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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명동촌 시대7
윤동주 출생 이전의 명동촌
윤동주 출생과 항일투쟁의 명동촌(1917년 ~ 1920년)
사회주의자들의 표적이 된 명동촌 (1920년 ~ 1925년)
2부,명동학교 시절에 형성된 윤동주의 감수성 (1925년 ~ 1931년)
김정우의 말대로 그는 교회 마당에 살면서 첨탑 끝의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보았다. 그는 주일학교에 다니며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찬송을 배우며 기도를 배웠다. 교회의 모든 절기 행사에 참여하며 성극에도 출연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레크리에이션 시간에는 마음껏 웃고 떠들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고난주간, 부활절과 성탄절을 통해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며 닮고자 마음에 새겼으며 여름 성경학교와 부흥사경회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살기를 기도하며 울었다. 학교에서 매일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바치는 예배는 그로 하여금 민족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였다. 십자가의 희생과 헌신을 결심하게 하였다. 정규 과목으로 배우는 성경공부는 사랑과 정의, 나눔과 섬김, 희생과 헌신 그리고 자기 성화에의 길로 안내였다. 명동교회에서 그는 주의 화원에 핀 한 송이 어린 백합화였으며 주의 품안에서 자라는 사랑스런 아이였다. 이런 윤동주의 성품에 대하여 그의 담임을 하였던 한준명 교사는 아래와 같이 회고한다.
“윤동주는 성품이 아주 순했어요, 너무 어질었지. 그래서 잘 울었고 …….”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 ……. 하하! 본래 재주 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101)
한준명 교사의 말대로 그는 또래 아이들에 비하여 순하고 여리고 어진 성품이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 시인 정지용과의 일문일답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길 갈망하던 깨끗하고 절제된 인품과 삶을 보여준다.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술은?”
“먹는 것 못 보았습니다.”
“담배는?”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인색하진 않았나?”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져 줍데다.”
“심술은?”
“순하디 순하였습니다.”102)
강처중은 윤동주 유고시집의 발문에서 윤동주의 넉넉한 품과 어진 마음에 대하여 썼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들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 주는 것이다. …
“동주 돈 좀 있나?”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이 하였다.”103)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려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용정의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는 진즉에 사회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고 은진중학교는 1928년 초에 150여 명의 학생들이 집단으로 전학을 감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명동소학교에도 학교를 교회에서 분리하려는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이 시작되었다. 명동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명동교회 장로이고 교장인 김약연선생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4학년생인 송몽규는 12살의 어린 나이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학교교육은 교회와 분리하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였다.104) 결국 1929년에 김약연은 교장 직을 내려놓고 명동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9월에 중국의 감독을 받는 현립학교로 강제로 편입되었고 수업도 중국 교과서로 하게 되었다. 당시 명동촌에 살았던 김신묵은 학교를 빼앗기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전영헌 갑장(이장), 윤갑제 갑장, 송창희, 박기주, 등이 주동이 되어 학교를 교회에서 분리해 인민학교로 만들어야 한다고 우겼다. 윤 갑장은 학교 땅이나 교회 땅이 다 교회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을 공박하면서, 교회가 학교 땅을 빼앗는 도적놈이라고 까지 하였다. 그러면 김약연 선생은 답변을 못했다. 교회가 사실상 학교를 경영하기에 합쳐져 있는 것이고, 만일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학교를 운영하더라도 학교 땅은 다 빼앗을 수 있지만 교회 땅은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국내에서도 교회와 학교의 재단을 분리해야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래서 결국 교회 땅을 뺀 학교 땅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105)
송창희와 그의 아들 송몽규는 교회와 학교 분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면 윤영석과 그의 아들 윤동주는 어느 편에 섰을까? 당시 명동학교 교사였던 한준명은 ‘윤동주 부친 윤영석 선생도 좀 그런 경향이 있었으며 교회에 나오기는 하는데 냉담한 신앙’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동주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송우혜는 ⌜윤동주평전⌟에서 ‘윤동주의 철저한 민족주의 성향 내면에 명동 마을에서 마구 자행된 공산 테러가 불러 일으켰던 공포와 피의 냄새’가 숨어 있다며 이는 윤동주가 반종교운동으로 고향을 상실한 피해자라는 증거라고 하였다.106) 그러나 ⌜송몽규평전⌟의 저자인 리광인은 윤동주도 반종교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한다.
