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지난 11월 29일, 일제강점기 꽃다운 나이에 미쓰비시중공업으로 동원돼 강제노동 피해를 입은 여자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최종 피해 할머니들의 손을 들어줬다.
11월 29일은, 한일 과거사에 대한 대한민국 사법 주권을 세운 역사적 쾌거를 이룬 날이자, 고향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자신의 피해 사실조차 감추고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에게는 광복 73년 만에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한 날이다.
여자근로정신대 사건 최초로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오랫동안 할머니들 곁에서 소송을 도와 준 변호사들이 있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지부장 김정호, 이하 민변 광주전남지부)와 22명의 원고 대리인단이 그 주인공들.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광주 시민사회의 관심은 정작 일본에서 진행된 소송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패소(2008년 11월 11일) 한 뒤에야 본격화됐다.
민변 광주전남지부 변호사들은 2009년 10월부터 2010년 7월까지 광주광역시청 맞은편 미쓰비시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시작된 ‘미쓰비시 사죄, 배상 촉구 1인 시위’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왔고, 2010년 3월부터는 매주 월요일 소속 변호사들이 2명씩 1인 시위 현장에 결합해 활동에 더욱 힘을 보탰다.
당시 민변 광주전남지부장을 맡았던 이상갑 변호사는 2010년 6월 양금덕 할머니 등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가 있는 도쿄 ‘항의방문단’ 활동에 직접 참여해 삼보일배 시위에 나섰다. 이후 16차례에 걸쳐 진행된 미쓰비시 측과의 협상(2010.11~2012.7)에서는 피해자 측 대표로 나서는 등 바쁜 시간을 쫓아 협상을 이끌었다.
“사회문제 참여하는 방식이 변호사들이 하는 것은 주로 법정에 나가 변론하거나 상담 자문해주는 방식인데, 현장에 나와 보니 가슴에 더 책임감을 느낍니다. 법의 최고 정신은 정의이고 인권의 수호라고 선언을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사법적 절차 안에서 해결이 안 되고, 여전히 길거리에 나와 실천운동으로 담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고, 더 큰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상갑. 2010.6.23. 도쿄 삼보일배 뒤)
그러나 광복 이후 최초로 가진 미쓰비시중공업 측과의 협상은 미쓰비시의 무성의한 태도로 인해, 2년여 간 16차례 협상 끝에 2012년 7월 6일 최종 결렬되고 말았다.
그 사이 이 문제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사건과 관련해,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이 기존 판결을 뒤집고 개인청구권을 인정함으로써, 피해자 권리구제에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게 된 것.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해 일본 소송에 나섰던 원고 5명은 2012년 10월 24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이상갑·김정희 변호사를 비롯해, 그동안 1인 시위 현장부터 함께 곁을 지켜 온 22명의 변호사들은 기꺼이 원고 대리인을 자청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일제 전범기업 미쓰비시 뒤에 법조계의 삼성이라고 불리는 국내 최대로펌 ‘김앤장’이 있었다면,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 곁에는 아픔을 함께 나눠 온 가슴 따뜻한 22명의 변호사들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1월 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승소했지만, 미쓰비시 측이 판결에 불복해 곧바로 항소했다. 2015년 6월 24일 광주고등법원 항소심에서도 승소하자, 미쓰비시 측은 또 다시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사건은 그해 7월 대법원에 계류됐고, 대법원의 마지막 판단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심초사 기다리는 원고 할머니들의 애타는 심정과 달리, 박근혜 정부에서는 기존 판결을 뒤집기 위한 대법원 초유의 재판 거래가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한일 간 외교적 갈등을 원치 않은 박근혜 대통령과, 권력의 시녀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결국 소송 제기 후 6년 1개월여 만인 지난 11월 29일에야 대법원에서 근로정신대 사건 최초의 승소 판결을 확정지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측 대리인을 맡은 김앤장과 맞서 22명의 젊은 변호사들이 마침내 승리한 것. 더불어 일본 소송으로부터 장장 19년 만에 비로소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피눈물을 닦아 줬다.
“일본 갔다 왔다는 이유로 '위안부'라는 오해를 받으며, 남편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다. 고향에서는 지금도 우리보고 손가락질을 한다. 그동안 자식들한테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평생을 살았다”(김성주. 2018.11.29 승소 기자회견)
원고 중 유일하게 승소 판결을 현장에서 지켜 본 김성주 할머니(90)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며 “그동안 우리를 위해 함께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통해 고마움을 전했다.
