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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3) 요셉 피츠마이어 (상)
공의회 정신에 따른 성경 연구에 기여한 신약 성경 학자
미국 출신의 예수회 사제 요셉 어거스틴 피츠마이어(Joseph Augustine Fitzmyer, 94)는 신약 성경학자이자 아람어 학자이며 사해 문서 전문가다. 신약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유다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동시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에 대한 큰 관심과 연구가 이뤄지도록 견인차 역할을 했다. 피츠마이어 신부가 교회와 학계에 미친 영향을 소개하기 위해 먼저 학문적 배경과 학자로서의 경력에 대해 알아보겠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주된 저서와 업적을 제시하겠다.
생애와 학문적 배경
피츠마이어 신부는 1920년 11월 4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38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인디애나주 예수회 신학교에서 그리스 고전 문학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피츠마이어 신부는 벨기에 에겐호벤에 있는 예수회대학과 루뱅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52년 루뱅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으로 고등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피츠마이어 신부는 본격적인 성경 공부에 몰두했다. 그런데 그가 성경 공부를 시작했던 상황은 현재와는 사뭇 다른 환경이었다. 지금은 역사 비평적 연구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 역사 비평적 성경 연구를 위한 대헌장이라 불리는 회칙 「성령의 영감」을 발표한 비오 12세 교황. 교황은 이 회칙을 통해 가톨릭 학자들이 역사 비평적 연구 방법론을 성경 연구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교회는 근대주의 위협 앞에서 한동안 비평적 성경 연구를 금지했다. 비평적 성경 연구를 위한 대헌장(Magna Carta)이라 할 수 있는 비오 12세 교황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 1943) 반포와 함께 교회는 역사 비평적 연구 방법론을 성경 연구에 적용하는 가능성을 가톨릭 학자들에게 열어줬다. 가톨릭 교회 보수 진영은 이러한 조처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은 비오 12세 교황 회칙에서 지시하고 있는 바를 「계시헌장」(Dei Verbum)에 수용했다. 비오 12세 교황 회칙 반포에서 계시헌장 발표까지, 곧 1943년에서 1965년 사이에 로마에 있는 교황청 성경 연구소와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가톨릭대학교, 예루살렘에 있는 성경학교와 같은 가톨릭 고등교육 기관들이 회칙이 장려하는 바에 따라 새로운 성경 연구 방법을 익힌 성경학자들을 배출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배출한 성경학자들의 성경 연구는 근대주의에 저항하던 기존의 보수 진영, 곧 가톨릭 절대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경을 공부했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1953년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했고, 곧이어 기록적인 시간 내에 박사 학위 과정도 마쳤다. 1956년 그는 유명한 성경 고고학자인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1892~1971) 교수 지도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논문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문헌에 기초한 아람어 문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지도 교수인 올브라이트 박사는 성경과 고대 근동학 연구에서 혁혁한 업적을 남긴 조지 어니스트 라이트(1909~1974), 레이먼드 브라운 (1928~1998), 그리고 데이비드 노엘 프리드먼(1922~2008)의 스승이기도 하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1957년 로마 교황청 성경 대학에서 성경학 고등석사학위(S.S.L.)를 받았다. 같은 해엔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서 사해문서 가운데 성경이 아닌 자료들의 목록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연구 및 저술활동
이렇게 성경 연구에 필요한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모두 마친 그는 메릴랜드 주 우드스탁대학에서 신약 성경 및 성경 언어를 가르치는 조교수가 됐고, 1964년 전임 교수가 됐다. 또한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아람어를 가르친 동시에 방문 교수로서 예일대학교에서 신약 성경을 가르쳤다. 이후 시카고대, 뉴욕 예수회 학교인 포담대, 웨스턴예수회신학교 등을 거쳐 1986년 미국가톨릭대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이내 명예교수로 복직, 1999년에서 2004년까지 신약 성경과 아람어를 가르쳤다.
