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이 시집,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 출간
이향이 시인은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고, 1989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2018년 재미시인협회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현재 재미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향이 시인에게 시라는 것은 내면에 들끓는 열정과 사랑과 고독을 아우르고, 홈리스로 상징되는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면서 타자를 향한 환대의 마음을 드러내는 매개이다. 사실 영어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에서 한글시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인으로서 언어적, 문화적 뿌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려는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다. 이향이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 는 “하드록”과 같이 들끓는 내면세계가 시의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들의 기록이다. “사막”과 같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별빛과 뚝향나무 향기”로 가득한 순간들 말이다. 그 주인공은 물론 이향이 시인이다. 그 뜨겁고 치열한 내면을 따듯하고 차분한 시의 꽃으로 피워낸 솜씨가 오롯하고 마뜩하다.
이향이 시인은 사랑의 시인이라 명명해도 좋을 만큼 사랑을 주제로 한 시편들을 빈도 높게 보여준다. 사랑에는 종교적 차원의 아가페(Agape)도 있고, 마음의 호감과 관련된 필리아(Philia)도 있고, 남녀의 욕망과 관련된 에로스(Eros)도 있다. 인간은 이러한 여러 가지 차원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가운데 시인들이 가장 관심 있게 노래하는 것은 물론 에로스 차원의 사랑이다. 남녀의 사랑은 동서고금의 시에서 가장 빈도 높게 다루어지는 일련의 주제 의식이자 시적 대상이다. 이것이 시적 대상으로 자주 호명되는 것은 그만큼 불완전하고 순간적이고 휘발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사랑은 원래부터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그러한 사랑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그칠 줄 모른다.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사랑의 시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 부단히 사랑의 시를 쓴다. 그 부단함이 한 인간으로서 혹은 한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최선의 예의이다.
부는 바람 손잡고/ 길 만들어/ 똑똑, 문 두드릴 테지/ 흐드러진 봄꽃 앞세우고// 얼음 속에 갇혔던 너 햇볕 한 아름 꺾어 안고 / 초록 들썩이며 내게로 오네/ 사랑, 그건 불안한 봄/ 낮엔 아지랑이 가면을 쓰고/ 밤엔 하얀 벚꽃 모자를 쓰네/ 봄비 내려 젖을 만하면/ 어느결에 비 멈춰 있고// 꽃 피어 향기 맡을 만하면/ 벌써 지고 없는
---「불안한 봄」 전문
이 시에서 봄은 사랑의 계절이다. 겨울 동안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바람이 불면 천지사방 대지에 새싹이 돋고 꽃이 핀다. 사람들의 마음도 겨울잠을 깨고 사랑의 시간을 맞이한다. 봄이 되면 겨우내 “얼음 속에 갇혔던 너”는 “흐드러진 봄꽃 앞세우고”서 “내게로 오”는 것이다. 그 결과 “너”와 “나”는 “사랑”의 자장 속에 한 몸, 한마음이 되어 공존하게 된다. 그런데 3연에서 시인은 “사랑, 그건 불안한 봄”이라고 말한다. 새싹 돋고 봄꽃이 흩날리는 계절에 찾아온 “사랑”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간직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한계를 깨달은 자의 언어이다. “봄”이라는 계절이 순식간에 지나가듯이, “사랑”도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 곧장 사라진다고 본 셈이다. “봄비 내려 젖을 만하면/ 어느결에 비 멈춰 있”는 것처럼, “꽃 피어 향기 맡을 만하면/ 벌써 지고 없는” 것과 같은 봄의 생리가 사랑의 속성과 똑같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사랑은 금세 지나가는 봄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는 속성을 지녔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을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랑은 항상 불완전하고 결여투성이의 속성을 지녔지만, 그런 속성 때문에 사랑은 오히려 영원한 지향의 대상이다. 사랑의 결여와 불완전은 그 충족과 완전을 향한 부단한 지향을 부추기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이러한 사랑의 역설을 노래한 것이다.
한편, 이향이 시인은 사랑이란 대상에 대한 포용과 배려의 마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항상 이기적인 욕망에 지배당하는 존재로서 사랑과 관련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정한 사랑은 이기적인 욕망을 멀리하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충만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래의 시에서 “꽃”은 그러한 사랑의 속성을 비유한다.
