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목표와 교육실천가를 통해 본 평등교육론 2011.4.4 월요일
양백산인 박 희 용
학교가 교육의 중심이고, 학교의 중심은 교장이다. 교장의 자질에 따라 학교의 수준이 정해지고 학교의 수준에 따라 나라의 미래 수준이 결정된다. 이렇듯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장이 된 사람들은 분명 우수한 엘리트들이다. 하지만 껍데기는 엘리트이지만 속은 평범한, 심지어 저질인 사람들이 교장이란 자리에 앉아 있다면 학교교육이 쇠락하고 만다.
‘속은 평범한, 심지어 저질인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영리하게 승진 점수를 잘 챙기고, 때가 되어 승진 점수가 다 차면 낮에는 교감, 교장에게 충성을 바치고 밤에는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명절과 생신 때마다 선물과 뇌물을 바쳐서 근평 수를 굳혀 일로 출세의 길로 매진한다. 물론 교육자로서의 본분과 도덕심을 긍지로 삼으며 자기 실력으로 정직하게 승진한 교육관리직들도 있다. 대한민국 교육이 그래도 살아있고 미래를 도모하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바로 이런 교육관리직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고,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그동안 들인 밑천을 꼭 뽑으려는 욕심을 갖는다. 그런데 본전만 뽑으면 그나마 괜찮으나 몇 배 더 뽑으려고 하는 악순환이 연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다.
부정한 방법으로 교육관리직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래도 교육자로서의 양심이 살아 있어, 자기의 승진 노력과 과정에 대한 반성을 평생토록 하며 성실한 교육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반성이 부실한 일부는 더 높은 자리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 체면과 양심을 가리지 않고 입질을 한다. 교감은 교장이 되기 위하여, 작은 학교 교장은 큰 학교 교장이 되기 위하여 연줄과 돈을 동원한다. 큰 학교 교장이 사용할 수 있는 연간 예산만 해도 수억이다. 그런 부류들은 학교 경영에 있어서도 공금을 자기주머니 돈으로 여겨 회계 부정을 저지르고 교내 인사를 정실과 뇌물로 하여 학교 구성원들의 교육력을 약화 시킨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고, 교육은 교사들에 달려 있으며, 교사들을 조합해 교육력을 최대화 시키는 조직이 학교이다. 그 학교의 중심핵이 교장이다. 이렇듯이 중요한 교장이 바로 서야만 교사가 바로 서고 학교가 바로 서고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애국의 이치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하게 승진한 자들이 교감, 교장, 장학사, 장학관 등으로 위세 등등하게 자리 잡고 군림해서야 어찌 애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학생들에게 공부를 직접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이라 하고, 교육행정을 맡아서 하는 사람을 관료라고 한다. 물론 선생을 거쳐서 관료가 되지만 공부를 직접 가르치지 않으므로 선생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냥 교감, 교장, 장학사, 장학관이지 '교장 선생님'처럼 뒤에 '선생님'이란 말을 붙여선 안 된다. 어느 조직이나 행정관료는 필요하다. 그러나 행정관료가 교육 위에 턱 없이 군림해선 교육이 주눅이 든다.
그동안 많은 교감과 교장을 만났다. 그 중에서 인품과 실력 면에서 ‘답다’라고 느낀 사람은 몇 안 되고 대부분이 평범하거나 기대 수준 아래였다. 그러나 군계일학이란 말 그대로 온혜초등학교에서 만난 이근필 교장선생님은 퇴계 종손답게 정말 모든 면에서 존경할만한 분이었다. 제3공화국 시절에 인천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도산서원이 중수되면서 종손이라 하여 도산초등학교 교장으로 특채 되신 분인데, 더 큰 학교나 교육장 등 영전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안 하고 평생을 종손답게 선비답게 살고 계시다. 북후초등학교에서 만난 변상호 교장선생님도 인품과 실력을 갖춘 분으로 교육계의 굵은 기둥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교사들이 그 분은 교육장 정도는 능히 하실 분으로 여겼는데 연구원 부장을 하고 안동시내 변두리 학교장으로 정년 하였다. 그런 사람을, 그토록 교육관이 투철한 분을 더 중요한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한 이 나라의 교육 현실이 얼마나 세속성을 갖는지 통탄할 수밖에 없다. “정치력이 약하단 말이야”라는 세평처럼 교육 권력에 줄 대고 아부하고 뇌물 올리는 잡스런 짓을 안 한 탓이리라.
교육실천가의 길 가운데 순수한 것은 홍사헌, 장정식 선생님들 같은 분들이 걷는 길이다. 영주시내 학교에서 2년 동안 근무하는 동안에 만난 선생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홍사헌 선생과 장정식 선생 두 분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두 분 모두 정년퇴직이 몇 년 남지 않은 원로교사였는데, 낸데 하는 티 하나 내지 않고 아동교육 면에서나 학교생활 면에서나 모범적인 초등교사상을 실천하였다. 홍 선생님은 남양 홍씨 홍익한의 후예답게 바르고 친절한 태도로 모든 사람을 대했으며 아침 일찍 손수 현관 앞 운동장을 빗자루로 쓸고 휴지를 주웠다. 40년 가까운 교직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이, 몇 년 전에 원하지도 않았는데 교장이 추천 해 교육장 상을 탄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세속적인 출세에 대한 집착보다는 후세교육의 외로운 길을 걸어왔다.
