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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묵상글 들 ( 12월 21일-죄와 은총을 같이 보는 완성된 회개. 등 )
*** 맨 아래 평화방송, 신부님 강론 말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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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2월 21일-죄와 은총을 같이 보는 완성된 회개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은 만남을 주제로 나눔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마남 얘기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만남에 비춰 우리의 만남도 보면 좋을 것입니다.
순전히 인간적인 눈으로 두분의 만남을 생각해봅시다.
두분은 친척간이라고 하니 자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경우는 있겠지만
일부러 찾아가서 만날 정도로 친밀함이나 일이 있는 사이는 아닐 겁니다.
만난다 하더라도 덤덤하거나 예의 차리거나 부담스러운 만남일 것입니다.
적어도 만남이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것처럼 기뻐뛰는 만남은 아닐 겁니다.
왜냐면 마리아는 갓 결혼적령기의 처녀이고 엘리사벳은 친척 할머니이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할머니와 손녀 사이, 더 정확히 얘기하면
친척 할머니와 손녀 사이에 같이 임신하여 만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임신하고 출산하여 늦둥이를 낳은
시어머니가 부끄러워하여 그 늦둥이를 돌보지 않았다는 얘기는 종종
들었는데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는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보다
훨씬 더 어색하고 부끄러워 대면하고 싶지 않은 관계였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 두 분의 관계는 이런 인간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만남이고,
자기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심을 함께 느낀 여인들의 만남입니다.
자기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신 흔적은 물론 태중의 아이들이지요.
엘리사벳은 아마 만삭의 몸일 것이고 마리아는 이제 갓 임신한 몸인데,
그래서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은 임신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왔을 때
이미 뱃속에서 역시 태아인 예수를 보고 기뻐뛰놀았다고 합니다.
아무튼, 두 분의 만남에서 제가 오늘 교훈삼고 싶은 것은
우리의 만남도 서로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신 흔적을
같이 확인하는 그런 만남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두 분에게만 있고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분명 아닌,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경험하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 교회 공동체나 수도 공동체 얘기를 할 때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죄들이나 잘못에 시선이 꽂혀
만나 대화하고 나면 마음이 몹시 어두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심을 가지고 그러니까 영안으로 우리 공동체를 보면
시기 질투한 형제들의 악한 행위를 통해서도 요셉을 이집트로
가게 하고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그 원대한
역사하심을 보듯 우리 형제들의 죄스런 모습들 넘어서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은총을 볼 수 있고, 그런 만남을 하고 난 뒤에는
오늘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처럼 우리도 기쁨에 차게 되지요.
우리가 진정 회개를 한다면 죄만 보지 않고 은총도 본다고 하지요.
죄를 보는 눈이 전혀 없으면 회개는 아예 시작도 못한 것입니다.
죄만 보면 회개의 시작은 하였지만 아직 미완성이고 불완전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를 보고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은총을 같이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영안과 회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때 우리의 회개는 완성되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대림 시기 이 회개를 하여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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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12월 21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은 기다림과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 1,1)인 아가는 일종의 ‘사랑 노래 모음집’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독서는 구혼 시절을 회상하는 여인의 노래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두 연인은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남자를 모르는 처녀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신 마리아와, 그에 앞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지만 같은 분의 힘으로 세례자 요한을 가진 엘리사벳이 인사를 나눕니다. 그 만남의 기쁨은 엘리사벳의 태 안의 아기가 뛰노는 즐거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절히 기다리던 만남이 이루어져 얻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라면 그 기쁨은 더욱 크다는 것을 화답송의 시편이 잘 보여 줍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
주님 성탄을 앞둔 대림 시기의 막바지에서 구세주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아가의 표현처럼 구세주께서는 노루나 사슴처럼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십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을 이루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아기의 잉태와 두 어머니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구세주께서 오시는 것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은 행동을 촉진하는 힘입니다. 주님 성탄을 앞둔 우리 또한 어떤 역경 속에서도 오시는 분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힘차게 뛰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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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12.21.“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올라 있고,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이루기에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말씀에게도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또 하나의 복을 노래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얼마나 벅찬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교제하며 사귀고 친교를 이루며,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자신을 헌신하는 봉사가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마침내 말씀은 삶이 되고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려고 말씀은 우리 안에 잉태되십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 요한이 동생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닦겠지만, 분명 예수님이 먼저 요한을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곧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하느님이 먼저 찾아와 부르시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는 모세를 먼저 찾아와 부르시듯이,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어 부르시는 그분의 부르심을 반겨 맞아들이고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방문하시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행복하십니다. 어머니!
경청만 하신 것이 아니라, 믿고 영접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믿고 영접한 것만이 아니라, 순명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순명한 것만이 아니라,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셨으니 행복하십니다.
