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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의 꿈
일행 셋이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후였다. 윤우일은 한국인 진품 여권을
사들였는데 이번에는 여행사를 통해 직접 구입했다.
한국 여행사 직원은 수수료 5천 달러를 받고 여행자로부터 개당 1만 달러씩 구입해 주었는데 서미향
의 여권은 사진과 용모가 비슷했다.
오후 3시의 자카르타 공항은 혼잡했다. 특히 로마에서 도착한 대한항공 k-927편에는 승객 대부분이
한국인 관광객이어서 입국심사대에 한 뭉치의 여권이 여행사 직원의 손으로 옮겨졌다.
[모두 몇 명이야?]
한 뭉치의 여권이 앞에 놓이자 입국 심사원이 흰 창이 많은 눈을 더 크게 뜨고 여행사 직원을 보았다.
[우리 팀은 75명이오.]
술 취한 관광객들에게 시달린 여행사 직원이 짜증난 얼굴로 말했다.
[저 망할 놈들 때문에 정말이지 죽겠어요. 얼른 도장이나 찍어주시오.]
[당신도 고생이 많군.]
쓴웃음을 지은 입국심사원이 여권 하나를 펼쳤다.
[당신들은 그렇게 돈이 많나?]
[무슨 말이오?]
[한국인들은 돈 잘 쓴다고 소문이 나서 말이오.]
[돈 많은 사람은 돈 자랑 안 해.]
그러자 입국심사원이 풀썩 웃었다.
[그렇지. 내가 보기에도 한국인들은 허풍이 심한 것 같아.]
그리고는 스탬프를 소리 나게 내려찍었다. 그로부터 30분쯤 후에 윤우일과 서미향은 여행사 직원한테
서 여권을 돌려받았다.
[자, 이제 그냥 나가시면 됩니다.]
30대 초반쯤의 사내는 여권을 내밀면서 정색하고 윤우일을 보았다. 그들은 마악 입국장 밖의 대합실
로 나온 참이었다.
[그냥 저하고 같이 한국에 가셔도 문제될 것 없는데. 여권 판 사람들이 분실신고를 아직 하지 않았거
든요.]
[이곳에 조금 있을랍니다.]
윤우일이 부드럽게 말했다.
[신세 많이 입었습니다, 김 형.]
[난 자카르타에 한 달에 두 번은 들립니다.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
명함을 꺼내 준 사내가 힐끗 기둥 옆에 서 있는 서미향과 이순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가 탈북자한테 여권을 여러 번 팔아먹었지만 선생처럼 한국인 티가 안 나는 사람은 첨입니다. 아무
도 눈치 못 챌 겁니다.]
[연락드리지요. 고맙습니다.]
윤우일이 손을 내밀자 사내가 미안한 듯 말했다.
[나야 돈 받고 한 일인데요, 뭐.]
[유능한 놈이었어.]
서류를 책상 위로 던진 피터 오웬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놈이 맡은 작전은 다 성공했다구.]
[지금쯤 한국에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죠지 피터슨이 다가와 오웬의 앞에 커피잔을 놓았다.
[백만장자가 되어서 말이지요.]
[놈이 한국으로 쉽게 돌아가지는 못해. 오히려 한국에서 더 찾기 쉬울 테니까.]
커피잔을 쥔 오웬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두 발을 책상 위로 올렸다.
이곳은 로마의 CIA 지국 사무실 안이었다. 오웬은 조금 전 본부 부국장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터
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한국 여권을 사용할 가능성이 제일 크지만 그것이 체크되었을 때는 놈이 달아난 지 며칠 후가 된단
말이야.]
혼잣소리처럼 말했던 오웬이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머리를 들었다.
[그 이덕수의 처와 자식은 지금도 유럽에 있을까?]
[집이 너무 넓어요.]
응접실에 도착한 서미향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들은 자카르타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오
후, 여권이 체크되는 호텔을 피해 변두리의 여관급 모텔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자
카르타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이 대저택은 숲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주위에는 비슷한 규모의 대저택이
즐비했다. 대부분이 정부 고위관리나 화교 거상들의 저택으로 윤우일은 인도네시아를 떠나려는 화교
실업가의 저택을 빌린 것이다. 서미향이 불안한 시선으로 윤우일을 보았다.
[집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어요?]
[모두 여섯 명. 남자 둘은 경비원과 정원사이고 여자 넷은 주방일 두 명과 집안 시중드는 사람 둘이지
요.]
거침없이 말한 윤우일이 털썩 소파에 앉았다. 저택에는 필요한 가구와 가전제품까지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전 주인이 고용했던 사람들인데 내가 다 인계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다....]
