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씨가 브레이즌 후시 하단과 상단을 이어서 오르고 있다.
브리트니 그리프스와 최석문씨, 이명희씨 부부의 아들 최보건군이 밝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등반을 마친 후 숙소에서 모닥불을 쬐며 담소를 나누는 중. |
제3회 중국 리밍 암벽등반 교류대회… 한국에선 11명 참가
고산과 협곡을 넘고 따르며 숨겨진 비경을 품고 있는 중국 운남성. 그 중에서도 리수족, 이족, 나시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울창한 산림 속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터 잡고 살면서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고 융합하며 살아온 작은 시골 마을 리밍(黎明여명). 외지인이라도 한 명 들라치면 금새 티가 나는 이 조용한 산간 마을이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014년 10월31일부터 11월2일까지 제3회 중국 노군산 리밍 클라이밍 페스티발이 열린 것. 노스페이스와 블랙다이아몬드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마이클 도비(Michael Dobie), 브리트니 그리피스(Brittany Griffith), 허촨(何川하천), 캉화(康康華강화)를 비롯한 선수들과 중국 각지에서 모인 등반 동호인 2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도 11명이 참석했다(최석문, 이명희, 문성욱, 김은숙, 이석무, 신성훈, 안종능, 최유혁, 강태원, 이정훈, 최보건).
부서지는 모래 탓에 등반이 어려운 루트를 문성욱씨가 안정된 동작으로 오르고 있다. | 더블 트리 루트를 등반 중인 신성훈씨와 이정훈씨. |
케이브 에어리어에서 좌우 루트를 함께 등반 중인 최석문씨와 최유혁씨. | 누운 크랙을 이명희씨가 재밍 동작으로 등반하고 있다. |
리밍은 중국 운남성 리장(麗江여강)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노군산 국가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0년 마이클 도비 등에 의해서 최초로 암장 개척이 시작된 이래 최근 들어 중국 내에서 가장 각광받는 암벽등반지로 떠오르고 있다. 리밍의 특징이라면 미국 유타주의 인디언 크릭(Indian Creek)을 연상시키는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크랙 지형. 마을 중심인 홍석가를 따라 걷다 보면 주변이 온통 붉은 벽으로 둘러싸인 그림 같은 풍경을 마주치게 되는데, 특히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에 지역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그 벽에 온몸을 던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회일보다 1주일 가량 일찍 리밍에 입성한 한국팀은 첫날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바로 접근성이 가장 좋은 리수(Lisu) 지역으로 이동하여 등반을 시작한다. 이 한 벽에만도 필라스 에어리어(Pillars Area), 프리머티브 에어리어(Primitive Area South&North), 파인 크레스트 버트래스(Pine Crest Buttress) 등 다양한 구역이 있으니 이를 모두 만나볼 생각에 마음이 급하다. 하지만 갑자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비. 황급히 일기예보를 찾아보니 며칠 내내 이럴 듯싶다. 현지 가이드를 자처했던 기자는 “지금 시즌 리밍에는 절대로 비가 오지 않습니다”라고 자신만만했던 것을 후회하며 머리만 긁적인다.
하지만 사람이 날씨를 움직일 수 없듯이 궂은 날씨 또한 멀리 한국에서 찾아온 이들의 등반 열정을 식힐 수는 없었다. 우리는 다음날 디너월(Dinner Wall)에 있는 케이브 에어리어(Cave Area) 지역으로 이동하여 루프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등반을 계속했다. 케이브 에어리어에는 유명한 루트인 재패니스 카우보이(Japanese Cowboy, 5.12+)를 비롯하여 14개의 루트가 있다.
대회 당일 행사장에서 한국 참가자들.
