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이사장 4년, 그리고 아름다운 퇴장
강희근(직전 국제펜 한국본부 부이사장, 경남펜 초대 회장)
1.
필자는 제33대 국제펜 힌국본부 이사장단(이사장: 이길원, 부이사장: 손광성, 문삼석, 강희근, 유자효, 이상문)의 한 사람으로서 지나간 4년을 한국펜의 심장부에서 일했다. 아쉬운 점도 많지만 즐거운 추억도 많이 만들었었다. 무엇보다 우리 이사장단은 시스템에 충실했다. 그래서 그 많은 국제 행사를 대과없이 치를 수 있었다. 필자로서는 세르비아 세계대회2011. 9.10-18) 참석으로 비로소 세계속의 펜회원이라는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분과회의나 <문학- 세계의 언어>라는 주제발표에 참석함으로써 세계펜의 현안문제를 익힐 수 있었다. 문학 페스티발의 주제는 <언어를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었는데 주제가 주는 무게와 감각이 참으로 탁월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2011년 대회를 앞두고는 한국펜의 국제 심포지움이나 특별행사에 참석한 국제펜 본부 임원들을 친구로 대화하고 소수민족 언어들의 소멸에 관해서는 집중적인 탐색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이 자산이 되었다. 특히 카나다의 존 롤스톤 소울(세계 회장) 작가와 일본의 다케아키 호리(사무총장) 작가, 그리고 알제리 회장 매가니씨를 안 것이 잊히지 않는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매가니씨는 필자의 사위가 엘지그룹 기획팀으로 알제리에 파견 근무할 때 주변이 되어준 것이 감사할 일이었다. 그 무렵의 심회를 쓴 시가 남아 있다.
알제리아에서 1년 살다가
방학이라고 외갓집에 온 여자 아이
현서는 오늘 다시 알제리아로 간다
El kalimat school, 9월 학기로 4학년에 오른다
한 마디씩 영어로 물으면
입을 닫고 열지 않았다 질렸을까
그곳은 한국 사람이 가 살기에는
힘드는 곳인데도
내색하지 않고 간다고 한다
이유는 없다 아빠 엄마가 가 살아야 하는
곳이므로
알제리아로 가면 또 한 번에 한 두시간씩
인터넷 전화로 한결이와 통화할 것이다
현서의 유일한 통로,
그것 때문에 내색하지 않고 가는 것일까
대한민국 LG를 좋아하는
알제리아 펜클럽회장 Mohamed Magani 씨에게
이번에도 한 차례 더 연락해 놓아야겠다
무슨 배경이 되겠는가
내가 아는 알제리아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기적이니까
-졸시 <알제리아로 가는 아이> 전문
이 시는 알제리아로 가는 외손녀를 두고 쓴 것이지만 측면에는 필자의 사위와 딸, 친손녀 한결이가 있고 그 배경에 일제리아 펜회장 매가니씨가 있다. 펜 이야기에서는 한겹 벗어나 있는 것이지만 필자는 이 시를 읽을 때면 국제펜이 햇살처럼 곁에 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2.
제78차 국제펜 대회는 한국펜 주관으로 2012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우리나라 경주에서 개최되었다. <문학, 미디어 그리고 인권>이라는 주제로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 경주시가 후원했다. 공식언어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 한국어(동시통역 제공) 등이었다. 대회 집행부는 물론 한국펜본부가 수행하는 것이지만 집행부 아래 제78차 국제펜대회 총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성춘복시인을 위촉했다. 위원으로는 김종상 유안진 시인등 7인을 선임하여 대회에 임했지만 이 위원회도 대회중에는 거의 의전적 의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애초 준비과정에는 펜 이시장단에서 광범위한 기획과 토론으로 임했으나 대회에 임박해지면서는 국제대회 운영업체가 실무 집행의 가닥을 잡으면서 기획은 수술 수준의 가감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부이사장들이 설 자리는 좁혀지고 집행부 공동체의 활력이 툭 떨어져 대회는 그냥 보면 겉도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이사장의 입지가 격 없이 졸아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무처 중심의 대회는 돌아가고 있었다. 집행부의 한 사람이 할 말을 하자면 스스로의 허리를 한 등급 이하로 굽히고 시스템이 움직이는 것에 만족하거나 의미 부여를 한 등급 격상시키는 일밖에 따로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 시스템은 도덕적이고 건강했다. 개회사에 필수적이지만 존 롤스톤 소을 회장을 하게 하고 우리 환영사는 마땅히 이길원 이사장이 나서서 했다. 기조강연에 이어령 평론가와 월레 소잉카, 르 클레지오 등 노벨상 수상자들이 나서게 했다.