[여섯 사람의 한 달 월급이 300달러입니다. 인건비가 싸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의 생계수단을 자르기
가 어려워서.]
그리고는 윤우일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서미향을 보았다.
[그리고 이 저택을 관리하려면 그만한 인력이 필요해요. 또 우린 그만한 능력도 있고.]
그때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던 이순영이 응접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 뒤를 여자 한 명이 따라왔다. 벌
써 이순영을 맡은 것이다.
[엄마, 강아지가 세 마리나 있어!]
이순영이 소리쳐 말했다.
[큰 개두 두 마리나 있어!]
[적응하도록 해요.]
윤우일이 서미향을 보며 말했다.
[우린 한국인 사업가 부부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잠시 빌려 사는 곳이고, 집주인 왕씨는 은밀하게 인
도네시아를 빠져나갈 작정이어서 집을 매매하지는 못하고 우리한테서 월세를 받기로 했어요. 오히려
우리한테는 이롭지요. 우리 신분이 어디에도 노출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윤우일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하인들도 눈치채지 못해야 돼요.]
그날 밤,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서미향은 눈을 떴다. 침대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눈을 서너 번 깜박였던 서미향은 곧 소스라쳐 상반신을 세웠다. 침대 옆에 윤우일이 서 있었다.
[내키지 않는다면 돌아가지요.]
윤우일이 부드럽게 말했다. 방의 불은 다 꺼놓아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아.....]
[전 아직.........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서미향은 자신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울리는 것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리고 입 안이
탔다. 그러자 윤우일이 아주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나는 남자라서 성욕을 느끼기는 합니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결심한 듯 침대 안쪽으로 몸을 비끼면서 서미향이 말했다. 윤우일의 말에 웬일인지 가슴이 가
벼워진 것이다. 이 남자는 그냥 자신을 버려두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난관을 무릅쓰고 자신과 순
영이를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약속과 신의를 지키는 남자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침대로 올라와 나란히 누운 윤우일이 가만히 팔을 뻗어 허리를 당겨 안았을 때 서미향은 반항하지 않
았다. 다만 벽 쪽의 작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이가 걸렸다.
윤우일은 침착하고 노련했다. 잠옷을 차분하게 벗기더니 곧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겨 알몸으로 만들었
고 자신도 알몸이 되었다. 서미향은 가빠지는 숨을 억누르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윤우일의 입이 젖가
슴을 가득 물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윤우일의 손이 자신의 샘으로 파고든 순간 서미향은 가늘게 신음했다. 샘은 이미 젖어 있었다.
윤우일의 입술과 혀는 젖가슴을 마구 뭉그릴듯 헤치더니 이윽고 아랫배로 내려왔다. 서미향은 두 손
으로 윤우일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아 아 .........]
서미향의 입에서 탄성과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윤우일의 혀가 샘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
는 허리를 올려 윤우일의 혀를 더 세게 받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허덕였다.
[어서........해 줘요..............]
그러나 윤우일은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갈증난 사람처럼 샘의 구석구석을 핥고 젖가슴을 애무했다.
서미향은 이제 자고 있는 아이도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몸을 비틀면서 억누른 신음을 뱉아내던 그녀
는 이윽고 사지를 뻗으면서 절정에 올랐고 흐느껴 울었다.
그제야 윤우일은 그녀의 몸 위로 상반신을 올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을 천천히 그녀의 몸 속으로 넣
었다. 그러자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놀란 듯 다시 깨어났다.
윤우일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을 때 서미향은 다시 절정으로 솟아올랐다.
[아.....]
흐느끼면서 신음을 뱉은 것은 무언가 알려주고 싶다는 충동때문이었다. 절정을 같이 느끼고 싶다는
행복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우일의 몸이 점점 세차게 움직이자 서미향의 쾌감은 더 높게 솟아올랐
다. 그리고는 겁이 났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뜻
스쳤다가 곧 열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윤우일의 어깨를 물면서 또 다시 절정에 올랐
다.
다음날 아침, 윤우일은 누군가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깨어났다. 눈을 뜨자 옆에 순영이 서 있었다.
[아저씨, 여기서 잤어?]
[응.]
대답을 하고 윤우일은 앞쪽을 보았으나 서미향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엄마 어디 갔니?]
[저쪽 방에.]
[어디? 응접실?]