“당년의 명동학교는 사회주의 새 사조와 반종교운동이 특히 맹렬히 타오른 곳으로서 필자의 연구 자료와 전문조사에 따르면 명동학교 학생 거의가 이 운동에 궐기하여 나섰다. 송몽규는 이 운동의 전열에 나섰다. 송몽규가 자기 분신이나 다름없는 윤동주를 운동권 밖으로 배회하게 할 리가 만무하다. 운동권 밖에서 배회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시대와 동떨어지고 사람 축에 들지 못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소년 윤동주한테서 이런 모습, 주눅 든 모습을 전혀 보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소년 윤동주도 시대의 물결 속에 뛰어들었다는 반증으로 된다. 다만 성격이 워낙 내성적이고 조용한 편인 윤동주는 송몽규처럼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107)
나는 12살의 윤동주는 학교와 교회 분리운동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 때 목격자였던 사람들이 송몽규에 대하여는 언급하지만 윤동주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그 일에 무관하다는 뜻이다. 윤동주가 송몽규의 분신도 아니지만 송몽규가 그를 가만히 두지 않고 끌어 들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 억지다. 한준명 교사의 말처럼 어질고 순한 성품이기에 참여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학교의 성경교육과 예배 그 자체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건 있은 지 6년 후, 그는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 때 용정중앙교회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들을 가르쳤다.108) 연희전문 1학년 여름방학 때도 용정 중앙교회 하기 성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109) 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아성이었던 명동학교의 성경과목과 아침 예배를 없애며 사회주의자들 손에 넘기는 일에 찬성하였던 학생이 3년 만에 회심하여 신앙고백을 해야 하는 미션스쿨에 입학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생각해 보자. 종교를 아편으로 생각하며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믿는 사회주의자가 주일학교의 교사의 직분을 맡았다 할지라도 매주 주일학교에 가서 성경말씀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날마다 교회당 마당에서 놀았던 그는 반종교운동에 참여하기에는 교회와 학교를 너무 사랑하였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강한 민족의식은 식민지 백성이라고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민족적 감수성은 중국에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업신여김 받으며 일본인들에게 회유 또는 취체당하며 살아온 북간도 조선인으로서 끝없는 자기성찰이며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다. 또한 망국 역사의 한 가운데서 그가 명동학교와 은진학교와 교회에서 받은 세례이다. 그의 민족적 감수성을 알려면 그가❰별 헤는 밤❱에서 말하는 북간도를 알아야 한다. 용정과 명동촌, 명동학교과 명동교회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하여 앞장에서 이미 기술하였기 때문에 같은 반복을 피하고 윤동주의 민족주의의 뼈대를 만들어준 북간도의 사립학교 교육의 시말(始末)과 조선인을 끊임없이 동화시키려 하였던 중국의 교육정책과 일제의 민족성 말살과 황민화정책을 살펴보고자 한다.아! 아! 민족의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대에 민족 언어를 보듬고 민족혼을 불사르며 시(詩)를 쓰는 것은 그대로 독립운동이고 저항이다.
북간도에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민족교육을 개시한❰서전서숙❱이다. 서전서숙은 북간도 용정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망국지사인 이상설과 여조현, 황달영, 김우용 등이 산술, 역사와 지리, 정치와 법 등을 가르치며 투철한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109) 그들은 독립운동 기지 구축과 인재 양육이라는 뚜렷한 목적으로 학교를 설립했으나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말미암아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서전서숙❱은 유교의 삼강오륜과 천자문을 가르치는 보수적인❰서당❱과 너무 다른 민족교육과 근대 신학문을 통하여 북간도 간민사회에서 교육혁명을 일으켰다.
서전서숙의 뒤를 이어서 1907년 남성우, 오상근 등이 국자가 서쪽 와룡동에 ❰창동서숙❱, 1908년 4월 서전서숙의 교사였던 박무림과 명동의 김약연, 김하규 등이 ❰명동서숙❱, 1908년 10월 강백규, 유한풍이 화룡현 자동에 ❰정동서숙❱, 1911년에 이동춘, 김립이 국자가 동쪽에 ❰길동서숙❱을 세웠다. 이 사립학교들은 근대서양문명의 수용과 교육구국을 동시에 추구하며 특별히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민족교육을 지향하였다.110) 서양의 근대문명을 수용하기 위하여 자연과학, 실업교육, 법학, 사범교육, 외국어, 종교교육 등을 교과목으로 가르쳤으며 민족교육을 위하여서는 역사, 지리, 수신, 윤리, 음악, 체육. 군사 등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1909년에 세워진 ❰간민교육회❱와 간민교육회의 발전적인 해체로 1913년에 이루어진❰간민회❱와 1913년에 용정에 세워진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민족교육을 목표하는 사립학교 설립을 위하여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1916년, 북간도지역의 조선인 사립학교 수는 157개로 학생 수는 3,879명이었다.111) 이때에 북간도 사회에 근대 교육으로 민족주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들이 일만 여명이 족히 넘었으며 그들은 교육받은 1세대로서 북간도 대상으로 활동하는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회원 또는 후원자로서 민족의 자치와 민족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간민회의 해체 후에는❰장업회❱가 설립하여 조선인들의 실업교육과 식산 진흥과 생활 개선에 힘을 모았다.
