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막11:22-26
제목: 용서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권세 있는 성도의 삶
● 기독교는 용서를 최우선으로 여기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용서자이시고 용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좋은 분이죠.
| 마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개역개정 없음, 『제네바 성경 1599』) For if you will not forgive,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will not pardon you your trespasses(죄를 범하다, 폐를 끼치다, 재산∙권리에 대한 불법 침해). |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용서를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시고, 모든 신앙 행위보다 앞세우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막 11:25-26). 막11:26이 개역개정에는 없지만 칼빈주의자의 제네바 성경에는 있습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죄)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소제목을 “믿음의 기도”라고 칭할 수 있듯이, 이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용서’와 ‘믿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르짖어 응답받는 믿음의 역사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주님께서는 그 위대한 믿음이 역사하기 위한 영적 토대로서 ‘용서’를 필수적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십니다. 기독교 기도의 본질은 참된 믿음과 권세 있는 교훈에 기초한 진리입니다. 기도는 믿음과 진리에 수반돼야합니다.
마7: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for He was teaching them as one having authority)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세 있는 새 교훈(new doctrine)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
기독교가 아닌 타 종교인들도 각자 자신들의 신에게 정성을 쏟으며 나름 독실한 종교적 열심의 언어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인간의 정성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살아있는 믿음이 수반되어야만 하나님께 상달(上達)되고 응답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설명하시기 전,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는 강력한 권고를 먼저 하셨습니다.
| 막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
이 믿음의 토대 위에서 성도가 선포하는 언어는 대상에 따라 두 가지로 명확히 분류됩니다. 기도(Pray)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들어주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간구하는 것입니다(24, 25).
|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trespasses)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
기도는 자녀들이 아버지께 올리는 것이지만, 명령(Command)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아닌 존재들, 즉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모든 피조물을 향해 예수 이름의 권세로 직접 선포하고 의심하지 않고 믿는 신앙입니다.
| 막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NIV: does not doubt in his heart) 그대로 되리라 |
참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좁은 의미의 ‘기도할 권리’뿐만 아니라,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산)과 어둠의 환경을 향해 당당하게 ‘명령할 권리’도 함께 보장받게 됩니다. 이 명령할 권리는 넓은 의미로는 기도에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으로 보면 되고요.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 신령한 기도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용서입니다. 성도가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으면 영적으로 담대해지고 용감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영적 원리를 무시한 채 신비주의자처럼 허황된 마음이 들뜨거나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명령하기 전에, 심령 속에 무엇보다 먼저 용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마11:25, 26). 우리는 아쉬운 것에 대해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답게, 우리와 대립하고 있는 누군가를 먼저 용서하여(forgive) 비로소 우리 믿음의 진실함과 온전함으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막히는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미움의 죄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도 이전에 믿음이 있고, 믿음의 결과로서 용서가 선행되는 것이 온전한 기독교 신앙의 순서입니다. 막11:26을 보면 용서의 우월적 지위와 영적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 계열 사본들의 성경에는 마가복음11장26절이 ‘없음’으로 처리되어 있으나, 제네바 성경(1599)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적 ‘싸움’을 싸우는 믿음의 언어(기도, 명령)는 군사처럼 용감해야 하지만, ‘용서’의 영역에서는 순진한 소녀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이 둘은 대립되지 않으며, 용서가 믿음보다 우월적인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복음 안에서 ‘용서해 주고’, ‘용서받는’ 신앙이며, 이 토대 위에서만 믿음이 정상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제네바 성경』으로 막11:26을 직역하면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죄)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입니다. 여기서 죄를 뜻하는 ‘trespass’는 도덕적 잘못 외에 법률적으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이라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소송에서 이기려면, 우리 스스로가 재판관의 자리에서 내려와 나에게 상처 준 이들을 향한 마음의 고소∙고발을 멈추고, 그를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가 남도 용서해줍니다.