순영이 가리킨 쪽은 응접실이었다. 벽시계는 오전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후에 응접실로 들어선 윤우일은 서미향이 무언가를 하녀에게 지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영
어에도 능숙했는데 윤우일이 옆쪽 소파에 앉자 첫날밤을 치른 신부처럼 얼굴이 붉어지더니 곧 하녀를
내보냈다.
[식사 메뉴를 물었더니 모두 중국식이라고 해서요.......]
그녀가 시선을 내린 채 낮게 말했다.
[한국 요리를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아요.]
[시장도 봐야 할 겁니다.]
응접실을 둘러보면서 윤우일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서미향은 금방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집주인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집안 장식도 바꿔야 할 것이고 가전제품도 더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곧 순영이가 다닐 외국인 학교도 알아봐야 할 것이고.]
자리에서 일어선 윤우일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 서더니 쪽지를 내밀었다.
[여기 퍼블릭 은행의 비밀계좌와 비밀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3백만 달러가 예치되어 있으니까 필요한
때 얼마든지 찾아 쓰면 됩니다.]
[저는 싫어요.]
서미향이 세차게 머리를 젓더니 시선을 올려 처음으로 윤우일을 보았다. 눈 주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
다.
[윤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전 돈에 손대기 싫어요.]
[그럼 비상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떠나시려는 건가요?]
불쑥 그녀가 물었다. 윤우일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갈등과 불안감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의지하고 싶다는 감정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윤우일은 천천히 머리를 젓고는 서미향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한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
았다. 말랑한 허릿살의 감촉과 함께 다시 성욕이 솟구쳤다.
[같이 있을 거요.]
[......]
[날 믿어요.]
[정말이죠?]
서미향이 어깨를 붙여오며 물었다. 윤우일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돌아가면 반겨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 순간 김희연의 얼굴이 눈앞에 번쩍이며 지났다. 그러나 윤곽 없는 형체뿐이었다.
수하르토가 물러난 후 인도네시아 정국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묻혀 있었다. 연일 반정부, 친정부 시
위가 일어나면서 상권을 장악한 화교계에 대한 테러가 계속되는 바람에 치안은 극히 위험한 상태였
다. 따라서 화교계 기업가나 상인들은 대부분 재산을 처리하여 국외 도피를 계획했는데 대를 이어 기
반을 굳힌 사업가들이 많아서 모든 것을 다 놔두고 떠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왕탐만 또한 그들 중의 하나로 중국의 복건성에서 이주해 온 후로 3대째 인도네시아에 기반을 굳힌 사
업가였다. 그는 백화점 하나와 세 개의 자동차 수리업소, 그리고 세 개의 대형 식당을 운영하는 거부
로써 반 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었다. 본래 왕탐만의 조부는 조그
만 음식점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성실한 사람이어서 지금도 자카르타만 근처의 다섯 평도 안 되는 가
게는 후손들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왕탐만이 윤우일을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인
카순이 저택의 세입자가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왔을 때 왕탐만은 순간 카순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부
동산 거래업을 하고 있는 카순도 윤우일의 전화를 받았을 때 흥분을 해서 마시던 차를 엎지르기까지
했다지만 이런 난리통에 들어오는 한국인 세입자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난리통에 화
교들의 재산 반출을 막으려고 매매가 금지되어 있는 데다 은행 예금도 동결되어 있는 왕탐만으로써는
윤우일한테서 받은 달러가 금쪽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오후 6시가 되었을 때 왕탐만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자카르타 호텔 라운지로 들어섰다. 50대 후반의
왕탐만은 작은 키에 비대한 체격이었으나 요즘 석 달여 동안 체중이 20킬로나 줄었다. 그래서 걸친 남
방이 헐렁했고 바지도 펄렁거려서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손님이 서너 테이블 뿐이어서 윤우일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갑자기 뵙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이 선생.]
능숙한 영어로 말한 왕탐만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그는 지금 자카르타 북부에 있는 여동생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평소에 인심을 잃지 않아서 종업원들의 공격대상은 되지 않았지만 사업장
은 모두 폐쇄되었다. 현지인 종업원들이 영업을 재개하려고 기를 썼지만 자금이 없는 터라 결국 자재
만 몽땅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냐는 듯 눈으로만 묻는 윤우일을 향해 왕탐만이 얼굴을 찌푸
리고 웃었다.
[잘 아시다시피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려면 군부의 배경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보안국 소
속의 대령을 스폰서로 두고 있었지요.]
왕탐만이 말을 이었다.
[그 대령이 곧 저택으로 찾아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놈한테 나하고는 사업관계로 알게 된 사이고
저택은 그냥 빌려쓰게 되었다고 말해 주십시오.]