오늘 제가 당신의 희망을 품고, 행복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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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성탄 5일 전.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 샤를르 드 푸꼬(Charles Eugene de Foucauld)의 영성
오늘 독서는 아가(雅歌)서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으로
아가('雅歌')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만, 원 이름은 잠언처럼 지은이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이스라엘의 현인으로 알려진
솔로몬을 솔로몬을 내세워서 붙여진, ‘솔로몬의 노래’입니다.
이 아가는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할 때나 결혼식에서 불리던 노래였는데,
구약 시대에 유다인들은 이 노래를 하느님께 드리는
인간의 사랑 고백으로 해석하여 과월절 축제에서 낭송하였습니다.
사실은 인간이 하느님께 이렇듯 달콤한 사랑을 드리지 못하지요?
오히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짝사랑을 반성하는 의미가 더 커 보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서는 사랑의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어서,
신부인 교회에 대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석하는 관점이 대세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은 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 만나는 내용인데,
이 두 여인이 모두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한 처지여서 독서에 아가서가 배치된 것 같습니다.
엘리사벳은 줄곧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사람이 필요하셨던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아들을 잉태한지 여섯 달이나 된 처지였고, 마리아는 이제 막 메시아를 잉태하리라는
전갈을 받은 처지였는데, 처지는 이렇게 달랐어도 하느님의 사랑어린 개입을 체험하기로는 똑같았습니다.
사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도 비슷해서 본질적으로 짝사랑으로 흐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때는 대개 자신도 가정을 이루어서
부모가 되어 본 다음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처럼, 인간도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정신 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상호간에 사랑을 주고받기보다 사랑이 큰 쪽에서 먼저 일방적으로 주고
다른 쪽에서는 받기만 하는 짝사랑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도 뒤늦게나마 그 사랑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고 표현하는 고백이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연인 사이의 사랑 고백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두 사람 다 하느님 앞에 신심이 두텁고
서로 간에도 신뢰가 깊었던 사이로서 아나빔에 속했습니다.
그러기에 만나자마자 평소에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던 바에 대한 응답이 주어진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공통적이었던 두 여인 사이에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통교가 마치 전기가 통하듯이 이루어져서, 바로 서로의 마음과 처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이런 뜻에서, 엘리사벳의 인사말은 성모송에 들어와서 신자들의 일상적인 기도에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이러한 인사말의 끝에 엘리사벳은 늙은 나이에 임신한 자신보다도 처녀이면서도
주님께서 메시아를 잉태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순명한 마리아가
더 복된 처지라고 축하하며 성령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칠 때, 환희의 신비 제2단에서 이 사건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관상하는 묵주기도 전체 신비 20단 중에서
예수님이 주어로나 목적어로 나오지 않는 유일한 단입니다.
이를 방문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에서 복음을 증거한
프랑스의 순교자 샤를르 드 푸꼬(1858-1916) 사제는
이 신비에 주목하여 죽기까지 그 영성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실 때 이미 홀몸이 아니셨고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가셨던 것처럼,
푸꼬는 자신의 신앙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되 옷으로
그분을 표현하거나 입으로 그분의 이름을 발설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처럼 사는 모범으로만 살고자 했고, 모로코의 가장 가난한 마을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12항)에서 ‘모든 이의 형제’라고 푸꼬 신부를
소개하며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인 형제애를 증거한 그리스도인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푸꼬 신부를 사하라 사막으로 이끌었던 사람들은 영적인 가난으로 살아가는,
투아게르족(Tuareg)으로서 이슬람의 가난한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관습과 언어를 배우며 자신의 모든 능력과 정성을 다해 사람들을 섬겼으며
이로써 평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알제리와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미 중세의 십자군 전쟁의 피해를 기억하고 있는 이슬람 신자들이고,
또 가톨릭 신자들이 많은 나라인 프랑스가 무력으로 식민통치를 하고 있어서
반가톨릭적 정서가 팽배했던 상황이었으므로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선교가 불가능한 사정이었습니다.
그래서도 더욱 그가 자신의 삶으로 예수를 보여주겠다는 선교 방식은 불가피했고 또 적합했습니다.
그러다가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났을 때, 광신적인 사누시파(Sanusiyah) 이슬람 광신자에 의해서
이유도 없이 총에 맞아 죽었던 푸꼬 신부를 그가 죽은지 몇 년만에 프랑스 교회가 찾아서
그의 삶과 영성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사막에서의 고적한 삶을 통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을 깨닫는 행복을 추구한 ‘사막의 은수자’였습니다.
그 후 그의 영성을 따르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세속에서 복음을 알리기보다 실천하는 관상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이들과 고통을 나누는 사도직이 생겨났습니다.
2005년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의해서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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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12월 21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러나 그것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거나 의심을 하였거나, 천사가 알려준 증거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보고 있다. 성경에 이르기를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예레 1,5) 이 일은 큰 표징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요한이 아직 목소리로 기쁨을 드러내고 주님을 증거할 수 없었기에 그 어머니가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에는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아들 덕분에 성령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된 다음에,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진 것이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자기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2) 이는 엘리사벳에게 옳은 말씀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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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2.21.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이루어져가는
믿음의
여정이다.
