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루가 11,37-41)
“Oh you Pharisees! Although you cleanse the outside of the cup and the dish, inside you are filled with plunder and evil. You fools! Did not the maker of the outside also make the inside?
말씀의 초대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한 조물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허망하고 우둔한 마음 때문에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고 하느님 대신 피조물을 섬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겉만 깨끗하고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 찬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다.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방법은 자선을 베푸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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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맥스 비어봄(Max Beerbohm)이 쓴 『행복한 위선자』라는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조지 헬(Hell: 지옥)은 이름자 그대로 부도덕하고 탐욕스럽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가 어느 날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제니 미어’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납니다. 그러나 방탕하고 흉측한 그의 얼굴로는 그녀의 마음을 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에 빠져 그녀를 포기할 수 없게 되자 밀랍으로 성자(聖者)의 마스크를 맞춥니다. 이 마스크는 매우 정교해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의 본디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마스크를 만들어 준 사람과 마스크 가게에서 나오다 마주친 옛 연인 ‘갬보기’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조지 헬은 이름도 조지 헤븐(Heaven: 천국)으로 바꾸고 성자의 마스크를 쓰고 사랑하는 제니 미어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여 혼인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복한 혼인 생활 뒤에는 자신의 흉측한 내면, 자신의 과거 모습이 탄로 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성자처럼 자신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착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가짜 얼굴과 마주하는 자신의 사랑하는 제인 미어에게 미안함과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정체를 아는 옛 연인 갬보기가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들의 혼인 생활이 행복할수록 질투심에 가득 찬 갬보기는 그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행복하게 사는 제인 미어를 만나 남편의 정체를 폭로하며 그녀가 보는 데서 그의 마스크를 벗기고 맙니다. 그런데 마스크가 벗겨진 순간 옛날 흉측했던 조지 헬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그의 얼굴은 성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가면 뒤에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성자의 얼굴을 닮으려고 애써 노력하여 그의 얼굴이 바뀐 것입니다. 성자의 얼굴이 된 그는 이제 자신의 진짜 얼굴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진실한 사랑의 입맞춤을 하며 소설이 끝납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누구나 이런 가면을 쓰고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에게 보이는 가면을 나의 진짜 얼굴로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겉과 속이 다른 나’를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약함과 죄스러움을 주님께 고백하고 꾸준히 선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월과 함께 자신이 쓰고 사는 성자의 얼굴 마스크는 나의 진짜 얼굴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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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하찮은 일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드신다며 놀라워한 것입니다. ‘손 씻는 행동’이 손님보다도 중요한 일일까요? 아무튼 당시 바리사이들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판단합니다. 자신의 수준을 쉽게 넘어서지 못합니다. 시야가 넓은 사람은 ‘넓게’ 보지만, 눈높이가 낮은 사람은 ‘낮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손 씻는 행동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준이라면 한심한 일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핵심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안과 밖을 다 만드셨는데 어찌 겉만 보고 판단하느냐는 꾸중입니다. ‘마음을 열면’ 많은 것이 보입니다. 자신의 수준을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을 여는 첫 행동은 ‘이득과 손실’을 따지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려는 노력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입니다. 그런 사람은 분명 ‘주님의 힘’을 만납니다. ‘좋게 보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삶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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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전에 손 씻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할는지요?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문제 삼습니다. 율법을 거스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감사에 있었습니다. 귀한 음식을 주셨으니까 감사의 표시로 손을 씻게 했습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근본은 외면한 채 손 씻는 행위에만 매달린다면 껍데기를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익지 않은 벼는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숙일 수가 없습니다. 알맹이가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맹이가 차면 낟알은 자동적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빈곤하기에 겉모습에 매달립니다. 내적으로 허전하기에 법을 따지고 듭니다.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이라면 너그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손 씻는 것은 율법의 핵심이 아닙니다. 깨끗하게 씻은 손으로 먹는다고 영혼까지 정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씻지 않으면 아무리 손을 씻고 또 씻어도 그저 형식일 뿐입니다.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드셨다.’고 하셨습니다. 겉과 속을 함께 다독거리라는 말씀입니다. 속은 변변치 못하면서 겉치레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언제라도 중요한 것은 겉이 아니라 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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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을 매우 앞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물론 그 그릇이 격에 맞고 예쁘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러나 조금 격에 맞지 않고, 썩 어울리지 않는다 해도 내용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하느님께서 보시면 우리는 가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소중한 것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마음을 바라십니다. 먼저 깨끗한 마음을 준비하고, 그다음에 깨끗한 마음을 담을 깨끗한 그릇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짝퉁 가방과 옷이 판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즉, 가짜와 모조품이 많다는 내용으로, 사람들이 명품 가방과 명품 옷 그리고 명품 구두를 선호하지만 구입하는 대부분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 보이기 위해 소위 명품이라는 것을 구입하려고 노력하다보니, 그만큼 가짜와 모조품이 판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품과 명품은 고가의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반면, 가짜와 모조품은 아마 재료비 정도만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품과 명품은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은 반면에, 가짜와 모조품은 많은 양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면서 사랑도 이와 비슷하다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물건에 진품과 모조품의 구분이 있는 것처럼, 사랑에도 진짜와 가짜라는 구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양도 진짜 사랑보다는 가짜 사랑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남녀 간의 만남에 있어서도 사랑의 본 의미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조건만을 더 강조됩니다.
