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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목록
-박설하 시인의 시세계: 『화요일의 목록』 읽기
배옥주
1. 당신들이 조립한 표정
늘, 윗니를 온통 드러내며 가지런하게 웃는 박설하 시인. 안륜근까지 풀어헤친 그녀의 무방비한 웃음 앞에선 왠지 덩달아 순해진다. 오래 불 밝힌 심장으로 써내려간 ‘당신들’의 목록을 펼친다. 그녀가 풀어나가는 ‘당신들’의 목록에는 밀당의 고수인 ‘당신들’과 시적 주체(시인)가 서로를 밀고 당기며 관계를 이어간다. 여기서 ‘당신들’은 현실 속의 타자인 ‘당신’이면서 현실 속의 자아인 ‘나’와 관계하는 존재들이다. 그녀가 이번 시집에서 건네주는 ‘당신들’의 스펙트럼은 굴절률이 다양한 ‘우리들’ 모두를 포괄한다. 그녀는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당신들’의 다양한 문제를 감정 정화와 승화된 치유의 해학미로 형상화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다원적이며 상대적이다.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정서적 유대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유동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박설하의 시편들은 비판이나 경멸, 냉소보다는 치유와 화해의 긍정적 웃음을 통해 현대인들의 부조리와 무지를 깨닫게 하거나 연민이나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부정적인 현실까지도 긍정적인 삶의 활력소로 회복시킨다. 박설하의 시에서 드러나는 해학미는 다원성과 상대성을 향한 현실을 반영한 시적 도구로 활용된다. 그녀의 시편들은 내적 필연성으로 억눌림이나 고통의 자리에 존재하는 ‘당신들’을 해방시켜 정신적인 자유를 제공한다.
이번 시집의 중심이 되는 해학미는 시 곳곳에서 사려 깊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며 악압된 감정을 해소하여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인류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를 ‘웃음’이라고 했다. 박설하는 자신이 가진 무장해제의 웃음을 ‘당신들’ 뒤편에 배경으로 세워두었다. 시인은 각각의 시에서 불러 세운 ‘당신들’과 시적 대상과의 관계를 다양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렇다면 그녀의 무수한 당신들은 어떤 표정을 조립하고 있을까?
2. 당신들의 바깥
박설하의 시편에서는 당신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녀가 그려내는 ‘당신들’은 정서적으로 메말라가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들은 공동체나 개인의 관계 속에서 표면적으로는 웃고 있지만 슬픔이 겹쳐진 ‘웃픈’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웃기면서 슬픈, 그래서 더 먹먹해지는 웃음은 대상을 포용하는 정화의 역할을 담당한다.
나를 그을 수 있는 건 없다. 파유리의 약점을 찌를 거다. 손자국 없는 갈굼. 해고수당을 올릴 수 있다면 잔업쯤은 밀어부칠 거다. 이주노동자 노라와 공장장의 불법사생활을 움켜쥐고 컨테이너 휴게실에서 쨉쨉 샌드백을 간보는 나는 계과장. 기세등등한 공장장의 배짱을 벤치마킹한다. 근면한 밴딩벨트를 노려보며 내부고발! 중지를 날린다. 아무도 못 쓰는 월차를 쓰고 야근 따윈 뒷전. 하하하. 목청을 뚫고 들어오는 경고는 짧고 굵게, 내일 뱉을 독설을 예고한다.
나는 들개. 세치 혀로 김대리의 새가슴을 교란 작전에 끌어들인다. 달군 강화로에 뒷담화를 굽는다. 유리가루 덮인 불법을 들먹이고 하극상을 대리한다. 나직할수록 먹히는 독설로 현장을 휘젓는 나를 제압할 수 없다.
굶어도 괜찮다. 다만 허기진 배를 걷어차진 마라. 깨진 유리로 환각을 긋고 나올 때까지.
- 「수정유리 계과장」 전문
한동안 드라마 <미생>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직장인의 애환을 잘 그려내 직장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미생’은 살아날 여지가 남은 돌을 뜻하는 바둑용어로 이 드라마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지칭한다. 드라마 <미생> 뿐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권변호사가 결국은 서울 시장이 되는 설정의 드라마 <퀸메이커>, 비정규직 부당해고에 맞서는 직원들의 영화<카트>까지 비정규직의 애환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는 많다.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애환이 깊다는 현실적 방증이다.