- 앵커 바이블 시리즈로 집필한 「루카 복음 주석서
피츠마이어 신부는 이처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거의 온 생애를 교수직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교수직 외에도 미국성경학회가 펴내는 전문 학술잡지인 「the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미국가톨릭성경학회 전문 학술잡지인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그리고 「New Testament Studies」와 같은 주요 성경 잡지의 편집자로도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피츠마이어 신부는 1984년부터 1995년까지 교황청 성경위원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피츠마이어 신부가 성경위원으로 활동하던 때인 1993년 교황청 성경위원회는 성경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헌인 「교회 안의 성경해석」을 발표했다. 그는 이 문헌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 이 문헌이 널리 전파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피츠마이어 신부의 학문적 연구 활동 범위는 매우 방대하다. 그는 학문 활동의 초기부터 왕성한 연구 활동을 펼치며 구약성경, 신약성경, 사해 문서, 아람어 문서들에 관한 연구 결과를 꾸준히 책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다른 학자 작품에 대한 학문적인 대화와 비평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유명한 성서 주석서인 앵커 바이블 시리즈의 「루카 복음 주석서」를 집필했다. 앵커 바이블 주석서 시리즈는 그의 지도 교수였던 올브라이트 박사와 그의 또 다른 제자인 데이비드 노엘 프리드먼 박사가 1956년 함께 기획한 것이다. 그들은 이 주석서의 주된 독자층을 학자들과 상당한 교육을 받은 비전문가들로 정했고, 주석서 필진은 가톨릭 학자들과 개신교 학자들, 그리고 유다인 학자들을 두루 포함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현재 이 주석서 시리즈는 본문 이해에 필요한 자세한 입문 자료와 정확한 본문 번역, 그리고 역사 비평적 방법론에 따른 본문 주석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앵커 바이블 주석서 시리즈 가운데 신약 성경 주석서로는 「요한 복음 주석서」가 가장 먼저 출판됐는데, 이 주석서를 집필한 이는 피츠마이어 신부와 평생에 걸쳐 우정을 나눈 동료, 레이먼드 브라운 신부다. 두 신부는 학문에 있어서도 선의의 경쟁자였지만, 세계적 수준의 우편 수집가로서도 경쟁했다고 한다. 그러나 브라운 신부는 1998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4) 요셉 피츠마이어 (중)
초기 유다교와 사해 문헌 연구에 정통한 대가
신약성경 연구
피츠마이어 신부의 「루카 복음 주석서」는 두 권으로 출판됐는데, 첫째 권인 「루카 1-9장」(1981)은 루카 복음의 연구사를 개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 복음서의 집필 시기와 저자, 복음서의 독자와 구성, 문체와 언어, 본문의 전승에 대한 주제를 차례로 다뤘다.
이 첫째 권 주석서에는 꽤 긴 논문인 ‘루카 복음의 신학에 대한 소고’라는 글이 들어 있는데, 이것으로 인해 피츠마이어 신부의 「루카 복음 주석서」는 이 주제에 관한 최고의 단행본으로 알려지게 됐다. 그는 또한 같은 주석서 시리즈의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주석서」(1993),「사도행전 주석서」(1998),「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주석서」(2001)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주석서」(2008)를 집필했다. 이로써 피츠마이어 신부는 바오로 서간 전문가로서도 연구를 활발히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석서들에는 피츠마이어 신부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는 신약 성경을 주석하면서 구약 성경과 제2 성전기의 유다교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해 성경 각 권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밝혔고, 사해 문헌에 관한 연구 결과 또한 성경 주석 작업에 종종 활용했다. 그리고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1-12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언급하는 ‘아담의 죄’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1장 2-16절에 나오는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하는 이유’와 같이 본문 해석과 관련해 자주 제기되는 질문의 경우에는 그 본문들과 관계된 학자들과 토론하고 연구한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제시했다.
