 사회,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밭과 같은 것입니다. 같은 밭에서는 씨앗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지고, 같은 씨앗을 여러 밭에 뿌렸을 때는 밭의 상태에 따라서 수확량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볼때 좋은 씨앗, 즉 개인은 '인'이라 하고, 좋은 밭, 즉 사회는 '연'이라고 합니다. '인'과 '연'이 만나서 결과를 만듭니다. 그래서 '인연과보'라고 합니다. 결과를 위해서 인을 개선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고, 연을 잘 가꾸어가는 것을 정토건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이 두가지를 하는 것이고,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하는자를 보디사트바, 보살이라고 합니다. 즉 '상구보리' 자기 인격을 닦는 수행과 '하화중생' 사회를 좋게 만드는 것, 성불과 정토건설을 동시에 하고, 개인 수행과 이상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하나로 보는 자를 보살이라고 하는데, 수행자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합니다.
자기 깨달음에만 치중하면 소승이라고 합니다. 주로 종교는 개인문제로 책임을 돌리는데 이것이 종교의 한계입니다. 사회운동은 너무 사회문제로만 책임을 돌립니다. 만약 내가 인도에 태어났다면 카스트 제도를 없애도록 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캐나다는 세상을 바꾸는 것 보다 개인 수행에 더 많이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한국사회는 이 두 가지가 비슷합니다. 먹고 살만 하고 민주화도 어느정도 되었기 때문에 이제 개인의 변화도 매우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직 사회적인 변화도 가져와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정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므로 정치적 무관심은 사회변화를 더디게 가도록 합니다. 그러니 정치에 실망했다고 정치에 무관심해지면 안됩니다. 금방 안된다고 분노하고 국적을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20년만에 광주 폭동을 민주 혁명으로 바꾸지 않았습니까?
세월호 사건도 이번에 특별법이 안 만들어진다고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물량중심, 속도중심에서 안전중심, 생명중심으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질적변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후세에 세월호 사건 이후로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한다면 304인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안됩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우리의 몫으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저항을 지속적으로 지혜롭게 해나가야 합니다. 슬픔에만 젖어있고 분노만 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떤 조건에서 태어났던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고,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30분 동안 질문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아 답변을 하니 청중들은 뜨거운 박수로 스님께 화답했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인을 해주시고 기념촬영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과 단체사진 촬영을 한다음에 자원봉사자 모두들에게 단주를 선물로 손목에 끼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행사 전체를 총괄한 임신효씨에게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하여 스님의 주례사에 사인을 하여 선물했습니다.

<임신효님>
또한 늦은 시간까지 교회건물을 쓸 수 있도록 한 교회 스텝인 찰쓰씨에게 영문 기도책을 사인하여 선물로 주었습니다.

<찰스씨>
그리고 스님께서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몸이 좋지 않아 함께 나누기도 못하고 먼저 숙소로 들어가니 묘덕법사님과 토론토법당의 김정란 총무님과 함께 나누기를 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자원봉사자들에게 정말 수고가 많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오셨습니다. 10시 10분이 되어 저는 스님과 내일 일정에 대해서 잠깐 의논을 하고 제 숙소로 내려와서 스님의 하루를 정리하고 저의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늘 자원봉사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젊은이였으며, 청년 직장인 2명과 교수님 1분, 그리고 대학생 1명, 고등학생 1명 등 총 12명 정도였습니다. 오늘 참가한 자원봉사자들은 법륜 스님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는데 준비과정은 즐겁고 재미있었고, 또한 여기 살면서 한국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본 것은 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스님 강연에 참가하여 강연을 들으면서 왜 사람들이 "법륜스님, 법륜스님"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원봉사자 한 명은 "학교행사를 많이 하는데 이번 강연은 자기가 너무 하고 싶어서 참가를 하게되었다"며 "공부하고 아르바이트 하면서 아주 바쁜 가운데 즐겁고 재미있게 자원봉사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봉사자들은 내년에도 오타와에서 강연이 있으면 좋겠고, 정 안되면 몬트리올이라도 스님께서 오셔서 강연을 해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토론토는 가기에 너무 멀고, 몬트리얼은 정기버스가 있기 때문에 참가할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행사를 준비한 임신효씨는 "내년에 오타와에서 또 강연이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행사를 준비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김정란 총무님께서는 오타와 강연에서는 외국인의 영어 강연 요청이 많았고 내년에는 영어 강연을 했으면 좋겠다는 문의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강연에도 외국인들이 한국분들과 함께 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이번 32번째 오타와 강연도 자원봉사자들의 아름다운 봉사활동으로 성황리에 행사가 마쳤습니다. 우리는 모두 모자이크 붓다라는 스님의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내일은 33번째 강연이 토론토에서 있으니 토론토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