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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문학 계간평 여름호
협동의 원리와 정서적 전염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인간의 경험은 시간과 공간의 범주 내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물리적이며 자연적인 시공간은 인간이 인식하는 데 있어서 기본 틀로 작용한다. 이런 시간과 공간에 수필가의 의식이 침투되어 융화하면, 시공간은 개인적, 내면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수필은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으로 작가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 그 메시지는 제재를 통해 표상되고 표달되는 게 바람직하다. 지향적 체험이 지배적 정황으로 표현되어야 그 심상이나 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독자는 연상과 상상을 활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감동의 고지로 가는 데 협동의 원리와 정서적 전염은 필수적이다. 하나의 표상은 서로 차이를 지니고 있는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형상으로 인식하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평자는 작품을 분석함에 있어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보다는 체험한 것을 ‘어떻게 세계 내에서 유기체로 통합했느냐’, 즉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표달하려 했는가에 초점을 둘 것이다.
II.
작품을 읽는 일은 작가와의 대화이기도 하며 협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의 처지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나 그와 반대로 작품 속 인물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소위 ‘소외현상’을 일으키는 것도 그 작품에 몰입한 협동의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독자는 수필을 읽으면서 협조적인 인내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불연속적인 흐름에서 연속성을 찾아낸다. 작가가 시간착오적인 기법을 써도 독자는 자연적 순서로 이해해야 한다. 작품의 감상은 의미의 재구성이며, 복잡한 것을 질서있게 정서적 자기 반응에 맡겨 읽어나감을 의미한다. 이번 호에서는 정서적으로 전염이 잘되는 여섯 분의 작품을 다루기로 하겠다. 이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할머니, 아버지, 아내와 어머니, 어떤 젊은이 등 다양하다. 사람뿐만 아니다. 도룡뇽, 신발 등 동물과 사물을 다룬 작품도 있다. 이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에서 수필 소재의 채집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ㄱ)소녀 때 보았던 맑은 도롱뇽 알 얼굴이 그립다. 녹조를 쓰고 떠날 준비부터 해야 하는 도롱뇽 아이들이 안타깝다. 내 청춘에 추억이었던 오솔길과 산 밑에 아지랑이가 환경파괴로 이제는 희귀한 것이 되었다.
(ㄴ)자주 회색 하늘을 봐야하는 나와 동질인 생명 도롱뇽. 귀 기울여본다. 아주 작은 외침과 흐느낌이 들린다. 나는 산길을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살아남으려는 그들에게는 내 발걸음도 치명적일 수가 있으니까.
김은희 <도룡뇽 알집> 중에서 -
현실세계에서 진실을 상실하면 삶의 지반은 무너지고 무질서의 세계만 남는다. 김은희는 이러한 세계에 대한 관심을 ‘자주 회색 하늘을 봐야하는 나와 동질인 생명’, 도룡뇽의 생존 위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이며, 무질서의 세계를 벗어나 질서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세계의 내면을 알고자 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진실은 객관적인 세계 내 현상이 아니라 주관적 진리이며, 자기의 존재 본질을 정립하는 하나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의식의 지향은 작가의 경험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이 수필의 가치는 생태문제와 환경문제를 중요한 주제의식으로 부각시킨 데 있다. 제재인 ‘도룡뇽’을 생명의 상징으로 제시하였으며, 지구가 병들어가는 실상을 의사가 내시경 렌즈로 보듯 정확하게 진단하고 비판하였다.
머레이 북친이 “생태문제는 곧 사회문제”라고 규정했듯이 1990년대 이후 환경오염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생태문제를 어떻게 그려내고 전달했느냐하는 데 있다. 위 인용 문단은 이 작가의 생태적 상상력을 잘 말해준다. 평자가 왜 이 수필을, 이 수필 중에서도 이 대목을 뽑았는지는 (ㄴ) 부분을 읽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남으려는 그들에게는 내 발걸음이 치명적일 수’가 있어서, 더 이상 작가는 걸을 수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 문장에 내 눈, 아니 마음이 멎었던 것이다. 이 수필은 ‘녹조’ ‘회색 하늘’ ‘아주 작은 외침과 흐느낌’ 등의 어구로 현대문명의 부정적 양상을 비판하면서, ‘귀 기울여보겠다’는 현실극복의 의지와 함께 유토피아를 향한 동경을 표현해서 문학적 성취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그렇게 생전의 어머님을 그리며 제상祭床 위에 모셔진 신위神位에 시선을 주었더니 거기에 동백기름을 윤기나게 바른 어머님이 단정히 자리를 잡고 앉아계셨다. 어머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기일忌日을 맞아 자손들이 차려드리는 제상祭床을 받으시려고 유택幽宅을 나서며 동백기름으로 단장을 하고 오셨나 보다. 어머님도 동백꽃 연정戀情을 안고 사셨던 또 한 분의 여인이었다.
