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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哲學) 사상가들 * 공자(孔子/BC 552~BC 479) 중국 고대의 사상가․유교의 개조(開祖).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邑:지금의 山東省曲阜의 남동) 출생.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ꡐ자(子)ꡑ는 존칭이다. 【생애】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ꡒ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ꡓ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ꡐ敎人不倦ꡑ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 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ꡒ사람을 사랑하는 것ꡓ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영향】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ꡒ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ꡓ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ꡐ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ꡑ(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 맹자(孟子/BC 372?~BC 289?)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 성명 맹가(孟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에 있었던 추(趨) 출생.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ꡐ사서(四書)ꡑ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사상】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ꡐ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ꡑ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ꡐ욕심을 적게ꡑ 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교는 맹자에 의하여 비로소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되었다. 그 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계승되어 유교를 ꡐ공맹지교(孔孟之敎)ꡑ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되었다. * 노자(老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 성 이(李). 자 담(聃). 이름 이(耳).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河南省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ꡐ자연(自然)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 장자(莊子/BC 369~BC 289?)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도가(道家)의 대표자이다.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官營)인 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晉代)의 곽상(郭象)이 산수(刪修)한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사상】: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시대․지역․교육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이 마음이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식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은 시대․지역,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人爲)라고 한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 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가라지․기왓장․똥․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에 의하여 물들은 심성(心性)을 닦아야 한다. 이를 성수반덕(性脩反德)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이도관지(以道觀之)라고 한다. 물(物)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자기는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 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至人)이라야 누릴 스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寓言)으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노자(老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영향】:이러한 장자사상은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반야학(般若學)과 당나라 때 융성한 선종(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종(玄宗)은 그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다. 송(宋)․명(明) 이학(理學)은 유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장자철학을 수용하였다. 장자의 이러한 초탈사상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에 이단(異端)으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산림(山林)의 선비들과 문인들이 그 문장을 애독하였다. * 순자(荀子/BC 298?~BC 238?)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성 순(荀). 이름 황(況). 조(趙)나라 사람. 순경(荀卿)․손경자(孫卿子) 등으로 존칭된다. 《사기(史記)》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하고, 진(秦)나라와 조나라에 유세(遊說)하였다. 제나라의 왕건(王建: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稷下)의 학사(學士) 중 최장로(最長老)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초(楚)나라의 재상 춘신군(春申君)의 천거로 난릉(蘭陵:山東省)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孔子)․자궁(子弓)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儒家)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戰國思想)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思想史的) 위치는 서양 철학사(哲學史)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ꡐ군(D)ꡑ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墨家)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秩序體)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法家的)으로, 개인의 ꡐ분수ꡑ 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합목적적 격률(合目的的 格律) ꡐ성왕(聖王)의 제(制)와 예의ꡑ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천적 합리론(合理論)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ꡐ하늘[天]ꡑ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며,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명가사상(名家思想)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實念論的) 입장에서 개념 종속 관계와 범주론(範疇論)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名辭)의 타당성은 합목적사회관습(合目的社會慣習) ꡐ왕제(王制)ꡑ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노장(老莊)의 변증적(辨證的) 사변(思辨)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欲)과 지(知)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自主的目的體)로 보는 유가(儒家) 부동(不動)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原存在)와 의의활동(意義活動)을 구별하고, 특히 후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人爲)인 ꡐ위(僞)ꡑ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ꡐ성(性)은 악(惡)이고, 선(善)한 것은 위(僞)ꡑ라는 성악론자(性惡論者)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맹자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擴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生得的)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 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多面)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歸一)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ꡐ학(學)ꡑ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深化)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人倫意義)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士)와 