[그 자가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있습니까?]
이맛살을 찌푸린 윤우일이 왕탐만을 보았다. 계약 당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정국이 거의 무정부 상태여서요. 총을 가진 놈들의 세상입니다. 그놈이 어제 그 저택을 쓰겠다고 해
서요.]
[만일 나더러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한테 월세를 주고 빌렸다고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곤란합니다.]
왕탐만이 당황한 듯이 손을 저었다.
[나가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하고 내가 말만 맞추면 말이지요.]
왕탐만이 의자를 당겨 바짝 다가앉았다. 말랐다고는 하나 아직도 기름진 얼굴에서 진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당신은 내 한국인 친구의 친척으로 정국이 안정되면 백화점 사업을 동업할 계획이라고 말씀해 주세
요. 실제도 그럴 계획이었으니까 그 담부이 대령 놈도 이해를 할 겁니다.]
왕탐만의 표정은 진지했다.
[내 여권에는 서른두 살로 되어 있으니까 우리가 부부 행세를 하면 될 겁니다.]
왕탐만을 만나고 돌아온 윤우일이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가볍게 말했다.
[내가 한국 기업가의 친척이 되어 버렸는데 마침 내 친구였던 놈이 유통업계 사장 아들이어서 그쪽 내
막도 잘 알고 있으니까 잘 되었어요.]
박동진을 표현할 때 윤우일은 친구였다고 과거형을 썼다. 서미향은 무심코 넘어갔다.
[괜찮을까요?]
불안해진 표정으로 서미향이 물었다. 저택생활을 한 지 오늘로 열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제 둘은 자
연스러운 부부로 보여 졌다. 침대를 같이 쓰는 것에 순영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보안국에까지 우리 정보가 넘어가지는 않을 거요.]
자신 있게는 말했지만 윤우일은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여권 조회를 해보면 들통이 날지도 모를 일이
었다. 여권을 판 여권의 실제 주인들이 분실신고를 하고 임시 여권을 받아 돌아갔다면 문제가 되는 것
이다. 한국에 여권 조회를 하면 당장에 분실신고가 된 여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해를 끼친 사람은 아니니까.]
소파에 등을 붙인 윤우일이 두 다리를 길게 뻗으며 여유 있게 말했다.
[닥쳐보면 뚫고 갈 방법이 생기겠지. 미리 겁먹고 우왕좌왕할 필요는 없어요.]
그날 밤 서미향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아이는 그동안 친해진 하녀와 같은 방을 쓰도
록 떼어낸 터라 침실에는 둘 뿐이었지만 언제나 수동적이었던 서미향이다. 그러나 성감이 높고 깊어
서 윤우일은 섹스를 할 때마다 그녀에게 도취되었다. 그것은 서미향 쪽에서는 더한 모양으로 밤이 되
어 둘만 남게 되면 열에 뜬 것처럼 허둥대며 몸을 맡겼다.
그녀는 한참 달아올랐을 때 자신이 상위로 하겠다고 제의했다. 부끄러운지 헐떡이며 말하면서도 시선
은 마주치지 않았다. 상위로 올라 쪼그린 자세로 앉은 그녀는 금방 절정에 올랐다. 자세가 어색한 것
이 처음 시도한 것처럼 보였다.
윤우일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천천히 다시 시작했다. 성감이 빠르게 밀려오는 체질은 서미향은
보통 하룻밤에 너댓 번은 절정에 올랐다.
이제 그녀는 탄성이나 신음을 억누르지 않았다. 마음껏 소리치며 쾌감을 표시했다.
윤우일도 몰두했다. 서미향의 몸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둘의 몸은 한 덩이가 되어 움직였다. 이것은
육정이다. 마음과 몸이 합일이 되어 이루는 쾌감이 더 큰 상승작용을 한다는 말도 있지만 서로의 몸이
맞는 것이 최상이다.
윤우일은 서미향이 네 번째로 절정에 올랐을 때 폭발했다. 오늘은 가장 폭발적인 날 중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숨이 끊어질 듯이 입에서 쇳소리를 내면서 서미향이 사지를 내던지고 누워있을 때 윤우일
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알몸으로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깊은 밤이어서 2층 침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정원은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정원 한쪽의 야자나무 숲
은 더욱 짙게 어두웠고 주위는 조용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당신은 순영이를 데리고 잠시 밖에 나가 있는 것이 낫겠는데.]
창 밖을 내다보며 윤우일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서미향의 숨소리가 딱 그쳤다.
[내가 그 대령을 이곳에서 만나는 동안만 말이야.]
