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파란 · 칠보의 독보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탐구와 재현 2)
* 은파란 비녀 ;
머리에 밑 기름을 바르고 곱게 참빗으로 눌러 빗어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곱게 뒤로 모아서 총총하게 땋아 다시 낭자를 만들고 마무리 짓는 것 즉 결발(結髮) 도구가 바로 비녀이다. 부녀자가 쪽을 진 머리가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꽂거나, 관(冠, 화관)이나 가체를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꽂는 장식품을 표현하는 한자어로 잠(簪)·계(筓)·차(釵)가 있다.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에는 단군이 나라 사람들에게 머리털을 땋고 머리를 가리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머리털을 정리하게 되면 자연히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비녀도 발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성인이 되면 남자는 대개 상투를 틀었으며, 여자는 얹은머리 · 쪽진 머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머리모양을 하였다. 따라서 정리한 머리가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비녀의 사용이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부여에서 발견된 백제의 은비녀는 한 끝이 고리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어 당시 비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에서는 진골녀(眞骨女)는 장식비녀[釵]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거나, 구슬을 다는 것을 금하였다. 육두품녀(六頭品女)는 순금 사용을 금하고 은에 누각[鏤刻]하거나 철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오두품녀는 백은을 사용하게 하였고, 사두품녀에게도 누각·철주와 순금 사용을 금하였다. 그리고 평인녀(平人女)에게는 놋쇠[鍮石]를 사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에 전해져 온 것으로 미루어 그 당시 비녀가 다양하게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녀자의 머리모양은 고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별다름이 없어 고려의 여인들도 머리에 작은 비녀를 꽂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에는 가체에 의한 얹은머리가 유행하였는데 얹은머리(둘러머리)는 본머리[本髮]와 다리를 합쳐 땋아서 위로 둥글게 둘러 얹은 모양으로 다리를 본체에 고정시키는 데 비녀가 사용되었다. 궁중 의식용인 큰머리[巨頭味, 일명 떠구지머리]· 대수(大首), 궁중 및 양반 집안의 예장용인 어여머리[於由味]등에도 비녀를 사용하여 가체를 고정시켰다. 얹은머리는 이에 소요되는 다리의 값이 비싼데다가 장식을 위한 금옥주패(金玉珠貝)의 사치가 날로 심해져 폐단이 많게 되자 영조·정조 때의 발제개혁(髮制改革)과 더불어 이에 대한 금령이 여러 차례 있었다. 순조 중엽에 와서는 얹은머리 대신 쪽진 머리가 일반화되면서 머리를 땋아 뒤통수 아래에서 둥글게 서리고 쪽이 풀어지지 않게 비녀를 꽂았다.
얹은머리의 가체에 치중하였던 사치가 점차 비녀로 옮겨지면서 그 종류가 다양해졌고 기교도 발달하여 당시의 공예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이 밖에 비녀는 관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는데 여자의 경우에는 화관에 비녀를 양쪽에 꽂아서 관을 고정시켰다.
비녀는 재료와 잠두(비녀머리, 簪頭)의 수식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재료에 따라 금비녀·은비녀·백동비녀·놋비녀·진주비녀·영락비녀·옥비녀·비취비녀·산호비녀·대모(玳瑁)비녀·목(木)비녀·죽(竹)비녀·각(角)비녀·골비녀 등 매우 다양하였다.
잠두의 수식에 따라서는 봉잠(鳳簪)·용잠(龍簪)·원앙잠(鴛鴦簪)·조두잠(鳥頭簪)·어두잠(魚頭簪)·매죽잠(梅竹簪)·매조잠(梅鳥簪)·죽잠(竹簪)·죽절잠(竹節簪)·목련잠(木蓮簪)·모란잠(牡丹簪)·석류잠(石榴簪)·가란잠(加蘭簪)·국화잠(菊花簪)·화엽잠(花葉簪)·초롱잠(草籠簪)·호도잠(胡桃簪)··두잠(豆簪)·완두잠(豌豆簪)·민잠(珉簪)·말뚝잠·조리잠·연봉잠(蓮峯簪) 등으로 구분된다.
이미 흥덕왕 복식금제에서도 그 일단을 보았듯이 계급사회에서는 존비·귀천·상하의 차별이 심하였으므로 금은·주옥 등 귀중한 재료로 만든 비녀는 상류계급에서 사용하였다. 서민계급의 부녀자는 나무[木]· 뿔[角]· 뼈[骨] 등으로 만든 비녀를 사용하였다. 또한 잠두의 수식에 있어서도 크게 차이가 있었다.