위 시에서는 ‘수정유리’ 공장의 계과장이 오히려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공장장의 불법사생활과 유리공장에서 벌어지는 불법을 약점으로 그러쥐고 “내부고발”의 중지를 날리며 엄포를 놓는 하극상을 보여준다. “공장장의 배짱을 벤치마킹”한 계과장이 휴게실에서 쨉을 날리고 “샌드백을 간보”면서 “독설을 예고”하고 있다. 약자의 위치에서도 되려 당당한 계과장의 독설은 속이 시원해지는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전해준다. 억눌리는 주체를 해방시켜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해학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과장은 김대리까지 끌어들여 교란작전을 벌이고 을의 입장에서는 하기 힘든 문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들개’로 정의된 계과장의 성이 계씨인 것은 동일한 발음의 ‘개’를 연상시키게 하는 시인의 전략적 의도임을 간파할 수 있다.
‘나’로 등장하는 계과장의 행동을 통해 발산되는 해학미는 간과할 수 없는 역설적인 울림을 준다. 그녀 스스로 비정규직 사원으로서의 동질감을 ‘나’인 계과장에게 이입해 지배층의 억압에 저항하는 동병상련의 정서를 웃음으로 형상화한다. 「수정유리 계과장」에서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사태를 뒤집는 의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이중섭의 그림 《소와 새와 게》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게’에게 가랑이 사이로 늘어진 불알을 물린 ‘황소’가 고통을 못 참을 때 ‘황소’뿔에 앉은 ‘새’가 조롱하듯 퍼덕이는 날갯짓은 강자와 약자의 기존 질서를 일탈하는 의미의 반전을 보여준다. 이렇듯 시인은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분방함’을 나타내는 카니발(Carnival)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 있다.
위 시가 현대 사회의 노동현실을 직시하여 부조리를 깨닫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반해, 아래의 시 「아저씨」는 긴장과 이완이 공존하는 또 다른 정서의 해학미를 드러낸다.
늦은 저녁을 받은 남자
식어가는 국으로 리모컨을 데우는 남자
먹으라는 채근을 모서리로 흩뿌리는 남자
‘지니’까지 애타게 불러대는 남자
마늘장아찌에서 텔레비전을 뒤적이는 남자
공들여 화제를 고르는 남자
가지런한 수저 위에 에로영화를 줄 세우는 남자
화면에서 깊은 밤을 꺼내는 남자
런닝 차림으로 연애 거는 남자
종료 버튼을 온몸으로 못 박는 남자
맞춰보고 싶은 속내를 외면하는 남자
속내를 맞추고 싶은 아내의 남자
비가 글썽이는 밤엔
곰으로 회귀하는 일상다반사적 아저씨
재방송은 언제쯤 끌 수 있을까요?
- 「아저씨」 전문
웃음과 슬픔의 뿌리는 하나인 불이不二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위 시는 남자인 당신의 행위를 통해 해학적인 웃음을 드러내고 있지만,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쓸쓸한 내면정서가 깔려 있다. 웃음을 가장한 쓸쓸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위 시의 ‘남자’는 화자의 남편이다. 지금 아내는 남편에게 늦은 저녁상을 차려주었지만, ‘당신’은 텔레비전과 리모컨과 한 몸이 되어 아내가 차려준 식사와 어서 먹으라는 채근까지 건성건성이며 TV시청 외에는 관심이 없다. ‘당신’은 “식어가는 국으로 리모컨을 데우”거나 “마늘장아찌에서 텔레비전을 뒤적”일 정도로 온통 텔레비전에 빠져 있다. 아내는 남편과 속내를 맞추며 밤을 보내고 싶지만 남편은 아내를 외면한 채 화면 속의 깊은 밤에 빠져 허우적댄다. 남편과 소통할 수 없는 막막한 아내의 눈에는 비조차 “글썽이”는 상황으로 다가온다. ‘글썽이는 비’에는 화자의 심사와 동일시된 감정이 실려 있다.
