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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전각/회화,작품 스크랩 서체의 종류와 발전
청운 추천 0 조회 302 11.07.07 10:3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서체의 종류와 발전-갑골문

人類(인류)의 歷史(역사)가 변천해 감에 따라 서체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왔다.
우리는 보통 서체의 종류를 篆(전), 隸(예), 楷(해), 行(행), 草(초) 라는 五體(오체)로 구분하여, 그 서체가 생겨난 시대와 서체의 변천 과정을 말하고 있다.


甲骨文(갑골문)과 金文(금문)

- 甲骨文(갑골문)
甲骨文은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글자이며 거북의 껍질이나, 또한 짐승의 뼈에 모양을 새겼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가 占卜(점복)의 辭句(사구)이기 때문에 卜辭(복사) 또는 貞卜文字(정복문자)라 부르기도 한다.
갑골문은 칼을 사용하여, 딱딱하고 단단한 龜甲(귀갑)이나 獸骨(수골)에 새긴 글자이다. 그러므로 거의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곧고 날카로우면서도 강건하다. 전체적인 章法(장법)은 새로로 나란히 行(행)을 이루고 있으며 행의 순서는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일정하지 않다. 行(행)의 형식도 모두 똑같지 않고, 글자의 格(격) 또한 일정하지 않아 글자의 大小(대소), 長短(장단)과 넓고 좁음이 모두 다르다.
분명한 상형성을 띄고 있으며, 상당 수준의 定型的(정형적)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귀갑龜甲에 새긴 <갑골문>

수골獸骨에 새긴<갑골문>



서법예술 3.서체의 종류와 발전-금문

-金文(금문)
金文이란 쇠붙이에 새긴 글로써, 靑銅器(청동기)의 표면에 文字(문자)를 鑄刻(주각)한 것이다.
이러한 청동기들은, 祭祀(제사) 지낼 때 술잔 또는 음식을 담는 그릇이나 악기, 兵器(병기), 거울, 인장 등에 나타나고 있다.
청동기를 썼던 시기는 商朝(상조)의 중ㆍ후기부터이며 西周(서주)시대에 특히 성행하게 되었고, 秦代(진대), 漢代(한대) 이후로는 많이 줄어들었다.
金文(금문)은 상당기간 쓰여졌기 때문에 그 글자의 모양이 매우 다채롭고 다양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그 風格(풍격) 또한 높은 수준이다.
西周金文(서주금문)의 필력은 모두 圓筆(원필)이며 자형이 우뚝하고 뛰어나다.
周代(주대) 이후부터는 금문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진일보시켜서 발전한 면이 보인다. 이때의 器物(기물)들은 대부분 기념물로 만든 것이며, 거기에 기념될 수 있는 사실을 기록하고 그 意味(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많은 글자를 새겨, 후손들에게 영원히 傳(전)하고자 하여 정성스럽게 썼으므로 그 모양이 곱고 단아하다.
이러한 金文(금문)을 銘文(명문)이라 부르는데 銘(명)은 새긴다는 뜻으로서, 이는 어떠한 사건이나 사실을 청도기나 鼎鐘(정종)등에 새겨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鼎鐘文(정종문)이라 하며 大篆(대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秦代(진대)에 만들어진 小篆(소전)이라는 글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東周時代(동주시대)를 春秋(춘추)시대와 戰國(전국)시대로 나누어 본다면, 춘추시대의 금문은 대체로 西周(서주) 말기 형식 그대로 이어받은 한편, 필획과 字型(자형)의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서주 초기 금문<대우정>           서주 중기 금문<대극정>



서법예술 3.서체의 종류와 발전-석고문

石鼓文(석고문) 기원전 828~782

石鼓文(석고문)은 篆書(전서) 中에서 大篆(대전)에 속하며 金文(금문)에서 小篆(소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대표적인 서체이다.
大篆(대전)은 宣王(선왕)때에 太史(태사)인 (주)가 만들었으므로 文(주문)이라고도 한다.
석고문은 현존하는 最古(최고)의 石刻文字(석각문자)이다.
石鼓(석고)는 처음에 中國陜西省(중국 협서성)의 들판에 방치되어 있던 것이 唐(당)나라때 발견되어 現在(현재) 北京國子監(북경 국자감)의 大成門(대성문) 殿內(전내)에 있다.
둥근돌의 上,下(상하)를 평판하게 하여 큰 북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石鼓(석고)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새겨진 字數(자수)는 歐陽修(구양수)가 조사하여 465字로 판명되었고 그 후 마모되어 지금은 약 300字 정도이다. 文字(문자)는 한자가 사방 4센티 정도의 크기이며 석고문이 가진 情趣(정취), 풍부한 妙味(묘미)로 후세의 詩人(시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詩歌(시가)를 짓게 했다.
唐(당)의 韓愈(한유) 宋(송)의 蘇東坡(소동파)의 石鼓歌(석고가)가 유명하다.
그러면 소동파의 석고가를 소개한다.