-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주석서
그의 주석서들은 성경의 두 가지 의미, 곧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를 밝히려는 그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피츠마이어 신부에게 있어 성경의 자구적 의미를 안다는 것은 ‘성경 본문을 집필한 저자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본문이 전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 본문의 자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성경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성경 본문의 자구적 의미는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봤다. 성경 본문의 자구적 의미에 바탕을 두고 그 본문이 어떻게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곧 성경 본문의 영성적 의미를 읽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그 본문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어떻게 미리 보여주는지를 읽어내는 것 또한 성경 본문의 ‘영성적 의미’를 읽어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가 성경 연구 활동을 하던 초창기에는 가톨릭 보수 진영의 학자들이 성경을 역사적 비평적 연구 방법론에 따라 읽고 연구하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성경 연구에 왜 역사적, 비평적 방법론을 적용할 필요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 본문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신학적 통찰과 민감성을 가지고 역사적 비평 방법론을 적용할 때 이 방법론이 교회의 삶과 신학을 모든 수준에서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아람어와 사해 문헌
그는 또한 아람어와 사해 문헌 연구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학자였다. 이 분야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는 신약성경 연구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아람어 연구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그는 같은 예수회 소속이었던 다니엘 헤링턴(1940~2013) 신부와 함께 「팔레스타인 아람어 교본」(1977)을 출판했고, 「성경 아람어 사전」(A Lexicon of Biblical Aramaic)(2011)을 편찬했다. 그리고 사해 문서 가운데 「창세기 외경」(Genesis Apocryphon, 2004)과 「아람어 토빗기」(2003)에 대한 그의 주석서들은 쿰란 연구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가 사해 문헌을 공부할 때 참고 교재로 봤던 「사해 두루마리와 그리스도교의 기원, 사해 두루마리 연구와 관련 문헌」(2007)과 「사해 두루마리의 영향」(2009)도 피츠마이어 신부의 저서들이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학자들을 위해 사해 문헌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사해 문헌에 관한 일반인들의 궁금점을 풀어주기 위해 「사해 문헌에 대한 101개의 질문에 대한 응답」(Responses to 101 Questions on the Dead Sea Scrolls, 1992)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사해 문헌에 관한 그의 열정과 학자로서의 경험은 2004년 미국 가톨릭대학교에서 은퇴한 후에도 후학들 성장에 귀한 거름이 돼 줬다. 은퇴하고 나서도 그는 조지타운대학교에서 학부 학생들에게 사해 문헌에 관한 지식을 나눠 주기 위해 강의를 했다.
그가 발표했던 다양한 논문을 한데 모아놓은 두 권의 논문 모음집은 피츠마이어 신부의 학문적 연구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신약 성경의 셈어적 배경에 대한 에세이 모음」(Essays on the Semitic Background of the New Testament, 1971)이고, 다른 하나는 「유랑하는 아람인: 아람어에 관한 에세이 모음」(A Wandering Aramean: Collected Aramaic Essays, 1979)이다. 이 두 권의 에세이 모음집은 「신약 성경의 셈어적 배경」(The Semitic Background of the New Testament, 1997)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재출판됐다. 여기에 게재된 논문 대부분은 신약 성경 연구와 관련 있는 쿰란 문헌을 분석한 것이다. 쿰란 문헌에 대한 그의 분석 작업은 가톨릭 교회 사제라고 하는 그의 종교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유다교 자료를 아주 균형 잡힌 시각에서 공정하게 다룬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다인 학자들 사이에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 자료는 초기 유다교를 연구하는 데 꼭 참고해야만 하는 자료로 알려져 있다. 쿰란 문헌의 대가인 유다인 학자 로렌스 쉬프만은 ‘쿰란 문헌을 통해 본 사도행전의 유다 그리스도교’(Jewish Christianity in Acts in Light of the Qumran Scrolls)라는 제목의 피츠마이어의 논문은 그리스도교와 초기 교회를 낳게 한 유다교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논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5) 요셉 피츠마이어 (하)
성경 연구, 상아탑 넘어 교육과 종교간 대화에도 앞장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 신약성경의 아람어적 배경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는 고대 유다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보고(寶庫)와 같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약성경의 호칭에 대한 문헌학적 고찰」(The New Testament Title ‘Son of Man’ Philologically Considered)이라는 논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개념과 용어들이 생겨난 배경이 되는 유다교를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와 아람어 서간학에 대한 연구는 제2 성전기와 초기 랍비 시대 유다인의 사고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열쇠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유다인 학자 로렌스 쉬프만은 피츠마이어 신부를 두고, 사도행전 5장 34절에 나오는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라고 평했다.
사제로서 사목적 관심과 배려
피츠마이어 신부의 학문적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연구 활동은 대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로서 그는 신자들을 향한 사목적인 관심과 배려 또한 잊지 않았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일반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노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하기 이전인 1964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성경 강좌를 개최하는 ‘여름 성경연구소’를 만들었고, 그 후 25년간 이 연구소를 이끌었다. 2013년 이 연구소는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그 이름을 ‘조지타운대학교 요셉 피츠마이어 성경 연구소’로 바꿨다.
