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과 저녁렵 개(犬)산뽀?
워치독, 랩독, 가드독... 은 아닐 터이고, ㅎ
아예 버젓이 보란 듯이 산책로 길에서 똥싸고 오짐뉘는 건 당연한 건가? 뭔가?
배변 등을 위한 활동책 일환일까?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에 앞서 이리 나도는 행위들은 어쩌면 꼴불견이 상이다.
똥오줌은 반드시 가호의 집 내에서 기쁘게 해결시키고 데리고 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
워리워리 안고 핥고 태워 끄집고 활개 시키는 모습들도 좋다지만,
아파트라는 좁은 공동 산책길에 어느새 덧보이기 시작한 견공들만의 활보를 마냥 지켜 바라보기엔 좀 그렇더라는 얘기이다.
인본에 대한 개티켓또한 매우 중요하고 절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고샅의 인적 밖 한적한 장소에서 배변 활동과 운동을 시키고 뒤처리 또한 경중하게 보살핌이 당연할 것이다.
더군다나 놀라운 건 버젓이 이름도 있겠지만, 개들에게 우리 아이? 엄마가? 아빠가? 하는 표현들을 곁에서 들어 보노라면 경악!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랴! 헐~ㅋ
인간의 존엄 적 과보(果報)의 일력일까?
아니면 생애 개새끼라는 전생 적 조합들이 남겨 준 현생의 산물들일까?
아찔함이다.
행여 보여지기 불편한 동행의 초라함 때문일까?
지체 불안한 노친의 부모와 형제들에 대한 애정 발로는 그 흔한 휠체어 효성 한번에도 인색하고 그저 살이 있음의 산술적 계산에만 염념(念念)한다.
자식들에게 부모란 무엇인가?
단순 혈연적 관계 이상의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는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에 비해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건 매우 어렵고도 힘들다.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질 않았던가?
남들에게는 의견을 나누고 온갖 구실 적 근간으로 친애하면서도 정작 부모가 하는 말씀과 들려 나누는 얘기들은 앞다투어 선점 경배하려 애쓰려는 게 아니라
알량한 지식과 얄팍한 정보 그리고 신세대적 사고들로 무장한 채 그저 잔소리라고 일축하며 들으려고 하지 않는 불경스러움은 반드시 소탐대실로 그 대가가 주어진다는 사실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 소유 본성의 이치대로라 하면 분명 내 조물적 소유주는 부모일 뿐이다.
시대적 산물로서의 치부 경거망동에 앞서 예배당의 신주 이상으로 섬기고 따라 배우며 경험해도 모자랄 것인데..
배륜(背倫)의 경과는 모든 것을 상실 체념 끝에 불행의 요인들로 남겨질수도 있음또한 상기해 보라 충고해 본다.
종일 내린 장맛비는 다소 주춤한 가운데 밤공기가 제법 시원한 6월의 마지막 날이다.
모두의 이해와 편협된 사고는 알알이 익어기는 청포도처럼 알차게 영글듯 7월에도 조금은 더 사랑으로 나누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