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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만난 자에게 돌 던지지 말라.
말씀 : 눅10:30~35. 2024년 11월 3일 일요일 오전 11시
본문은 주께서 참된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는 말씀으로 많은 교회의 설교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아직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보다 더 많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즐겁고 신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내 미는 것은 정말 복된 일이며 기분 좋은 일입니다. 주님께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도다.”(행20:35)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이면 즉시 다가가 손 내미는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누군가 자기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다가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싸매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자신의 사정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며 위로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금전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빚을 변제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처럼 어려움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주님 같이 내 목숨까지 내 놓을 정도로 그렇게 착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참된 이웃사랑에 크나큰 걸림돌입니다.
오늘 본문은 강도만난 사람의 곁을 지나가는 어떤 제사장(31)이나 한 레위 사람(32)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들로 가정하고 말씀을 합니다. 33절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 줄 마음도 있고, 도와 줄 금전적인 여유도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도와 줄 마음보다 자기 것이 더 소중하다고 여기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칩니다.
율법은 말하기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 지니라(신19:21). 이런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 앞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심으로 듣는 율법사는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율법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하시는 말씀도 있지만 당시 율법사들과 백성의 치리자들은 약자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멸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므로 당시의 율법사들이나 현재의 종교 지도자들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어떤 율법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눅10:25, [보라,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그분을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매] 이 율법사는 그 문제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율법사로서 모든 율법을 잘 지킨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26,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시니] 주님은 그가 율법사인줄도 알고 그가 어떤 의도로 질문하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네가 율법사이니까 기록된 율법을 잘 알겠구나. 그런데 그 기록된 율법을 “네가 어떻게 읽느냐?”질문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탐구하며 잘 읽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숙제 아닌 숙제가 있는데 곧 매일 성경읽기입니다. 물론 읽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아무튼 매달 성경읽기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거나 말거나 자유지만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아주 적은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입니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을 읽고 탐구하고 공부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을 매일 읽지 않으며, 읽어도 어떻게 읽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런데 성경을 읽지도 않는 성도들에게 “네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하는 질문은 헛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무생각 없이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이라며 찬송을 합니다. 제발 육신의 양식만 찾지 말고 영의 양식도 부지런히 읽고 듣고 탐구하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27,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매] 그는 율법사답게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매일 성경을 읽고 일요일마다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잘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이 율법사와 같이, 누가 성경을 물으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28,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옳게 대답하였도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하시니라.] 여러분들도 성경 읽고, 설교 듣고, 성경공부 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성경이 가르치고 주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5:39, [성경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는데 그것들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설 때 각자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그 행위에 따라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가리니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할 행위대로 주리라.]하셨습니다.
29, [그러나 그가 자기를 의롭게 만들려고 예수님께 이르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니] 아마도 율법사는 자기의 이웃을 자기와 동일한 계층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은 가난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며 또한 가난하여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을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요.
권세 자들은 권세 자들끼리 만나고 교제합니다. 부자들은 부자들끼리만 어울립니다. 그들 주위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접근도 못합니다. 오늘날 그들과 같이 부유한 사람들은 지하철 요금이 얼마인지,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시금치한단이 얼마인지 서민들의 삶을 모릅니다. 그러니 본문의 율법사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주님은 친절하시게 그 율법사에게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줍니다.
3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매 그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상처를 입혀 그를 반쯤 죽인 채 버려두고 떠났느니라.] 누구나 흉악한 강도들을 만나면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맙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이 사람도 강도들을 만나 입은 옷도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상처를 입고 거의 죽게 된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옷은 단순이 몸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출22:26, [네가 어떻게든 네 이웃의 옷을 담보로 잡으면 해가 질 때까지 그에게 그것을 넘겨줄지니라.] 우리는 밤낮의 기온차가 10도 이상나면 감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중동지방은 낮과 밤의 기온차가 더 심합니다. 낮은 몹시 덥고 밤엔 매우 춥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옷이 밤에 덮고 자는 이불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귀중품을 전당포에 잡히고 급전을 빌려 씁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옷을 잡히고 먹을 것을 사는데 이스라엘의 율법에는 그 옷을 담보 잡은 사람은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합니다.
신24:13, [어떤 경우든지 해가 질 때에 담보물을 그에게 다시 넘겨줄지니라. 그러면 그가 자기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축복하리니 그것이 주 네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리라.]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들에게 옷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인적 없는 외딴 곳에 옷이 벗겨진 채 두들겨 맞아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누구나 그런 경우 우선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주위를 살피고 거기서 빨리 도망칠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보호 본능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그처럼 고난을 겪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그를 도울 용기가 필요하고 그에 따른 희생도 있어야합니다.