가톨릭 교회 내 일반 신자들에게 성경 지식을 나누고자 하는 피츠마이어 신부의 관심은 일반 신자들이 쉽게 참조할 수 있는 주석서를 편찬할 의향을 품게 했다. 그의 바람은 같은 뜻을 지녔던 다른 두 가톨릭 성경학자들과 협력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됐다. 미국 가톨릭 성서학계의 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뜻을 함께한 것이다. 예수회의 피츠마이어 신부, 슐피츠회의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 가르멜회의 롤랜드 머피 신부는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68)와「신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90)를 편찬했다. 이외에도 피츠마이어 신부는 여러 본당 단체들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강의했는데, 팔순을 넘어서도 계속했다고 한다.
종교간 대화 활동
그는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파를 초월해 신학적 대화를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79년부터 1988년까지 교황청 일치평의회 자문위원으로서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과 대화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꼽는다면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대표자들이 ‘의화론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을 하게 된 기념비적 사건이다.
- 교황청 일치평의회 의장 카시디 추기경(오른쪽)과 루터교 세계연맹 크라우저 회장(왼쪽)이 의화론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30년 간 두 교회 간 대화에 참여했다. 출처=http://elcic.ca
의화론(義化論)은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간의 오랜 쟁점이었다. 루터교는 믿음(신앙)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했고, 가톨릭 교회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두 교회는 공동 선언을 통해 “구원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할 힘을 주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고 합의했다.
공동 선언이 발표된 날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95개의 주제문을 붙였던 날과 같은 날이다. 공동 선언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두 교회가 35년간 신학 대화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신약 성경 학계의 주도적인 가톨릭 학자로서 거의 30여 년에 걸쳐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간 대화에 참여했다.
평가와 인간적 면모
지금까지 살펴본 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생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현재까지 약 60년에 이르는 가톨릭 성서학계의 역사를 요약하는 것과 같다.
그는 공의회 이전까지 이뤄진 가톨릭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19세기 이후 개신교 성경학자들이 성경 연구에 적용한 방법들을 성경 연구에 도입했다. 이제는 그의 뒤를 이어 훨씬 더 많은 가톨릭 성경학자들이 학문적인 성경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피츠마이어 신부처럼 학문적인 성경 연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학자들 덕분에 성경 연구에 바탕을 둔 초교파적 신학 대화의 문이 그전보다는 훨씬 더 넓게 열리게 됐다. 그리고 피츠마이어 신부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성경에 대한 지식에 목마른 수천 명의 남녀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피츠마이어 신부가 세운 여름 성경 연구소로 밀려들었다.
피츠마이어 신부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거의 수도자처럼 생활한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저녁 8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들었다.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서 피츠마이어 신부는 아주 정확하고 꼼꼼했다. 논문을 쓸 때 사용하는 일차 자료와 이차 자료를 모두 두 번씩 반복 확인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학문적 논쟁에 참여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인 모임을 통해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의 여러 곳을 방문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이와 함께 그는 성경 연구만큼이나 요리를 즐겼다. 이제 만 94세가 된 피츠마이어 신부는 워싱턴 D.C.에 있는 예수회 대학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평생을 교육자로서 가르치고, 미래의 학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열정을 쏟았던 그의 모든 노력은 이제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후학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여름 성경연구소를 통하여 배웠던 수많은 평신도와 성직자, 수도자의 삶의 통해 이어질 것이다. 피츠마이어 신부가 뿌린 씨앗은 온 세상 곳곳에서 오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6) 존 필 마이어 (상)
‘역사적 예수’ 가장 치밀하게 연구한 성경학자
20세기 미 가톨릭 성경학자 중 독보적
20세기를 빛낸 미국의 가톨릭 성경학자로서 존 필 마이어(J.P.Meier, 74, 뉴욕대교구) 신부는 독보적인 인물에 속한다.
마이어 신부는 1964년 성 요셉 신학교에서 신학 학사, 1968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신학 석사, 1976년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마태오 복음에 관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최우수 논문(summa cum laude)으로 선정돼 교황 금메달을 수상했다. 마이어는 1984년부터 미국 가톨릭대학교에서 신약 성경을 가르쳤고 지금은 노트르담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마이어의 학문적 관심은 역사적 예수, 마태오 복음서,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다교, 콥트어 토마스 복음서와 공관 복음서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1991년부터 현재까지 4권으로 간행된 방대한 예수 연구서인 「주변부 유다인: 역사적 예수의 재고」(A Marginal Jew: The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시리즈다.