暴君縱欲窮人力  폭군종욕궁인력
神物義不汚泰垢  신물의불오태후
是時石鼓何處避  시시석고하처피
無乃天工命鬼守
 무내천공명귀수

폭군(진시황제를 가리킴)은 욕망을 방자하게 굴어 인민의 힘을 혹사했다.
신물(석고를 가리킴)은 義(의)를 지켜 秦(진)나라의 더러움에 상처입지 않았다.
이때에 석고는 어느곳에 피해 있었던고?
이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하늘이 귀신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리라.



서법예술 3.서체의 종류와 발전-秦(진)나라 시대의 서예

1) 秦始皇(진시황)의 문자 통일

서기전 221년 秦(진)나라는 戰國時代(전국시대)의 六國(육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중앙집권국가로 탄생하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전쟁이 빈번하여 政治(정치)와 社會(사회)가 혼란하여 언어와 문자도 지역과 국가별로 각각 다른 발음과 書體(서체)로 사용하였으며 諸子百家(제자백가)라 불리는 많은 사상과 철학이 나타났다.
六國을 統一(통일)한 秦始皇(진시황)은 국가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각종 제도와 문자는 물론이고 사상과 哲學(철학)까지도 통일하기에 이른다.
書體統一(서체통일)의 대표적인 인물은 李斯(이사)외에 趙高(조고), 胡姆敬(호모경) 등이 있다.
秦나라 시대의 공시적으로 사용한 서체는 크게 나누어 篆書(전서) 계통의 서체, 즉 小篆(소전)과 隸書(예서)이다.
秦나라는 中國을 통일한 후 비록 15년의 짧은 기간 밖에 국가를 유지하지 못했으나 書藝史的(서예사적)으로 볼 때 매우 意味(의미) 있는 王朝(왕조)였다.
서체 변화의 측면에서 보면, 秦(진)나라의 문자통일은 小篆(소전)의 창조와 隸書(예서)의 사용으로 이어져 古體字(고체자)의 변화를 종결시켰으며 隸書(예서)와 草書(초서)등의 今體字(금체자)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小篆(소전)이 완성되고 난 후 더 이상 篆書계통의 서체가 탄생하지 않고 今體字(금체자)인 楷書(해서)가 완성되고 난 후, 더 이상 다른 서체가 탄생되지 않았으며 복잡하고 불편한 篆書(전서)는 實用(실용)가치가 없게되어 常用文字(상용문자)로서의 수명을 다하게 되었다.

  



서법예술 3.서체의 종류와 발전-漢(한)나라 시대의 서예 1

1. 兩漢(양한)시대의 서예 ①

秦始皇(진시황)은 서기전 211년 地方(지방) 순행 도중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秦二世(진2세)가 뒤를 이었다.
가혹한 세금과 부역으로 사회가 혼란하게 되고, 중앙권력계층에서도 권력다툼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 뒤 秦二世(진2세)의 아들이 秦王(진왕)으로 옹립되었으나,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劉邦(유방)에 의해 다시 中國(중국)이 統一(통일)되었다. 서기전 206년에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漢(한)이라 하고 長安(장안)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이때부터 漢(한)나라는 426년간 중국을 統治(통치)하는 통일 王朝(왕조)가 되었다.
漢(한)나라 성립초기에는 秦(진)나라에서 사용하던 각종 법률과 制度(제도)를 많이 계승하여 사용하였으나 漢武帝(한무제, 서기전140~서기전87)가 즉위하고부터는, 그 전까지 公式(공식)서체인 小篆(소전)과 隸書(예서)에서, 小篆(소전)은 특수한 目的(목적)으로 사용되고 점차 隸書(예서) 小篆(소전)을 完全(완전)히 대신하게 되었다.
漢(한)나라가 건립초기에는 각종 법률과 제도를 晋(진)나라 시대의 것을 사용하면서 한편으로는 丞相(승상)인 簫何(숙하)로 하여금, 한나라의 실정에 적합한 형태와 양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秦(진)시대의 八體(팔체)를 정리하고 이를 官吏(관리)를 뽑는 시험에 응용하였고, 그 중에서도 隸書(예서)를 중점 과목으로 정하고 전문적으로 文字를 관리하는 벼슬을 두기도 하였다.
東漢時代(동한시대)에는 예서가 더욱 성행하여 예서를 쓰는 書藝家(서예가)가 탄생하였으며, 서예의 이론에 관한 글과 冊(책)들이 등장하여, 서예는 순수예술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漢나라 시대의 서체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隸書(예서)이나 刻石隸書(각석예서) 中心(중심)으로 설명할 때, 예서의 완성은 東漢(동한)의 중ㆍ후기인 桓帝(환제)와 靈帝(영제)시대이다.
西漢(서한)시대의 초기에는 小篆(소전)과 隸書(예서)가 함께 공식 서체로 사용되었으며, 비석에 기록하거나 중요한 공문서에는 隸書(예서)보다 小篆(소전)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예서는 국가의 일반 문서나, 민간에서 竹簡(죽간) 木牘(목독)을 서사 재료로 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西漢(서한)시대에는 예서의 광범위한 사용과 동시에 草書(초서)가 성행하여 개인적 기록이나 書信(서신)의 왕래에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
東漢(동한)을 세운 光武帝(광무제)는 서한의 郡國帝(군국제)를 이어 받았으나 西漢(서한)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후들의 封邑(봉읍)을 적게 하여 그들의 세력을 축소하였다.
東漢(동한)시대에 가장 유행했던 서체는 隸書이다. 現在(현재)까지 발견된 자료를 근거로 할 때 東漢의 예서 作品(작품)은 대부분 刻石(각석)작품이다.
현재까지 출토된 동한의 비석은 약 170여점이며 거의 예서로 기록되어 있다.
東漢의 문예부흥과 서예이론의 발전, 서사재료의 개량과 기록 등을 볼 때 東漢시대에도 簡帛(간백)과 종이를 이용한 서예활동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 兩漢(양한)시대의 서예 ②

