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하기
'고전'과 '토론.'
세인트존스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다.
하지만 이 단어들보다 더 중요한 키워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자율'이다.
세인트존스의 모든 토론 수업은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다.
'자율적이지 않은 공부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다.
사실 자율적이지 않은 공부는 없다.
아무리 떠먹여주려고 해도 학생 본인이 스스로 배움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세인트존스의 자율은 조금 다르다. 그야말로 배움의 모든 것이 학생에게 달린, 최고로 적극적인 자율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강의를 통한 배움' 과 '토론을 통한 배움'의 차이를 비교해보자.
이미 설명했지만, 세인트존스에는 강의가 없다.
모든 수업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기 전,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 강의가 없고 토론이 있구나. 좋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니었다.
이 '강의 대신 토론'이라는 개념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어떤 배움을 얻느냐 하는 그 결과까지 어마어마한 차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강의 전쟁터 VS. 토론 전쟁터
우선 강의 수업을 보자.
한국의 초.중. 고등학교에서 하는 일반적인 수업은 강의 형태다.
선생님이 칠판 앞에 서서 교과서에 있는 여러 정보들을 설명해준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중요하다고(시험에 나온다고) 하는 부분을 표시해놓고 필기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도 할 수 있다.
토론 수업은 어떨까?
토론을 하기 위해서 학생들은 각자가 토론 내용을 준비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토론의 종류에 따라) 대화와 논쟁을 하며 공통된 주제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나눈다.
이것이 강의와 토론의 가장 큰, 모두가 알고 있는 차이점이다.
이 다른 방식의 수업이 학생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까?
우선 수업 준비 과정을 보자.
강의 수업의 경우 수업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교수(선생)님들이다.
학생들이 예습을 해온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예습이 필수는 아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준비해온 강의를 잘 듣고 나서 스스로 공부를 시작한다.
하지만 토론 수업의 경우 수업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이다.
학생이 준비해오지 않으면 토론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토론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에게는 토론 주제에 대한 공부, 예습이 필수다.
간혹 토론 수업이어도 준비를 안해도 될 때가 있다.
내 4학년 언어 수업이 그랬다.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둥의 책을 읽었는데,
책의 일정 부분을 수업 시간에 같이 읽고 그 느낌을 바로 이야기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미리 읽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 생생한 아이디어와 표현이 나올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튜터는 학생들이 예습하지 않고 오길 바랐다.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고, 보통 토론 수업은 예습과 사전 준비가 필수다.
강의와 토론 수업의 이런 준비 과정의 차이는 전쟁터의 군인에 비유할 수 있다.
학생이 강의를 듣는 데 필요한 것은 우선 교과서(전공 서적)이다.
강의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은 교과서라는 총을 잘 챙겨야 한다.
무기 사용법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열정이 있고 몸만 멀쩡하다면 전쟁터로 가도 괜찮다.
강의 전쟁터에는 총을 가지고 오기만 하면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 교수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 수업에선 이것이 불가능하다. 토론 전쟁터에는 교과서라는 총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토론 주제나 토론할 책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책은 총이 아니다.
교과서나 전공 서적이 있다는 것은 그날 수업에서 배워야 할 '학습 목표'가 있다는 말이다.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지 뛰어난 전문가들이 이미 다 정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세인트존스의 수업에는 읽어야 할 고전들 그 자체만이 있을 뿐, 거기에서 무엇을 배울지는 학생들이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토론 전쟁터에 가는 학생들은 어떤 총(배움)을 얻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본 후 자신만의 총을 만들어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
강의와 토론 수업의 두 번째 차이점은 '수업 중 학생들의 역할'에 서 볼 수있다.
총을 들고 탭댄스를
다시 강의식 수업을 살펴보자.
강의 수업은 준비하고 가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어쨋든 총은 모든 군인에게 주어지고 전쟁터로 총을 가져오기만 하면 교수님이 사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의 수업에선 교수님의 해박한 설명을 들으며 교과서 내용을 함께 배우면 된다.
그렇다면 토론식 수업은?
토론 수업에는 공통된 교과서가 없으며 학생들은 저마다 알아서 총을 만들어왔다(무엇을 토론하고 싶은지 그 배움의 주제를 각자 정해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들이 전쟁터에 오는 순간부터 싸움은 시작된다.