마이어는 초기에 마태오 복음 연구에 집중하여 「마태오」(Matthew, 1980), 「마태오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1993) 같은 저서를 간행했다. 그 뒤로 그는 브라운(R.E.Brown)과 「안티오키아와 로마」(Antioch and Rome, 1983)를 함께 썼고, 「신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New Jerome Biblical Commenatry, 1993) 개정판에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관한 글을 썼다.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명과 교회 :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연구」(The mission of Christ and His Church : Studies on Christology and ecclesiology, 1990)를 펴냈고 역사적 예수 연구 방법론, 예수의 비유, 예수와 율법 등에 관한 논문들을 주요 학술 잡지에 발표했다.
마이어는 오랜 시간 「계간 가톨릭 성경」(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신약 연구」(New Testament Studies), 「사해 발견」(Dead Sea Discoveries) 과 같은 유수한 성경 학술지의 편집 책임자로 활동했고 여러 대학에 초대받아 강연하는 등 학문적 연구 결과를 일반 청중에게 전달하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구 방법론-역사적 예수 연구의 배경
마이어는 성경 연구에 역사 비평이라는 소위 통시적 연구 방법을 집중적으로 사용한다. 독일에서 발전한 역사 비평의 세 분야인 출전 비평, 양식 비평, 편집 비평을 적절히 활용하여 성경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초대 교회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특히 그는 「마태오 복음 주석서」와 공저 「안티오키아와 로마」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을 초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재구성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마이어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역사 비평 방법을 가장 치밀하게 적용하고 그 연구 결과를 필생의 대작인 「주변부 유다인」에 집대성하였다.
마이어는 왜 역사적 예수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을까. 일찍이 라이마루스(1694~1768)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별한 이후 개신교의 비판적인 성경학계에서는 20세기 전반부까지 불트만을 중심으로 역사와 신앙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불가지론의 입장에서 신앙의 결단만을 강조하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50년대 불트만의 제자 케제만이 예수 전승의 진정성을 살펴보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비유사성(dissimilarity)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됐다.
그 뒤로 역사적 예수 연구는 ‘새로운 탐구’ 시기를 거쳐 1980년대 이후 ‘제3의 탐구’에 이르러 예수의 면모를 유다교 틀 안에서 이해하고 고고학과 사회학, 종교학, 심리학과 같은 인문ㆍ사회 과학과의 학제간 연구 등 복합적인 방법론을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성경학계는 알버트 슈바이처 이래로 견지돼 온 종말론적 예수상을 역사적 진실로 대부분 인정하지만 북미의 일부 학자들이 주도했던 ‘예수 세미나’는 비종말론적인 예수를 주장하고 1990년대부터 대중 매체를 통해 이를 선전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예수 세미나’ 학자들은 초기 형태의 토마스 복음을 문헌과 동시대에 놓음으로써 사실 역사적 예수는 묵시문학적 예언자가 아니라 지혜의 스승이었다고 해석하고 예수를 사회 개혁의 예언자, 전복적인 현인 등으로 묘사한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마이어는 역사 비평적 방법을 철저하고 온전하게 활용해 해석자 자신의 심리적인 투사를 지양하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곡해를 걷어내고 진실을 찾고자 한다. 그러면 여기서 사용되는 역사성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 될까.
역사성 판단의 기준들
마이어는 먼저 당혹성의 기준(The Criterion of Embarrassment)을 첫 번째 준거로 활용하는데 이는 예수의 세례와 같이 초대 교회로 하여금 당혹감이나 어려움을 불러일으킬 만한 예수의 말과 행동이 역사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 기준은 불연속성 내지 비유사성의 기준(The Criterion of Discontinuity or Dissimilarity)인데 당시의 유다교와도 구별되고 초대 교회의 전통으로부터도 연역될 수 없는 전승을 찾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이 기준은 유다교의 환경 안에서 성장한 예수가 자연히 유다교의 종교 유산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가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세 번째로 다수적 증언의 기준 (The Criterion of Multiple Attestation)은 예수의 말이나 행위가 다양한 전승에서 발견되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마이어는 흔히 사용되는 위의 세 가지 기준 외에 거부와 처형에 대한 기준 (The Criterion of Rejection and Execution)을 제안한다. 예수가 유다교 지도자들과 로마 관리에 넘겨져 폭력적인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유다인들의 왕으로 재판받고 처형에 이르게 한 예수의 말이나 행동의 역사성을 판단하는 데 활용한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7) 존 필 마이어 (중)
예언자 · 세례자 · 치유자 등 다양한 얼굴 지닌 ‘역사적 예수’
존 필 마이어 신부가 추구하는 역사적 예수는 역사 비평 방법으로 재구성된 학문적 결과이다. 그리하여 마이어는 역사적 예수의 학문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처음부터 신앙을 배제하고 순전히 역사적 방법으로 복음서를 분석해 예수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마이어에 의하면 역사적 연구의 목표는 역사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개연성을 확보하는 하는 것이다.