언제나
주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행복은
정녕
무엇일까.
믿음이
행복이다.
믿음을
나누는 것이
행복이다.
믿음은
말씀으로
이어진다.
믿음 안에
행복이 있다.
성령 안에
행복이 있다.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이다.
행복은
퍼져나간다.
고통이 있기에
말씀을 찾고
말씀과
함께하기에
행복하다.
믿음은
순탄하지 않다.
고개를
넘는다.
가파르기에
하느님을
일깨워준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행복이다.
하느님의 뜻안에
이루어지리라
믿는 성탄이다.
성숙한 믿음
성숙한
기다림이길
기도한다.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다.
행복은 정녕
주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나눔이다.
나눔과 만남
말씀과
행복은
삶 안에서
하나이다.
믿음이 되는
행복으로
초대하는
대림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
대림은
믿음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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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새벽을 열며. 2020년 12월 21일. 빠다킹 신부님.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운전을 해서 국내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새벽 3~4시에 출발해서 순례합니다. 성지에 사는 저이지만, 성지순례를 통해 얻는 은총이 너무 커서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벌써 3번째 완주를 앞두고 있습니다(성지순례 책자를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성지는 167곳으로 나옵니다).
언젠가 춘천교구 지역을 순례하다가 어느 순례객을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게 “신부님! 어느 성지가 제일 좋으셨어요? 신부님 계시는 갑곶성지는 빼고요.”라고 물으십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인상 깊었던 어느 성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잖아요.”라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지금 한창 성지개발 중이라 아무것도, 심지어 성당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대한 인상이 깊습니다. 예전 갑곶성지의 초창기 때의 모습도 생각나고, 이곳의 미래를 상상하다 보니 계속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성지는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억나는 곳은 화려한 곳도 볼거리가 많은 곳도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곳입니다.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은 겸손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볼 것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곳보다도 감동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단단하게 굳은 마음이 아닌, 말랑말랑하게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반깁니다. 단순히 사촌 동생으로서 성모님을 반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화하신 메시아를 시편으로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소리로 외쳤다는 점은 그만큼 엘리사벳의 믿음이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믿음의 크기 때문일까요? 먼저 주님께서 겸손하게 다가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직접 주님과 함께 방문하신 겸손을 그의 마음은 주님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럽지만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알아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 경배의 노래, 찬미의 노래를 바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의 관점을 버려야 합니다. 가장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겸손을 바라볼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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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도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일한 만큼 노력한 만큼 받게 되어 있다(나폴레온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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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
예전에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피정 참석자에게 “내가 행복한 이유 100가지만 적어보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놀리듯이 “100가지만 적기에는 행복의 이유가 너무 적지요?”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를 비롯한 피정 참석자들은 열심히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는 쓸 수 있었지만, 100가지나 되는 행복한 이유를 찾기란 너무 힘들었습니다. 힘들어하는 우리를 보신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이유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이유고, 음식을 먹을 입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이유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행복한 이유 100개는 너무 적은 숫자고, 작성하기에 너무 쉬운 문제가 아닐까요?”
행복한 이유를 우리는 이미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미 가지고 있으므로 할 수 있는 것도 당연히 너무 많습니다.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마음이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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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2월 21일
코로나19에 대해서 백신과 치료제는 방패와 창과 같습니다. 백신은 바이러스가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예방하는 의미에서 방패와 같습니다. 치료제는 우리 몸에 들어와서 염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내보낸다는 의미에서 창과 같습니다. 바이러스는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하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이제 곧 치료제와 백신이 나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치료제를 만드는 제약회사 관계자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 기업은 공공재(公共財)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치료약을 만들면 국민들에게 원가에 제공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는 국민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없다면 기업도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치료제의 수출도 국가의 외교적인 판단과 함께 한다고 하였습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위기상황에서는 국가의 이익이 기업의 이익보다 먼저라고 하였습니다.
문득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보호하는 방패와 창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사생활(聖事生活)은 우리를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방패와 같습니다. 세례성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합니다. 지난날의 죄를 없애 줍니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 병자성사는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위로해 줍니다. 고백성사를 통하여 영적인 아픔을 치유하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성전(聖殿)이 되게 합니다. 혼인성사는 하느님의 축복 속에 성가정을 이루게 합니다. 신품성사는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울 봉사자를 선발하는 것입니다. 성사생활만 충실하게 하여도 우리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고백성사를 하기 전에 잘못을 성찰하고,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제가 주는 보속을 해야 합니다. 아플 때 약은 먹어야지 보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에 참례하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성이 없는 신앙은 광신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이성은 허무할 수 있습니다.