가디언월 어프로치 시작지점. | 베이스캠프인 리밍 홍석가로 돌아오는 길. |
브레이즌 후시(5.10a/b)를 등반 중인 최유혁씨. | 플라이트 오브로커스트(5.12a)를 등반 중인 이명희씨. |
리밍 사람들은 수백 년 전부터 나무로 사다리를 엮어 절벽을 오르며 약초와 벌꿀을 채취하여 생활을 이어왔다. 등반하다 보면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사다리를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현재 암벽등반의 모습은 바로 이 지역 삶의 모습이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디너월’ ‘가디언’이라고 부르는 암장들이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약초벽’, ‘벌꿀벽’, 이렇게 불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디너월에 있는 디동스 크랙(De Dong’s Crack, 5.12a/b) 옆으로는 채집용 사다리가 놓여져 있고, 그 위로는 석청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있다. 카메라 앵글 속으로 함께 잡히는 두 선(線). 생활을 위해 선을 오르는 이들에게도 선을 위해 생활을 잠시 떠나온 이들에게도 그 선은 모두 삶의 한 모습일 것이다.
며칠 사이에 한국팀은 이미 지역 클라이머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너희 한국 사람들 대단하더라.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뜰 무렵에 너희는 이미 등반을 시작한다”며 부지런함을 칭찬하는 듯하지만 한국팀의 등반 실력은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은 90년대 중 후반부터 암벽등반 애호가들이 생겨났지만, 한국과 비교하자면 수준이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고, 최근 스포츠클라이밍 붐이 일고 있는 것에 비해 전통 암벽등반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이러한 등반대회는 트래드 클라이밍(Trad-Climbing) 애호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사이고, 멀리 베이징, 샹하이, 광저우, 홍콩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리밍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이번 행사의 캐치프레이즈 또한 ‘保持傳統(전통을 지키자)’ 이라는 것이었고, 참여자들의 프라이드도 매우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겸손하게 스스로를 평가하는 그들의 표현과는 달리 중국은 등반인구 증가 속도도 빠르고, 무엇보다 그 거대한 대륙에 무궁무진한 등반지를 품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산악 분야에서의 중국의 잠재력은 흔히 회자되는 여느 분야에 못지 않게 거대할 것이라는 예견을 해본다.
현재 리밍은 서쪽 계곡에 5개(The Holidays, Lisu Area, Dinner Wall, Pandora, One Dragon), 남쪽 계곡에 6개(Indy Wall, Angel Wall, Bull Crag, Unnamed, Guardian Valley, Faraway Buttress)의 벽이 있으며, 각각의 벽마다 여러 개의 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현재 200여 루트가 개척된 상태이며 잠재적 루트 또한 풍부하다. 난이도뿐만 아니라 크랙의 크기도 다양하여 한국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재밍의 다양한 변주도 가능하다. 온 몸을 밀어 넣어야 하는 침니에서부터 오프위드, 피스트로 시작해서 핑거로 좁아지는 작은 크랙에 이르기까지 심장을 뛰게 만드는 선들의 집합이다. 크랙 등반에 갈증을 느끼던 한국 클라이머들에게 이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보다 쉽고 다양하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등반지가 될 것이다. 리밍을 찾은 이들은 각자의 난이도에 맞는 루트를 찾아나서지만 역시 순전히 재밍에만 의존하여 양손과 양발을 크랙과 일치시키며 올라야 하는 루트가 단연 인기가 좋다.
서쪽 계곡에 위치한 가디언 밸리는 베이스캠프로 사용되는 마을에서 차량으로 이동해야 할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누구나 탐낼 만한 멋진 11개의 루트가 있다. 어프로치가 다소 길고 해발이 높다 보니 쉽게 호흡이 흐트러지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지만, 벽에 다가서서 장비를 착용하며 뒤를 돌아보면 붉은 사암벽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에 올라온 보람을 충분히 느끼게 된다. 뚫어지듯 루트를 응시하는 눈빛과 몸과 확보물의 사이즈를 크랙과 맞추는 준비, 그리고 시작되는 신중한 몸짓. 이 날 등반팀은 우리 한국팀뿐이었지만, 그 모든 과정은 노군산의 주봉과 더불어 다른 붉은 벽들이 더불어 지켜보고 있었다.
리밍의 벽들과 골고루 인사를 나누며 1주일을 보내는 사이에 대회일이 다가왔다. 첫날 도착해 등록한 후 둘째 날부터는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된다. 개막식 이후 해외 선수 등반 참관과 분조 활동이 시작되었다. 참가자들의 수준에 따라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뉘어서 전통 암벽등반의 이해, 확보물 설치법, 루트파인딩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과 등반이 이루어졌다. 순수함과 열정이 묻어나는 말 그대로의 축제 분위기.
