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강릉(江陵)
<2> 전후재(前後峙) 이야기
진고개 / 전후재(前後峙) / 전후재 입구 / 가마소(釜淵洞)
태백준령(白頭大幹)은 조금 동쪽으로 치우치긴 했지만, 우리나라를 영동과 영서로 나누는 그야말로 등뼈와 같은 산줄기이다. 동해를 끼고 있는 좁고 기다란 영동지방은 이 태백준령으로 인해 영서지방과 왕래가 어려웠던 까닭으로 말투에서부터 먹거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생활풍습에 이르기까지 영서지방과는 사뭇 다르게 발전하여온 듯하다.
백두대간을 넘는 영(嶺)을 살펴보면 영동고속도로로 인하여 새로이 굴이 뚫리긴 했지만, 진부(珍富)에서 강릉(江陵)으로 넘어가는 ‘대관령(大關嶺)’, 원통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한계령(寒溪嶺)’, 원통에서 속초로 빠지는 ‘미시령(彌矢嶺)’, 다시 원통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간성(杆城)으로 넘어가는 ‘진부령(陳富嶺)’이 대표적인 큰 고개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모두 번듯이 포장된 찻길이지만 예전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거의 오솔길 수준이었고 그중 제일 중요하고 왕래가 잦았던 대관령도 아흔아홉 구비를 걸어서 넘나들었다고 하니 옛 어른들의 고초를 짐작할 수 있는데 보통 강릉에서 대관령 넘어 진부(珍富)까지 하루걸이였다고 한다. 대관령의 샛길쯤으로 생각되는 ‘진고개’는 진부(珍富)에서 월정사 쪽으로 가다가 산줄기를 넘는 고개로, 소금강이 있는 연곡(連谷)으로 빠져 주문진(注文津)으로 나가게 되는데 가파르고 구불거리기로 유명하지만, 영(嶺)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 걸 보면 다른 고개와 비교하여 그다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큰 고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주문진에서 소금강 입구를 지나 연곡(連谷) 골짜기를 들어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가마소(부연동/釜淵洞)’로 가는 좁다란 자동차도로가 보이는데 이 고개가 ‘전후재(前後峙)’이다. 전후재로 올라서서 구불구불 산 능선과 골짜기를 넘나들다 보면 언뜻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가마소 마을이 내려다보이는데 높은 산이 에워싸고 있는 둥그렇고 옴팍한 가마소 마을은 10여 호가 작은 농토에 약초와 푸성귀를 가꾸고 토종벌을 치며 사는 마을이다. 현기증이 나는 가파른 절벽 길을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내려가면 마을에 다다르게 되는데 지금은 골짜기가 트인 주문진 쪽으로 찻길이 뚫렸다고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무인지경 산길이 너무 멀어 그쪽으로 다니는 길이 없었고 이 전후재만이 유일한 외부와의 통로로 오로지 걸어서 넘나들었다고 한다.
이 가마소에 사셨던 우리 고모부는
‘전후재 꼭대기에서 하늘까지 30리 밖에 안되어~!’
‘왜 전후재가 되었냐하면 전에두 없구 후에두 없는 고개라구 전후재가 된거여~’
‘아, 가매소에서 전후재 고개를 넘어가는 모양을 고개를 제끼고 쳐다 보문 개미새끼가 가물가물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이지~’ ‘차앙동(靑鶴洞)에서 가마소까진 꼬박 한나절 걸이여~’하시곤 했다.
어느 해 겨울 고모부가 강릉에 나왔다가 연곡에서 하룻밤 묵고 연곡장에 들러 몇 가지 장을 본 후 서둘러 전후재를 넘으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느닷없이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개 어귀에 들어서면서 발목이 묻히기 시작하던 눈은 중간쯤 오자 종아리까지 차올라 길도 분간하기 어려워 허덕거렸다. 시간이 늦어 날까지 어스름해져 걸음을 재촉하는데 저만큼 앞쪽 길가에 뭔가 눈 위에 시뻘건 것이 보인다. 섬칫한 마음을 누르며 서둘러 눈을 헤치고 다가가 보니 젊은 아낙이 아랫도리가 피투성인 채 초점 없는 퀭한 눈으로 쳐다보며 손으로 뭔가를 끌어당기는 시늉을 한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뒷집에 살던 처자로 작년 연곡으로 시집을 갔는데 산달이 되어 가마소 친정으로 아이를 낳으러 오다가 눈 속에서 변을 당한 것이다.
허우적거리는 손끝을 따라가 보니 아이를 낳았는데 벌써 새까맣게 얼어서 눈 속에 뒹굴어 있고 아직 탯줄이 달려있었다. 급한 김에 달려들어 이빨로 탯줄을 물어 뜯어버리고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들여다볼 겨를도 없이 피투성이인 산모를 치마로 둘둘 말아 등에 들쳐업고는 냅다 눈 속을 뛰었다.
산모는 등에서 뭐라고 웅얼거리며 뒤를 보고 계속 손을 허우적거리는데 몸은 이미 얼음덩이였다.
정신없이 어둠 속을 내달려 가마소 절벽 비탈을 구르듯이 미끄러져 내려가 마을에 도착해서 인사불성인 산모를 친정집에 내려주고는 집에 와 탈진하여 쓰러졌다고 한다.
몇 해 전 이른 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가마소 마을을 가봤는데 마침 복사꽃이 막 피어나는 계절이어서인지 전후재 절벽 위에서 내려다 본 가마소 마을은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표현이 딱 알맞다 싶었다.
녹색으로 물든 높은 산으로 옴팍하니 둘러싸인 가마(釜) 모양의 마을은 온통 연분홍 복숭아꽃으로 뒤덮여있어 인간 세상이 아닌 신선(神仙)들이 사는 세상 같았다.
내가 쓴 이 글은 재경 강릉 시민회에서 발간하는 문예지(2015. 1월호)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