잠두의 수식은 그 형태가 대부분 길상(吉祥)·부귀(富貴)·장수(長壽)·다남(多男)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 것 들이다. 그 중에서 봉잠·용잠은 왕비나 세자빈이 예장할 때 다리를 드린 큰 낭자 쪽에 꽂았고 일반 부녀자, 서민들은 혼례 때 한 번 정도 큰 비녀를 사용하는 특혜를 누렸으며 궁궐에서나 사용할 수 있던 용잠을 꽂을 수 있도록 허용되기도 하였다.
그밖에 일종의 보조비녀로 두 가닥으로 된 차(釵)라고 하는 것은 가체 또는 족두리·떠구지 등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보이지 않게 꽂았던 것으로 은으로 만들었다.
비녀는 재료와 잠두의 수식에 따라 예장 때와 평상시에 사용하는 것이 달랐으며 착용자의 나이와 계절에 따라서도 그 사용을 달리하였다.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 金氏)의 ≪사절복색자장요람 四節服色自藏要覽≫에서 보면, ‘ 비녀도 계절에 맞추어 직금당의(織金唐衣)에는 봉잠이나 옥모란잠을 꽂는다. 평시 문안에는 10월 초하루부터 용잠, 2월에는 모란잠, 4·8·9월에는 매죽잠이나 옥모란잠을 꽂는다. 원삼에 큰머리를 할 때는 칠보수식을 하고, 금박당의에는 옥봉잠·원앙잠 또는 니사련잠(泥絲蓮簪)을 꽂는다. 옥 칠보가 무거울 때에는 금 칠보를 하여도 좋으나, 원칙적으로는 젊어서는 옥 칠보를 하는 것이 좋고 노년에는 금 칠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조짐머리에는 10월부터 정월까지 도금용잠을 꽂고, 2월에는 옥모란잠을 꽂는 것이 좋으나, 마음껏 치레하기에 조심스러울 때에는 은 모란잠을 꽂아도 좋다. 옥모란잠은 호사할 때 꽂으면 더욱 좋다. 5월에 백광사당의(白光紗唐衣)를 입을 때는 민옥잠(珉玉簪)이나 용잠에 떨잠을 꽂는다. 봄과 가을에는 모란잠·매죽잠을 꽂고 그 위에 니사 떨잠을 꽂아 수식한다 ’고 하였다.
이것은 경빈 김씨 생존 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한 예를 기록해 놓은 내용이기는 하나, 일반 상류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지난날 비녀는 머리 장식물로서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주는 가보로도 귀중히 여겨졌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선조로부터 이어 받은 유산으로 여겨서 매우 소중히 다루었고 자르지도 않았으므로 긴 머리를 처리하는데 비녀는 필수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계급사회인 조선시대에는 여인들이 내외법에 묶여 마음껏 치장을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자르지 않던 습관이 있어 비녀에 대한 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녀는 긴 부분의 몸체와 머리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머리 부분은 비녀가 낭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장식을 보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조각을 하고 파란을 올려 멋을 내거나 보석을 붙여 머리 부분만 따로 만들어 붙이기도 하고 통째로 몸체와 머리를 한 소재로 만들기도 했다.
비녀 머리에 사용된 무늬종류는 다양하고 풍부하였으며 소재의 개성을 살리면서 무늬를 표현하여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머리가 크고 조각이나 장식을 한 몸체가 긴 것은 의례용으로 예복과 함께 사용했다.
* 은파란봉황비녀 ; 은.파란, 산호 크 기 : 가로 32cm 경기도박물관 소장
봉황(鳳凰)이란 수컷인 봉(鳳)과 암컷인 황(凰)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봉황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어 왕비에 비유되기도 하며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겨져 궁궐에서 사용하는 각종 기물의 문양으로 많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봉황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좁쌀 따위는 먹지 않는 고고한 품위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귀인들의 예복이나 장신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시문되었다. 봉황은 서응조(瑞應鳥 : 왕이 백성들을 잘 다스릴 때 상서로운 조짐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신조(神鳥), 봉황이 나타나면 일이 모두 잘 되고 사람들에게 복이 온다 하였다 )로 대나무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오동나무 위에서만 산다고 한다. 봉황비녀는 원래 왕비나 세자빈이 착용할 수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 상류층의 부녀자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비녀머리 전체와 몸체를 은으로 만들었고 깃털의 민각 위에 투명한 파란 색감이 비쳐 보이는 것이 매우 화려하다. 칸마다 꼬은 은선으로 두르고 파란을 올려 구워 냈으므로 양면이 조화롭고 튼실하며 입체감이 두드러지게 장식된 예장용 비녀이다.