수덕생활(修德生活)은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창과 같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향주삼덕과 복음삼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악을 멀리하고,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하며, 사랑으로 선을 실천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악을 행하면 벌을 받을 것을 생각하여 악을 피하고, 희망으로 선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육신과 세상의 쾌락을 피할 것이며, 사랑으로 자신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도록 열정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청빈은 마음과 정신 그리고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아감으로써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더 자유롭게 따를 수 있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며 완전한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결은 모든 사람이 그 신분대로 지켜야 할 덕행이지만 특별히 수도자들은 정결 서원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서약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칩니다. 정결은 하느님과 배우자와 좋은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순명은 자기의 자유의사를 끊어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교회 장상(어른)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수도자로서의 순명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보다 효과적인 단체 활동을 위해 장상들에게 적극 복종한다는 서약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악의 세력은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가 성사생활에 충실하고, 수덕생활을 한다면 우리 또한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분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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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진리의 연인 - 마라나타 : 오소서, 주 예수님! - 12.21.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시기,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연인, 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초대교회 신자들 역시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대림2부 다섯째 날, 오 후렴의 ‘샛별’, ‘찬란한 광채’, ‘정의의 태양’이 가리키는 바 역시 우리의 영원한 진리의 연인 주 예수님입니다.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오, 정의의 태양이시오,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진리의 연인인 주 예수님을 갈망하여 닮아갈 때 저절로 존엄한 품위의 회복으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본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성탄날 선물 받은 빨간 칸나꽃을 보며 써놓고 애송했던 시도 생각이 납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며/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두 말할 것 없이 당신의 지칭하는 바 우리의 영원한 진리의 연인 주 예수 그리스도님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런 연인을 기다리는 심정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대로 진리의 연인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영혼의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연인이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이자, 매일 미사를 통해 앞당겨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들입니다.
새삼 ‘영육의 건강’에, ‘영육의 치유와 구원’에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자 연인이신 주 예수님과의 영적우정의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아가서의 말마디들은 얼마나 실감나고 감미로운지요!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요.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세상에 이보다 감미로운 연인에 대한 소개는 없을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영혼을 사랑하는 우리의 영원한 진리의 연인이신 주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사랑하여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서로간의 참된 영적 우정에 도반이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마리아가 길을 떠나 서둘러 찾아간 영적 도반 엘리사벳입니다. 흡사 아가서의 애인을 찾아 나선 연인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마리아 태중의 아기 예수님은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자 요한을 찾아나선 장면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엘리사벳의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참 아름다운 도반들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입니다. 이처럼 주님 안에서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영적 도반의 우정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두 분의 어머니들은 이상적인 수도형제들간의 영적 우정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흡사 아가서의 애인을 찾아나선 연인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잘들여다 보면 중심은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임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를 통한 연인 예수님의 방문에 기뻐뛰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 세례자의 모습이 미래의 두분의 관계를 예시합니다. 흡사 엘리사벳 태중에서 기뻐뛰는 모습이 사무엘 하권의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기뻐 덩실덩실 춤췄던 다윗을 연상케합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의 궤 앞에서 춤을 추었다.”(2사무6,24).
바로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자신은 주님이 머무는 주님의 궤가, 주님의 감실이, 새 예루살렘이 되고 있으며, 바로 이 앞에서 기뻐 춤추는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자 요한은 그대로 다윗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진리의 연인이자 영원한 영적 도반이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분 안에서 우리 마음 기뻐하고, 거룩하신 그 이름 우리가 신뢰하네.”(시편33,20-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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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대림 12월21일.
행복하십니다
행복은 무엇인가? 만족한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모든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은 많은 일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소유와 지배를 하는 욕구에서 벗어나 천상을 갈망하며 베푸는 삶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베푸는 삶, 사랑의 삶에서 만족하는 삶은 ‘약속에 충실한 주님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행복에 행복을 더하길 기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께 대한 믿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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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송영진 모세 신부. 12. 21.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도 알려 주었습니다(루카 1,36).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간 것은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또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엘리사벳에게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최초의 선교사가 되는 셈입니다.
(‘기쁜 소식’은 혼자서만 알고 있으면 안 되는 소식입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소식입니다.
만일에 ‘기쁜 소식’을 혼자서만 알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쁜 소식’을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감추어진 상태에서는
‘기쁜 소식’에 들어 있는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 소식은 기쁘지 않은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메시아 강생’ 소식과 자신의 ‘성령 잉태’ 소식을
우선 먼저 부모님에게, 또 요셉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엘리사벳에게 갔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가족 다음으로 가까운 친척이었을 것입니다.)