● 명목상의 신자들이 형식적∙습관적 식사기도 외에는 기도를 잘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 기도의 막힌 담을 허는 승리자의 신앙적 비결을 나누고자 합니다. 누군가 오랜 시간 간절히 기도하고, 눈물로 회개하며, 어둠의 세력을 향해 사자처럼 포효(咆哮)하고 절규해도 아무런 결실이 없다면, 내 마음에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누군가가 남아있는지 철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미움의 쓴 뿌리를 마음에 둔 채 부르짖는 기도는 하늘 문을 열지 못합니다. 우리가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하고 최고의 영적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내 허물을 용서받은 자임을 자각하고 ‘남을’ 먼저 용서하고 신앙적 순결함과 진실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의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님의 관심과 도움을 받는 비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용서의 법칙은 마태복음 6:14-15, 18:21-35 등 성경 곳곳에서 일관되게 선포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용서를 우선하고 강조하시는 자비로운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용서가 타인의 잘못이나 교회를 무너뜨리는 불의에 대한 ‘무분별한 용납과 방종의 묵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의 균형에는 균형과 분별이 있습니다. 무분별한 관용을 경계하고 불의에 대해서는 엄중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세력과 불의에 대해서는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의지해 올바르게 판단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행4:19-20, 행5:29). 또한 교회 내에 치명적인 죄악이 존재한다면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정확히 분별하여 권징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고전5:3-5, 고전5:12-13). 내게 해를 끼친 이웃은 자비함으로 철저히 용서하되,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악에 대해서는 공의의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이 복음의 균형입니다. 용서 위에 세워지는 권세 있는 성도의 삶이 요구됩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위에 세워진 ‘용서받고 용서하는’ 신앙입니다. 이 위대한 용서가 마음에 먼저 흘러넘치고 이웃과의 맺힌 담이 허물어진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담대하고 권세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애로사항은 ‘하나님께’ 기도드려 위로와 공급을 받고, 우리를 묶고 있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불신앙적 환경들’을 향해서는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날마다 먼저 용서함으로 기도의 문을 열고, 권세 있는 기도와 명령으로 신앙에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의미 있는 호국의 달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11:22 - 24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 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 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11:15:26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는 기도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서서 기도하다가 믿는 자들에게든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든지 누구에게든지 악의를 기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일단 그것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대한
관계는 서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용서하시는 자와 용서받는 자 사이에는 하나의 결속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요구된다. 만약 그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호크마 치고는 주석 내용이 적은 것 같습니다 😂
<호크마 주석: 마가복음>
3. 기도와 간구에 관한 교훈(11:19-26)
본문은 무화과나무 이야기의 두번째 부분이지만 첫번째 부분(11-14절)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은 아니다. 제자들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본래 의도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단지 그 저주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사실에 대해 놀라와 할 뿐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그들의 영적 무지와 불신 상태를 바로잡으시려는 동기에서 본문과 같은 교훈으로 말머리를 돌리셨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마 17:20에도 나오지만 본문과는 다른 문맥에서 등장한다. 아마 예수는 이와 유사한 교훈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하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문에는 얼핏 보기에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두 내용이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23, 24절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이고 25절은 용서에 관한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내용은 기도 내지는 간구라는 단일 주제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고 있다.
(1) 믿음과 간구. 본문은 예수의 이적적 권능이 제자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음을 확증하는 말씀이다. 다만 이러한 권능을 체험하게 위해 한 가지 분명히 전제해야 할 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곧 예수께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믿음을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는 우(愚)를 범한다. 믿음의 간구란 자기 자신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부패한 마음을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구하는 것이다(마 6:10). 우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으로써 주께 간구할 때 주님은 분명히 이 모든 간구를 낱낱이 이루어 주실 것이다(요일 5:14).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간구의 전형을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14:32-42). 너무도 고통스럽고 또한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서도 다만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주님의 피땀 어린 기도 모습이야말로 믿음과 순종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2) 용서와 기도. 또한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이전에 먼저 이웃과 화목할 것을 가르친다. 이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못지않게 인간 상호간의 관계도 중요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하면서 주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이거나
스스로 거짓말하는 자나 다름없다(요일 4:20). 또한 기도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은 간구의 근거가 용서,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용서임을 암시한다. 만일 예수께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겠는가 ! (히 4:16) 한편, 예수는 그토록 엄청난 은혜를 거저 받고서도 여전히 형제들에게 인색하거나 심지어 형제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들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로써 설명하셨다(마 18:23-35). 그리고 상호간의 용서를 강조하고자 하신 주님의
깊으신 의도는 주기도문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마 6:12), 주기도문에 이은 말씀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마 6:14, 15).
* 믿음의 본질. 믿음 곧 신앙이란 성도의 삶에 있어 핵심적 요소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의 핵심적 본질을 파악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어려움의 여러 원인들 중 하나로서 믿음이란 개념의 포괄성을 들 수 있다. 즉, 믿음이란 한 마디 말로 그 본질을
다 드러낼 수 없는 폭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단순한 지적 인식(知的認識)의 차원을 넘어 삶 전체와 연관된 것이다. 여기서는 믿음의 본질을 사복음서와 바울 서신 등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간략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1)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은 믿음을'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믿음에는 합리적 이성(合理的異性)만으로는 또한 신앙을 뒷받침하는 필수적 요소이며 합리적 이성을 배격한 신앙은 맹목적 일 수밖에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감각만으로 세상 만물의 기원이나 하나님의 존재 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인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은 더욱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복음은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신실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만 주어지는 것이다.
