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평가의 모범을 보여준 가의(賈誼, BC 200~BC 168)
천재 가의(賈誼)
가의는 전한(前漢) 시대 최고의 천재 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가의는 어려서부터 시문과 제자백가의 사상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중국 역사상 4대 태평성대 가운데 하나인 문제(文帝) 시대에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태평성대의 시기에는 원래 학문과 문화가 번성하기 때문에, 역사상 최고의 문재(文才)를 드러낸 학자들은 이때에 많이 배출된다. 가의는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에 최연소로 박사가 되었던 것이다.
박사가 된 지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법률과 관리제도, 예악 문화 등의 제도를 개정했다. 또한 국가의 관직과 제도 정비를 위한 수많은 의견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러나 '재주가 많은 자는 시기와 질투하는 자도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약관의 어린 나이에 조정에 나와 국가의 각종 제도에 대해 직언(直言)을 하는 가의(賈誼)를 권력과 이권에 흠뻑 빠져 있는 고관대작들이 곱게 보았을 리 만무하다.
결국 고관대작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중앙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 온 가의(賈誼)에게 이 사건은 뼈아픈 좌절이었고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멸망하는 조국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어 끝내 강물에 몸을 던진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유명 시인 굴원(屈原)에 비유했다. 자신의 꿈과 이상 그리고 재주와 열정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을 담은 여러 편의 글도 남겼다.
장사왕의 태부로 좌천된 지 4년 만에 문제(文帝)의 막내아들인 양왕(梁王)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나 왕이 말에서 떨어져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이를 슬퍼한 나머지 1년 후에 죽음을 맞게 된다. 천재는 요절한다는 옛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과진론(過秦論)
천재 가의가 남긴 여러 시문(詩文)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과진론(過秦論)』이다. 사마천은 『과진론』에 대해, 진(秦)나라의 흥망(興亡)을 "얼마나 깊고 예리하게 평론해 놓았는가!"하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과진론』의 전체 문장은 후대에 와서 세 편으로 나뉘었다. 상편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역사와 진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을 총괄적으로 분석했다. 중편에서는 통일 후 진시황의 잘못된 노선과 정책을 비판하고, 뒤를 이은 2세 호해(胡亥)황제의 포악무도한 정치로 인해 민심이 진나라 황실에 철저하게 등을 돌렸음을 논했다. 하편에서는 백성들의 봉기와 각지 군웅들의 반란으로 황실은 무너지고 새로 등극한 군주 자영(황제가 아닌 진왕(秦王)이라는 호칭을 사용)은 다시 진나라를 일으켜 세울 만한 능력이 없었음을 설명했다.
가의(賈誼)는 이 글에서 아무리 강대한 제국이라 할지라도 가혹한 형벌과 포악무도한 정치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과진론(過秦論)』은 민심을 얻지 못한 권력은 백성들의 저항과 반란 앞에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한 글이다.
가의의 『과진론』은 사마천이 『사기(史記)』 「진시황본기」에서 '진나라의 흥망사(興亡史)'를 깊고도 예리하게 평론했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명문장(名文章)이다. 가의(賈誼)의 시대를 전후한 그 어떤 역사가나 학자도, 이 글만큼 간략하고 논리적이면서 드라마틱하게 대제국(大帝國)의 흥망을 논한 역사서를 남기지 못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사 속으로 - 역사 평가의 모범을 보여준 가의 (2천 년을 살아남은 명문(名文), 2006.7.27,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