런닝 차림으로 TV화면에만 “연애 걸”고 차려둔 밥은 모르는 척 수저에는 손도 안 대고 “에로 영화를 줄세우”는 남편에게서 아내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비가 내리는 스산한 밤에 곰이 되어 텔레비전 속 동굴에 박히는 일이 일상의 다반사가 되는 남편의 아내는 재방송까지 섭렵하는 남편을 기다릴 뿐인 것을. 위 시에서 ‘당신’은 아내와 소통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자유자재로 끌고 다니는 가부장적 남편이다. 속내를 맞춰보고 싶어 재방송이 끝나길 기다리는 아내의 간절한 기다림은 남편의 일방적인 즐거움 앞에 무방비로 내던져진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이 마주한 현실 속의 ‘당신’을 ‘아저씨’라 호명하며 해학으로 이끌어낸다. 부부의 삶을 가치 있게 이끌어내려 애쓰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당신’의 이기심마저 양면적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3. 훔치고 싶은 당신들
박설하가 써내려간 ‘당신들’은 가까이 가고 싶지만 차마 닿기 힘든 상대들이다. 시인은 ‘당신들’에게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다양한 오브제를 차용한 메타포(metaphor)를 화자에게 걸어둔다. 다음의 시편들은 ‘모기’나 ‘노랑나비’가 된 화자의 다양한 행위와 감정을 통해 ‘당신’에게 화자의 의도를 직접적이거나 친숙하게 전달하는 수사적 장치를 활용하고 있다. 그녀는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들’에게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도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전달한다.
피를 나누고 싶을 만큼 떨리는 당신이
또 있을까요
서툰 날개를 모으고
겹눈을 부풀린 채 굽어봅니다
머리보다 높은 곳에서
레이더에 걸린 당신을 맴돌기로 합니다
고해성사가 끝날 때까지 고백은
닿을 수 있을까요
두 손으로 감싼 심장을 향해
파르르 떨리는 휘파람처럼
물고 물리는 관계는 구체적인가요
아랫입술을 포개면
윗입술도 달아오를 거라서
해명의 경계에서 함부로
열꽃이 피어납니다
피가 섞일 만큼
떨리는 당신이 또 있을까요?
- 「모기」 전문
알레고리는 전체가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관철되는 기법이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주장처럼 시 전체가 하나의 주제인 알레고리 기법은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로 작용한다. 표면에 형상화된 요소보다 이면에 담긴 내적 의미를 더 중요시하여,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개념이 더 우위가 된다. 위 시에서 ‘당신’이 흡혈 해충인 모기를 반기지 않을 게 당연한데도, 화자는 자신을 여름이면 찾아오는 불청객 ‘모기’로 규정한다.
화자는 “피를 나누고 싶을 만큼 떨리”는 ‘당신’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 하고 있다. 일방향의 사랑으로 “레이더에 걸”린 ‘당신’을 굽어보며 맴돌지만 ‘당신’에게 다가갈 자신이 없을뿐더러, ‘당신’에게 인정받을 자신조차 없어 보인다. ‘모기’가 된 화자는 감히 ‘당신’을 물지 못하는 소극적인 해충의 존재로 스스로 자신을 ‘당신’에게서 먼 곳에 둔다. 위 시를 통해 화자는 감히 닿을 수 없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먼발치에서 짝사랑하는 하찮은 해충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화자는 ‘당신’을 자신의 레이더에 가둬두었지만 “고해성사가 끝날 때까”지도 고백은 닿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설사 화자인 ‘모기’가 ‘당신’에게 닿는다고 해도 까딱 잘못하면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날 처지다. 그러므로 “물고 물리는 관계”는 일방적으로 끝날 개연성이 아주 높다. ‘모기’가 된 시적 주체는 자신에게 달아준 “서툰 날개”로는 ‘당신’과 피를 나눌 수 없을지도 모를 미래를 두려워하며 용기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신’의 암흑 속에서 자신이 깜깜한 무늬였다는(「규화목」) 것을 깨닫는 것이다. 다음의 시편 또한 표층적 의미와 심층적 의미의 충돌을 알레고리 기법으로 보여준다.
이마에 모래바람을 불어넣는
나는 노랑나비예요
당신으로부터 당신을 훔칠 거예요
<중략>
날개를 포갠 첫 여인이 되어서야
당신의 당신이 되어요
무성한 턱뼈를 건드려 보아요
심장에 핀 곰팡이는 당신의 전생일까요
눈을 감으면 다시 당신 곁이에요
고대를 건너온 날갯짓은
여러 생을 전전한 사랑
환생한 당신을 화인으로 남겨요
- 「람세스 2세」 부분
「모기」에서 화자가 ‘모기’였다면, 위의 시 「람세스 2세」에서 화자는 당신을 훔치고 싶은 ‘노랑나비’가 된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인 파라오다. 양머리 미라가 2000개 이상 발굴된 것으로 볼 때 이집트 왕조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파라오로 꼽힌다. 화자는 이렇게 강력한 파라오인 람세스 2세의 ‘당신’이 되고자 소망한다.