(2) 순종과 의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서도 결연히 고향과 친지를 뒤로 하고 장차 기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아간 것은, 그가 우주 만물의 창조주요, 개인과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전격적으로
그의 모든 것을 의탁했기 때문이다(히 11:8). 이를 통해 우리는 순종과 의탁이 믿음의 본질 가운데 하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순종과 의탁은 상대편의 인격에 대한 온전한 신뢰로써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임을 확신하면 우리는 그분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마 7:11).
(3) 은혜의 수납. 믿음의 결과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되며(롬 8:16),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르는 등 신령한 축복들을 얻는다(요일 3:14). 이러한 축복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신령한 축복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이며, 이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수납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 할 수 있다(엡 2:8). 따라서 영육간의 축복들을 얻기 위해 신비주의적 황홀경(恍惚境)에 몰두하거나 자신의 잠재력을 스스로 돈독히 세운 정신적 확신 등은 믿음의 본질과 동떨어진 것이다.
(4) 구체적 결실.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하여 삶 전체와 관련되어 생겨나고
발전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좋다는 말은 단지 어떤 특출한 이적적 은사를 지녔다든지 종교적 열심이 남다르다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향기를 드러내며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에 바로 선 자는 가치관을 위시한 전인격(whole person)의 변화를 경험할 뿐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구체적인 결실을 맺게 마련이다(약 2:14-26, 주제 강해 '행함과 믿음' 참조).
주석에 첨부된 강해의 내용이군요. 좋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 마가복음>, “11장”.
2. 이 사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시었다.
(1) 그리스도께서 이 후로는 믿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심(22절). "하나님을 믿으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의 말씀에 대한 능력을 찬양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생기 있는 활동적인 신앙은 그들의 기도에 큰 능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하시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3, 24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통하여 가장 큰 고난도 극복될 수 있으며 그 일들이 해결될 수 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을 줄로 믿으라"고 하시지 않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24절) 하시었다.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시었다(23, 24절).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사도들과 초대 복음 전도자들에게 부여되었던 기적의 신앙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마귀를 추방하는 등의 자연의 일들에 있어서 기적을 행한 것이며 이 신앙은 산을 옮기는 효력을 나타낸다. 사도들은 그런 일을 나타내는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런 신앙은 거룩한 사랑이 결핍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전 13:2).
[2] 또 하나는 신앙의 기적인데 이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되며 이는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신앙은 우리를 의롭게 하며(롬 5:1) 죄의 산들을 옮겨 바다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다시 떠올라 우리를 향하여 심판할 수 없는 것이다(미 7:19). 그 신앙은 우리의 심령을 정결케 하며(행 15:9), 부패의 산들을 옮겨 하나님의 은혜 앞에 평지가 되게 한다(슥 4:7). 세상을 정복하고 사탄의 맹렬한 공격을 무력하게 하며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다시 사는 일도 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또한 신앙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항상 우리 앞에 계시게 하며, 보이지 않으시는 그를 보는 것이며, 그리고 그가 우리 마음속에 계시게 하는 것이다. 이 신앙이 산을 옮기는 효력을 지닌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임재 앞에서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산들은 요동할 뿐더러 옮겨지기 때문이다(시 114:4-7).
(2) 이 신앙에다 여기에서 승리의 기도에 대한 필요한 자격을 첨가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혐의가 있는 자들을 우리가 용서해 주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는 것이다(25, 26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일어서는 것은 기도에 적당한 태도가 못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대체로 그렇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기도를 가리켜 그들이 서 있다고 한다. 그들이 기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보존된다고 말할 때에 세상은 일어섬으로 보존된다고 표현한다(The world is upheld by standings).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무릎을 꿇는 더욱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주일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특별히 금식의 날들이면 그러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우리의 원수들이나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에게 악을 행하고 그들이 불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도록 기도한 우리의 기도는
진실한 것이 못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 드리기 전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이 생각나면 우리는 가서 그들과 화목하도록 해야 한다(마 5:23, 24). 그러나 그들이 나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우리는 곧 그들에게 찾아가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 이렇게 행하는 것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마땅한 길이기 때문이다.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25절). 이 말씀은 "너희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지니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명예에 손상됨이 없이 너희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려면 그렇게 해야된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아야 될 그런 자들을 괴롭게 하신다면 그것은 죄를 사해 주시는 모범이 되기에 적합할 수 없는 것이다."
[2] 이 용서의 결핍은 우리의 죄 사함을 받는 일에 있어서 확실한 장해가 되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너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만일에 너희가 그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그들에게 복수할 계획을 가지며 모든 기회를 다 이용하여 그들을 욕한다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리라." 기도할 때에 이 일을 꼭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늘 보좌를 행하여 아뢰어야 할 한 가지 큰 사실은 우리의 죄 사함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관심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심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의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자주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게 하는 일이 주님의 큰 목적이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박윤선 주석: 마가복음>
막 11:20-25
이 몇 귀절은, 응답 받을만한 기도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1)그것은 하나님을 항상 믿는 기도이니, 그 믿음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것이다(22, 23). 믿으라. - 이 말의 헬라 원어 에케테 피스틴(* )은, 현재명령사이므로 신앙 행동의 계속을 가리킨다.