이야기에는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라고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마리아가 인사만 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과
자신의 ‘성령 잉태’ 소식을 전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이 기쁨은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한 기쁨이고,
메시아 덕분에 ‘인류 구원의 길’이 열린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즉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기쁨과 기쁨의 만남’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이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이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
자유의지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을 엘리사벳이 바로 알아듣고, 믿고, 받아들이고,
찬미한 일은, 성령의 인도도 있었지만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한 일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라는 말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 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을 엘리사벳 입장에서 다시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서 “여인들 가운데에서”는,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남자들은 제외하고’ 여자들 가운데에서만 복되신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사업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로
선택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마리아 태중의 아기 예수님이 복되신 분인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이 ‘복되신 분’이라는 말은, 두 분이 하느님의 복을 누리고
계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두 분을 통해서 인류 전체가
하느님의 복을(구원의 은총을) 받게 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복을(구원의 은총을) 인류에게 주시는 통로로
삼으신 분이기 때문에 복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그 복을(은총을) 인류에게 직접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복되신 분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은,
“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의 어머니”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류 구원사업)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로서, 또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 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은,
뜻으로는 “복되십니다. 주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실천하셨으니!”입니다.
(여기서 마리아의 ‘실천’은 응답과 순종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해 준 말을,
특히 메시아께서 하시게 될 일에 관한 말을 가리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2-33).”
<이 말은 메시아께서 하시는 일의 맨 마지막 단계의 일을,
즉 구원사업이 완성되었을 때의 일을 묘사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해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천사는 왜, 맨 마지막의 영광만 이야기하고, 중간 과정의 십자가는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혹시 마리아는 중간 과정의 십자가를(고난과 시련을) 모르는 채로
마지막의 영광만 생각하고서 응답한 것은 아닐까?”
천사가 일부러 십자가에 관한 말을 감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은 나중에 시메온 예언자가 하게 되는데(루카 1,34-35),
복음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어도
가브리엘 천사가 십자가에 관한 말을 먼저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라는 천사의 말에는,
“부르심에 응답하면, 모진 고난과 시련도 겪겠지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십자가를 다 알면서도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할 때,
그것이 참으로 가치 있고 위대한 응답과 순종이 됩니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모든 십자가를 감내할 각오를 하고서
응답하고 순종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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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12월 21일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설레는 만남이 펼쳐집니다. 이 기쁨을 제1독서와 복음이 서로 화답하듯 주고받지요.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 성령 잉태 후 마리아는 길을 떠납니다. 요즘과 달리 교통이나 편의시설, 치안 수준에서 당시는 젊은 여성이 여행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서둘렀다고 하네요. 신중하고 차분한 면이 없지 않을 것 같은 마리아에게서 매우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면모가 돋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천사가 전한 엘리사벳의 고령 임신을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있고, 엘리사벳의 노산을 돕기 위해 갔다는 해석도 있습니다만, 지금 마리아를 움직이는 힘은 그 무엇보다 그녀 태중에 잉태된 주님의 마음에서 솟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의 여인은 자기를 향해 시시각각 다가오는 연인을 떠올리며 환호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 2,8)
사랑에 깊이 빠진 한 여인이 보입니다. 사랑으로 그녀의 볼은 붉게 달아오르고 심장은 쿵쾅거립니다. 그녀는 뜨거운 사랑의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외치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사랑을 입안에 담아둘 수는 없지요. 아직 연인이 자기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지만, 그녀에게는 연인의 수려하고 황홀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현재진행형입니다.
여인은 연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산과 언덕을 훌훌 날듯이 뛰어온다고 상상하지요. 맞습니다. 그녀 상상 속의 모습과 실제 다가오는 연인의 모습은 하나입니다. 게다가 기다리는 이나 다가오는 이나 한 마음입니다. 서로를 향한 사랑! 그 일치의 접점을 향해 몸과 마음이 환호하며 바삐 움직입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루카 1,41-42)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창조주의 방문에 어머니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기가 함께 환호합니다. 세상의 눈에는 한 여인이 또 다른 여인을 만나고 있지만, 영의 눈으로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말씀"과 "소리"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과 그분의 "선구자"가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시는 분은 온 인류가 기다린 분이고 또 우리가 매년 기다리고 맞이하는 분이십니다. 아울러 올해 코로나19라는 인류 공통의 특수 상황과 각자 개인이 겪는 실존적 상황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아가 2,10)
그렇게 서둘러 껑충껑충 산까지 뛰어넘으며 신이 나서 달려오던 연인이 어찌된 일인지 여인이 있는 곳으로 내처 들어오지 않고 멈춥니다. 그리고는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며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면서" 서성이지요. 그리고 속삭입니다.
아무리 사랑으로 물불 안 가리는 전능한 연인이어도 올 수 있는 곳은 거기까지인가 봅니다. 이제부터는 여인이 직접 문을 열고 나가야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 경계에 서서 연인이 달콤한 목소리와 달콤한 내용으로 여인을 부릅니다. 이른바 꼬셔내는 듯한 분위기지요.