이들에겐 총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교수님은 커녕 공통된 설명서조차 없다.
모두 다 똑같은 총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가 가져온 총(교과서)의 사용법을 스스로 익혀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온 배움의 주제를 스스로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총을 만들어(배움의 주제를 정하여) 사용법을 익히고 (그 배움을 탐구하고) 전쟁터로 온(토론 수업을 하러) 학생이라면 자기를 죽이려는 적군(자신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내는 학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토론을 통해 가치관을 세워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강의 수업에서는 상관이 총 쏘는 법을 가르쳐준다.
하나, 총알을 장전한다.
둘, 목표물을 조준한다.
셋,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면 학생들은 그 방법을 배우고 연습한다.
모두 같은 방식으로 총을 쏘는 데다 사령관이 전쟁을 지휘하기 때문에 힘든 전쟁에서 효과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총 사용법을 배우고 상관의 지휘 아래 단체로 행동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다.
반면 토론 수업에서는 스스로 사용법을 익히고 오기 때문에 엉뚱한 총 사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 총을 들고 탭댄스를 춘다.
둘, 추다가 필이 오면 방아쇠를 당긴다.
이와 같은 법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온다.
그 후 전쟁터에서 이들이 하는 일은 자기가 연구해온 대로 우선 총을 쏴보는 거다.
각자가 연구해온 방법을 살펴보면서 다른 사람의 방법을 물어보기도 하고, 따라 해보기도 하고, 자신의 방법을 더 발전시키기도 한다.
도중에 누군가가 "야, 탭댄스는 너무 무의미 해!"라고 말하면 탭댄스를 추는 과정을 빼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자 기 마음이다.
이것이 가장 큰, 강의와 토론의 두 번째 차이다.
강의 전쟁터의 군인(학생)들은 상관(교수)의 지휘 아래 똑같은 방식으로 총 쏘는 법(지식, 배움을 얻는 방법)을 배운다.
토론 전쟁터의 군인(학생)들은 상관(교수)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무기(각자가 배우려고 생각해온 내용)가 다 다르기 때문에 제각각 토론을 통해 자기만의 배움과 가까워진다.
강의를 들을 때 학생들이 할 일은 열심히 '듣는 것'이다.
강의 전쟁터에서 배운 사용법을 익히고 지휘관의 말을 들으며 전투를 해나가면 된다.
하지만 토론 수업에서 학생들의 역할은 자신의 의견을 열심히 '공유하는 것'이다.
의견 공유를 위해선 자신만의 의견이 미리 정리돼 있어야 하고, 토론 전쟁터에 나가서 역시 적극적으로 '말을 해야' 한다.
'배움'이라는 승리를 성취하라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단계 '학생들의 배움' 이 달라진다.
강의 수업을 들은 학생은 모두 총 쏘는 3단계 정석을 배웠다.
지휘관의 말을 열심히 들으며 지시에 따라 함께 전쟁을 치렀다.
그렇게 모두 같은 정보를 습득하므로 학생들은 그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했는지 다 같이 시험을 보게 된다.
하지만 토론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서로 의견을 공유하며 전쟁을 치렀고 각자 다양한 자신만의 방법으로 총 쏘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이 학생들은 같은 시험을 볼 수가 없다.
각자가 가져온 무기로 생각했고, 수업 시간에 발전시킨 생각과 그걸 통해 얻은 배움이 자신만의 정답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의와 토론, 두 방법 모두 장단점이 있다.
강의식 배움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설정한 방향에 따라 함께 배운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유롭지 못하다는 단점도 있다.
반면 토론식 배움은 자유로운 만큼 책임이 따른다.
그렇기에 둘 중 어떤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우월할 수 없 다.
두 방식에서 각자 다른 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마다 자신의 성향에 따라, 또 배우고자 하는 공부의 종류에 따라 더 맞는 공부법이 있을 것이다.
세인트존스의 토론 수업을 선택했다면 배움에 있어서 전투적이어야 한다.
배움을 성취하기 위해 시작부터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 한다.
토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배움을 얻을 수 있는) 지휘관은 교수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학생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스로 배움의 목표를 설정하고, 여러 배움의 방식들을 시도해보며 그것을 공유하면 자신만의 배움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이 배움의 자율성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인트존스가 가장 강조하는,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 교육liberal education'이다.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중에서
진짜 공부하는 법 배우기
조한별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