장정식 선생님은 원로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체육부장을 수년째 맡아 6학년 담임 수업 시간 외인 아침과 오후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운동부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젊은 선생들에게도 늘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로 말을 먼저 걸었다. 학모들 모임 식전 행사 무대에 나가서 여러 가지 놀이와 인사말로 학모들의 어색하고 지루한 감정을 잘 풀어주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교단에서 분필 가루를 마시며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순수한 교육실천가들과 정직하게 학교를 경영하는 교육관리직들이 다수가 되면 대한민국의 기초인 초등교육이 비로소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교육을 현장에서 집행하는 교육실천가들의 교육관과 교육력에 따른 문제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의 바탕을 이루는 교육철학에 따른 문제점이 더 심각하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정신과 육체란 두 개의 축이 필요하듯 학교 교육의 갈래도 크게 인성교육과 실업교육의 두 축이다. 실업교육이야 날로 발전하는 과학기술 덕분에 심도를 더해가지만 인성교육은 오히려 퇴화하고 있다. 문명이 발달하고 경제가 확장 될수록 개인적 인성과 사회적 인성이 험악해지고 있다.
현재의 교육철학의 근저는 ‘건전한 민주시민의 양성’이다. 그러한 교육철학을 표현한 용어들이 도덕, 국어, 사회 등의 인문 교과서에 수두룩하다. 그 용어들을 배운 학생들이 해마다 사회에 배출되고 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인성은 이기주의화 되고 사회는 양육강식의 법칙이 굳어진다.
그러한 현상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현재의 교육철학이 분명하고 구체적인 미래의 인간상을 적시하고 있다기보다는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 위주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육목표에서부터 추상적 나열에 만족하다보니 그 틀인 교육과정과 실천의 장인 교실 곳곳에서 혼란상이 나타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인성교육의 덕목들이 현실에선 무기력해지는 현상. 학교에서 배운 덕목대로 해서는 현실에서 뒤쳐지며 손해를 보는 현상, 즉 학교교육에서부터 이론과 현실이 괴리되어 있다.
서구 산업혁명 때부터 뿐만 아니라 과거 어느 시대 때에도 그러했지만, 특히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휩쓸어 우리나라에 상륙한 이후부터는 학교교육이 완전히 지식 암기력 경쟁 판이 되어 버렸다. 암기력이 월등한 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학창 시절 내내 지적 우월감을 갖고 엘리트 의식에 젖는다. 그리하여 대기업, 판검사, 고급공무원 등 한국사회의 최상류층에 진입하여 부와 권력을 누린다.
어느 시대에나 지적으로 우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축복 받은 존재들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일생동안 자기 생업에 종사하지만, 엘리트들은 개인적 생업의 범위를 넘어 사회적 발전과 안정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듯 중요한 역할을 맡은 엘리트들이 자기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 그 시대는 안정과 발전을 맞이한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엘리트층은 태어나고 자라서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와 역사는 늘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할 엘리트층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자기 생업에만 종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교육목표와 직결되는 문제이지만,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병소는 엘리트 교육 위주 현상이다. 물론 엘리트는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학창시절부터 의식에 굳힌 지적 우월감, 엘리트 의식은 우리 사회와 역사 발전에 장애물이다. 그 장애를 소멸시키기 위해선, 엘리트 의식의 공허를 통찰하는 엘리트들의 개인적 자각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미치는 학교 교육에서부터 ‘함께 사는 세상’ 개념을 제대로 가르쳐서 의식화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함께 사는 세상’ 개념의 기초는 ‘생명존중과 가치중립’이고 교육용어로는 ‘평등교육’이다.
‘생명존중’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생존권과 가치가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생태계, 즉 생명들의 근원인 자연 생태계에 대한 존중도 포함된다. 생명을 존중하면 인간생물에 대한 살육과 일반생물에 대한 살육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나아가서는 생명을 담아 기르는 그릇인 자연 생태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지 알 수 있다. 자각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적 사고력이 향상되어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주위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저절로 겸손하고 공손하게 되어 예의를 갖추게 되고, 경쟁이 가져오는 긴장과 과로보다는 교섭과 조절이 가져오는 온화를 선호하게 되어 평화 의식이 향상된다.
‘생명존중’이 나와 남의 물질적인 관계라면 ‘가치중립’은 정신적인 관계를 말한다. 사고하는 생물인 인간은 저마다의 생각과 가치관이 다르다. 경제적 안정과 물질적인 풍요 다음에 오는 것이 정신적 공허이다.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그 중의 하나로 지적 탐구를 통한 정신적 만족감을 추구한다. 그러한 지적 탐구가 과학이나 역사, 예술 분야로 집중 될 적엔 개인적인 문제로 귀착되지만, 사상이나 종교, 철학 등 극히 개인적 사고 특질을 논하는 분야로 집중될 적엔 사회적으로 매우 첨예한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명예욕-지적 만족과 우월감’이 사고하는 생물인 인간의 생리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물질’은 양보할 수 있어도 ‘명예’는 양보할 수 없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상과 종교 때문에 긴장과 갈등, 심지어 폭력과 전쟁이 빈발하게 된다.
‘가치중립’이란, 온 세상에 핀 꽃이 모두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며 아름답듯 인간이 창출하는 모든 생각은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며 고귀하다는 의미이다. 자기 생각만이 옳고 귀하다는 생각은 온 세상의 꽃을 모두 뽑아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꽃 한 가지만 심어 가꾸겠다는 거친 욕심의 소치이다. 자연의 산물로 자연 속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만 살아가는 한 인간이 어찌 전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나도 자연이고 남도 자연인데 말이다.
‘생명존중’과 ‘가치중립’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평등교육’이 우리 사회의 교육목표와 교육실천 현장에서 확대, 심화되는 현상과 비례하여 사회와 역사가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