본문에 강도만나 옷이 벗겨지고 많은 상처를 입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세 사람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며 율법사에게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오다가 그를 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갔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사장이라면 종교지도자요,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중요한 인물이며 모든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만약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눈치를 보며 그를 돕든지, 돕는 척이라도 하든지, 다른 누군가에게 도우라고 지시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고 자신도 그를 도울 마음이 없으므로 다른 쪽으로 지나갔습니다.
거기에 보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런 면에서 그 제사장은 종교인일 뿐이지 진정 하나님을 믿거나 두려워하는 자는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보는 눈이 두렵습니까? 아니면 언제 어디서나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여러분들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행동합니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합니까?
고후8:21, [주의 눈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눈앞에서도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노라.] 여러분들은 주의 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위한 왕과 제사장들입니다.(계1:6)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아들답게, 제사장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많은 직장 그리스도인들이 감독자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도 없고 감독자도 없으면 게으름을 피우며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시며 감독자가 되십니다.
엡6:6~7,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볼 때만 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선한 뜻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 말씀을 잊지 말고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2, [또 그와 같이 한 레위 사람도 그가 그곳에 있을 때에 와서 그를 바라보고는 다른 쪽으로 지나갔으나] 이스라엘에서 레위지파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일들이나 성전 일을 전담하는 지파로서 특별히 선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열한 지파들의 십일조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지파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당한 사람을 보고도 그를 돕지 아니하고 다른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자기들이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받은 은혜를 되돌려 주거나 감사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부족하거나 없는 것을 불평하고 투덜댑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거나 주님께 받은 복을 생각하지 않고 부족하다고만 하는데 그것이 곧 죄를 부르는 것입니다.
33~35,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그가 있는 곳으로 와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즙을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주고 35, 이튿날 떠날 때에 이 데나리온을 꺼내 주인에게 주며 그에게 이르되, 그를 돌보아주라. 당신이 얼마를 더 쓰든지 내가 다시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느니라.]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를 보살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일찍이 하나님을 떠났고 우상을 섬겼으므로 주께서 이웃 시리아에게 침략 하게 하여 대다수가 다른 나라로 끌려갔고 혼혈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는 이방인이요, 죄인이요,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요4:9, [그때에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께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인 내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본문에 강도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준 사람은 율법사에게나 레위사람에게나 유대인들에게 개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문맥으로 보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은 유대인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서로 싫어하는 적대관계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가 있는 곳으로 와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 중에 그런 사람이 보인다면 자기도 그런 일을 당할까봐 가까이 가지 않고 급히 발길을 돌릴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어느 나라 사람이건,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도와야합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가서 기름과 포도즙을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며 그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주었습니다.” 이는 자기희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간과 재물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돌보려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 흘려 죽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사마리아 사람은 “이튿날 떠날 때에 이 데나리온을 꺼내 주인에게 주며 그에게 이르되, 그를 돌보아주라. 당신이 얼마를 더 쓰든지 내가 다시 올 때에 갚으리라.”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그의 어려움에서 도와준다면 여러분이 고난을 받을 때에도 반드시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현 세상에서 거두지 못한다면 주께서 더 큰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하여 선한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36~37, [이제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들을 만난 자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시니 율법사가 이르되, 그에게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하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들도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그럴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강도만난 사람의 입장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고 여러분들 이웃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못 본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명령하십니다.
저는 오늘 강도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몇 마디 덧붙여 보고자 합니다.
저는 장애인의 활동을 돕는 “장애인 활동 지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장애인이 되고 싶어 장애인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들보다 살다가 장애인이 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으로 장애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비장애인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장애인 후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대상포진 광고 중에 “여러분도 대상포진 대상자입니다.”라는 광고와 같습니다.
사람은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성공할 때가 있듯이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강도를 만나듯이 어려운 일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어느 누구에게만 있는 특정한 일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일들입니다(고전10:13). 누구든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어떻게 극복하고 일어서느냐? 하는 문제만 남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 주위에 질병가운데 있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사업에 실패했거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다가가 위로와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전하면서 “강도 만날 준비를 하지 말라.”외치고 싶습니다.