재산, 부모, 가정 형편, 직업, 연봉, 성격 등만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이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살아가는데 있어, 또 만나기 위한 조건이 될 수는 있겠지만 사랑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들만을 강조하고 드러낼 때, 내 모습은 진품 명품이 아닌 가짜 모조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진품 명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입으로만 외치는 가짜 사랑이 아니라 직접 행동하는 진짜 사랑을 실천하라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겉치레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푸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어제 명동에서 전국 시국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이 땅의 소외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였고, 특별히 용산참사로 인해 희생당한 분과 그 가족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그동안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혹시 나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을 뿐, 지금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이제 겉으로만 드러나는 가짜 사랑은 그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진품 명품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몸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깨끗해지고, 주님의 진품 명품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을 곤경에 빠뜨린 바로 그것이 또한 당신을 곤경에서 구해주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박힌 가시는 가시로 빼내고 땅으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기 때문이다.(이드리스 샤흐)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 유경희-
한국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1950년 말 미국 뉴욕 출신의 20대 젊은 신학생이 수도회 명으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한국 땅을 향한다. 그때는 직항로가 없어 시애틀을 경유해 태평양의 섬을 거쳐 일본에 도착했고 다시 한국행 항공기를 일주일 만에 타고 겨우 서울에 도착한다. 그후 봉사활동을 마치고 프랑스 신학교로 가 신학과정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았다. 196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광주에 부임한다. 그러나 바로 고열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져 미군의 도움을 받아 부평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러고는 소아마비 판명을 받고 평생 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사목활동을 하며 특히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70 - 90년대 한국 노동사목을 이끌어 나간다. 지금은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노동사목회관을 지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목을 하고 계신다. 그분께는 항상 시련이 따랐고 특히 열세 번의 전신마취 수술을 했으며 지금도 1주일에 세 번 항암치료를 받고 계신다. 그럼에도 지팡이를 짚고 날마다 회관 주변 동네를 산책하시며, 앉아 있을 힘만 있어도 미사를 드리시고 간혹 건강이 호전되어 식사 초대를 받으면 남은 음식을 싸 갖고 가시어 한 끼 식사로 드신다. 그렇게 절약된 예산을 모아 지난해에는 베트남공동체에 조그마한 공간을 마련하도록 희사하셨다. 주님의 말씀대로 겉치레가 아니라 속에 담긴 것을 베푸는 행동으로 세상이 깨끗해질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시는 신부님이다. ‘70대인 신부님이 더욱 오래 사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라고 하면 욕심이 지나친 것일까 ?
속을 깨끗이 씻는 방법
-전삼용신부-
요즘 살을 빼 보려고 노력중입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엔 ‘굶으면 지가 안 빠지고 배기겠어?’라는 생각으로 자주 굶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 한 끼만 먹고 살아보았습니다. 살이 조금은 빠지는 것 같았고 배고픈 것도 잘 참았는데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피부에 자꾸 이상한 것들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약을 발라도 그 곳이 사라지면 다른 곳에 또 나고 그곳이 사라지면 다른 곳에 또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원인은 영양부족인 것 같았습니다. 배고픔을 참을 수 있어도 몸은 속일 수 없나봅니다. 그래서 다시 제 끼니를 열심히 먹되 조금씩 덜 먹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피부가 조금씩 안정을 찾았습니다.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듯이 말과 행동을 보면 그 안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쇼프로에서 본 것인데 길 가르쳐 줄 때 쓰는 말들을 잘 들으면 그 사람의 직업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 가르쳐 주는 사람이 의사라면, “예, 저 앞에 약국 보이시죠? 거기를 돌면 성모 병원이 있는데 그 병원에서 길을 건너면 동물 병원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돌면 성형외과가 보이는데 그 앞에 찾으시는 건물이 있습니다.”