「주변부 유다인 1」 - 문제와 인물의 뿌리
마이어는 자신의 저서 「주변부 유다인」 제1권에서 예수의 생애를 1세기 팔레스티나의 나자렛을 배경으로 살펴본다. 예수는 헤로데 대왕(재위 기원전 37~4년) 말년인 기원전 4~7년 사이에 베들레헴보다는 나자렛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예수는 기원후 28년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요한 복음서의 연대기에 따라 해방절과 안식일이 겹쳤던 30년 4월 7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보인다.
마이어는 요셉이 다윗 가문의 후손이고 가족 구성원의 이름들이 과거 영광스러웠던 성조들, 이집트 탈출, 약속의 땅 정복 시기의 인물에게서 빌어왔다는 점에 주목하고 예수 가족의 이름들이 이스라엘 재건에 대한 열망을 지닌 갈릴래아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나 마이어는 예수의 동정녀 잉태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의 자료에만 등장할 뿐, 마르코 복음과 요한 복음 나아가 사도 바오로 서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사성을 판단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고 본다. 마르코 복음 6장에 등장하는 요세와 야고보 등의 형제자매들이 예수의 사촌이라는 예로니모의 해석은 사촌(콜로 4,10)이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요셉의 전처 소생이라는 에피파니아의 견해도 성경 자체에 근거한 것이 아닌 구전 전승에 근거한 것으로 보고 일찍이 제기된 헤제시푸스(Hegessipus, 2세기)와 헬비디우스 (helvidius, 4세기)의 해석 전통에 따라 예수의 형제들은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낳은 자식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한다.
예수의 직업인 목수(tekton)는 생계를 위해 힘들게 노동을 하는 요즘의 ‘블루칼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바오로처럼 전문적인 랍비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아람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히브리 성경을 읽고 글을 쓸 줄 알았으며 이방인들을 만나고 생업에 필요한 기초적인 그리스어 지식을 습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는 당대의 유다교 전통과 달리 세례자 요한처럼 독신이었을 것이며, 사제 계급이 아닌 평신도 신분이었다.
「주변부 유다인 2」 - 멘토, 그리고 하느님 나라 말씀과 기적
마이어는 「주변부 유다인」 제2권에서 예수의 멘토(스승), 메시지, 기적을 주제로 예수의 말씀과 행위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예수는 한때 요한 세례자의 제자 그룹에 속해있었으며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루카 7,28)라고 칭할 만큼 요한을 위대한 예언자로 평가하였고 그에게서 세례 활동과 종말론적 전망을 이어받았다.
예수는 1세기 종말론적 유다인 예언자로서 하느님 나라가 임박한 미래에 다가오리라고 선포하였으며,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 준비 예식으로 세례를 베풀었다(요한 3,23). 그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쳤고,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열두 사도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말론적인 재건이 이루어질 것이며 여기에 이방인들도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예언했다(루카 13,29). 동시에 예수의 구마 행위들과 기적적인 치유를 통해서 적어도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다고 선포됐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들에게 미래의 구원을 이미 중개해 주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구원 체험은 그가 세리 및 죄인들과 자유분방하게 식탁의 친교를 나누고, 제자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단식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예수가 누구였건, 그리고 그가 어떤 인물이었건 간에 그는 하나의 신학적 제목이나 사회학적 모델로 쉽사리 담아낼 수 없는 복합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주변부 유다인’(A Marginal Jew)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종말론적인 예언자, 세례자, 구마사, 기적을 행하는 자(miracle-worker), 치유자,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적 스승의 면모 등이 예수라는 인물 안에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여러분에게 왔다(루카 11,20)는 예수의 말씀은 결국 그분의 기적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마이어는 기적 이야기가 복음서 모든 전승 층에서 언급되고 있다는 다수적 증언의 기준, 설화와 토막 말씀(로기아) 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는 양식비평의 관점, 나아가 그리스도교와 무관한 1세기의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예수를 놀라운 일들(paradoxa)을 행하는 이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기적 전승의 역사성은 매우 견고하다고 평가한다.