여인이 있는 곳은 "바위틈, 벼랑 속"(아가 2,14)으로 표현됩니다. 어딘가 비좁고 음습하고 위험하고 꽉 막힌 듯한 곳이지요. 요한이 머무르는 엘리사벳의 태 안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애타게 찾으면서도 정작 용기를 내어 마음을 열지 못하는 여인의 한계일 수도 있습니다. 메시아를 애타게 부르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선뜻 맞이하지 않는 인류의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지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마리아는 믿음으로 복된 여인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지금 메시아를 기다리는 인류와, "바위틈, 벼랑 속" 비둘기 같이 두려움에 주저하는 여인과, 각자의 어둠과 상처에 묶여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묘약일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기는 우리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믿음은 주님께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는 결단이고 선택이지요. 그래서 믿는 이는 기쁩니다. 오시는 분을 이미 기쁨으로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기뻐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주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행복을 믿음으로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와 사랑을 나누고 일치를 이루시려 위엄과 위용을 던져버리시고 (채신머리 없이) 겅중겅중 뛰어오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가슴 설레게 고대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시대와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각박해도 사랑하는 그분을 생각할 때 마음에서 솟아나는 영적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한답니다. 아가의 신부처럼, 어머니 태중의 요한처럼 이 기쁨과 이 행복을 온전히, 마음껏 누리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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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이병우 루카 신부님. <12월 21일>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1,39)
그 고을이 '아인 카렘'(Ain Karem)이라는 곳입니다. 아인 카렘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고향으로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곳입니다. 그곳은 베들레헴에서 7-8km의 거리에 있지만, 마리아가 있었던 나자렛에서는 130km 떨어져 있는 꽤나 먼 곳입니다.
마리아가 그곳을 찾아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또 다른 여인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두고 이렇게 큰 소리로 칭송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오늘 독서는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아가1,1)인 아가서인데, 아가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연인에 비유해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아가2,8)
우리는 11월29일 대림 제1주일부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준비해 오고 있습니다. 때가 가까워 주님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오실 주님, 오셔야만 하는 주님께서 도착하실 때가 거의 다 되었다는 것을 아가서는 노래합니다.
그분을 간절히 기다려온 이들의 기쁨이 얼마나 클까???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러운 이 세상 안으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의 오심은 우리의 나약함, 나의 나약함 때문이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잘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코로나가,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시는 주님 성탄에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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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 21일. <인간관계를 내 마음대로 끊어도 되는가?>
오늘 복음은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내용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가만히 보면 인간관계가 매우 협소해 보입니다. 성경만 보면 성모님이 많은 사람과 교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지만 그분이 친밀하게 교제한 분들은 손에 꼽을만합니다. ‘모든 사람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제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그 깊이가 줄어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관계란 주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이긴 하지만, 관계를 끊는 것을 두려워해서 모든 사람과 연결되려고 하는 마음도 바꿔야 합니다. 그러다 누구와도 교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끊을 것은 끊고 맺을 것은 맺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관계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께서 맺어주셨다면 반드시 좋은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발전이 없다면 과감히 끊어야 합니다.
40세에 배우 오디션에 나가서 5등을 한 아직도 신인배우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우 허성태입니다. 그는 연봉 7천이 넘는 회사에서 8년을 일하다 결혼하고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배우의 길로 뛰어든 사람입니다. 회사의 생활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며 2남 1녀를 잘 키워주신 어머니는 연신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해주었고 그것 때문에 결혼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시작한 연기자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습니다. 갖은 단역을 거치며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습니다. 그가 뜨게 된 것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입니다. 그 영화에서 송강호 씨에게 뺨을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뺨을 맞으면서도 너무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가 존경하는 김지운 감독 밑에서 그가 사랑하는 배우 송강호 씨에게 뺨을 맞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었습니다. 물론 아주 유명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젠 어느 정도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습니다.
뺨을 맞으면서도 행복하다면 그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허성태 씨는 직장에서 하도 긴장하여 손에 땀이 흐르는 다한증까지 생겼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연봉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다면 자신과 같은 용기를 내어보라고 말합니다.
[참조: “하고 싶은 걸 하세요”, ‘대기업을 관두고 맨땅에 헤딩을 하다’, 허성태, JTBC 말하는대로, 유튜브]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현실의 벽에 부딪힙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아까워서 계속 끌려다니면서도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여서가 아니라 나의 집착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은 지금 다니는 직장이나, 혹은 지금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주님께서 교제하라고 맺어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과 다 결혼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만 혼인할 수 있도록 정해주십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그 이상의 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정해주신다고 믿으면 그만큼 끊는 선도 확실해집니다. 그래서 관계를 끊지 못해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느 선에서 끊어야 하느냐인 것입니다. 그리고 끊거나 이어갈 사람을 어떻게 분별하느냐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겠습니다. 성모님은 그 귀한 시간에 엘리사벳에게 달려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엘리사벳에게 당신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늦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하여 기쁘기도 하겠지만 불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의 도우심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가셨습니다. 또한,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방문을 매우 감사해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며 황송해합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면 이렇게 상대를 높여주고 존중해주며 감사해합니다. 서로 행복해집니다. 성모님께서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시며 기쁨과 감사, 찬미를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이렇게 만남을 통해서 두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가 함께 맺힌다면 이것만큼 좋은 관계는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행복입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만남을 지속하거나 끊는 것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데 만나는 것은 내가 지닌 아주 조금의 성령의 힘도 열매 맺지 못하는 땅에 소진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속하면 성령께 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기다려줘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를 기다려 준 시간 정도는 노력을 하는 게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3년은 가리옷 유다를 참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반대로 가는 그를 더는 버티지 못하시고 악으로 넘겨버리십니다. 이것은 잔인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무의미하게 소진하지 않는 성령께 대한 존중입니다.