군자(君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聖人),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完全體)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禮治主義)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宋代)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性惡說)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儒家經典)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韓非)․이사(李斯)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秦)․한(漢)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한초(秦漢初)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 춘추(呂氏春秋)》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 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巨步)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實踐合目的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成文)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孫卿新書)》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唐)나라의 양량(楊倞)이 편(編)의 순서를 바꾸고 주(註)를 붙여 《손경자(孫卿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문인(門人)의 설(說)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賦) 10편의 저작이 있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 * 주자(朱子/1130~1200)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깃?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ꡐ논어․맹자ꡑ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소학서(小學書)》 《대학장구(大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ꡐ사서(四書)의 신주(新註)ꡑ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孟子要路)》 《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ꡐ성의장(誠意章)ꡑ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 석가모니(釋迦/BC 563 ?~BC 483 ?) 불교의 개조.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黙)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Sa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a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출생】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 을 중심으로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 (Suddhodana:淨飯王)와 마야(Maya:摩耶)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야 계급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人)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네팔계(系)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왕[阿育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石柱)가, 1896년에 발견․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ꡒ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ꡓ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島史) Dipavamsa》 《대사(大史) Mahavamsa》에 근거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 전하는 중성점기(衆聖點記), 즉 불멸(不滅) 후 최초의 율장(律藏)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齊)나라의 영명(永明)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 외에 BC 624~BC 544년설, BC 463~BC 383년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출가와 성도】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매우 풍부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그는 16세에 결혼하였다. 부인은 야쇼다라[耶輸陀羅]라고 하며, 곧 아들 라훌라[羅羅]도 얻었다.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설적으로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모습,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써 설명된다. 석가모니는 29세 때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江)을 건너 마가다국(國)의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 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2명의 선인(仙人)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웠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통일에 의하여 하늘에 태어나 보려는 것이었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고행은 육체적인 면의 극소화를 통하여 정신의 독립을 구하는 2원적 극단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菩提樹:Bodhi-tree) 아래에 자리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함경(阿含經)》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십이인연(十二因緣)․사선삼명(四禪三明)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겠다. 즉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直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如實知見: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었는데, 공포에도 고통에도, 나아가서는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不動)의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解脫:moksa)이라고 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nirvana)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설법】 석가모니는 성도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는데, 범천(梵天)의 간절한 권청(勸請)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악마의 유혹, 설법주저(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 범천권청 등은 마음속의 일을 희곡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석가모니는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Mrgadava)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제에 관하여 설하였다. 이것을 특히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법을 깨달아 제자가 되었다. 여기에 최초의 불교 교단(samgha:僧伽)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강(江)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다. 제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 《율장》 등의 원시불교 경전을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을 후세에 편집한 것이지만, 후세에 정형화된 다음의 교설을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원형 또는 그 핵심을 알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一切皆苦․諸行無常․諸法無我 또는 一切皆苦를 빼고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사제․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무기(無記:일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 실천을 지향함을 말한다)․법(法: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오온(五蘊: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존재의 구성요소)․육근(六根:법의 분류로서 眼․耳․鼻․舌․身․意의 주체. 이에 대응하는 色․聲․香․味․觸․法의 객체, 즉 6境을 더한 十二處와, 거기에 眼識 등의 6식을 추가하여 十八界를 말하기도 한다)․연기(緣起: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함을 말함. 12연기가 특히 유명하다)․열반․일체중생의 평등 등이 그것이다. 