- ‘눈 먼 이를 고치는 예수’, 유스타쉬 르 쉬위르 작. 존 필 마이어 신부는 예수라는 인물 안에는 종말론적인 예언자, 세례자, 구마사, 기적을 행하는 자, 치유자, 율법을 가르치는 랍비 등 다양한 인물이 혼합돼 있다고 봤다.
마이어는 구마 행위 중에서도 특히 귀신 들린 소년 이야기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구마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으로 소급해 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마이어에 의하면 치유 전승은 비록 후대에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 다시금 편집되기는 하였지만, 중풍 병자 이야기(마르 2,1-12), 벳자타 못의 중풍 병자(요한 5,1-9),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마르 10,46-52), 벳사이다의 눈먼 사람(마르 8,22-26), 실로암 연못에서 씻은 눈먼 사람(요한 9,1-7), 귀먹은 반벙어리(마르 7, 31-37),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는 이야기(마태 8,5-13;요한 4,46-54)는 역사의 예수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희귀하지만 다수적 증언의 기준과 다양한 형태의 문학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야이로 딸의 소생이야기(마르 5,21-43), 나인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 (루카 7,11-17), 라자로를 살리는 이야기(요한 11,1-46) 속에는 편집 이전의 초기 전승이 담겨 있다고 본다. 특히 어록 전승(마태 11,5)은 예수께서 공생활 중에 죽은 이를 살리셨음을 말해준다.
‘자연 기적’이라고 분류된 이야기 중에는 군중에게 빵을 먹인 이야기만을 제외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다양한 신학적 목적을 위해 초기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다수적 증언과 종말론적인 특별함이 있는 즐거운 식사를 하는 예수 습관에 대한 일관성의 기준으로 볼 때, 빵의 기적 이야기의 근저에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본다. 마이어에 의하면 빵의 기적 이야기는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예수께서 많은 군중과 더불어 물고기가 곁들인 기억할 만한 식사를 했다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하여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8 · 끝) 존 필 마이어 (하)
5부작 시리즈 통해 예수의 역사적 진실 세세히 파헤쳐
「주변부 유다인 3」 - 추종자들과 경쟁자들
존 필 마이어 신부는 제3권에서 군중, 열둘, 여자들로 구성된 추종자 그룹을 분석하고 아울러 경쟁자들의 역사적인 면모를 재구성한다. 예수의 경쟁자들로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쿰란 공동체 포함), 그리고 ‘제4 철학(the fourth philosophy)’을 분석한다. 제4 철학은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하고도 진실하신 통치자라는 믿음으로 서기 6년 유다 지방에 대한 로마의 지배와 조세에 저항한 갈릴래아 사람 유다와 그의 후계자들을 가리킨다.
흔히 혁명당원으로 동일시되는 젤롯당(Zealots)은 68년 로마 항쟁 때 출현한 조직이기에 예수의 직무 기간 중에 활동한 세력은 아니다. 예수의 직무 기간 동안 무장한 혁명당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쿰란 공동체가 속해 있던 에세네파는 종말론적인 지향성과 성전 사제 계급과의 거리감에서 예수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정ㆍ부정의 엄격한 기준과 이에 따른 탈속적인 삶의 모습에서 예수와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성문화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하고 종말론적인 교리를 거부했던 사두가이파와 달리 바리사이파들은 ‘선조들의 전승들’(traditions of the fathers)을 율법과 함께 받아들이고 율법 해석의 관용성, 일상에서 사제적 이상을 지향하는 정결법에 대한 관심, 그리고 부활과 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한 종말론적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협동설을 강조하였다. 예수와 바리사이파와의 관계를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이유는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은 초기 그리스도교와 바리사이들의 후신인 랍비 유대교와의 대립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70년대 이전에는 갈릴래아 지방에 바리사이파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주로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 퍼져 살았다. 이러한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도 갈랄래아의 예수가 유다의 바리사이파들과 얼마나 논쟁을 할 수 있었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주변부 유다인 4」 - 율법과 사랑
마이어는 제4권에서 예수와 율법(이혼 금지, 맹세 금지, 안식일, 정결법) 그리고 사랑의 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마이어는 4권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결국 역사적 예수는 유다교의 틀 안에서 성장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진실한 유다인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는 종말론적 예언자로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조명하에 율법을 새롭게 해석했다. 마이어에 의하면, 바로 여기서 유다교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이중적인 면모가 드러난다고 본다.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할라카적 예수(halakic Jesus)의 본래 모습이 역사적으로 손실되었던 것은 양식 비평이 지적하듯이 초대 공동체의 상황이 예수 전승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이어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조명 아래 율법을 해석하는 할라카적 예수가 역사적 예수의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하고 있다.
