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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1-23
성숙의 덫 / 김성덕 목사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경주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경주는 반듯이 출발선과 결승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출발선과 결승점 즉 목표가 무엇인냐?
만약 경주하는 경기자가 출발선을 무시한다거나 결승점을 모르고 달린다면
그는 아무리 잘 달린다 할지라도 실격처리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출발선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성경에서는 사42:3절에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사41:14절에는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되려 남에게 해를 끼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말합니다.
그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면 실격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출발선은 항상 자신이 무능한 존재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결승점은 어디입니까?
이 말은 3월은 성숙의 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목표가 무엇인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신앙생활 하는 목표가 무엇인냐는 것입니다.
엡4: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결승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무엇인냐? 그리스도를 닮은 자신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나다니엘 호오돈의 큰바위 얼굴이 기억납니다.
호오돈은 철저한 청교도 신앙을 가진 인물입니다.
교과서에 실릴 때에는 문학적 가치 때문에 실어겠지마는 그러나 큰 바위 얼굴은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어떤 모습인가를 잘 설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어느 동네에 어네스트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언젠가 저 산꼭데기에 있는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전에 말하던 큰 바위 얼굴을 꼭 닮은 위인이 드디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곳 청년 중에 도시에 나가 돈을 벌여 큰 장사꾼이 된 <개드골드>라는 사람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는 날 온 동네사람들은 그가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감탄을 하지만 어네스트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실망을 합니다.
얼마후 다시 동네에 큰바 위 얼굴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2>
그는 일찍 군에 입대하여 전쟁 영웅이 되어 개선장군으로 돌아오는 <올드 블러드 앤드 샌드>라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네스트는 그의 모습을 보고도 실망을 합니다.
또 몇해가 지났습니다.
그 동네 출신으로써 훌륭한 정치가가 되어서 금의환향하는 <올드 스토니 휘즈>라는 위인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그가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하지만 역시 어네스트는 그도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이제 어네스트도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동네에 시인이 찾아와 큰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살아온 어네스트를 바라보고는 [보라 어네스트야 말로 큰바위 얼굴과 꼭 같지 아니한가?]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돈 많은 부자입니까? 한 세기의 영웅대접을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성있는 위인이 되는 것입니까?
이대로 주님을 바라보다가 주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경주의 푯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의 삶의 모습 가운데 예수를 닮은 모습, 예수를 닮은 삶,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경주의 푯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경주는 좀 특이합니다.
단순한 경주가 아니라 장애물 경주이기도 합니다.
저도 학생시절에 한때 3000m 장애물 선수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장애물을 넘고 또 건너서 달려간다는 것이 참 멋이 있어 보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 장애물 경주입니다.
우리는 그 장애물을 잘 넘어야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경계를 하기 위해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구약을 이해하는데 어려운 점은 우리가 그냥 읽어 나가면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같이 그 온 땅 곧 산지와 온 남방과 고센 온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의 산지와 그 평지를 취하였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을 물리치고 그 땅 모두를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을 다시보면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산지에서 아낙사람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성읍들을 진멸하였으므로]
22절[이스라엘 자손의 땅 안에는 아낙 사람이 하나도 남음이 없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었더라] 하며
그리고 23절에 [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 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 가운데 자세히 보면 <3> 뭔가 한가지 사실을 감출려고 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다 멸절 했는데~ 하면서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약간 남았더라 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특히 신앙이 성숙하는데 어려운 점이 다음과 같은 점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여기는 것 크게 여기고 하나님이 대수롭잖게 여기는 것 작게 여기는 신앙은 상당히 경지에 이른 신앙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별로라고 하는 것 사람들은 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만 해도 그렇습니다.
말로는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야 하지만 실지로는 대학들어가는 것, 사업 잘 되는 것, 출세하는 것 이런 것들이 예수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여호수아가 지나가면서 이야기 하듯이 [유다와 이스라엘에 있는 아낙 사람 다 진멸했습니다. 단지 가사와 가드 그리고 아스돗에 조금 남았 있습니다.]