조직 폭력배는, “저 앞에 경찰서 보이시죠? 거길 지나치면 공터가 나오는데 그 곳은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에요. 거기서 왼쪽으로 돌면 고딩 애들이 담배 자주 피고 삥 뜯는 골목이 있는데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속에 있는 대로 보고 속에 있는 대로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속에 영양이 부족하면 피부 같은 곳에 안 좋은 것이 생겨나듯이 영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이 더러우면 겉을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더러운 면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속을 정화해야 겉까지 깨끗해집니다.
유다인들의 전통 중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손, 발을 씻는 전통이 있었고 식사하기 전에도 손을 씻는 전통이 있고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식당 앞에 항상 손을 씻는 곳이 있습니다. 이는 먼지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선조들이 생각해 낸 지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전통을 따르지 않고 손을 씻지 않은 채 식사를 합니다. 이에 율법을 열심히 따르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맞받아치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겉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아무리 손을 씻고 그릇을 깨끗이 씻어도 그들의 속이 더러우니 삶이 깨끗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속을 깨끗이 닦는 방법으로 ‘자선’, 즉 사랑의 실천을 한 방법으로 제시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고 또 우리가 그것을 받아서 밖으로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파이프를 통해서 밖으로 나오듯 사랑도 우리를 통하여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그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고 미움이나 악을 표출 할 때는 우리 마음에 안 좋은 것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들이 신부님의 안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안수를 통해서 사람들 안에 있는 안 좋은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말씀을 하시며 그래서 안수를 받을 때는 먼저 받는 것이 좋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귀가 안수 할 때 나왔다가 사제의 안수를 통해 또 다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수도꼭지에 억지로라도 구정물을 집어넣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 쏟아져 나오는 은총은 안 좋은 것으로 더럽혀 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나중에 안수를 받는 분이 더 깨끗한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수를 하는 중에 사제의 안 좋은 것들이 있었다면 그 이전의 안수를 통해 다 씻겨나갔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장 내시경을 하기 위해 오전 내내 약과 함께 많은 양의 물을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에 있는 변이 나왔지만 나중에는 마셨던 물이 그대로 깨끗하게 나왔습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속은 저절로 정화되고 깨끗해집니다.
새벽을 열며
여러분 하늘은 무슨 색일까요? 파란색?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자신 있게 파란색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날은 구름이 많아서 회색 하늘일수도 있지요. 또 어떤 날은 빨간 석양에 비추어진 선홍색의 하늘일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때에 따라서 그 색이 변하기 때문에 ‘파란색’ 하늘이라고 말하는 것이 결코 정답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늘을 보지 않고도 늘 자신 있게 말합니다.
“하늘은 파란색이죠.”
이렇게 틀린 답만 말하고 있는 우리들이 아닐까요? 또한 틀린 답이 마치 맞는 것처럼 박박 우기고 있는 우리는 아닐까요? 색깔하나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면서도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나요?
바로 하늘의 색깔을 무조건 ‘파란색이다’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듯이,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틀에 박힌 고정된 시선이 아니라 늘 마음을 열어 변화하는 방식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때 나의 성장이 있으며, 그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식사 전에 반드시 종교예식으로 손을 씻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 예식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견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실질적인 행위가 종교화되면서 형식화된 것이지요. 그래서 먼지 묻은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는 것이 아니고 그저 손가락만 잠깐 물에 담갔다가 꺼내면 종교적 예식을 행한 것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이 예식은 구약의 율법규정이 아닙니다. 단지 위생적인 견지에서 시작된 바리사이파들의 규정에 해당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를 따르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몰지각한 상식이하의 인간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주의에 예수님께서는 일침을 놓으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겉치레가 아닌 마음의 깨끗함이 더욱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단순히 ‘파란색’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을 형식적인 규정 하나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이 형식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는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기 전에 내 마음을 먼저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형식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양승국신부-
<호박을 바라보며>
여러 농작물을 재배하는 가운데, 가장 신기하게 바라보게 되는 작물은 호박입니다. 봄에 1000원쯤 하는 모종 몇 개를 둔덕에 심어놓고, 거름을 듬뿍 줍니다. 완전히 잊어먹고 있었는데, 가을이 오면 온 둔덕이 호박넝쿨과 호박잎 천지로 변합니다. 여기 저기 묵직하고 탐스런 호박들이 숨어있습니다. 어떤 녀석들은 얼마나 무거운지 혼자서 들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녀석들 때문에 올 가을축제 때는 호박죽을 제대로 쑤어 팔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올 호박 농사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호박과실파리라는 녀석들 때문입니다. 호박재배 농가의 피해는 심각합니다. 더 괴로운 것은 퇴치를 위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렇게 잘 자란 호박의 겉모양은 정말 멀쩡합니다. 오랜 나날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잘 키웠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수확합니다. 시장에 내다 팔거나, 호박 즙을 생산하는 건강원에 납품합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항의가 빗발칩니다. 물건 도로 가져가라고.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으면 어떻게 이따위 호박을 팔 수 있냐는 말을 들으며 호박을 거두어 와야 합니다.