람세스 2세의 사랑은 “고대를 건너온 날갯짓”으로 여러 생을 전전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렇게 “환생한 당신”을 “화인으”로 남길 만큼 화자는 ‘당신’의 여인이 되고 싶다. 이미 천 년 전에 죽었다가 환생한 ‘당신’의 “첫 여인이 되”겠다는 염원은 “심장에 핀 곰팡이” 따위는 극복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시인은 ‘모기’나 ‘호랑나비’라는 객관적 상관물에 자신을 유비시켜 알레고리 효과를 극대화한다. 시적 주체는 그토록 “피를 나누고 싶”어 당신을 맴돈다. 또한 람세스 2세와 “날개를 포갠 첫 여인이 되”고 싶어 “환생한 당신을 화인으로 남”고자 발버둥친다. 하지만 자신은 결국 ‘당신들’을 훔칠 수 없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4. 안녕, 당신들
우리의 일상은 때로는 진부하고 때로는 고단하다. 물론 때로는 의미 있고 특별하기도 하지만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날이 이어질 때가 많다. 날마다 반복되는 보통의 일이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게 다반사지만 어느 날 문득, 특별하지 않아서 더 특별하게 와닿는 우리의 친애하는 ‘당신’들을 떠올리면 그 ‘당신’들은 안녕하신지(「사과의 속내」)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그 ‘당신’들은 더러 붉은 침묵을 천천히 접었다 폈다 다시 접기도(「남천」)하고, 삼동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파들파들」). 결국 ‘당신’들은 자아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지칭한다. 다음의 시에서는 일상의 배경이 되는 주변의 ‘당신’들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눈이 내릴 것 같다
이웃의 목록에 비닐하우스를 저장한다
택배가 오지 않는 날이다
불현듯 먹고 싶은 짬뽕은 읍내에 있다
나와 읍내 사이에는
배달 불가의 방어벽이 있다
바람을 뚫고 당도한 읍내 장터
중국집 문은 닫혀 있다
눈을 찌르는 앞머리가
낭패로 치렁이는 화요일
미용실마저 쉬는 날이다
불 꺼진 싸인볼 아래
길고양이가 털 고르듯 뭉쳐진 눈발을 굴리고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엄마가
별거 아닌 일로 다투기 좋은 날이다
치매방지책이라고 동생이 일러준다
꾹꾹 눌러 쓴 트집들이
믿고 싶은 줄거리를 지어내고 있다
친애하는 당신과 나
엄마와 아버지의 다정을
비밀 같은 눈이 날린다
가래와 삽 너머로
택배 안부가 궁금해진다
누가 나에게 요일을 배달시켰나
화요일에 걸린 시계가
여섯 시 칠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다
- 「화요일의 목록」 전문
「화요일의 목록」은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다. 화자가 써내려가는 화요일의 목록에는 다양한 대상과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화자가 살고 있는 곳은 배달이 되지 않는 촌락이다. 박설하 시인은 공직에서 은퇴한 남편과 함께 소와 농작물을 키우며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이 시는 자전적인 경험에서 획득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시인은 “이웃의 목록”에 저장한 ‘비닐하우스’와 이웃하는 촌락에 둥지를 틀었다. 비닐 지붕과 비닐 담으로 가려진(「비닐하우스가 보이는 my 하우스」) 창밖으로 눈이 내릴 것 같은 흐린 날. 화자는 불현 듯 ‘짬뽕’을 먹고 싶지만 배달이 되지 않는 전원주택에 살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참을 수 없는 식욕을 앞세우고 읍내로 달려가지만 화요일은 중국집이 문을 닫는 날이다. 게다가 치렁치렁 자란 앞머리를 자르고 싶어 들른 미용실마저 쉬는 날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화자는 하고 싶던 두 가지 일을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답답한 화자의 심사는 아버지와 엄마, 동생, 친애하는 ‘당신’에게까지 전해진다. 엄마와 아버지는 별 거 아닌 일로 다투고 있지만, 동생은 부모님의 말다툼이 치매방지책이 된다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연로한 엄마와 아버지는 어째서 아직까지도 다정하지 않은 것인지, ‘당신’은 왜 친애하지 않은 것인지. 화자는 “친애하는 당신”으로 존재하면 좋을 ‘당신’과 ‘나’의 관계 또는 이젠 다투지 않으면 좋을 “엄마와 아버지의 다정”을 믿고 싶은 서사로 지어낸다.