이 말씀 이면에는 조금 남은 아낙 자손 대수롭잖습니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읍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대수롭잖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낙 자손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그기서 살아가는데 아무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조금 남아있는 아낙 사람들 대수롭잖게 여겨지지만 후일에 이들이 얼마나 큰 방해거리가 되고 원수가 되는지 이스라엘은 몰랐지마는 하나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만약 이때에 여호수아가 [ 하나도 남김없이 취하라 ] 했더라면 그당시에는 마음만 먹어면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랬더라면 평생 후회할 일이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수롭잖고 간과한 그 일이 나중에 얼마나 큰 불행을 초래하는지 이스라엘은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점입니다.
오늘 나의 나의 삶에 불편함이 없다고 그냥 넘어 가버리다가 나중에 큰 불행이 되어서 다가올 일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즉 나의 삶에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남겨둔 아낙 사람은 없느냐는 것입니다.
나의 삶 속에 나중에 거침돌이 될 만한 요소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4>
1. 가사라는 곳을 생각해 봅시다.
가사는 나중에 불레셋 나라의 중요한 도시 중에 하나로 나타납니다.
삿16:에 보면 이스라엘의 유명한 사사 삼손이 가사에 가서 그기서 기생 들릴라를 알아 결국은 잡혀서 머리 깎이고 눈 빼이고 감옥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합니다.
만약 이 지금 여호수아가 [ 저 성을 취하라 ]라고 했더라면 이렇게 나중에 가사에서 삼손이 불행을 당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지금 대수롭잖게 여겼던 것이 당대에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던 삼손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불행을 낳게 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나의 신앙의 삶에 가사에 남겨둔 아낙 사람 없습니까?
오늘 내게 가사가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를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가사 !
삼손을 넘어지게 했던 가사, 오늘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가사입니다.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유혹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사입니다.
나라가 평안하고, 교회가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한 것 다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편한 것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하고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별 지장없다고 해서 남겨둔 세상적인 요소들이 나중에 나의 신앙생활에 올무가 되고 나의 신앙의 성숙에 덫이 된다는 것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제가 서울에서 만났던 여 집사님 이야기입니다.
서울에 큰 교회 집사로서 남편은 큰 제과공장 월급 사장입니다.
그러니 생활에 어려움이 없고 자녀들도 대학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 집사직은 맡았지마는 주일 낯 예배만 참석하지 그 외에는 교회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닌 교회라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지 가끔 주일날 남편하고 등산도 가고 모임도 갑니다.
결국은 남편은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사주와 갈등이 생겨 50이 넘어 사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경제문제에 부딪치니 자녀들이 먼저 방황을 합니다.
남편 의지하고 살다가, 남편 좋은대로 하다가 남편이 실직하게 되니 자신이 너무 무능하게 느껴집니다.
문제가 이쯤되면 평시에 신앙생활 제대로 했더라면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릴건데
그럴 믿음과 용기도 없습니다.
결국은 고민하다가 병을 얻게 되어 온 사방이 막히니 그때사 주님 앞에 엎드렸지마는 벌써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한테 하는 말이 [목사님, 왜 그때 우리 목사님 나 한테 책망을 안했는지 원망스럽습니다]
그렇습니다. <5>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다고 세상반 교회반 적당히 걸쳐 살다가 결국은 낭패 당하고 보니 신앙생활 제대로 할 걸 후회하지만 늦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교회가 이런 잠자는 교인들에 대해 책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뭐할려고 교회 책망받으려 나온냐?
위로하고 칭찬하는 교회도 많은데 .....
그러나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상반 교회반 두다리 걸치고 예수 믿는 것 처럼 살아가는 교인들 지금 아무일 없다고 대수롭잖게 생각하다가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일 터지면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교회보다 콘도가 더 편한 것 같고 주일날 장사하면 더 부자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사의 아낙자손 나중에 큰 올무가 되고 나의 신앙의 덫이 된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사의 아낙 자손 결국은 이스라엘의 화근이 되듯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려는 안일한 마음 나의 신앙의 성숙에 덫이 된다는 것 바로 깨닫고 세상에서 안일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가드를 생각해 봅시다.