“아무리 문이 많아도 열리지 않으면 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3년 동안 열었는데 행복의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건 문이 아니라 벽입니다. 3년을 다녔는데 점점 더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주님께서 선택해주신 직장이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나 자녀와 같이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가 아니라면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소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래 만났는데도 성령의 열매, 행복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그래도 끊지 못하면 그건 나의 집착일 뿐입니다. 좋은 관계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서로 행복합니다. 하느님도 인간과 그런 관계를 맺으십니다. 물론 그분이 우리와 영원한 관계를 이어가시든지, 영원히 관계를 끊으시든지는 우리 각자의 죽음의 시간에 결정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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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21일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근처 아이들을 초대해서 조촐한 성탄 파티를 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코로나19 시대에 걸맞는 비대면 거리두기 성탄구유도 만들었습니다. 아기 예수님 따로, 성모님 따로, 성 요셉 따로, 목동 따로, 가축들도 각자 방 하나씩!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구유 앞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웰빙 점심 식사 후에는, 큰 산타 할아버지 신부님과 작은 산타 할아버지 신부님이 색소폰과 기타를 들고 등장했고, 아이들을 위해 성탄 캐롤 메들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신부님들의 연주에 맞춰 신나게 박수를 쳤습니다. 생후 8개월되는 아기도 함께 했는데, 그 아기도 신이 난듯 활짝 웃으며, 온 몸으로 리듬을 탔습니다. 참으로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작은 공연이 끝난 후에는 정성껏 준비한 성탄 선물 나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문화상품권이며 사탕, 초콜릿이 가득 담긴, 알록달록 예쁜 무늬의 커다란 양말을 받아든 아이들 얼굴마다에 환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참으로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봉독되는 루카 복음 말씀의 주제 역시 기쁨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나자렛의 마리아가 여섯달 전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아인카림의 엘리사벳을 찾아가 상봉하는데, 만남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두 사람은 큰 목소리로 찬가를 주고 받습니다.
영성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여러가지 결실들이 덤으로 주어지는데, 그중 가장 특별하며, 가장 높은 경지의 덤이 있습니다. 바로 충만한 기쁨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사셨던 탁월한 영성의 대가들, 성인성녀들을 삶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들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끝도없이 계속되는 시련 앞에서도 충만한 기쁨의 삶을 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누린 기쁨은 세상의 기쁨, 인간적 기쁨, 감각적 기쁨을 넘어서는 영적 기쁨이요,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나자렛의 마리아와 아인카림의 엘리사벳의 상봉을 바라보면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무척이나 서글프고 씁쓸한 만남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노산(老産)을 앞두고 있는 엘리사벳과 미혼모 후보자 마리아의 만남은 더할 나위없이 측은하고 안타까운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분의 만남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서글픈 만남은 단박에 충만한 기쁨의 만남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쁨에 넘친 두 여인은 목청높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서로를 환대하고 격려했습니다. 두 여인의 뱃속에 든 아기들도 덩달아 기뻐 뛰놀았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팬데믹 시대, 제한된 조건 속에 살아가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의 진수인 기쁨의 영성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파도가 아무리 높이 들이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도 작은 삶의 기쁨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겠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영적 기쁨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충만한 기쁨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우리 봉헌생활자들이 빛나는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야겠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생명의 광채를 반사하는 거울이어야겠습니다. 우리 각자 영혼의 등불에 성령의 심지로 불을 밝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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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김용원 토마스 신부님. ◉비우고 낮추인 자리에 오시는 주님◉
무소유(無所有)란 말이 있습니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소유는 궁색하게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내면에도 불필요한 것, 내버려야하고 끊어 버려야 할 습관이나 행동, 혹은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과감하게 끊어 버리고 낮추인 자세가 될 때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것이 분명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생명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수도회에 교만한 젊은 수사가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한 수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그 젊은 수사가 다가옵니다. 경험 많은 수사는 후배 수사에게 충고해 주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사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물은 옆으로 다 흘러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사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군.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자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주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자신의 것을 깨뜨리는 깨어짐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깨어짐은 더 좋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뿌리가 됩니다. 더 좋은 꽃을 피우기 위해 반드시 선행돼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모 마리아는 주님을 잉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주님이 들어오실 공간을 마련하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현실적인 눈,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기구한 두 여인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너무나 이상한 만남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만남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만남입니다. 한 여인은 노인인데 해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이상한 나머지 뒤에서 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다른 한 여인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습니다. 정식으로 혼인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졌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면 큰 일 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기구한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두 여인은 서로 기쁨과 감격, 행복에 찬 마음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아 오르는 환희의 기쁨을 억제할 수 없었던 나머지 두 여인은 부둥켜안고 노래를 부릅니다.