(2)의심치 않는 믿음(23절).
여기 "의심"- 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 디아크리네스다이(* )라고 한 것인데 갈린 마음을 가리킨다. 믿음은 단일성 있는 마음을 그 특질로 한다.
(3)그 구하는 것을 벌써 얻은 줄로 알 것(24절).
여기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받을 줄로 믿는 목적물은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구하여진 것이어야 한다.
(4)남의 혐의를 용서할 것(25절).
효과 있는 기도는 믿음이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을 겸한 것이다.
짧지만 유용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막힘없이 하늘 보좌에 상달되는 영적 비밀은 눈물이나 부르짖음 이전에 내 곁의 형제를 향한 온전한 용서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개역개정에는 생략되어 자칫 놓치기 쉬웠던 막11장26절(제네바 성경)의 엄중한 경고를 통해, 십자가의 용서가 성도의 믿음과 기도를 역사하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임을 다시금 정립하게 되는 귀한 묵상입니다.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당당한 자녀로 서기 위해, 내 마음속에 가둬둔 타인을 향한 소송을 먼저 내려놓고 공의와 사랑의 균형 잡힌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함께 결단합니다.
아멘!
단순한 종교적 열심이나 인간의 정성을 넘어,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살아있는 믿음만이 참된 기도의 본질이자 영적 응답의 유일한 통로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우리의 애로사항은 사랑하는 아버지께 '기도(Pray)'로 온전히 올려드리고, 우리를 가로막는 척박한 환경과 대적들을 향해서는 자녀의 권세로 담대히 '명령(Command)'해야 한다는 명확한 영적 분별을 얻게 됩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가진 자녀로서 의심 없이 선포하는 믿음의 언어를 회복하여, 삶의 모든 가로막힌 산들을 믿음으로 다스리며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함께 소망합니다.
아멘!
성도가 예수 이름으로 장애물을 향해 선포하는 '명령할 권리'는 기도의 확장된 영역이며, 이를 문자적 맹신이나 허황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균형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응답받는 신령한 기도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형제를 향한 '용서'이며, 내 안에 미움의 죄와 타인을 향한 마음의 소송을 먼저 내려놓을 때 비로소 믿음이 정상적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눈물로 부르짖을지라도 내면에 미움의 쓴 뿌리가 남아 있다면 하늘 문이 열리지 않으므로,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남을 먼저 용서하는 신앙의 순결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이 강조하신 거룩한 용서는 불의나 죄악에 대한 무분별한 묵인이 아니므로, 나에게 해를 끼친 이웃은 철저히 용서하되 진리를 대적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악에 대해서는 사도들처럼 단호하게 권징하고 대처하는 복음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보혈 위에 세워진 용서의 신앙이기에, 마음의 막힌 담을 허문 후에 하나님께는 기도로 위로를 받고 불신앙적인 환경을 향해서는 권세 있는 명령을 선포함으로써 날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좋은 말씀에 공감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속 미움의 쓴 뿌리와 타인을 향한 마음의 소송을 먼저 내려놓게 하사, 거룩한 용서의 토대 위에서 담대한 기도와 권세 있는 명령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용서와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풀어주시니 유익합니다. 성도에게 있는 영적 무기인 기도는 하나님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인데요. 강력한 힘을 공급 받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손을 깨끗이 하지 않고 어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미움과 분노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여서 그런 것들이 기도를 막고, 응답을 막고 있는 거겠죠.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니 그런 용서와 구원의 감격을 체험한 자들로서 마땅히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우리가 먼저 용서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네요.
하나님을 고의로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해서는 교회가 단호하게 대처해야겠지만 사람 간의 잘못에 대해서는 악을 악으로 이기려 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는, 용서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래야 기도의 담력이 생기고 응답 받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풍성한 댓글에 공감합니다.
내 안의 억울함과 미움의 소송을 먼저 내려놓는 자비로운 용서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왜곡되지 않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온전한 기도로 역사할 수 있음을 배웁니다.
아무리 사자처럼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면 내면에 가로막힌 쓴 뿌리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며, 하나님께 거저 받은 무한한 용서를 기억할 때 비로소 형제를 품을 수 있는 영적 순결함이 회복됩니다.
내게 해를 끼친 이웃은 철저히 용서하되 진리를 가로막는 악과 불의에는 단호했던 사도들처럼, 사랑의 용서와 공의의 분별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잡힌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합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보혈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내 안의 미움과 쓴 뿌리를 먼저 내려놓고, 이제는 담대한 기도와 권세 있는 명령으로 가로막힌 모든 환경을 다스리며 승리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