중국집도 미용실도 문을 걸어 잠근 화요일. 할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화자의 답답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눈을 찌르는 앞머리처럼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허기처럼 “화요일에 걸린 시계”가 여섯 시 60분을 지나 “칠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화요일을 빨리 넘기고 수요일을 맞고 싶은 화자의 내면 심사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칠십오 분’ 속에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다음의 시에서는 공무원에서 월산리 농부가 된 남편을 통해 시인과 농부 남편과의 관계를 끌어낸다.
당신은 물 장화가 어울려
삭은 볏짚이 들러붙어
추적추적 종아리를 따라다녀도
당신은 알곡을 셈하는 게 어울려
때아닌 폭우에 까뭇해진 마늘을 말려도
화요일 수요일이 다를 게 뭐야
구멍 뚫린 밀짚모자를 퉁명스럽게 고쳐 쓴다
검버섯이 어울려, 당신은
키보드 두드리던 손가락을 목장갑으로 감추고
굳은살이 거뭇거뭇 박힌
잡풀을 걷어내며
당신에겐 내가 잘 어울려?
흙탕물에 잠긴 채 꾹 입을 다문 마늘밭
두 발을 다지는 진흙은 뺄 수 없는 무게로 짓누르는데
검정비닐을 뚫고 올라온 마늘종들이
들리지 않는 매운 말을 주고받는다
때때로 어울리지 않는 변명이 있어, 우리에겐
당신 눈빛을 끌고 가는
월산리 그림자가 따갑도록 맵다
- 「월산리, 당신」 전문
위 시에서 ‘당신’은 물장화와 검버섯이 어울리고 일곡을 셈하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구멍 뚫린 밀짚모자와 목장갑이 더 어울리는 ‘당신’은 “키보드 두드리”던 공무원에서 잡풀과 마늘밭을 가까이에 둔 농부가 되었다. 매일을 밭에서 잡초와 씨름하는 ‘당신’에게 “화요일과 수요일”은 다를 게 없고 “굳은살이 거뭇거뭇 박”히는 하루하루의 연속일 뿐이다.
영락없는 농부로 자신의 몫을 묵묵히 해내는 데만 몰두하는 ‘당신’에게 화자가 불현듯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겐 내가 잘 어울”리냐는 화자의 물음에도 ‘당신’은 야속하게 묵묵부답 일만 하고 있다. 흙탕물에 잠긴 채 꾹 입을 다문 마늘밭은 바로 ‘당신’이며, “검정비닐을 뚫고 올라온 마늘종”들이 “주고받”는 매운 말은 일은 안 거들고 쓸데없는 질문만 한다는 ‘당신’의 핀잔이 잘 묻어나는 대목이다. 해보지 않던 농삿일에 적응하느라 힘든 ‘당신’의 처지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화자를 향해 ‘당신’은 말 안 해도 눈빛으로 알지 않느냐는 변명을 따가운 눈빛으을 보내고 있다. ‘당신’의 눈빛을 끌고 가는 월산리 그림자는 안 물어도 다 알지만 그래도 듣고 싶은 화자의 간절함이 깊게 묻어난다. 내게 어울리는 건 당신뿐이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될 걸. ‘당신’은 그 한 마디가 왜 그렇게 인색하단 말인가.
