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어신은운동화/허정희
강의를 마치고 후문으로 향한다.정문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없었다.
아침부터 흐리던 잿빛 하늘이 눈이 되어 흩날린다. 후문으로 가는 길위로 며칠전부터 내린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쌓인 눈이 눈더미가 되어 내 발길을 막아선다. 길을 막아선 눈더미에는
누런 흙탕물이 묻어있었고, 지난날의 오가던 우리들의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리던
흰눈이 눈더미에 남겨진 흔적을 지우려 진눈깨비로 변해간다. 왠지 모르게 온종일 눈이 올 것
같아서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겨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허기진 탓인지 늘 춥고, 걸음을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제자리인 것 같아서 겨울날의 버스정류장은 더 멀고 낯설게 느껴진다. 오가는 버스들이
찬바람을 몰고 와 정류장에 내려놓고 정신없이 사람들을 채우고 횅한 큰 소리를 내며 쉴틈없이
어디론가 급히 떠난다.
멀리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내리는 어둠과 눈사이로 희미하게 다가온다. 늦게 나타난
버스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이끌려 얼어붙은 발을 몰아
차로로 떠밀어냈다. 버스의 번호판 옆으로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오고, 서로가 먼저라고
우기면서 섞인 무리가 다가서는 버스를 향해 달려간다. 마치 이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않은
버스인 것 같아 나도 달렸다. 사람들에 떠밀려 버스의 맨끝자리에 서서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버티려 남은 힘을 모아 다리에 힘을 주다가 버스길 건너편에 서있는 한사람을 보았다. 조금 더
가까이 보려고 얼어있던 발꿈치를 들어 앞에 선 사람을 밀어내고 버스의 천장에 달려있던
손잡이에 몸을 실어본다. 서리낀 차창사이로 그가 보였다. 그는 흰눈이 덮인 길위에서 운동화를
꺾어 신고 서 있었다. 추위에 얼어있던 심장이 멈춘 것 같아 눈을 껌뻑거려본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휘청이던 기억이 그가 있던 곳으로 나를 데리고간다. 그리움이 느닷없이 퍼붓는 눈처럼
밀려온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가슴깊이 묻어둔 시린숨을 몰아 내쉬어본다. 주저앉고 싶은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안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로 걸어왔다. 뿌연 현실속에서도, 사회정의를 외치던 시위대속에서도, 진압을
피해 후문으로 향해 달리던 무리속에서도, 그리고 나를 만나러 올때도, 그는 운동화를 꺾어신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민중이 되어, 가슴속에 품은 그의 신념이 이루어질 그 날을 위해
쉬지않고 계속 달리고 있었다. 온종일 교정을 뒤덮었던 매운 최루탄연기도, 무자비한 군화의
발길질도, 끌려가는 친구들의 아우성이 실린 트럭도 달리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가 높게
달린 깃발이었고, 그 깃발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오월의 축제가 끝나던 날 그런 그가 미치도록 화가나서 왜 운동화를 꺾어신는지 물어보지도
못한채 헤어지자고 했는데, 아무런 대답없이 바라만보던 그가 버스의 느린 움직임을 따라
내게서 멀어져간다. 멀어지는 그가 눈이되어 찬바람에 휘날리더니 기억저편으로 사라져간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고 겨울이 긴 도시에서 두번의 겨울을 만났다. 꿈은 구름같은
시간속에 바람을 타고 알 수 없는 곳에다 나를 내려놓는다. 일찍 찾아오는 긴 어둠은 꿈과 만나
늪을 만들고, 그 늪에서 겨울앓이가 시작되었다. 마치 독한 감기에 걸린것처럼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낫질 않는다. 긴 겨울이 지나간 그자리엔 힘들게 애쓰지 않아도 봄은 오는데, 그 때의 그
봄은 얼마나고단하고, 멀리있었는지…
겨울이 시작되는 날 산책길에서 앞서가는 남편은 운동화를 꺾어신고 있었다. 꺾여진 운동화를
닮은 그의 어깨는 세월에 눌리어 내려앉았고, 드러난 발꿈치처럼 휑한 그의 정수리가
겨울바람에 도드라져보였다. 힘겹게 흔들리는 흰머리카락이 시간속에 남기고 간 자국이어서
내마음도 흔들렸다.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울음이 가늘어진 그의 다리에 기대어 숨죽여 울고
있었다.
젊은날의 눈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날아온 눈이 길위에 하나씩 쌓여간다. 그가 걸어간
발자국이 눈길을 열어가고, 길이된다. 그가 걷는 이 길이 누군가의 길벗이 되어 가는길이
외롭지않기를 바라면서 꾹꾹 눌러가며 걸어간다.
집으로 돌아와 외투를 벗어 걸고 뒤돌아보니 그가 벗어놓은 운동화가 현관옆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운동화를 들어 꺾어진 뒤축을 당겨 한쪽으로 닳아버린 운동화를 바로 세워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운동화속에 그와 내가 있었다. 먼길을 걸어온 우리들의 토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쭈그러진 주름이 웃으며 걸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