호박을 잘라보면 호박과실파리 유층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호박과실파리 녀석들이 애호박 시절, 애호박 안에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호박 내면에 자리 잡은 알들은 애벌레가 될 때까지 그 안에서 성장을 거듭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예수님 시대 바리사이들, 불행하게도 그들은 호박과실파리들로부터 철저하게 유린된 썩은 호박과 같았습니다.
겉은 멀쩡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봉헌하는 헌금의 액수도 대단했습니다.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질타를 받았을까요? 그들은 철저하게도 이중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가식적이었습니다.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잘 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바빴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비쳐졌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사라진 곳에서는 호박씨를 깠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귀신같이 꿰뚫어보시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철저하게도 이중적인 인간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악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에 걸쳐 노력해야할 것이 바로 위선과 이중성의 극복입니다. 사람보다는 하느님 앞에 똑바로 서기입니다. 언행일치, 기도와 삶의 조화, 신앙과 생활의 통합, 전례와 삶의 일치입니다.
미사 가운데서는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는 말과 함께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신랄한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바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시간이 ‘땡’하기 무섭게 주변사람들 괴롭히고 족치는 사람들, 예수님의 무서운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
-이수철 신부-
어느 순례자가 인도에서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 안에서 다섯 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 대하며 유심히 이 순례자를 살펴보던 사두(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꼭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군!” 이 한마디로 그 순례자는 언제 어디서든 가식적인 얼굴을 버리고 진정한 얼굴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는 체험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 모두가 본의 아니게 정도의 차이일 뿐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가면을 쓰고 살 수는 없으므로 때로 편한 이들 앞에서는 가면을 벗고 진실을 토로하면서 긴장을 풀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위선자로 지탄받던 바리사이들은 참된 나의 모습대로 살지 못하고 가면을 쓴 채 산 이들이었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면서도,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한 위선의 가면을 쓴 바리사이들. 우리의 삶은 가면을 벗을수록 자유롭습니다. 주님을 닮아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 될 때 비로소 가면은 벗겨집니다. 예수님은 전혀 가면을 쓰지 않았던 안과 밖이 하나된 신인(神人)이자 진인(眞人)이셨습니다. 주님을 닮아 가면을 벗고 진실한 얼굴로 진실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까마귀 검다 하여 백로야 웃지 마라
-안성철 신부-
예수께서는 겉과 속이 다른 바리사이들을 책망하시면서 우리에게 하느님 앞에서 거짓 없이 살아가기를 촉구하신다. 거짓 없이 산다는 것. 이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 서 있으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 창조되었을 때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뱀의 꾐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해주는 열매를 먹고 난 후 그들은 서로 부끄러운 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나뭇잎으로 알몸을 가리고 하느님한테서도 숨는다. 하느님 앞에서 가리고 숨는 행위, 이것이 바로 인류가 하느님 앞에 죄를 범하고 취한 첫 번째 행동이다. 우리도 원조의 피를 이어받아 하느님과 자신을 속이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많은 경우 나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하느님께 드러내 보이기를 꺼려 꼭꼭 숨기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나의 자랑스러운 부분만 보고 계신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부족한 모습이다. 이는 분명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그분을 속이는 것이다. 다윗 성왕은 이 부분에서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분이다. 다윗은 자신의 분노·죄·어둠을 모두 하느님께 말씀드리면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였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다윗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많은 은총을 베푸셨다. 완벽하게 살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의 현실이다. 부족하고 실수를 범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분께 다 보여드릴 때 그분 또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실 것이다. 내가 나 자신과 하느님을 속이면서 멀어질수록 그분도 우리한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율법의 중심이 되는 정신이 무엇인가? -한 건 신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시면서 생활의 여유를 가지셨는지요. 아무리 바쁜 일이 쌓여 있어도 한번쯤은 자연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면, 그것이 삶의 즐거움이며 작은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 때는 이런 작은 행복마저 유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22년 전 오늘은 많은 젊은이들이 유신 독재 정권과 투쟁을 했던 부마민주항쟁기념일입니다. 그들은 10월의 낭만을 잊은 채, 사람들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독재 정권과 피땀을 흘리고, 매맞아가며 투쟁하여, 마침내 그들을 무너뜨리게 했습니다. 젊은이들의 투쟁의 기본 정신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지만, 도리어 그들을 나무라십니다. 실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요구하는 식사 전에 손 씻는 것과 잔을 깨끗이 닦는 것은 정결예식의 기본적인 준수 사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무시하고 식사를 합니다. 이것을 본 바라사이파 사람들은 큰 일이나 일어난 것처럼 깜짝 놀라며 당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율법의 중심이 되는 정신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정결예식의 주된 정신으로 진정 깨끗해지고자 한다면 우선 마음 속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가득차 있는 착취와 사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 속에 착취와 사악이 들어있다면, 겉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 깨끗해져도, 또한 남에게 보이는 좋은 일을 많이 하던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이런 헛된 수고는 오히려 하느님은 물론 이웃과의 관계도 단절되고, 결국 은총의 삶에서 벗어나기 마련입니다.
