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와 혁명가 그리고 나그네
1. 성자
저는 이십대 후반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사 58장) 가운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라”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서울 봉천동 반지하방 형제 공동체(바실레이아)에서 함께 사는 형제들의 동의를 얻은 후 서울역에 가서 노숙인 아저씨를 모시고 오기도 했고, 청량리역에서 노숙하시는 분을 형제 공동체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섬기던 대학생 모임(새벽이슬)에서, 성탄절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라는 동일한 질문을 함께 나눈 후, 당시 처참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던 서울 행당동 철거민 마을로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일 저녁마다 찾아가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그 분들의 상처 입은 심령을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픈 분들이 많이 계셔서 잘 아는 한의사 선배님에게 부탁하여 주말에는 그 마을에서 한방 치료를 하기도 했고, 또 사법연수원에 계시던 한 선배님에게 부탁하여 법원에 제출할 소장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전도 집회를 열어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때로는 쇠파이프를 들고 다가오는 다수의 철거반원들과 이에 저항하는 소수의 철거민 사이에 홀로 서서 철거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 단 한사람도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없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였던 난곡에서 고아처럼 자라면서 조현병(정신분열)과 뇌전증(간질)으로 고통 받던 한 청년을 위해, 그 청년이 다니던 교회의 원로목사님이 마련해 주신 과천 외곽의 시골집에서 함께 살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청년과 함께 먼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밥을 짓고 상을 차려 함께 먹곤 했습니다.
또 파키스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큰 박해를 받고 한국으로 도피해 온 종교 난민이었던 한 파키스탄 청년이 머물 곳이 없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제가 살던 서울 연희동 반지하방 형제 공동체에 그 청년을 맞이하여 함께 살기도 했습니다. 그 청년은 매일 두 시간씩 가부좌 명상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깊이 만나면서, 타국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가운데 겪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항상 웃는 얼굴로 맛있는 무교병(로띠)을 만들어주곤 했는데, 저는 그의 히말라야 영성에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갈 때 저와 아주 가까운 어느 분은 저를 성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도(saints) 곧 성자들입니다.
2. 혁명가
결혼하고 삼십대 이후의 삶은 한국 사회에서 토지평등권을 실현하여 빈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체제를 희년 체제로 변혁하여 조국통일을 준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이를 위해 전국을 다니며 많은 소모임과 강연회를 조직하기도 했고, 많은 교회와 단체에서 제가 직접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어느 분은 저를 혁명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왕인 사탄이 바알과 맘몬을 앞세워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지배하는 반(反)희년의 세상에서,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희년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신해야 할 혁명가들입니다.
3. 나그네
저는 최근 나그네라는 말이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앞의 성자나 혁명가는 다른 사람들이 제게 붙여준 말인 데 비해, 나그네는 저의 지나온 삶을 생각할 때 제가 제 자신에게 붙이고 싶은 말입니다.
기업(基業) 없는 나그네처럼 저 역시 기업 없는 나그네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가난과 고난과 비난이라는 삼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찬송가 가사처럼 오직 하나님만이 저의 유일하신 기업이 되셨습니다. 나그네로 살아온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생생합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저의 삶을 책임져 주신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성경을 보니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나그네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바로 나그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늘 나그네로 살아갔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히 11:16).
애굽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 자손도 나그네였습니다. 미디안에 도피한 모세도 나그네였습니다. 다윗도 자신들을 나그네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기서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는 모든 인류가 사실은 나그네입니다.
사람의 본질이 나그네라는 진리는 희년 토지법의 대헌장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땅을 빌려 잠시 살아가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나그네라는 이 진리를 망각했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가난이 사라지지 않고, 또 서로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벧전 1:1)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명심하고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바로 나그네입니다.
저는 제가 나그네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나그네’라는 말에 담긴 그 깊고 넓은 의미가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집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자손과 초대 교회의 나그네 삶이 살아있는 문자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지금 나그네로 살아가는 수많은 땅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나그네로 살아온 사람이 받는 또 하나의 은혜입니다.
저는 제 호를 ‘하늘 나그네’라는 뜻의 천객(天客)으로 삼고자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이 반(反)희년의 땅에 희년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르며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살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