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신문예> 121호(2024년 1/2월)를 통해 "치욕의 길-남한산성 서문"을 돌아본다.
치욕의 길
- 남한산성 서문
차용국
남한산성 서문은 높아서 시야가 넓다. 문루에 올라 바라보는 서울은 고층 건물과 아파트가 빼곡하다. 초고층 롯대월드타워(555.65m)가 코앞에 서 있는 것처럼 가깝다. 한강은 수직의 빌딩 사이를 겨우 비집고 기어가는 뱀처럼 기진해서 맥없어 보인다. 서울의 주거지와 상가는 산성 바로 밑까지 파고들어서, 서문 밖 산길은 가파르지만 거리가 짧다. 산성 아래 거여·위례 사람들은 서문을 들락이며 남한산성을 산책하듯 오간다.
서문은 산성의 대문중에서 가장 추레하다. 통로는 낮고 비좁다. 겨울은 뒤끝이 길어서 서문을 나와 서울로 내려가는 비탈길 낙엽 속에 언 잔설이 숨어있다. 미끄럽고 위험하다. 밟혀 뭉개진 잔설의 빙판은 아물지 않은 상처의 딱지를 드러낸 채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삶에서 쉬이 떨어지지 않고 대책 없이 엉겨 붙은 치욕恥辱의 파편처럼 날카롭고 더럽다.
400여 년 전, 인조와 신료들은 서문을 나왔다. 서문 출행은 인조가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청국이 정한 문이고 길이었다. 눈발이 얼어붙은 비탈길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려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서문에서 서울은 가까우나 송파 삼전나루 수항단受降檀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김훈이 소설『남한산성』에서 인조 일행의 서문 행렬을 그린 장면은 오히려 담담하다.
"대열은 행궁을 나와 서문으로 올라갔다. 임금과 세자는 말을 탔고, 신료들은 걸었다. 안개가 자욱했다. 성벽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성 밖의 계곡들과 들판도 보이지 않았다.
성안에 남는 사대부와 궁녀들이 서문 앞에 모여 통곡하며 절했다. 임금은 돌아보지 않았다. 서문은 홍례가 낮았다. 말을 타고 홍례 밑을 지날 때 임금은 허리를 숙였다. 서문 밖은 내리막 경사가 가팔랐다. 말이 앞쪽으로 고꾸라질 듯이 비틀거렸다. 말은 힝힝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은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임금은 내리막 산길의 중턱쯤에서 걸음을 멈추고 땅바닥에 앉아 쉬었다. 강의 먼 하류 쪽부터 날이 밝아왔다. 빛들이 강물 위에 실려서 상류 쪽으로 퍼져갔다. 안개가 걷히고, 물러서는 어둠의 밑바닥에서 거여ㆍ마천의 넓은 들판이 드러났다. 임금은 오랫동안 밝아오는 강과 들을 바라보았다. 강과 들은 처음 보는 산천처럼 새롭고 낯설었다."*
* 김훈, 『남한산성』381쪽, 학고재, 2021
치욕의 길이었다. 스피노자B. Spinoza는 『에티카』에서 ‘치욕이란 우리가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라고 말했다. 쉽지 않은 말이다. 치욕은 타인의 비난으로 상처 입은 자존감에서 일어나는 슬픈 감정의 하나로 개인의 슬픈 감정에만 수반되는 것일까? 국가 안전망이 붕괴되어 보호받지 못한 민중의 치욕도 오로지 개인이 감내할 슬픈 몫으로 치부置簿해도 되는 걸까?
임금과 신료들이 백성을 내팽개치고 산성에 틀어박혀 47일 동안 대책 없이 존버* 하며 한 일이란 겨우 말싸움뿐이었다.
* 존버 :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 유저들이 사용하는 ‘존나 버로우’ 스킬에서 유래하여 ‘존나게 버티기’로 변천된 비속어의 줄임말로, 엄청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참고 버티는 상황에 사용한다.
