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시절이었다. 월요일은 모든 학생이 비상 걸리는 날이다. 이날은 용의 검사를 했다. 용의容儀란 몸을 가지는 태도, 또는 차린 모습을 말한다. 즉 얼굴, 손, 머리 등을 살펴보는 걸 말하며, 당시 대부분 학생의 머리나 옷에 이가 들끓는 시절이라 아이들이 줄을 서서 교탁 앞으로 나가면, 담임선생님이 물통에 담긴 하얀 DDT 가루를 차례대로 머리에 쓱쓱 문질러주었다. 그게 귀하디귀한 약품이란 욕심이 나서 옷 속에도 한 움큼씩 몰래 넣는 아이들도 있었다.
55년 전 군에 입대하면서 겨울철이 시작되면 총기를 닦는 수입포로 주머니를 만들어 DDT 가루를 내복 양 겨드랑, 아랫도리에 달아야만 했다. 저녁이면 내무사열 때 선임자가 꼭 부착 여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강 위쪽 근무지는 겨울이 길었다. 살충제나 제초제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터라, 학교는 물론이고 군에서도 그런 극약을 어린이나 신병에게 마구잡이로 살포한 것이다. 그런 맹독성 약을 몸에 바르고 접촉하면 치명적인 결과는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월남전에 다녀온 군인들이 앓고 있는 고엽제징후처럼 서서히 우리 몸에 나타날 DDT 후유증은 도대체 어디서 배상을 받는단 말인가.
고엽제枯葉劑는 수풀이나 정글에 제초용으로 사용하고, DDT는 빈대, 이, 파리, 모기 등 해충을 퇴치는 살충제라 한다. ‘오렌지색 비’로 알려진 고엽제는 월남전 당시 미군과 한국군이 정글을 제거하기 위해 살포한 제초제를 말하며, 다이옥신이라는 독성 화학물질을 포함되어 참전 장병이 장시간 노출될 위험이 컸고, 이후 피부질환‧암‧신경계 질환 등 다양한 부작용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농약 가운데 DDT 이상으로 고엽제가 국민에게 익숙한 이유는 아마도 젊은 나이에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아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 때문이며, 고엽제 환자로 확인되면 ‘국가 유공자’가 되어 유족보상금, 순직 여부, 국립묘지 안장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고엽제판정을 받기까지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DDT는 상대적으로 급성 독성이 약하다고 한다. 대신 생분해 과정이 느리고 지용성이라 체내 또는 환경에 축적되는 특성이 있어 ‘잔류성 독성’으로 분류되며 체내 흡수 시 혈액‧신장‧간‧심장‧신경계‧지방조직 농도가 높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하며, 이 살충제는 1940년 3월 특허를 출원했다. 지중해 지역에 만연한 말라리아모기를 박멸하는데 널리 사용되었고, 실제 이 지역의 말라리아 질병 발생 빈도는 현저하게 감소했다. 이런 공로로 스위스 과학자 파울 헤르만 뮐러는 194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지만, 그 후 이 화학물질은 ‘재앙의 씨앗’으로 잉태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난민수용소, 포로수용소, 감옥 등 사람들이 밀집되고 위생상태가 나빴던 그곳에 발진티푸스가 유행하자 골치를 앓던 미군은 DDT의 효과를 보고, 군사훈련프로그램에 사용법을 집어넣었으며, 한국 군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2년 ‘침묵의 봄’이라는 책을 통해 DDT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생태계가 파괴돼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다’라며 그 위험을 고발하게 되었다.
인간은 편리한 것을 찾고, 단숨에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농작물 해충을 한 방에 잡기 위해 인간이 개발해서 전 세계에 유포한 살충제 DDT! 자신에게 거슬리는 존재는 살충제를 쳐서 깡그리 없애버려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정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의 행보에 방해되는 정적들을 에프킬라 약으로 모기를 잡듯 행하는 게 인간들이다. 정치판에선 국가의 장래와 미래에 관한 관심은 없고 오로지 자신과 정당의 이익을 위해 유유상종하며 온갖 술수를 펼치고 상대를 향한 헛소문을 살포한다. 정치판이란 핑계로 서로에게 독을 품고 엎치락뒤치락 말싸움하며, 그들이 무심코 던진 말과 섣불리 한 행동은 독이 되어 상처를 입힌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중에 그로 인해 가슴에 멍든 이들도 있을 것이며, 정의를 위해 흘린 피를 채 풀지 못하고 이승을 떠난 이들도 많으리라. 이 업보는 저승까지 지고 가야 할 것이다.
타인의 생명과 모두의 건강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 했다. 가렵고 습진이 생기고 워낙 작아 잡기가 까다롭고, 오죽 잡기 힘들었으면 ‘이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50~60년대까지는 공중살포가 잦았다. 당국은 ‘장독’과 ‘양봉 농가’에 피해 없도록 주의해 달라는 고지를 했다. 우린 그저 먼지를 조심하자는 정도 수준의 경각심밖에 없었다. 우리가 몸에 발랐던 DDT 가루, 액상 형태로 뿌려댔던 소독차 연기와 공중살포까지…. 공중살포가 알려지자 아이들은 낮게 뜬 비행기를 보려고 살포 현장에 몰려들어 올려다봤으며, 거리를 달리던 소독차와 뜀박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독극물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DDT가 사라졌는지?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안타까운 건 위정자들은 자신이 맹독성 살충제를 뿌리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1972년에 환경보호국에서 DDT 사용을 금지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1979년 완전히 퇴출당했고 현재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DDT와 고엽제는 환경과 인간 모두를 말려서 죽이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