문학포럼에 부이사장 유자효를 내세우고 좌장에 이근배, 발표는 데이비드 맥켄 하바드대 교수와 시조시인 홍성란, 그리고 네팔의 람 쿠말 펜다이가 담당했는데 대주제는 시조 논의 였다. 또 다른 포럼은 표현의 자유와 미디어라는 주제로 이상문 부이사장의 사회, 이문열 작가가 좌장, 발표에는 장윤익, 임헌영, 김영순(탈북문인), 도명학(탈북작가), 유미리(재일 한국인 작가)가 했고 다른 포럼의 <나의 삶 나의 작가>에서는 소울 회장이 좌장으로 월레 소잉카, 고은, 르클레지오 가 담당하였다. 북 사인회에는 르 클레지오, 유미리, 소잉카, 김후란, 이문열 등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논의들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틈틈이 시낭송, 총회, 분과회의, 음악 발표, 패션쇼, 뮤지컬 신국의 땅 신라,삼국유사, 요덕스토리 공연, 한국무용 공연, 환영 만찬(경북지사. 경주시장), 인각사 관광 등이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분과위원회는 평화작가위원회, 언어권리위원회, 여성작가위원회, 투옥작가위원회가 열리었는데 특히 투옥작가위원회가 가장 열띤 토론을 펼쳤다.
필자는 이번 대회에서 한국펜 센터의 정대표로 문삼석 부이사장과 같이 총회에 참석했다. 우리 자리에는 ‘KOREAN PEN'이라는 팻말이 올려져 있었다. 세계 110여개국 센터의 대표들과 세계펜의 예산결산 등 현안문제를 다루는 데 동참했다. 대회 이쓔를 이루었던 망명북한작가 펜센터가 144번째 회원 센터로 가입이 된 것은 최종 총회장이었다. 역사적으로 한 센터의 중심인 서울에 두 개의 펜센터가 존재하는 특수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만장일치로 가입이 이루어지고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탈북 망명작가들이 입장할 때 환성이 터져나왔고 회의 끝에는 여러나라 대표들이 서로 사진을 찍으려고 혼잡을 보이기도 했다.
경주대회에서 쏟아져 나온 핵심 문장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 예로부터 문학을 숭상하는 나라인데 이곳에 와주신 국제펜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환영한다.”(이길원)
“신라문학의 통합적인 세계관으로 한 쪽으로 밀리고 갈라지는 디지털 시대의 편향을 바로잡아야 한다.”(이어령)
“속성상 문학이라는 창조성을 권력은 억누르려 하는 것이다. 이를 벗어나는 길이 문학의 길이다.”(월레 소잉카)
“미디어의 이미지나 간단한 정보와는 달리 문학은 시간과 문화를 융화하며 인간 생활을 초월하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세계 모든 언어의 관여나 문화의 교류와 같은 표현방식은 이롭고 중요한 것이다.”(르 클레지오)
경주대회는 진행이나 사무처리가 비교적 원만하고 매끄러웠다는 평가가 있었고 특히 외각의 안내나 도우미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필자로서는 <표현의 자유와 미디어> 주제 아래 발표자로 나선 재일교포 작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재일 한국인이기 때문에 받은 상처나 표현에 관한 사안을 담담히 발표했는데 그녀가 말한 말들이 필자의 가슴에 닿기 시작한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부터였다. “그 벽을 앞에 두고 내가 선택한 것은 벽을 부수려는 것도, 벽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것도, 벽에 등을 돌려 발길을 돌리는 것도, 벽이 있는 길을 돌아가는 것도 아닌, 벽 앞에 서서 그 벽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시종 유미리의 발표는 필자를 적당한 긴장의 벽 앞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그녀의 아버지는 산청에서 태어난 산청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일이지만 ‘산청’이라는 말 앞에 서면 필자는 ‘작아지는’ 속성이 있다. 대회기간 필자는 이것 저것으로 작은 데다 더 작아져 있을 밖에 없었다.
3.
필자는 국제펜 한국본부 제33대 이사장단의 일원으로 큰 하자 없이 임기를 마친 셈이다. 그런 데에는 이길원 이사장의 국제감각과 탁월한 역량, 손광성, 문삼석 부이사장의 높은 인격과 해당 장르에서의 중진적 위상, 유자효, 이상문 부이사장의 문학 역량과 지도자적 자질 등이 배경에 있었다.
그 배경을 업고 필자는 일정한 시점 이전에 차기 이사장 선거에 후보로 뛰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일이 있었고, 그 계획은 매우 구체적인 진전으로 가는 길목까지 닿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요청과 분위기를 접었던 것은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인 여건에 그 원인이 있었다. 우선 연락부지 세계로 뛰어다닐 건강에 자신이 없었고,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서울살이의 필수적인 요건이 심리적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고, 꼭 필자가 하지 않아도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자신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 후배들이 주변에 있었다는 것 등이 출마 포기의 변이 될 수 있었다.
필자는 그렇게 결심하는 순간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먼저 떠올랐다.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때로 지팡이 세워 놓고 김도 매고 한다네” 그 유한함은 시를 쓰는 것일 때 더 유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중국의 강서성 여산 언저리를 여행하던 중에 시골 한적한 지대의 도로를 지나다가 길가에 세워진 거대한 도연명의 석상을 보았다. 도잠이 살아서 그 길에 선다면 석상을 무어라 했을까, 아마도 부질없고 그마저 걸리적거린다고 했을 듯 싶었다.
지금은 이형기의 <낙화>가 격에 맞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