[언제 오는데요?]
상반신을 일으키며 서미향이 묻자 윤우일이 돌아섰다.
[오늘 오후 2시경에 온다고 했어요.]
[별일 없을까요?]
[지난 일에 비교하면 이쯤은 일도 아니에요.]
[그럼 어디에 가 있을까요?]
[메린을 데리고 바닷가로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곳은 조용하다고 하니까요.]
메린은 저택의 관리를 맡은 인도네시아인 하녀였다. 침대로 다가온 윤우일이 서미향의 상반신을 안았
다.
[걱정할 것 없어요. 별일 없을 테니까.]
담부이 대령은 깡마른 체구에 선글라스를 끼었는데 검은 피부는 윤기가 났다. 주름잡힌 전투복에다
머리에는 검정색 특전단용 베레모를 썼고 허리에 미군용 베레타 92를 탄 것이 잘 어울렸다. 키는 1미
터 70쯤으로 전형적인 자바인의 모습이었지만 드러난 코와 입술의 윤곽이 뚜렷했다. 그가 대위 한 명
과 상사 둘을 응접실까지 데려온 것은 기세를 보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현관 앞에 주찬된 두
대의 지프 중에서 한 대에는 20밀리 기관포가 설치되어 있는 것도 위협적이었다.
[왕 사장한테서 이야기를 들었소.]
투박했지만 정확한 영어로 말한 담부이가 윤우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국 강 사장의 친척이 되신다구?]
[그렇습니다.]
담부이의 손은 부드러웠다. 훈련 대신 지폐를 주물렀기 때문일 것이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담
부이가 다시 불쑥 물었다.
[백화점 사업에 아직도 관심이 있습니까?]
[예, 정국이 안정되기만 하면.]
[곧 안정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자 담부이가 뒤에 선 대위에게 자바어로 빠르게 지껄였다. 담부이의 지시를 받은 대위는 상사들
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응접실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왕 사장 이야기로는 뉴자카르타 백화점을 인수할 계획이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담부이가 안경을 벗자 검은 눈동자와 주름진 눈이 드러났다. 40대 후반쯤이나 50대 초반의 얼굴이었
다. 정색한 윤우일이 담부이를 보았다. 왕탐만과 말을 맞출 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시장조사를 더 해보아야 될 것 같은데요.]
[인도네시아 사정은 잘 알고 계시지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스폰서가 필요한 것도 알고 있지요?]
[압니다.]
소파에 등을 붙인 윤우일이 지긋한 시선으로 담부이를 보았다. 보안국의 대령이면 최고 기밀을 취급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터폴이나 CIA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윤우일이 정중하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들의 스폰서 역할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럼 일을 시작할 때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합시다.]
담부이가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조건은 왕 사장과 같은 조건으로 하십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 계실 예정입니까?]
[한국을 다녀오기는 하겠지만 왕 사장한테서 이곳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왜 그러시
죠?]
[아닙니다. 그저....]
그러나 담부이는 곧 선글라스를 집어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같이 일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담부이를 현관 앞에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윤우일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이 개운해
진 것은 아니었다.
[왕탐만은 곧 도망칠거야.]
지프 앞좌석에 앉은 담부이가 뒤쪽의 부관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기관포를 앞세운 지프를 선두 차로
세워놓고 그들은 시내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중이었다.
[한국의 강 사장이 왕탐만의 분위기를 모르거나 아니면 같이 공모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
다.]
[그렇지만 백화점이나 사업체들은 매각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위가 묻자 담부이는 머리를 저었다.
[공식적인 서류는 그대로 두고 비밀계약을 하는 거지. 얼마든지 방법이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왕탐만을 잡아놓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도망치기 전에 말입니다.]
[감시나 철저히 하도록.]
담부이가 입술 끝만 비틀며 웃었다.
[비밀사업을 실컷 벌이게 한 다음에 잡는 게 이득이야.]
정국은 갈수록 혼란해졌고 그와 비례해서 군부의 세력은 더 강해지는 상황이다. 군부는 얼마든지 쿠
데타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학생과 시민들의 반대시위를 진압하려면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
래서 지금 사태를 관망하면서 여유 있게 세력을 키워 가는 상황이었다. 한동안 앞쪽만 바라보던 담부
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때는 한국의 강 사장이란 놈이 무슨 꿍꿍이 속셈을 갖고 있는지도 알게 되겠지.]
[그럼 저택에 있는 한국 놈도 감시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담부이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인들 중 하나를 정보원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효과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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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상감사 므
감사히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