그들은 온갖 미사여구의 수사修辭를 덧붙이며 허물을 숨기고, 허깨비 이념에 편승해서 헛것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고상하게 떠들었다. 말은 말로 편을 갈라 말을 살찌우며 말로 말과 싸웠을 뿐이다. 말은 말과 뒤엉킬 뿐 산성을 넘지 못하고, 삭풍에 얼어붙은 성벽에 부딪혀 되돌아 휘몰아치면서 비좁은 성안에 날카로운 ‘말의 성벽’을 쌓으며 경계 그었다. 말은 화려했으나 실체가 없었고, 백성이 살아가는 데 사소한 보탬도 되지 않는 그들만의 언어 유희遊戲였다. 김훈은 『남한산성』부록 '못다 한 말‘에서 이렇게 썼다.
"말의 길은 마음속으로 뻗어 있고, 삶의 길은 땅 위로 뻗어 있다. 삶은 말을 온전히 짊어지고 갈 수 없고 말이 삶을 모두 감당해낼 수도 없다.
말의 길과 삶의 길을 이으려는 인간의 길은 흔히 고통과 시련 속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은 전인미답이고, 우회로가 없다.
임금은 성안으로 쫓겨 들어왔다가 끌려 나갔고, 폐허의 봄에 냉이가 돋았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그 성안에 모여들어서 봄 농사를 준비하고 나루가 초경을 흘리는 대목으로 내 소설은 끝났다. 나는 정축년(1637년)의 봄을 단지 자연의 순환에 따른 일상의 풍경을 묘사했다. 이념의 지표가 없는, 진부한 결말이지만 억지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일상의 구체성 안에서 구현될 수 없는 사상의 지표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고립무원의 성안에서 많은 언어와 지표들이 뒤엉켰는데, 말, 그 지향성 안에는 길이 없었고, 말의 길을 이 세상의 땅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곳에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겨우 생겨났다. 그 길은 문명의 흔적이 없는 황무지를 건너가는 길이었고, 아무도 디딘 적이 없는 땅에 몸을 갈면서 나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 김훈, 『남한산성』397~398쪽, 학고재, 2021
결국 대책 없이 존버하며 벌인 말쌈의 끝판은 치욕일 뿐이었고, 그 치욕은 수항단에서 끝나지 않았다. 치욕은 한강과 압록강을 넘어 심양으로 이어졌고, 그 길 위에 흐르는 눈물과 울부짖음은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었다. 인조와 신료들은 수항단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과 충성을 맹세하며 머리를 바닥에 찍고 궁궐로 돌아왔지만, 청군에 붙잡힌 50만여 명의 ‘피로인被擄人’은 영문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심양으로 끌려갔다.
피로인은 전쟁포로가 아니었다. 인조와 신료들이 남한산성에서 존버하며 말쌈할 때, 청군에게 붙잡힌 서울과 경기 백성이었다. 청군은 동물 사냥하듯 ‘인간 사냥’을 자행했다. 피로인은 청군이 가장 선호하는 전리품이었다. 대략 150만 명 정도의 만주족이 중국의 주인으로 부상하면서, 피로인은 고질적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는 수단이자 돈을 벌 수 있는 상품이었다.
“피로인들은 농장 등지에서 노비로 사역되었다. 신체가 건장한 자들은 군대에 편제되어 또 다른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 여자들은 궁중에 들어가 시비侍婢가 되기도 했다. 특히 철장鐵匠, 야장冶匠 등 특별한 기능을 가진 피로인들은 상대적으로 우대”*하기도 했다.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2』285쪽, 푸른역사, 2016
피로인이 돌아오려면 몸값(속환가, 贖還價)을 지불해야 했다. 청군이 돌아갈 때 사람당 남자 은 5냥, 여자 3냥 하던 몸값은 심양의 ‘인간시장’에서 수백 냥으로 폭등했다. 양반 기득권자들은 온갖 수완을 부려 그 몸값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민초들은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몸값이었다. 몸값을 지불하고 돌아와도 치욕은 멈추지 않았다. 특히 여성에게 가해진 삭풍은 비극을 초월했다. 환향녀還鄕女라 부르는 속환녀贖還女는 가족과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죽지 않고 돌아온 그 자체가 죄를 지은 셈이었고, 그 죄값은 가혹했다.
지금 저 아래 마천루의 도시에서는 헛것의 이념에 진득이처럼 매달린 말과 말이 광장과 SNS를 들쑤시고 있다. 국민의 삶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자신들만의 언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