긴 긴 여름 그 뜨거운 볕을/ 온몸으로 견디는 배롱나무/ 부러질 듯 휘어진 가지에 진분홍 꽃들이 피어있다// 너의 가슴에 안겨 흐드러진 꽃 무더기로/ 피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그랬을 뿐인데//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 바람 세차게 불어와/ 차라리/ 꽃잎 우수수 떨어져 내려/ 너, 가벼이 숨 쉴 수 있다면/ 너로 인해 빛날 수 있었던/ 나 기꺼이 낙화하리/ 온 힘 다해 안아 준/ 아름다운 너를 보리
---「배롱나무」 전문
이 시는 여름날에 여기저기서 풍성하게 꽃피우는 “배롱나무”를 노래하고 있다. “배롱나무”는 사랑의 대상인 “너”이고, “꽃”은 사랑의 주체인 “나”를 비유하고 있다. “나”의 사랑은 “흐드러진 꽃 무더기”가 되어 “배롱나무”와 같은 “너의 가슴에 안겨” 있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나”의 진실한 사랑은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라는 시구에 담겨 있다. “꽃”은 아름다운 꽃이라도 너무 많으면 무거워서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배롱나무”를 걱정하고 있다. 이는 과도한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하거나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인식과 관련된다. 하여 “바람 세차게 불어와/ 차라리/ 꽃잎 우수수 떨어져 내려”서는 “너”를 가볍게 해 주고 싶다고 소망한다.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가 “너로 인해 빛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꽃”이 “배롱나무”로 인하여 활짝 필 수 있었던 것처럼. 하여 기꺼이 “낙화”로 꽃의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너, 가벼이 숨 쉴 수 있”게 해 주고 싶다고 소망한다. 이는 자기희생을 감내하면서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일 터, 그 구체적인 모습을 시인은 “배롱나무”에 붉게 피어나는 “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랑에 대한 사유와 상상은 다른 시에서도 “한 번도 남자 아닌 적이 없었으면서도/ 한 번도 남자인 적이 없었던/ 그대가/ 오늘도 꽃으로 피어 있다”(「첫사랑」 부분), “그의 어깨를 누르던 시간이/ 가벼워졌으면 해요/ 멀리서 달려온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다정히 그의 손을 잡을 테지요”(「나무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부분) 등의 흥미로운 표현을 얻는다. 앞의 시구에서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 깊이 남아있는 첫사랑의 기억을 “남자”라는 이성적 존재이자 그 이상의 존재로서 “오늘도 꽃”이라는 현전의 대상으로 노래한다. “첫사랑”이 지닌 역설적 의미를 간파한 시구이다. 뒤의 시구에서 시인은 “나무”가 되어 “그의 어깨를 누르던 시간”에 희망의 “햇살”이 비추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사랑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 없다.
볼 붉은 봄비가 짓궂게/ 땅을 툭툭 치며// 새초롬한 나뭇가지 살살 어르고/ 늦도록 고개 내밀지 못한 초록/ 손잡아 돋아주며/ 수줍은 꽃망울 터트리고// 아찔한 꽃세상 만들어//하늘과 땅은 서로 달아올라/ 시방/ 천지사방은 대놓고 연애 중
---「볼 붉은 봄」 전문
“봄비” 내리는 봄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시이다. “봄비”는 온 세상에 “초록”이 돋아나고 “꽃망울을 터트리”게 하는 봄의 전령사이다. “초록”과 “꽃”이 어우러져 “아찔한 꽃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인데, “꽃세상”은 다름 아닌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이다. 주목할 것은 봄의 풍경을 “하늘과 땅은 서로 달아올라” 있다고 묘사하는 부분이다. “봄비”로 인해 새 생명이 태어나는 모습을 “하늘과 땅”의 에로스로 상상하고 있다. 이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봄비”의 속성을 남녀를 하나로 이어주는 사랑의 행위로 상상한 결과이다. 사랑은 단지 남녀 사이의 에로스를 넘어 하늘과 땅, 음과 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전 지구적 온 생명의 원리라고 보는 것이다. 하여 “시방/ 천지사방은 대놓고 연애 중”이라는 의미심장한 시구가 탄생한다. 사랑은 남녀 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라는 “아찔한” 인식에 도달한 셈이다.
----이향이 시집,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