옥형길 <동백꽃 연정> 중에서 -
동백꽃을 좋아하는 아내의 망향병을 달래주려고 작가는 고향인 거제도 지심도를 반세기만에 찾는다. 이 수필의 쾌미는 작가의 고향행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내 사랑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건져낸 데 있다. 지심도가 건너다보이는 항구가 아내의 고향이다. 어릴 때 보았던 윤기가 나던 동백꽃과 지금의 동백꽃이 같을 수가 없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너무 변해버린 동백의 모습에 아내가 서운해 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남편의 위로도 소용이 없다. 이런 동백꽃과 아내의 추억을 음미하다가 작가는 마음 속에 동백꽃 연정을 안고 살아온 또 하나의 여인,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의 기일에 동생이 선물한 동백기름을 보면서 생전의 어머니 모습을 그리며, 작가는 어머니가 시골 고향집 마당가의 동백나무를 보고 모진 세파를 이겨냈으리라 짐작한다. 이는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당연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수필의 문학적 가치는 고향의 동백나무를 통해 아내와 어머니를 동시에 그려내었다는 데 있다.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추억 중에서도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에 관한 것만큼 애틋한 게 또 있을까. 추억의 뒤안길에서 만나는 동백꽃에서 아내를, 동백기름에서 어머니의 영상을 건져낸 것은 작가가 어디까지나 자연을 신뢰와 조화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고향의 질서 안에는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자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이 수필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한 작가의 사랑이나 성장에 관한 개인사적인 사실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짜 돌아가야 할 본향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애향적인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따스한 햇살이 살랑거리는 4월의 화창한 봄날 이십대 중반 젊은 청년, P주사는 구룡폭포로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잡으러 가는 일이니 주변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바짝 긴장하여 현장에 도착하여 불법으로 지어놓은 여인숙 집주인을 불러 조사를 하고 도벌죄로 구속하여 춘천지검에 송치하였다.
박용구 <구룡폭포 산림보호 일지> 중에서 -
흔히 문학은 인간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참모습을 비춰주는 동시에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삶에 대한 교훈과 진리를 전달한다. 그것은 문학이 일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안목에 따라 재구성됨은 물론이요, 독자들이 소망하는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수필이 일상적인 모습을 모방하거나 일방적인 교훈을 나열하는 식이라면 독자들에게 감흥과 깨달음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수필은 도벌꾼을 잡아서 검찰에 송치한 이십대 중반의 젊은 청년 p주사의 억울한 사연을 수필화한 것이다. 법대로 자신의 책임을 다 했다가 엄청난 재산상 손실을 입은 한 젊은 영림서 산림보호주사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를 찾아보는 것이 이 수필의 감상포인트라 하겠다.
글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깨어있는 의식과 세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발견하고자 하는 지성이 번득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사회의 등불이 되지 못하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 못하는 수필은 일반 수필은 될지언정 훌륭한 수필은 될 수가 없다. 작가는 ‘보지 않는다’의 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만연된 향토비리의 일면을 전하고자 한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그릇된 현실타파를 외치고, 진실하고 정의로운 삶의 추구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이 수필이 갖는 가치는 크다고 하겠다. ‘P주사는 구룡폭포로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잡으러 가니 주변 아름다운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는 데서 젊은 혈기가 갖는 정의감이 미루어 짐작된다. 이 수필의 압권은 역시 결미의 “역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다.”란 이 한 문장, 바로 현상에 대한 인문학적인 말 걸기다.
같은 신발이라도 신는 장소와 목적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는다. 실내에서 신으면 실내화, 운동할 때 신으면 운동화, 등산할 때 신으면 등산화가 된다. 신은 진자리, 마른자리, 먼 곳,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는다. 가면 가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오로지 신는 사람의 뜻에 따를 뿐 가장 밑바닥,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을 바쳐 봉사하고 희생한다.
이종삼 <신발 > 중에서 -
우리가 싣고 다니는 ‘신발’에 대한 의미부여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수필의 쾌미는 신발이 의미화되고 있는 부분, 즉 ‘신는 사람의 뜻에 따를 뿐 가장 밑바닥,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을 바쳐 봉사하고 희생한다.’고 한 대목이다. 인간중심의 시선에서 탈피하면, 그야말로 신은 가장 낮은 곳, 밑바닥에서의 ‘헌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명사, 인간사만 엄숙하다고 하질 않는가. 그러나 헌신하는 신발 한 켤레 앞에서 인간의 문명사는 전부가 아닌 것이다. 무심히 읽으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꼼꼼히 눌러 읽으면 새로운 시선에 놀라게 된다.
물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자신을 떠받쳐온 신발에 큰 의미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다 탈인간중심주의 시선을 갖지 않는다. 울림을 준 가장 핵심적인 문장을 찾아내는 것 이상 수필읽기에서 보람되는 것도 없다. 위의 인용문은 안도현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는 시구를 생각나게 한다.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구절이다. 관찰-고찰-통찰-관찰 즉 사찰을 거치지 않으면 뽑아내기 힘든 것이리라.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것을 새롭게 봐줬다는 것은 작가다운 시선과 사유 덕분이라 하겠다. 이 범상치 않은 문장에서 우리가 희생과 헌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다면, 순전히 글의 힘이다.