유명 선수들의 등반이 시작되면 모두 바위 밑에 모여 함께 ‘지아요우(加油파이팅)!’ 을 외치고 다시 그 길을 따라 직접 실전 등반을 시작한다. 그간 등반에만 힘을 기울였던 한국팀은 각국에서 온 산벗들과 인사를 나누고 등반 모습을 지켜보며 간만에 여유로운 하루 일정을 보낸다. 리밍에는 유명한 세 로컬 친구가 있다. 매일 아침 클라이머들을 쫓아서 어프로치를 함께 하고 등반하는 동안 벽 아래서 기다리다가 저녁때 같이 하산하는 견공들인 제리와 딩동, 그리고 푸거. 이들도 갑자기 찾아든 많은 손님들에게 일일이 몸을 비벼대며 환영 인사를 보내느라 바쁘다.
“아직도 풀지 못한 루트가 많아요. 다시 올께요”
이정훈씨가 브레이즌 후시 하단과 상단을 4 이어서 오르고 있다.
이번 페스티발의 중국 명칭은 ‘중국 전통암벽등반 교류대회’. 그 이름에 맞게 마지막 날 저녁에는 주최측에서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무제한 제공되는 맥주와 꼬치를 양손에 들고 대회에서 준비한 경품추첨 시간을 애타게 기다린다. 추첨 중간에는 리수족의 전통 공연이 펼쳐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둥글게 원을 그리며 리수족 댄스 스텝을 밟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각국에서 모여든 클라이머들과의 정보교환의 자리도 마련된다.
아시아 황금피켈상 후보로 한국을 방문하여 본지와 인연을 맺었던 리슈앙(李爽이상)과 조우펑(周鵬주붕)도 만났다. 한국의 시상식장에서 만났던 한중 클라이머들이 중국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다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운다. 리슈앙과 조우펑은 얼마 전 결혼식을 올렸고, 최근에는 같이 수개월간 중국 각지를 탐사하며 새로운 등반지를 찾고 있다고 한다. 결혼 축하 인사를 성급히 마치자마자 역시 대화의 주제는 등반으로 이어진다. 중국의 빼어난 산군과 숨겨진 암벽, 빙벽등반지들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서로의 향후 계획을 묻는다.
대회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된 한국팀의 등반은 모두 3주간 이어졌다. 그 기간도 짧았는지 “아직 풀지 못한 루트가 남아있습니다. 다시 올께요”라며 떠나는 팀. 리밍의 붉은 벽들은 그 속살에 품었던 클라이머들의 뜨거운 열정을 기억하고 더불어 열뜬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교통 및 숙식
중국 운남성 리장에서 매일 오후 2시30분에 출발하는 미니버스가 있다(출발장소 및 시간은 유동적이므로 사전 확인 필요). 리밍에서 돌아오는 차량은 매일 오전 7시에 출발한다.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되며 빵차를 렌트하여 갈 수도 있다. 리밍에는 노군산 국가공원에서 운영하는 노매드 호텔과 유스호스텔이 있으며, 클라이머들이 많이 모이는 파러웨이 호텔(Faraway Hotel) 등 다양한 가격대의 숙소와 식당이 있다.
등반시기 및 정보
여름 우기철(7월~9월)을 제외하고는 사계절 내내 등반을 즐길 수 있다. 가장 추운 12월에는 밤 기온이 -5℃까지 내려가지만 한낮에는 15℃까지 올라간다. 루트에 대한 설명이 기재된 중국어판과 영어판 가이드북(약 200페이지)이 매년 새로운 버전으로 배포되고 있다. 관련 정보는 www.yunnanstory.com
기타 등반지
리밍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스구(石鼓•석고)에 올해 5월에 새로 개척된 등반지가 있다. 5.8급에서 5.13급에 이르는 루트가 30개 정도 개척된 상태. 등반을 위해 리장을 찾을 경우 리밍에서 크랙등반을, 스구에서 페이스등반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