漢나라 시대의 서예 作品(작품)은 대부분이 글씨를 쓴 사람이나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느 작품이 누구에 의해서 쓰여지고 새겨졌는지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단지 역사적 사실과 몇몇 작품에 남겨진 이름을 근거로 하여 볼때 당시에 활동한 뛰어난 서예가로는 草書의 張芝(장지), 예서에는 蔡邕(채옹), 行書(행서)에는 劉德昇(유덕승) 등이 있다.

漢(한)나라 시대 서예의 개괄적 특징은 다양한 서체의 출현과 전문 서예가의 등장, 그리고 書論(서론)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대에 서예가 발달한 직ㆍ간접적인 이유는
첫째, 儒學(유학)의 적극적 수용으로 經書(경서)가 광범위하게 편찬되었다.
둘째, 禮樂(예악)을 숭상함에 따라 中和(중화)사상과 先賢(선현)을 송덕하는 전통이 싹텄다.
셋째, 종이가 발명되었고, 붓, 먹 등의 서사용구가 크게 개량되어, 문자를 기록하고 보관하기에 편리하여 졌다.
넷째, 隸書(예서)가 公式的(공식적)으로 쓰였으며 楷書(해서)와 行書(행서)가 새롭게 탄생하였다.

이리하여 先秦(선진)시대의 甲骨文(갑골문)과 金文(금문)에서 출발한 서예활동은 秦나라와 兩漢(양한)을 거치면서 예술작품으로서 창작하고 감상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兩漢(양한)의 대표적인 刻石(각석)을 소개하면

 
내자후각석  

 
석문송  

1)萊子侯刻石(래자후각석. 서기16년) : 남겨진 漢隸(한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가장자리 행간에 경계선을 긋고 가장자리 경계선 밖에 빗살무늬로 장식하였으며, 西漢의 다른 刻石(각석)서체와 달리 古隸(고예)의 느낌이 많지 않으며, 筆勢(필세) 字勢(자세)에서 성숙한 예서의 깊은 멋을 잘 표현하고 있다.
 

2)石門頌(석문송. 서기148년) : 東漢桓帝(동한환제)建和(건화) 2년에 새겨진 磨崖刻石(마애각석)이다.
현재 漢中市(한중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글씨가 새겨진 돌의 높이는 약 2.6M, 폭 2M 정도이다.
본문은 모두 22행이며 매행 30여자의 예서가 새겨져 있다. 文章(문장)은 漢中太守(한중태수)인 王升(왕승)이 지었으며 楊孟文(양맹문)이 石門(석문)길을 보수하여 개통한 공적을 송덕한 글이다.

3)乙瑛碑(을영비. 서기153년) : 東漢(동한)시대의 永興(영흥)원년의 碑刻(비각)으로 비의 높이는 2.6M, 넓이가 약 1.3M, 모두 18행이며 매행 40자이다.
표준 漢隸(한예)로 새겼으며 山東省 曲阜(산동성 곡부)에 孔廟(공묘)에 소장되어 있으며 碑(비)의 명문은 漢(한)의 魯相(노상)인 乙瑛(을영)이 孔廟(공묘)에 전문적으로 제사를 관장하는 직책인 百石卒史(백석졸사)를 설치할 것을 上訴(상소)하여 성사시킨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을영비는 漢隸(한예)의 표본으로 圓筆(원필)과 方筆(방필)을 겸비하고 있으며 波(파책)이 분명하고 筆勢(필세)가 건강하다.
그 외에 예기비(서기156년), 鮮于璜碑(선우황비. 서기 165년), 張遷碑(장천비. 서기186년) 등의 많은 碑刻(비각)들이 현대 서예가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을영비

 

예기비

 

선우황비

 

장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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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7.16 10:38

    첫댓글 여름 더위에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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