또한 깨끗한 마음 속에는 사랑과 온정을 채워야 합니다. 사랑과 온정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됩니다. 이처럼 이웃과의 나눔이 이루어지는 마음은 완전히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이웃과 함께 은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22년 전 젊은이들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 위에 존재하던 유신 악법을 철폐하려고 투쟁했습니다. 그 악법은 마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착취와 사악이 가득 담겨있어, 사람의 기본 인권조차 무시했습니다.
당시의 젊은 이들은 자신들만이 잘 살겠다는 무사안일주의의 방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처럼,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요구받는 상황이었지만, 물러서지 않고 투쟁했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마음이 하늘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인간의 온갖 불경과 불의를 치시려고 하늘로부터 나타났던 것입니다." 마침내 독재정권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그 악법은 철폐되었습니다. 그 이후 또 다른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지만, 부마민중항쟁의 정신은 이어져 군사독재정권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나마 이웃과 함께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시금 22년 전 젊은이들의 마음을 고마워하고, 우리의 삶에 그들의 마음을 되새겨봅시다. 그들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마련된 민주공원에서는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민주공원에서 10월 화창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그곳에 깃들여 있는 젊은이들의 결연에 찬 외침과 마음을 느껴 보십시오.
오늘의 우리의 마음이 젊은이의 마음과 일치될 때,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암울하고 희망이 없이 보이는 우리의 앞날에 새로운 자극과 함께 희망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영원하고 유일한 통로인 믿음 -경규봉 신부-
사도 바울로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였으며, 죽는 것도 그에게는 이득이 된다(필립 1,21)고 생각했다. 복음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복음은 하느님과 인간이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을 보여주는데, 그리스도께서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셨고,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에 힘입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다.
공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불경과 인간에 대한 불의를 분명히 심판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때부터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 아무런 핑계를 댈 수 없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이성과 감성을 가졌으면서도 하느님을 섬기지 않으며, 허황된 생각에 빠져 그들의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은 똑똑한 체하지만 실상 어리석다. 그래서 하느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을 숭배한다.
하느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올바른 방향을 잃고 탈선하게 되어 피조물을 섬기고 서로의 몸을 더럽히는 탈선을 하는데, 이러한 탈선이 곧 하느님의 진노이며, 하느님을 거부하는 데에 따른 정당한 징벌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여느 피조물과 달리 사람에게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뛰어난 이성과 감성을 주셨다. 사람의 이성은 하느님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동시에 사람의 본질도 알 수 있다.
사람이란 결국 죽어야만 하는 존재이며,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이룰 수도 없고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의지함으로써만이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이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은 스스로 똑똑한 체하면서 자신의 힘만으로 자신의 욕망과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처럼 허황된 생각과 어리석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 곧 죄이며, 그 죄에 대한 진노가 곧 인간이 저지르는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우상숭배나 욕정대로 살면서 서로의 몸을 더럽히는 것이 그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인간의 악행을 하느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보았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악행을 하도록 버려두시는 것이 곧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진노하심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이 곧 복음이며, 이 복음은 인간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길을 보여준다.
즉,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죄와 악행에서 스스로 벗어날 힘이나 능력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만이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받는 길은 오직 믿음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힘을 받는 유일하고 영원한 통로인 것이다.
과연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록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죄악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상 것에 집착하고 자신을 내세우고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역시 죄가 아닌가?