삼상17:4절에 보면 [불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이요(2m 7-80cm)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요 그 다리에는 놋정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그 창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한 마디로 사람이 아니라 영화에나 나오는 괴물 같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모욕하지마는 이스라엘 40만 대군 가운데 그 누구도 나갈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너무 잘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극적인 장면에 모두가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해봅시다.
얼마나 모욕적이고 또 두려워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없었더라면 불레셋에 지배받고 피로 물든 제2의 사사시대가 되지 아니했다고 누가 장담하게읍니까?
우리는 단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믿음과 용맹만 기억합니다만 이 일이 왜? 일어난지는 알려고 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이 일이 왜 일어 났습니까? 근원적으로 올라 가면 바로 여호수아가 가드에 아낙 사람을 조금 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조금 남겨둔 아낙 사람 중에서 골리앗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6> 가나안 사람 다 쫒아 내고 저들 풍속 좇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의 저력이요 능력입니다.
그런데 삼상8장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씀 순종하는 것보다 세상적으로 강하면 불레셋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에게도 강한 왕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겨난 왕이 사울입니다.
그런데 골리앗 앞에 사울이 무슨 쓸데가 있습니까?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훈련이 된 성도는 절대로 세상을 두려워 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세상에서 잘되면 누가 나를 건드릴 수 있나? 세상적으로 대책을 세우는 교인들 그러나 막상 그 대책은 골리앗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일류 대학만 들어가면 다 될 것 같고 유학만 같다오면 슈퍼맨이 될 것 같고
사업만 잘 되면 모든 것이 자기 생각대로 될 것 같지요.
그러나 되려 그것들이 골리앗이 되어 나를 낭패케 할 수 있다는 것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아직도 세속적 욕망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신앙생활 하는 성도 없습니까?
지금 포기하기는 쉬워도 나중에 그것이 골리앗이 되어 나타난다면 속수무책입니다.
가드의 아낙 사람도 정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으로 잘 나가면 형통하겠지 라고 착각하고 있는 교인이 있다면 지금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가드를 남겨두면 그기서 꼭 골리앗이 나타난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직분자라 할지라도 자녀들 결혼 할 때 보면 신앙 조건을 첫째로 드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어느 대학 나오고 직업이 무엇인냐? 그리고 가문은 어떠냐?
물론 이런 것들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교인들마져 신앙보다 이런 세상의 기준으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결혼생활 10년 만에 드디어 골리앗이 등장합니다.
그때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통곡을 해도 해결점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드를 남겨놓는 신앙생활 결국은 나의 신앙의 성숙에 올무가 되고 덫이 된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시골 교회 집회를 갔는데 <7>
그 교회 장로님 가운데 면장도 하시고 지역에 유지인 장로님이 계셔요.
그리고 주위에서 그 장로님 굉장히 칭찬을 해요
왜냐하면 큰 아들이 부장 검사가 되어 그 고을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온 동네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집회 도중에 목사님이 그래요.
[목사님, 아들 부잔검사 되었다고 다 잘된 것은 아닙니다.
큰 아들 키울 때 공부잘한다고 특히 고시공부 한다고 교회도 안나와도 장로님이나 권사님 아무런 권면 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고시합격하여 법관이 되고 지위가 올라가니 교회도 나오지 않고 꼭 집안 행사를 큰 아들이 주도해서 주일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들 마져도 꼭 주일날 불러서 잔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권사님은 돌봐주러 주일날 또 아들 집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로님이 속이 상하여 아들에게 바른 책망을 하니 이제는 아버지도 고집 부리지 말고 자기 방식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장로님 얼마나 귀가 막히겠습니까?