은파란 쌍봉비녀 · 봉비녀 · 민각 파란잠 · 매화잠 · 불로잠, 노용숙 재현작;
머리의 윗부분에는 부부의 애정을 표상하는 두 마리의 봉황이 다정하게 마주보며 사랑을 노래하는 듯하다. 봉황은 상상의 동물로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으로 덕(德) · 의(義) · 인(仁) · 신(信) · 정(正)을 지녔다고 하여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러한 봉황은 자웅 이 사이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천생연분을 꿈꾸는 여인의 소망이 머리를 장식하는 비녀에 음을 알 수 있다. 비녀의 대에는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마디를 양각으로 제작하였고, 그 위에 원형의 ‘수(壽)' 자가 양각된 2개의 큰 대나무 잎 사이에 장식되어있다. 그 댓잎 사이로 장수를 상징하는 한 마리의 학이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위 그림 상단의 네 점의 쌍봉과 두 장의 댓잎, 한 마리의 학이 서로 조화롭게 붙여지면서 공간이 있어서 비녀의 머리위에 마치 봉황이 앉아 있는 것 같은 형상이다. 가운데 봉비녀(鳳簪)는 날카로운 부리와 이글이글 불타는 눈, 벼슬과 날개의 섬세한 표현 등이 일품으로 화려하고도 그 크기가 매우 큰 보기 드문 형태로 아주 귀하게 느껴져 대 · 중 · 소 세 점을 재현 한 바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개교 110 주년 기념 초대전 ‘ 품(品) ’ 출품작, 숙대박물관
(위 봉잠 세 점 ( 52 * 440, 40 * 260, 30 * 180, 은, 유약 , 노용숙 재현. 아래 떨장식 뒤꽂이 40 * 95 와 매화잠 30 * 240 , 불로잠35 * 240 . 은 , 유약, 노용숙재현 )
은파란 쌍봉비녀 , 봉비녀, 민각잠, 매화잠, 불로잠, 노용숙 재현작
* 은파란죽절비녀 ; 조선 후기 여자들이 사용하던 은으로 만든 파란 죽절비녀로
대나무 여섯 마디 위에 은파란 원앙 한 쌍과 학 한 쌍, 대나무 잎과 꽃잎 등을 장식하였고, 꽃봉오리는 산호로 장식, 이 모든 것들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었다 . 대나무의 곧은 절개의 상징으로 인하여 사대부가문의 생활신조를 표상, 일반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여인들의 장신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상이다. 비녀의 재료는 금속류 중에서는 은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비녀는 고가(高價)의 장신구였으며, 가보(家寶)로 대(代)를 물려 사용 했다. 또한 화폐경제가 오늘날과 같이 발달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녀를 일종의 비상금과 같이 여겨 급전(急錢)이 필요하거나 집안 형편이 어려울 때 비녀를 팔아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비녀 통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결실과 영구의 상징인 회(回)문양을 올려 장식하고 꽃봉오리는 산호를 물려 마무리하였다. .
은파란죽잠, 은, 계관석(鷄冠石) 크 기 : 가로 28.3cm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녀를 사용한 유래는 매우 오래인 듯하다. 고대의 한국인들이 남녀 불문하고 긴 머리카락을 간직하고 가꾸는 것을 좋아하여 이미 백제시대의 여인들이 처녀는 댕기머리를 하였고 부인은 쪽진 머리를 했다고 하였으니 쪽머리에 비녀를 꽂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유물은 대나무마디 모양의 머리 부분에 대나무 잎을 양 옆으로 붙이고 윗부분에는 매화문양을 넣었다 파란을 올려 구워낸 것이다.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순결을 상징하는 매화문양이 어울려 정절을 강조하였다.
* 은파란 비녀, 노용숙 재현
예쁘게 초화문을 민각한 은비녀에 파란을 올리고 구워 내어 착색을 하기 전 모습과 은빛이 공기 중에서 유화되어 잿빛으로 변색되기 전에 황화칼륨으로 은에 착색하는 기법으로 미리 색상을 연출한 모습
*은파란수자문비녀 ; 비녀머리 네 면 중앙에 둥글게 장수를 기원하는 글자로 도안화된 수(壽)자 문을 새겼고, 비녀머리 아래쪽에 식물문양을 돌아가며 민각하고 그 위에 파란을 올렸다. 이렇게 사용된 문양은 단순한 장식 효과를 뛰어넘어 가문의 행복 기원을 담아내는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
아래 떨장식 뒤꽂이 40 * 95 , 매화잠30 * 240 , 불로잠 35 * 240 은, 파란, 노용숙재현 )
* 은파란비녀 , 뒤꽂이, 끼움단추의 재현, 노 용 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