인간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기구한 운명의 만남이지만,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더할 수 없는 은총의 만남입니다. 육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너무나 이상하고 안쓰러운 만남이겠지만 성령의 눈으로 바라보면 더 할 나위 없이 귀중한 만남입니다. 왜 그럴까요? 두 여인은 자신을 비우고, 버리고, 깨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두 여인은 그냥 자신들 뜻대로 살았으면 탄탄대로에서 안락하고 따스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여인은 자신들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은 가파른 언덕길에서 신산(辛酸)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두 여인은 자신들 삶 안에 일어나는 납득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주님의 놀라운 섭리라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를 향해 엘리사벳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마리아는 평생토록 이런 믿음으로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며 사신 분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믿었고 그래서 늘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는 영성을 통해 주님을 맞이하십니다. 세상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 찬 사람들의 마음에는 결코 주님이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가득한 욕망, 계획, 의지를 버리고 낮추인 자세가 될 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일이 분명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완전히 비운 우리 안에 성령께서는 너무도 쉽게 임하실 것입니다. 편안하게 당신 거처를 마련하실 것입니다. 이제민 신부는 <수동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듯이 내 힘을 죽인 곳, 모욕과 침 뱉음과 폭력을 다 참아 받아들인 곳에서 인생은 꽃을 피우게 된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얼굴은 비록 고생으로 주름이 깊게 패였을지라도 평온하다. 아름답다.”
인고의 세월을 잘 견뎌낸 두 나무-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마침내 선구자였던 세례자 요한과 구세주였던 예수님이라는 꽃을 활짝 꽃피워냈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오랜 의혹과 안타까움의 세월을 끝까지 잘 견뎌내었으며,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구세사 안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으로 길이 기억에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을 본받아 주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낮춤으로써 신앙의 꽃을 피워내는 복된 신자가 됩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해남성당 김용원 토마스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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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12월 21일)
지붕과 골수를 뚫고….
정채봉 시인의 “만남”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납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와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립니다.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닿았을 때는 던져 버립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와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립니다.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임신 6개월이 된 엘리사벳은 성모님과 만나서, 성모님께서 임신한 사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에서 아이가 생겨서 기뻐했겠지만, 처녀의 몸속에 아이를 갖은 성모님의 임신은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복된 일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과 그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함께 기뻐하면서 성모님을 향하여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십니다.”라고 외치십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벳이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성모님의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 고운님들이 고통 중에서도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고운님들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주님의 생명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고운님들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또한 힘들다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씀으로 하느님을 믿는다면, 복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복된 사람이 부르짖는 기도와 원하는 일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아멘.
오늘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말을 듣고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던 말씀 그대로 주님께 충실한 고운님들에게도 끊임없이 인사말을 건네고 계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영혼!”
그러므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기도하고 간구하면 희망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언젠가 이루어 주시겠지요.
고운님들에게는 너무나 긴 날들이지만, 주님께서는 천년이 하루 같으시니, 믿고 구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베드로 2서 3장 8절).
그러니 주님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주님 때문에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구원과 축복과 은혜의 때가 꽉 찬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어느 날 하느님의 천사가 성모님에게 “구세주의 잉태”라는 놀라운 소식이 전하면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하고 말씀합니다.
성모님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모님은 갈대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하느님을, 죽은 사람을 살리신 하느님을 부모님으로부터 말씀으로 들었고, 그리고 그 하느님은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세상에서 가장 복된 여인이(어머니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멘.
로마서 10장 17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그때부터 기도를 시작할 때마다 성경을 펴놓고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그 순간부터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믿음으로 말씀을 은혜롭게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믿음의 손을 내미시는 고운님들에게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특히, 저 두레박도 말씀을 듣고 전하는 주님께 충실한 사제로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간호하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이라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그때가 되면, 고통과 곤경 속에 있는 고운님들의 집 지붕(보이는 모습 그대로)을 뚫고, 또한 걱정이나 염려 속에 있는 고운님들의 골수(마음속의 깊은 곳)를 뚫고 치유와 회복이라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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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1일 월요일 매일미사 _엄익재 라파엘 신부 집전
https://youtu.be/sLFgo3LrCF4 (24:01)
•2020. 12. 21.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엄익재 라파엘 신부 (서울대교구 용산 본당 보좌) 집전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 신부님 강론 7분 52초부터 11분 21초까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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