이러한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느님의 은총만이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자신을 믿지 말고,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만을 고집하지 말고,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고,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이경식 -
성서를 읽을 때마다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 중에 하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열심한 종교인인 그들이 어째서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더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데 앞장섰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차 있다”며 꾸짖으신다. 나는 이 말씀을 나에게 비추어 보면서 나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지, 곧 사죄경에서 말하듯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되돌아보곤 한다. 내 삶이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잘못이 있다면 빨리 고쳐야 한다. 만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사이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병동의 수많은 말기환자들은 죽음 앞에서 자기 삶을 되돌아본다. 지금까지 사랑하며 살아왔는지,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돌보면서 누구나 똑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을 보고 놀란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느님 안에서 행한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하신 말씀은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은 우리의 겉과 속을 하나로 만들어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착취와 사악을 없애고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금메달 사과
-최영균 신부-
황종렬 씨의 <가시 겨울나기>란 시집에 나온 어느 시 구절에는 먹음직스러운 사과에 붙인 황금색 레테르 딱지의 존재이유에 대해 성찰하고 있습니다. 사과뿐만 아니라 수박이며 바나나와 같은 과일엔 그 과일이 아주 좋은 상품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레테르 딱지가 붙여집니다.
그런데 가끔 그 레테르 딱지를 떼면 거기에 과일이 곯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먹음직스러운 과일에 곯은 자리는 과일의 품질을 의심케 만들고 그 상품가치를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금색 레테르 딱지로 붙입니다. 그렇다고 그 과일의 곯은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인간의 눈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곳으로 쏠리기 마련입니다.
좋고 멋진 것만을 좇는 우리 마음의 눈길은 우리 존재의 상처를 덮고 있는 예쁜 포장지에 가 있습니다. 사실 그 포장지 속에 상처가 너무 깊고 아픈데도 우리는 포장지가 주는 근사함에 취해 살 때가 많습니다. 돈, 명예, 그리고 과도한 욕망들은 우리의 상처를 잘 가려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가려짐 속의 상처는 더욱 깊게 곯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계속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 역시 음식이 주는 나눔과 친교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 예법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사람과의 친교적 삶을 그 소명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본질이 건강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예법이라는 포장지 속에서 어쩌면 곯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
- 여영재 신부-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율법이었기에 지켜야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사소한 규정까지도 마음을 쓰고 지킬 줄 아는 그들이었지만 이 모든 일들을 자신들의 모습을 경건한 사람으로 드러내는 것에만 치중 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경멸의 자세로 아픔을 갖게 하고 스스로는 할 일을 다 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겉과 속이 다르다고, 번지르르한 그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하다고 질책을 당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나눔과 배려라는 것이 없는 율법주의 그 속에서는, 아름다운 그릇 속에 가득 차 있는 교만과 멸시만을 보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율법을 지키지만 말고 율법을 살라고 하십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느님 마음에 드는 그릇이 되도록 노력하라 하십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십자가를 손에 쥐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벽에 달아만 둘 것이 아니라, 진정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만 말고 율법을 살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내 가정, 내 이웃, 내 직장의 동료들에게 율법의 정신대로, 주일 미사 때 들었던 하느님 말씀 대로 사랑과 나눔과 배려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행복의 조건’이라는 아주 재미있는 그러나 아주 의미심장한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 행복의 조건(한젬마의 ‘그림 읽어주는 여자’ 중에서) *
예쁜 여자를 만나면 삼년이 행복하고, 착한 여자를 만나면 삼십 년이 행복하고,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면 삼대가 행복하단다.
잘 생긴 남자를 만나면 결혼식 세 시간 동안의 행복이 보장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통장 세 개의 행복이 보장되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를 만나면 평생의 행복이 보장된단다.