아니 세상에 강도 만날 준비를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반문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실패하면 마귀에게 조롱당하거나 끌려 다니거나 마귀의 하수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강도는 마귀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강도는 욕심 부리는 자를 노립니다. 강도는 가진 것이 많은 부자들을 노립니다. 강도는 갑자기 부자가 된 자를 노립니다. 주님은 속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죄를 짓는다고 말씀합니다. 잠28:20, [신실한 자는 복이 넘칠 것이나 속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무죄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며 22절에도 [급히 부자가 되려 하는 자는 악한 눈을 가졌으므로 가난이 자기에게 닥칠 줄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느니라.](잠28:22) 하셨으며 이 모든 것들이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는 자는 “강도 만날 준비를 하는 자”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은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은 곧 마귀와 같은 강도를 초청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꿈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분수를 알아야하고 가능성을 알아야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포부는 크나큰 상처와 실망을 안겨줍니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달려가되 실패했을 때를 예상하지 않는다면 그는 갑절의 실패의 늪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는 더 중요합니다. 그 과정이 선하고 즐겁고 아름다웠다 할지라도 실패를 가져온다면 그 아름답던 과정은 몇 십 배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정이 어떠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친 목표와 포부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불행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강도만난 사람의 곁을 지나가는 세 사람의 예를 들었는데 저는 하나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강도만난 자에게 돌 던지지 말라.”입니다. 강도 만나 죽을 지경인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이 이웃 사랑이라고 주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제사장이나 한 레위 사람은 그를 보고도 다른 길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악한 자들이 있으니 곧 강도 만나 죽을 지경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를 비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주위에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건강에 실패했거나, 사업에 실패했거나, 취직에 실패하거나, 공부에 실패하여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도움입니다. 책망은 그가 회복한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에게 위로 대신 “아마도 그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어”라든가 “그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거야”하며 비난하거나 “내가 그럴 줄 알았어.”하지 마십시오, 실패하여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용기를 주며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그 사람 처지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는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 아이의 어머니인지는 모르겠는데 길 가던 아이가 돌에 걸려 넘어져서 피를 흘리며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주지 않고 우는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욕을 퍼 붓습니다. “왜 똑바로 걷지 못하고 병신같이 넘어지고 지랄이야!” 그 아이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아픔을 치료해 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넘어져 다친 아픔보다 그 여인으로부터 받은 욕설의 아픔이 더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도 지난날 그런 잘못들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게 왜 그것도 모르느냐? 책망했습니다. 배워도 모르는데 이유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급하게 발전하고 돌아가는 세상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 사용하는 것을 배워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잠시 제가 어릴 적에 한글을 늦게 깨우쳤던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배운 국어책을 집에서 형님 앞에서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형님은 회초리로 때리면서 왜 배운 것을 모르느냐? 야단을 칩니다. 그러면 주눅이 들어 아는 것도 더 읽지 못했습니다. 학교 가서는 숙제를 해 오지 않았다고 선생님에게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았습니다. 저는 한 동안 학교도 가기 싫고 집에도 가기 싫어서 11월 달, 허옇게 서리 내린 빈 논두렁에 숨어 오돌 오돌 떨며 학교가 끝날 때까지 울고 있었던 쓰라린 추억이 있습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글을 가르쳐주고 위로해 주고 칭찬을 해야 기가살고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형님 또래 되는 이웃집 청년이 우리 셋째 누님을 좋아하는데 그분이 누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저에게 전해 달라 부탁하며 저를 자기 집에 데려가서 글을 쓰고 읽는 것을 가르쳐 주며 칭찬을 쏟아 붓는 바람에 재미나서 한글을 순식간에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학년의 겨울 방학을 보내고 2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반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형님이 군엘 가서 보내온 편지를 부모님께 읽어 드리고 부모님 대신 답장을 써서 보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동네에 T.V 는 물론 전깃불도 없었습니다. 밤마다 어머니를 따라가 사랑방에 모인 어머니들에게 호롱불 아래에서 고전 소설(심청전,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박문수 어사전 등)을 읽어 주면 좋아하시고, 동네 신동이 났다며 칭찬하셨습니다. 어머님은 그런 저를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위로와 칭찬은 큰 용기와 힘을 줍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넘어진 자는 일으켜 주고 상처를 싸매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먼저고. 꾸중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남에게 돈을 빌리는 자는 돈이 없는 사람입니다. 돈이 없어 실패하고 넘어진 자에게 당장 내 돈 갚으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더 큰 좌절과 더 큰 상처를 줄 뿐입니다. 먼저 그에게 위로와 기운을 북돋워 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가 다시일어서야 빚을 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우리도 탕자의 아버지처럼 해야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몫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집을 나간 아들을 매일 마을 밖에 나가 기다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거지꼴로 힘없이 걸어오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를 집으로 데려가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며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이보다 더 큰 효과적인 책망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당하는 고통과 슬픔을 위로해 주고 용기를 주는 멋진 사람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권고합니다.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야합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를 일으켜 주고 상처를 싸매 주고 나을 때까지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강도만나 고통 받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거나 발길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주께서 하신 일이요, 또한 명령입니다.
엡2: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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