그 뒤로 장로님은 일체 큰 아들 집에 발걸음을 들어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부 잘해 일류대학 들어 갔다고, 좋은 직장에 취직 했다고 똑똑한 사위 삼았다고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가드의 아낙 사람 남겨두면 결국은 골리앗이 되어 돌아옵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앙의 성숙에 두 번째 걸림돌은 바로 세속적 욕망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고 강자가 되면 다 될 것같지만 때로는 그것이 골리앗이 되어 나의 신앙의 성숙에 덫이 된다는 것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3. 아스돗입니다.
삼상 4장에 아스돗 사건ㅇ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불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쳤고 불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날 전쟁에서 4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참패를 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불레셋에게 질 수 있느냐?] 해서 착안해 낸 것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에 도착하니 다시 사기가 충천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보병 삼만 명이 죽고 패전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 마져 불레셋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아스돗 사건은 이것과 연관되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상5:1절에 보면
[불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불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땅에 들어가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에벤에셀의 전투가 이스라엘에게 패배로 기록되고 있느냐? <8>
그것은 에벤에셀이 갖는 이름 때문입니다.
에벤에셀이란 뜻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는데 불레셋에게 패해습니까?
이 말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도왔다고 해서 미래가 약속된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은혜 받았다고 해서 지금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의 싸움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지마는
이제부터 하는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3만명이 죽고 불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아스돗 사건입니다.
아스돗 사건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에벤에셀에서 그것고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 갔는데도 이스라엘이 패했다는 것입니다.
에벤에셀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참패한 이유를 살펴보면 삼상3:1절에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도우셨겠지만 현재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지금까지는 그래도 하나님이 도우서서 교회가 성장하고 내가 직분자가 되었지마는 현재는 말씀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도우셔서 세계속에 한국교회가 되었지마는 한국교회 1000만 기독교인들 정말 무슨 힘이 있습니까?
교회가 이 사회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칩니까?
반대로 세상 앞에 너무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는 현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거에 잘 믿었다고 지금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신앙의 연륜만 내 세우고 직분만 앞세운다면 그것이 바로 내게 아스돗 사건이 되고 맙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오신 성도 여러분
정말 잘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다가 에벤에셀의 말뚝을 밖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도 계속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스돗을 점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받기 위하여 진력해야 합니다.
경건생활에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말씀에 은혜받지 못하고 <9>
전통과 습관과 외식에 메여 신앙생활 하지 마시기 바라니다.
그러면 언젠가 꼭 내게도 아스돗 사건이 터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말씀에 은혜받기 위하여 전심전력 한다면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제가 사람이 좀 늦게 되는 것 같아요.
남들이 벌써 깨달은 것 이제사 깨닫는 것 보면 그런 것 같애요.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그 일에 마음을 쏟고 재미가 있어면 다른 것은 시시하게 여겨져요.
만약 목회자가 목회 보다도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벌써 목회에 재미를 잃은 것입니다.
학생이 공부보다도 다른 것에 마음을 배앗기고 그기에 시간을 보낸다는 것 벌써 공부에 재미를 잃은 것입니다.
성도가 경건생활 보다
T.V 앞에 시간을 보내고 아니면 세상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말씀의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 백성에게 말씀이 희귀하면 비젼이 없고 아스돗 사건이 터지고 마는 것입니다.
말씀에 은혜 받지 아니해도 신앙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내 마음의 아스돗 먼저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어떤 대적도 두려워 하지 않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결론>
우리의 신앙의 경주에 출발선과 결승점은 무엇입니까?
출발선은 상한 갈대 거져가는 등불이요.
결승점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숙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성숙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게는 대수롭잖게 보일는지 모르지마는 그것 지금 취하지 아니하면 결국은 나의 신앙의 성숙에 덫이 되어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도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의 아낙 사람 멸절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으로써 지금 나의 삶에 문제가 없다고 가사 - 즉 세상에 편할려고 하는 마음
가드 - 세상에 욕망
아스돗 - 말씀에 은혜받지 못하고 하는 형식적 신앙
이런 것들이 지금은 나의 신앙생활에 별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나를 넘어드리는 들릴라가 되고 나를 괴롭히는 골리앗이 되고 나를 무능하게 만드는 다곤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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