다음의 시에서도 생의 바깥을 잃고(「일자형 저녁 6시의 소파」) 안녕하지 못한 ‘나’의 내면이 형상화되어 있다
창밖에서 캐럴은 나를 훔쳐보곤 했어요
한겨울 밤이면
출근을 서두르곤 했지요
눅눅한 불빛은
고드름 아래에서 눈을 떴다 감곤 했어요
오로라를 찾아 빙하를 달려가곤 했지요
채찍을 휘두르다
개썰매에서 떨어지기도 했어요
눈밭으로 사라진 털복숭이들을 쫓아
하얀 밤이 달리기도 했지요
사이키 조명 사이로
끈적이는 12월을 놓치곤 했어요
밤무대에서 돌아온 엔카는
선잠에 들었다 깨곤 했지요
라면을 끓이면
허기진 목청이 뜨겁게 흘러내렸어요
끊어지는 면발을 휘휘 저으며
젓가락으로 바닥을 건져 올렸지요
식은 국물을 삼킬 때마다
잊어버린 가사가 밀려갔다 밀려오곤 했어요
오색 광도의 1번 트랙은 언제쯤 달려올까요
- 「12월의 오로라」 전문
오로라는 밤하늘에서 춤추는 빛으로 북극광으로 불린다. 지구의 자기장과 태양의 하전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빛의 향연이다. 위 시 「12월의 오로라」는 아직 빛의 향연을 즐기지 못한 엔카 가수의 힘겨운 삶이 녹아 있다. 오로라를 관측하기 좋은 시기는 4월에서 9월이지만 겨울에 오로라를 잘 만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위 시의 주체인 ‘나’는 밤에 “출근을 서두르”는 밤무대가수다. 가수로 성공하고 싶지만 밤무대를 뛰고 있는 지금의 ‘나’는 허기진 목청으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 식은 라면 국물을 삼킬 때면 “잊어버린 가사가 밀려갔다 밀려오”곤 하는 것으로 보아 정상적인 유명 가수가 되지 못 하고 밤무대를 전전하는 무명 엔카 가수인 것으로 보인다.
세상엔 너무 많은 가수 지망생이 있고 노래를 잘 하는 사람도 너무 많다. 그러니 성공하는 사람보다 밤무대에서 사라지는 무명가수가 더 많을 것이다. ‘12월의 오로라’는 오묘하게 빛날 ‘나’의 꿈을 대변해준다. “오색 광도의 1번 트랙”이 아직 달려오지 않았으므로 음원을 내고 싶지만 낼 수 없는 상황이거나, 음원을 냈다 하더라도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나’인 당신의 안위는 그렇게 평안해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가수가 아니라 화자가 이루고 싶은 꿈이 목표하는 1번 트랙은 언제쯤 오색 광도의 오로라로 빛날 것인가. 「12월의 오로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1번 트랙의 오로라에 닿지 못하는 화자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5. 당신들, 함께 물들 수 있을까요?
인상주의 화가 칸딘스키(Kandinsky, Wassily)는 내적 필연성內的 必然性을 강조했다. 회화작품에는 인간 내면의 정신적 법칙이 반영된다는 예술론이다. 우주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필연적 법칙은 정신과 감정으로 분출된다는 칸딘스키의 예술론을 통해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은 내적 필연성이 충만된 세계를 열리게 한다고 역설했다. 박설하의 목록에 저장된 ‘당신’들은 내적 필연성이 반영된 존재들이다. 시인은 ‘두근두근 한철 흩날리는 꽃잎’이다가 ‘닫힌 창구석’이다(「꽃물」). 그리고 ‘당신들’에게 가까이 다가와도 좋다고 말하면서 먼저 다가가는 ‘당신들’의 ‘당신’이다. 화자는 안개에 잠겨도 되는 나이의 ‘당신들’이 내준 어깨에 내려앉은 안개의 수심을 걷어내고(「고요한 어깨로 건너가는 두만강 푸른 물에」), ‘당신들’과 맞주름을 포갠 채 으깬 감자를 함께 즐기고 싶은(「솔라닌」) 마음 간절하다.
빛바랜 밤마다 ‘당신들’이 다가오는 꿈을 꾸거나 ‘당신들’과 같이 물들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은 현재진행형이다(「꽃물」). 꽃무늬로 물든 골목에서 시인은 언제쯤 ‘당신들’과 함께 물들 수 있을 것인가.
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 ‘시’ 신인상, 2022년 <애지> ‘평론’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시집 『오후의 지퍼들』과 『The 빨강』이 있으며 평론집 『언어의 가면』이 있다. 연구서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 공간』이 있으며, 『여성과 문학』, 『김명순에게 신여성의 길을 묻다』 외 여러 권의 공저가 있다. <요산창작기금>을 수혜하였으며 <김민부 문학상>과 <두레 문학상>을 수상했다. <부경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부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산작가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