종합 및 평가
마이어의 「주변부 유다인」은 이제 마지막 5권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마이어는 5권에서 예수의 비유, 예수의 자기 지칭 표현 그리고 예수의 죽음이라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마지막 연구 과제로 남겨놓고 있다.
아직 5권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4권까지 내용을 바탕으로 마이어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시도해보고자 한다.
첫째, 무엇보다 마이어는 역사 비평의 통시적인 분석이 설화 비평이나 독자 반응 비평과 같은 공시적 분석 방법에 의해 대체되거나 평가 절하되는 현금의 주석학계에서 역사 비평의 정당성과 효용성을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탁월하게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이어에 의하면 공시적 분석은 전승이 형성되고 전달되어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양식 비평을 전제할 때, 올바른 의미와 기능을 가질 수 있다. 복음서는 순전히 저자가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니라 기존의 전승들을 취합하고 편집한 결과라는 것이 역사 비평의 통찰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이어가 재구성한 예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향된 예수 세미나의 오류를 극복하고 1세기 유다교에 뿌리를 둔 유다적인 예수를 그려준다. 역사 비평이 재구성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미래와 현재를 선포하는 종말론적 예언자, 기적 수행자, 스승의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이른바 ‘주변부 유다인’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예수는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 ‘그리스도의 부활과 빈 무덤 앞의 여인들’, 프라 안젤리코 작. 역사 비평이 재구성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미래와 현재를 선포하는 종말론적 예언자, 기적 수행자, 스승의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이른바 ‘주변부 유다인’이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예수는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 신앙에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셋째, 마이어에게 역사와 신앙은 서로 구별된다. 역사는 신앙을 증명할 수 없으나 신앙의 이유를 나름대로 제공할 수 있다. 예컨대 예수의 동정녀 잉태 전승에 대한 역사 비평적 연구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앙의 근거를 역사적으로 제공할 수 없으나 그 신앙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할 수는 있다. 이 점에서 마이어는 역사의 예수와 실제의 예수, 그리고 복음서의 예수를 구별한다. 실제의 예수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 예수를 의미하고 복음서의 예수는 복음서 저자 및 신앙 공동체가 기억하고 고백하는 예수를 가리킨다. 역사적 예수는 복음서가 말하는 신앙의 예수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역사적 개연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넷째, 마이어는 그러나 역사가 신앙에 개연성을 제공하는 역사적 작업에 철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이어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자 근거인 예수 부활을 역사적 연구의 대상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정의하는 기적이란 시간과 공간 내에 발생한 비일상적 사건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다. 그런데 부활은 시공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사건이기에 기적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고 따라서 역사적 연구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이어는 부활이 철저히 신앙의 문제이지 역사가의 탐구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마지막 작품이 될 제5권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부활은 시공간 안에 발생한 초월적인 사건이다. 빈 무덤 이야기와 발현 이야기가 이 점을 암시한다. 사실 부활이 시공간 안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그리스도 신앙은 가현론 내지 영지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신약 성경의 어느 전승보다도 부활 전승이야말로 정작 마이어가 역사성 판단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당혹성의 기준, 비유사성의 기준, 다수적 증언의 기준, 거부와 처형의 기준까지 충족시키는 소위 역사적 개연성을 지닌다. 마이어는 역사성 판단의 기준을 동정녀 잉태 전승을 포함하여 기적이야기에는 적용하고 왜 부활 이야기에는 적용하기를 거부하는가? 마이어는 부활을 역사적 범주 밖에 위치시킴으로써 신앙과 역사를 분리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마이어는 불트만 류의 불가지론 내지, 신앙과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변증법적 신학의 틀로 회귀하고 만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어의 5부작 「주변부 유다인」은 예수의 역사적 진실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파헤친 세기의 대작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세계의 많은 독자는 마이어가 끝까지 건강을 유지하여 마지막 제5권의 집필을 완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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