한전 직원과 작업 일을 12월 5일로 약속했다. 공교롭게 그날은 아버지 생신날이다. 아버지가 계실 때 이웃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마음 쓰이시던 일을 생신날 해드리는 것 같아 나무를 베어내는 아픔이 아버지를 위로하는 마음에 묻히고 말았다. 소중하게 여긴 나무지만 아버님보다 소중할 수야 있을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무를 베어내고 아버지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아픔을 달래고 있었다. 다음에는 이처럼 생활에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나무가 오랫동안 자랄 수 있는 곳에 심을 것이라고 마음속 다짐을 하면서...
변광옥 <가래나무를 베어내는 아픔> 중에서 -
물질과 자본을 손에 넣으려는 욕망을 최소한의 상태로 줄일 때, 사람의 마음에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샘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 수필은 집 주변에 심어져 있는 아름드리 가래나무가 옆집 밭에 그늘을 지우니 베어주라고 한 부친의 말씀에 따라 작가는 고민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나무를 베기로 했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큰 줄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호주에 연수를 가서 경험한 서양 사람들의 집 위주로가 아닌 자연환경을 중요시하는 집짓기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배려하는 아버지의 사상이다. 자연을 맞아들이는 생활방식이 작가가 누리고자 하는 본향의 문화다. 본향으로 돌아가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자연친화적 문화를 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위 수필에서 ‘다음에는 이처럼 생활에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나무가 오랫동안 자랄 수 있는 곳에 심을 것이라고 마음속 다짐을 하면서’라는 발언은 탈인간중심주의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인간중심주의를 최소의 상태로 줄이려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점점 더 아득해질 뿐이다. 작가는 나무에 관한 연구를 하는 분이니까 누구보다도 자연 감수성이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 중심의 사고를 자연의 상징이기도 한 ‘나무’ 중심으로 돌려놓는다는 것은 동시대 모든 현대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명사회의 병리현상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를 맞이하는 본향의 세계가 ‘가래나무를 베어내는 아픔’에 가득 담겨있어 공감을 자아낸다.
어버이날, 아내와 함께 다슬기 해장국집에 갔더니, 뜻밖에 3일장 할머니 가족 10명이 예약실로 향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을 잡고,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따랐다. 방에 들어가시자 오랜만에 들어보는 가족들의 웃음소리다.
계산을 하려는데 “계산을 하셨어요. 할머니가 하셨어요.”라고 한다. 못 본 척했는데 식대를 지불하다니 난감했다.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인사를 드렸더니, 항상 신세 지는 장바구니 아저씨라며 가족에게 소개했다.
조철형 <할머니의 미소> 중에서 -
문학은 언어를 통해 구축된 삶의 실상이다. 그 안에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강한 의식의 주체들이 있는 힘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지는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이 수필 또한 마찬가지다. 조철형은 일상 속에서 장바구니 아저씨로 불린다. 이 수필은 공원 길목 나무 아래 삼일장을 개설하여 채소류를 파는 할머니에 대한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채소 ‘할머니는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미소 속에 마음을 사고파는 분이셨다’는 이 할머니에 대한 평가의 근거는 위 인용 예문으로도 충분하다. 90세의 할머니가 장마당에 안 보이면 혹시 할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부터 하게 되는 작가의 인간적인 순수가 감동을 견인한다.
이 수필은 일상을 보다 윤기 있는 터치를 통해 그 빛깔과 체취를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키는 작품이다. 수필의 윤기가 문학언어를 사용해서 화려하게 윤색을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얼마나 진솔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 하는 점과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따뜻한 눈을 갖느냐는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고 할 때, 이 수필은 큰 문학적 의의를 갖는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나이 많은 할머니에 대한 배려다. 조철형의 수필은 대체적으로 거의 다 감동을 준다. 삶에 대한 진정한 가치와 영원의 세계를 바라보며 깨달음의 느낌표를 찾아온 사람만이 지니는 향기를 내고 있다고 하겠다.
III.
그리움의 텃밭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우리는 무한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되고, 생활의 지혜도 만날 수 있다. 삶의 진면목은 과거의 내부에 뿌리를 서려 두며 이를 근간으로 하여 잎을 피우고 꽃을 만들어 내보이는 것이다. 이번에 다룬 수필들은 전부 이런 토속성이나 향토성을 근간으로 한다. 이종삼의 <신발>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작가들의 정서는 생태와 밀착되어 있다. 이는 생태와 동화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인 것이다.
박용구 씨는 앞으로 제목짓기에 유의했으면 좋겠고, 변광옥 씨는 수필의 결말에 가서, ~다짐하다‘는 말을 안 썼으면 좋겠다. 모든 수필에 ’다짐한다‘는 마무리는 격을 떨어뜨린다. 생물학적인 것에만 전염이 있는 게 아니라 정서적인 것에도 전염이 있다. 문학은 작가가 자신의 정서를 글로 표현하여 독자들에게 전염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염은 작품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독자의 카타르시스도 정서적 전염의 하나다. 우리 작가들은 바이러스로 다른 사람을 전염시킬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정서적 전염을 시키는 데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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