이 외에도 그들은 연길현의 1910년에 세워진❰대한국민회간도직속지회❱,1913년에 설립된 ❰의란구 친목회❱, 같은 해에 세워진❰사우계❱, 1914년에 설립된❰철혈광복단❱ 화룡현의 1912년에 세워진❰민권당❱ 훈춘현의 1910년에 설립된❰해도회❱, 1912년에 세워진 ❰훈춘상무회❱, 1913년에 설립된❰기독교 교우회❱,같은 해에 설립한 ❰둔전영❱, 1914년에 세워진 ❰창의소❱, 왕청현의 1911년에 설립된❰중광단❱, 1912년에 세워진 ❰급당❱, 같은 해에 세워진❰농상회❱에서 민족교육과 의식계몽 그리고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112)
1920년대에의 북간도는 사립학교 확산과 발전으로 청년학생들의 지적 열망이 높아짐에 따라 중등학교가 속속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 2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푸트가 설립한❰은진중학교❱, 같은 해 베이커가 설립한 ❰명신여자중학교❱,1921년 용정중앙교회 조희림이 세운 ❰영신중학교❱, 1921년 8월 석화준과 임창세가 설립한❰대성중학교❱, 천도교의 최익룡이 세운 ❰동흥중학교❱등이 있었다. 상기의 중학교들은 설립 배경, 설립 주체 및 교육 내용에 차이가 있었지만 일제의 교육 간섭과 친일노예화 교육을 막는 강력한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113) 그러나 1920년대 맑스주의 사조가 조선인 거주 지역에 급속하게 전파됨에 따라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가 공산주의 온상이 되고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이 설립한 단체들이 노동자와 농민운동을 조직하여 민족주의를 넘어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로 나갔다. 초기에 함께 항일투쟁을 벌였던 그들이 후에는 민족주의를 공산주의 혁명의 장애물로 여기며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1920년까지 북간도에서는 독립지사들이 어려움 없이 자유롭게 학교를 설립하고 근대교육을 펼치며 독립운동기지촌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인 학교는 북간도에서 일제가 표현하는 수십 개의 “불령선인의 소굴”과 “항일운동의 책원지”로 자리 잡았으며 마침내 그 저력이 용정의 ❰3.13독립만세시위❱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만세 시위 후, 각지 학생들은 충렬대, 암살대, 맹호단, 단지결사대, 대한학생광복단, 철혈광복단 등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항일집회, 정보수집 등 다양한 활동으로 북간도 항일민족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였다.114) 뿐만 아니라 ❰간도국민회❱, ❰훈춘한민회❱, ❰북로군정서❱, ❰신민회❱, ❰도독부❱,❰의민단❱, ❰광복단❱ 등 30여 개의 무장독립단체들이 일어나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115) 그러나 아시아 제패를 꿈꾸며 동북중국에로의 진출을 꾀하고자 하였던 일제는 기세가 등등한 독립군을 제거하고 독립군의 모체가 되는 학교와 마을을 제거할 거대한 음모,❰간도대학살❱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사립학교 30여 개를 재기가 불가능하도록 불태우고 독립군을 배출하고 지지하며 지원한 수십 개의 마을들을 초토화시키고 3,600여 명에 이르는 조선간민을 학살하였다. 그로써 1906년에 시작된 민족교육의 요람인 사립학교들이 존폐의 기로에 섰다. 민족교육을 계속하면서 박해를 받거나 굴복하여 보수로 돌아서 친일교육을 하거나 아니면 면종복배(面從腹背)하거나 아니면 공산주의로 넘어가 치열한 투쟁을 벌이거나 아니면 문을 닫아야 했다. 긴 역사의 안목으로 볼 때 1920년 이후 북간도에서 민족주의 교육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민족교육은 멈추지 않았고 윤동주에게 까지 이르렀다.
9부로 계속
2026년 2월 12일 목요일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 주
101) 송우혜 ⌜윤동주평전⌟, 70쪽, 서정시학, 2015
102) 송우혜 ⌜윤동주평전⌟, 475쪽, 서정시학, 2015
103) 송우혜 ⌜윤동주평전⌟, 479쪽, 서정시학, 2015
104) 리광인 ⌜송몽규평전⌟, 103쪽, 연변대학출판사, 2018
105) 문영금 외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468, 469쪽, 삼인, 2006
106) 송우혜 ⌜윤동주평전⌟, 90쪽, 서정시학, 2015
107) 리광인 ⌜송몽규평전⌟, 104쪽, 연변대학출판사, 2018
108) 리태수 주필 ⌜륙도하⌟, 63쪽, 연변인민출판사, 2013
109) 리태수 주필 ⌜륙도하⌟, 64쪽, 연변인민출판사, 2013
110) 김춘선 주필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431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111) 김춘선 주필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429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112 양소전 외 ⌜중국조선족항일투쟁사⌟, 155, 156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113) 김춘선 주필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431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114) 김춘선 주필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433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115) 룡정3.13기념사업회 외 ⌜룡정3.13 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240,24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