한편,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은 오는 14일, 변론인이기 전에 따뜻한 인간애를 몸소 보여 준 민변 광주전남지부 소속 22명의 원고 대리인단에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감사패 전달식2018.12.14(금) 저녁 7시. 어느 멋진 날(지산동)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대법원 승소 원고 대리인단
변호사강부원 김상훈 김정우 김정호 김정희 김현무 문영곤
박인동 박지현 소병선 오대한 이상갑 이성숙 이소아 임선숙
임태호 정다은 정인기 최목 최정희 홍지은 홍현수 님(22명)
※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3차 소송 항소심 선고안내
. 사건번호 2017나59993
. 원고 : 이경자 김영옥(2명)
. 일시 : 2018. 12. 14(금) 오후 2시
. 장소 : 광주지방법원 항소부 303호 법정
당일 참석 원고: 이경자
당일 선고 후 법정 앞 브리핑 예정
◯ 문의 : 안영숙 공동대표 062-365-0815, 010-9268-6750
2018년 12월 13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이국언 안영숙 김정희)
[참고자료]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3차 소송 항소심 선고
(12.14.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 항소부 303호 법정)
원고 중 이경자 참석 예정. (김영옥 할머니는 건강상 이유로 참석 어려움)
- 판결 직후 법정 앞 판결 관련 브리핑 예정
■ 3차 소송 원고 현황(사건번호: 광주지방법원 2017나59993)
원고
주소
비고
김영옥(金英玉.1932.3)
서울
여수 미평((美坪) 초교 졸업 후 1944.5월경 동원.
이경자(李敬子.1943.2)
전남
나주
나주초교 졸업 후 1944.5월경 동원된 후 1944.12.7 지진에 숨진 故 최정례(崔貞禮)의 유족(조카 며느리). 결혼 후 모시게 된 시할머니가 “어린 딸을 잃고 내가 어떻게 따뜻한 방에서 지낼 수 있겠느냐”며 찬 겨울에도 이불을 마다했던 시할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소송에 참여.
3차 소송 원고들 이야기
■ 원고 : 김영옥
(1932. 金英玉. 여수 미평(麗水 美平)초등학교 졸업. 현재 서울 거주)
“어린 애들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여수항까지 따라와 떠나는 저를 붙잡고 하염없이 우시던 할머니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한번은 소이탄 공격에 기름 파편이 몸에 튀어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말았는데, 특히 양쪽 팔에 화상이 심했습니다. 진물이 늘 옷과 들어붙었기 때문에, 그것을 떼고 소독할 때 마다 매번 죽을 고통이었습니다.
흉터 때문에 젊은 날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남한테 흉터를 보이는 게 부끄러워 젊어서도 남 앞에 손 한번 내 놓을 수도 없었고, 특히 결혼할 나이가 되어 사람을 만나는데도 스스로 자신이 없어, 괴롭기만 했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됐지만 주변에서는 ‘위안부’로 잘못 알아, 늘 죄인처럼 일본에 다녀온 것을 숨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남자를 만났는데 그 어머니는 “저런 며느리는 볼 수 없다”며 결혼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 원고 : 이경자
(1943. 李敬子. 1944.12.7.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에 사망한 나주초교 졸업생 최정례(崔貞禮)의 조카 며느리. 현재 나주 거주)
“지진에 죽은 고인(최정례)과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결혼할 때 이불을 여러 채 해 왔는데, 시할머니는 한 겨울에도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이불을 덮지 않아, 내심 제가 해 온 이불을 덮지 않아 서운하기도 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어린 자식을 보내고 내가 어떻게 이불을 덮고 편히 자겠느냐?‘며 끝내 이불을 덮지 않으셨습니다.
시할머니는 또 추석과 설 명절에는 집안 대문 밖에 과일, 조기, 나물과 밥 한 그릇과 국을 놓아 상을 차려 놓도록 했습니다.
“밖에서 죽은 귀신은 못 들어오고 밖에서 맴돈다.”는 말도 있어, 안타까움에 그랬던 모양입니다. 시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저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사랑하는 어린 딸을 잃고 쓸쓸해하시던 생전 시할머니의 모습이 생각나, 저도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51년째, 명절이 되면 간단하게라도 상을 차리고 있습니다.
돈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딸을 먼 일본 지진에 잃고, 평생 가슴에 한을 안고 돌아가신 시할머니를 대신해, 한이라도 풀려고 이렇게 소송에 나서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