【입멸(入滅)】 혹서의 중부인도(印度)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敎化)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ꡒ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ꡓ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 ꡒ교주(敎主)의 말은 끝났다. 우리의 교주는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내가 설한 교법(敎法)과 계율이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ꡓ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숲에 이르렀을 때, 석가모니는 심한 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하였다. ꡒ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沙羅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ꡓ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는 ꡒ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ꡓ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茶毘:화장)되고, 그 유골[舍利:sarira]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승(大乘)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불타에는 법신(法身:진리로서의 불타)․보신(報身:보살의 願․行에 의하여 성취된 불타)․응신(應身:중생구제를 위하여 상대방에 상응하게 나타나는 불타)의 3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 성도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입멸지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靈地)로서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성도․입멸의 월․일에 관하여 최고(最古)의 문헌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탄생을 4월 8일, 성도를 12월 8일, 입멸을 2월 15일로 한다. 또한 남방불교에서는 탄생․성도․입멸이 모두 바이샤카월(Vaisakha 月:4~5월)의 보름날의 일이라고 하여, 이 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8시기로 구분하여 팔상(八相:兜率來儀相․毘藍降生相․四門遊觀相․踰城出家相․雪山修道相․樹下降魔相․鹿苑轉法相․雙林涅槃相)이라고 부르는데, 회화나 조각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중국 전국시대(BC 5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諸子)란 말은 제선생이란 뜻이고, 백가란 수많은 파벌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 중에서 옛 서적을 분류했을 때의 명칭으로, 그 제자의 파벌은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論理學派)․묵가(墨家)․종횡가 (縱橫家:外交術派)․잡가(雜家)․농가(農家) 등 9류에다가 또 소설가를 부록으로 한 것이다. 이 중에서 공자의 유가가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인(仁)의 교의를 수립하였는데, 그 다음으로 묵적(墨翟:墨子)이 겸애(兼愛)를 주창하여 묵가를 일으켰으며, 이윽고 노자․장자 등의 도가와 기타 제파가 나타나서 사상계는 제자백가의 시대라고 할만큼 극히 활발한 상황을 나타냈다. 중국사에서도 특색이 있지만 또 고대 그리스의 철학계와도 비교된다. 그 발흥된 이유는 역시 사회적인 기운(機運)에 의한 것으로서 주왕조(周王朝)의 가족제가 붕괴되어 혈연의 일족에게 수호되어오던 영주가 농민과 경지를 확보하여 실력을 지니고 있는 신흥 지주계층에게 권력을 빼앗겨 가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대는 도리어 실력본위의 자유로운 활력에 넘친 유능한 인재의 발흥을 촉구하였다. 제자백가의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하에서 태어난 것으로, 수십대의 수레를 이어놓고 제후에게 유세한 맹자와 같은 호화로운 집단으로부터 형제가 농구를 메고 유랑하는 자까지 그 생태는 가지가지였다. 또한 집단을 이루어서 전승(傳承)한 것은 유(儒)․묵(墨)의 2가뿐이고 기타는 그때그때의 개별적인 자유사상가로 보아야 한다. 묵자(墨子/BC 480~BC 390)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이름은 적(翟).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墨家)의 설을 모은 《묵자(墨子)》가 현존한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나, 《한서(漢書)》 지(志)에는 71편으로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은 한(漢)의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방면에 걸쳤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尙賢)․상동(尙同)․겸애(兼愛)․비공(非攻)․절용(節用)․ 절장(節葬)․천지(天志)․명귀(明鬼)․비악(非樂)․비명(非命)의 10론(十論)을 풀이한 23편이다. 겸애란 사람은 ꡐ자신(自身)ꡑ ꡐ자가(自家)ꡑ ꡐ자국(自國)ꡑ을 사랑하듯이 ꡐ타인(他人)ꡑ ꡐ타가(他家)ꡑ ꡐ타국(他國)ꡑ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儒家)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愛]을 주의(主意)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ꡐ겸애교리(兼愛交利)ꡑ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節葬論)과 음악(音樂)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非樂論)으로 전개된다. 한편, 정치에 대해서는 상동론(尙同論)이 있으며, 그 기초로서 천지론(天志論)이 있다. 천지론은 절대적․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天意)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상동이란 아랫사람[下]은 윗사람[上]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ꡒ사람이란 일인일의(一人一義) 십인십의(十人十義)이므로 방치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락민은 이장에게, 이장은 면장에게, 점차 아래에서 위로 상동(尙同)하여 그 정점에는 최고의 현자(賢者)로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天子)가 있다ꡓ는 것이다. 명귀론(明鬼論)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비명론(非命論)은 이른바 운명을 부정하지만, 그 참뜻은 명(命: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묵자》는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禮樂)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10론 이외에 일종의 논리학을 풀이하는 편(編)과 비공론(非攻論)에서 출발한 방어술(防禦術)․축성술(築城術)에 관한 편도 있다. * 명가(名家) 중국, 제자백가 중 궤변학파(詭辯學派).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변자찰사(辯者察士)로 불렸고,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사마 담(司馬談)이 모든 학파를 분류할 때 6가(家) 중의 하나로 명가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명가라는 명칭은, 이 학파가 명(名:槪念․表現․名目)과 실(實:內容․實體)의 일치․불일치 관계를 중시하여, 세상이 혼란한 것은 명과 실의 불일치에 그 원인이 있으므로 명실합일(名實合一)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연유하였다. 이 학파의 대표적 인물은 공손 룡(公孫龍)․등석(鄧析)․윤문(尹文)․혜시(惠施) 등으로, 특히 공손 룡의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과 견백론(堅白論)은 서양의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처럼 교묘한 궤변론(詭辯論)으로 유명하다. 명가의 논리는 지나친 점도 있으나 논리학 발달에 공헌한 논리학파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 음양가(陰陽家) 고대 중국에서 음양설(陰陽說)을 신봉하던 학파. 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파로 제(齊)나라의 추연(鄒衍)․추석(鄒奭) 등이 그 대표적 사상가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그들의 설은 고대에 역상(曆象)을 관장하는 관직에 있던 희씨(羲氏)․화씨(和氏)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천체(天體)의 운행이나 사계(四季)의 추이(推移) 등 자연현상의 법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나, 반면 이 법칙을 인사(人事)에 관련시켜 인간생활도 이에 따르지 않으면 재해(災害)를 입게 된다는 등 미신적 요소가 강하다. 이 같은 중국의 음양설은 일찍이 한국에 전래되어 천문(天文)과 역학(曆學)을 연구하는 많은 음양가[曆官]와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음양사(陰陽師)가 속출하였는데, 주로 음양가라 하면 후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을 들 수 있으며 지관(地官) 또는 일관(日官)이 묘지와 집터의 선정에서부터 연사(年事)의 길흉까지 점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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