어떻습니까?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젊었을 때에는 예쁜 여자, 잘 생긴 남자를 선호하지만, 어른들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무조건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이 최고라고 하시나요? 아니지요. 평생 배우자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분들이 그냥 하시는 말씀일까요? 오랜 경험에서 나온 분명히 맞는 정답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모습만을 보고서 결혼하면 후회할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 즉 외적인 모습만을 추구하는 모습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 순간의 기쁨이 최고라는 생각들, 이 세상의 것들이 내 생의 전부라는 듯이 그곳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나의 모습들.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깜짝 놀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쎄 식사 전에는 손을 닦는 것이 율법의 내용인데, 예수님께서는 손도 닦지 않고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초대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로부터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겉으로 드러나는 한 가지 행동, 손을 닦지 않았다는 행동 하나만으로 예수님을 배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바로 지혜로운 사람임을 자청하는 그들이었지만, 순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혹시 우리들도 이렇지 않을까요? 외적인 모습만을 바라본다면, 순간의 기쁨에만 만족한다면,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면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내 속을 자선으로 깨끗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바로 순간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자선을 베풉시다.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빠다킹신부
규정, 판단, 자유와 사랑과 해방의 하느님
-이성우-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왜 놀랍니까? 그것이 꼭 놀랄 일인가요? 그 순간 그는 바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정결법을 따르지 않는, 하느님 앞에 부정한 자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가 정해놓은 규정들이 많기도 합니다. 누구누구는 꼭 이래야 한다는 규정을 많이 만들어놓고 나도 지키고 다른 사람도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 규정을 누군가가 어기면 우리는 바로 그를 판단하고 죄인으로 치부합니다. 우리가 정해 놓은 규정들이 하느님께서 꼭 원하시는 사랑입니까? 정해 놓은 규정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규정을 정한 본래의 취지는 잊어버리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어느 순간 형식이 본래의 취지보다 중요하게 되어 그것이 바로 나와 타인을 재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자유와 사랑과 해방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어느 누구보다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자유롭게 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사랑은 커지고 경계는 없어집니다. 나에게 지금 나와 타인을 저울질하는 잣대가 얼마나 많은가를 보면, 나는 하느님과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 안의 잣대는 느슨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나와 타인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도록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분위기 반전
-김정대 신부-
전례 형식에 집착하다 보면 전례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놓칠 수 있다. 부제서품을 앞두고 호주에서 지내던 어느날 예수회 어느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했다. 이탈리아 출신들이 많은 공동체라 그런지 평일미사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이 왔다. 주로 연세가 지긋한 여성들이었지만 간혹 젊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 중 서너 살 정도의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도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고 신부님이 강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중앙으로 나오더니 제단 아래 꾸며진 장식 앞에서 신기한 듯 쳐다보며 그 앞에서 뒹굴며 놀았다. 아이의 엄마는 당황스러워했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부리나케 달려나왔다. 그런데 강론 중이던 신부님은 오히려 편안한 말로 그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아이에게 전혀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냥 두세요.” 그 신부님은 아이 엄마에게 면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색한 분위기를 사랑으로 감싸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나는 그날 신부님의 넉넉한 마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례에 엄숙함만 있고 이런 사랑이 없다면 전례 안에서 무엇을 상상하고 배울까? 바쁘게 미사참례를 하고 생업에 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절박함을 무시하고 단지 겉으로 드러난 옷차림만 보고 신앙심이 없다고 판단하지는 않는가? 엄숙함이라는 형식도 중요하겠지만 본질인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볼 수 있는 형식도 매우 중요하다.
겉(表)과 속(裏)
-강영구신부-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그대에게
저는 늘 저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고민합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마태7,15-16) 저는 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리와 같이 착취와 사악이 가득한 엉터리 사제가 아닌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늑대의 모습이지만 착하고 순한 양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셨습니다. 겉은 속을 담는 그릇입니다.
겉모습은 사람이 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환호하거나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혹은 겉모습만 보고 욕하거나 비난합니다. 속모습은 하느님께서 봅니다.
속모습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은 아름답게 살고 향기롭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겉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속모습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듭니다.
겉모습보다 속모습이 아름다운 이지선양의 이야기 ‘지선아 사랑해!’(이레)를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一明)
"나의 것이 이웃을 향해 흐르는 깨끗한 삶을 유지합시다."
-홍성만 신부-
오늘 복음은,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식사에 앞서 손을 씻지 않으시는 주님을 보고 놀라워하는 바리사이에게 하시는 말씀이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것이 다 깨끗해 질 것이다."(루가11,39-41)
예수님께서는 지금 깨끗하다는 의미를 겉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끔 '저 사람은 참으로 곱게 늙었다. 저 사람은 추하게 늙었다'하고 말을 듣기도 하고 또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생전의 깨끗한 삶의 내용이, 혹은 깨끗하지 못한 삶의 내용이 지금 드러났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깨끗함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배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물이 흐를때 비로서 물의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듯이, 나의 것이 이웃에게 나누어질 때, 내 마음은, 정화되고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이 이웃을 향해 흐르는 깨끗한 삶을 유지합시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란?
-오상선신부-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그릇 속에 담긴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보통 미인이라면
키가 늘씬하고 허리가 가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각종 미인대회에서 보게 되는 미인상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불과하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들이 소위 성형수술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이나 가슴 등 여러 부위들을 뜯어고친다고 한다.
워낙 그런 사람이 많아서
진짜 원래 얼굴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도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나중에 애를 낳아보면 안다고 한다.
왜냐하면 원판보존의 법칙(?)에 따라 그 원래의 모습을 따라 2세가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모 수필가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외형 가운데서도
피부가 고운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피가 맑은 여자가 더 아름다운 여자이고,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목욕하고 방금 나왔을 때라고 한다.
