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창 37:19)
이스라엘의 히브리인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되었던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 인물은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이 늦은 나이에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얻은 늦둥이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성장한 요셉은 성경에서조차 박한 평가를 받은 기록이 있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알게되면 아버지 야곱에게 고자질(?)했던 인물이었으며, 아버지의 편애로 홀로 채색옷을 입는 야곱은 형제들의 눈 밖에 난 형제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요셉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형제들의 원성을 쌓았습니다. 자신의 곡식단에게 형들의 곡식단들이 절을 하는 꿈, 그리고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조차 꿈의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형제들은 어땠을까 상상이 갑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로 불렀습니다. 요셉의 고자질과 채색옷은 참을 수 있었으나 그의 꿈은 형제들의 인내심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아들들은 꿈꾸는 자, 요셉을 죽이려 했으나 결국 형제이었음에도 그를 노예상에게 팔아버리는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꿈’이란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다가오는 다음 세대를 향해 기성세대는 ‘꿈’을 가지라고 독려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다음 세대를 기대하기도 하고, 실제로 ‘꿈’은 위대한 인물을 준비하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꿈’은 일장춘몽의 허망한 상상 혹은 공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셉을 꿈꾸는 자라 부른 형제들은 요셉의 허망한 꿈을 비웃은 것 같습니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은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땀과 수고를 겨루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도전의 장입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그들의 도전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라 하는 것들이 동물의 것들과 비교를 한다면 한없이 초라해집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하고자 수고의 땀을 흘리지만 감히 동물의 것들과는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연약해 보이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장 의미있고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창 1:28)’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힘이 없고, 높이 날 수 없고, 더 빠르지도 앉지만 인간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그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연약한 존재이지만 가장 막중한 권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꿈’을 꾸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허망한 꿈을 꾸는 거짓 선지자를 경계하라(신 13:1)고 경고하지만 허망한 일장춘몽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꿈(비전)을 가진 존재가 우리입니다. 작은 씨앗 속에 숨겨진 수많은 가능성과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꿈은 자신의 입신양명을 꾸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요셉의 꿈으로 이스라엘은 큰 기근 가운데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꿈을 꾼 요셉을 반대하며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저항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저항을 받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세상으로부터 지지와 찬사를 받기는 힘들끼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침내 마침내 하나님은 그의 꿈을 이루십니다. 일장춘몽의 허망한 꿈처럼 우습고 지금은 희미하지만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꿈을 기대해야 합니다.
믿음(히 11:1)은 하나님의 꿈을 바라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바라고 믿음으로 바라보는 바다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