그것은 아무것으로도 치장하지 않은 순수한 모습 때문이란다.
그러나 정말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마음이 고운 여자라고 하였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움, 진정한 깨끗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계신다.
진정한 아름다움, 진정한 깨끗함은 내면에서부터 솟아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사제의 손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이는 물로 자주 씻어서가 아니라
그 고귀한 성체를 직접 만지고 모시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그 정도로 사제는 거룩하고 깨끗한 내면을 지녀야 한다는 뜻일게다.
그대는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계시는가?
가장 겉에 있는 아름다움 추구에만 골몰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피부미인이 되는데만 열중하고 있는가!
순수하고 맑은 피와 영혼을 지니는 여인이 가장 아름답지 않겠는가?
성모상을 바라볼 때마다
성모님이 너무 이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성모님을 이쁘게 만드는 이유는
그분이 외적으로 팔등신 미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맑은 영혼의 소유자이셨기에 그것을 상징하기 위해
외형적으로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게다.
그대도
성모님 같은 아름다움을 가꿀 의향은 없는가?
그렇다면
내 마음에 치중하자.
내 마음은 맑고 깨끗한가?
사심, 욕심, 시기심, 질투심 등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옹달샘이 맑음을 유지하는 것처럼
조용히 기도하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모든 욕심들을 가라앉히자.
그때 그대는 참 미인이 되리라.
아멘. 알렐루야!
나의 밥상이 정당한 노력의 대가인가?
-박상대신부-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목소리가 격앙(激昻)되어 가고, 격앙된 목소리는 가르침의 비중과 비례한다. 이제 루가복음에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단도직입적인 책망과 불행선언이 서서히 준비되고 있다.(루가 11,37-54)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지도자로 위치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표리부동함을 경계하고 책망하시면서, 그것 때문에 그들이 불행과 화를 입게 될 것임을 예고하신다. 마태오도 복음의 23장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의 서막(序幕) 역할을 담당한다. 장소는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이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신다.(37절)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식사초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루가 7,36; 14,1) 그분은 세리와 죄인과도 함께 식사를 하셨다.(루가 5,29-30) 문제는 예수께서 손을 씻는 예식을 치르지 않고 음식을 드신 데서 발생한다. 호스트인 바리사이파 사람은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38절) 다소 과장된 반응인 듯하지만 그가 놀란 만큼 예수님의 말씀도 놀랄 만큼 단호하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39절)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는 단언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다섯 번째 불행선언(마태 23,25-26)의 범주에 넣어 다루고 있는 반면, 루가는 이 대목을 불행선언을 위한 서막으로 다루고 있다. 마태오는 여기서 ‘이 눈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먼저 잔의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겉도 깨끗하여 질 것이다.’는 말을 붙여 외적인 정결보다 내적인 정결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그릇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에 더 관심을 보인다. 물론 이 부분은 루가가 의도적으로 개작한 부분임이 틀림없다. 통상 맨손으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유대인들의 풍속(風俗)을 감안하면,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일은 위생상으로도 꼭 필요한 것인데, 유대교는 이를 정결예식에다 묶어 꼭 치러야 하는 규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규정의 참뜻은 손, 접시, 잔, 항아리 등을 씻어 겉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속까지 깨끗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까지 보시는 예수님의 눈에 그들의 속은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먹기 위해 잘 닦은 그릇 속에 담긴 음식은 그릇의 정결함과는 달리 부정함으로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것이다. 담겨진 음식이 깨끗해야 잘 닦은 그릇도 빛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속이 더럽다면 겉으로 보이는 행세가 아무리 옳고 멋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이 되고 위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차 마음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과 봉사로 정결함을 되찾을 수 있을 뿐이다.(41절) 하느님의 눈에 이것 말고 다른 정결함의 방법은 없다.
그릇을 잘 씻어 음식을 담고, 그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함은 유다교의 율법이 규정이기 전에 위생상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그릇에 담겨 있는 음식이다. 바로 내가 먹을 음식 말이다. 그 음식이 착취와 사악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살피는 일이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같이 그릇은 사람의 마음을 담는 도구요,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은 마음 씀씀이를 말한다. 그릇을 아무리 깨끗이 닦는다고 해도 제대로 된 음식이 담겨 있지 않다면 그릇의 깨끗함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매일 내가 먹든, 남이 먹든 음식은 깨끗해야 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생명을 주는 음식이어야 한다. 사람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생물학적 활동은 그 근본이 먹고 사는데 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남을 등쳐먹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남이야 굶든, 먹고 죽든, 어찌되든 간에 자기만 잘 먹고 살면 끝난다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자의 밥상은 결코 정당한 밥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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