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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믿음
(로마서 1-4장)
홍인규
1. 인사(1:1-7)
로마서의 서두(1:1-7)는 바울의 인사이다. 먼저, 바울은 자기가 세우지도 않았고 아직 방문해 본 적도 없는 로마 교회에 자신을 소개한다(1:1).1) (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dou/loj)"이다. 그는 구약의 아브라함(창 26:24; 시 105:42), 모세(민 12:7, 8; 신 34:5; 수 1:1, 2, 7), 다윗(삼하 7:5; 시 78:70; 89:3), 이사야(사 20:3)와 같은 야웨의 특별한 종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울이 구약 "야웨"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만유(하늘과 땅)의 주이시며 바울 자신의 사명은 처음부터 주되신 그리스도에 의해 위임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2)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그 분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자이다. 따라서 특별한 권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3)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avfwrisme,noj)." 갈라디아서 1:15("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afori,saj]")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우리는 예레미야 1:5("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cf. 사 49:1)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바울의 구체적인 소명에 앞서 이미 선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2)
다음으로,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간단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요약을 제공하고 있다(1:2-6). 복음은 천재의 우발적인 착상도 아니고, 혹은 그리스도의 예고 없는 출현으로 비로서 세상에 나타났던 메시지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1:2).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자주 구약을 인용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독특하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다(1:3a). 그러니까 아들은 복음의 저자가 아니고, 복음의 결정적인 내용인 것이다. 아들은 말할 것도 없이 1:4에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빌립보서 2:6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본성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동등이시다. 그런데 아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 통치의 수립을 위하여 인간 역사의 장에 나타나셨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계속되어온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이었다.
1:3b-4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장엄한 서술이 나타난다. "육신으로 말하면(kata. vrs,rka)," 아들은 메시야의 약속에 따라 다윗 왕의 자손으로 태어났다(1:3b; cf. 삼후 7:12-16; 사 11:1, 10; 겔 34:23-24). 그런데 "성결의 영(성령)으로 말하면(kata. pneu/ma a``giwsu,nhj),"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의 권세 있는3) 아들(Son of God with power)로 임명되셨다(1:4; cf. 시 2:7).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상 사역 동안 연약과 비천의 상태에 있던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권세와 영광을 얻으시고 만유의 주로 즉위하셨음을 의미한다(cf. 빌 2:9-11).4) 여기서 "육신으로 말하면"과 "성결의 영(성령)으로 말하면" 사이의 대조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대조가 아니라, 그 분의 지상의 상태와 하늘의 상태 사이의 대조이다.5)
이 부활하신 주로 말미암아 바울은 "은혜와 사도의 직분(ca,rin kai. avpostolh,n)"을 받았다(1:5a). 여기서 "은혜와 사도의 직분"이란 중언법(hendiadys)으로 사도직의 은혜와 같은 말이다(cf. 15:15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너희에게 썼노니"). 그러니까 사도직은 바울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혜이다.
바울의 사도적 사명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하게 하는 것이다(1:5b). "믿어 순종(u``pakoh. pi,stewj)"이라는 말은 헬라어를 직역하면, "믿음의 순종"이다. 이 구절은 결론적인 문장인 로마서 16:26("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cf. 15:18)에도 나타나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다. 필자가 볼 때, "믿음의 순종"은 믿음 곧 순종, 또는 순종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의미한다(동격의 소유격).6) 믿음과 순종은 로마서 1:8; 데살로니가전서 1:8; 로마서 15:18; 16:19에서, 그리고 고린도후서 10:5, 15에서 상호 교환될 수 있다. 또한 로마서 10:16에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순종으로 서술되고 있다.7) 이렇게 바울이 믿음과 순종을 결합시키는 것은 우선적으로 윤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다(cf. 고후 10:4-6).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건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사탄과 같은 옛 시대의 지배자들을 정복하시고(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지만), 새 시대를 출범시키셨다. 그리고 새 시대의 주(Lord)로 즉위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이전의 반역 행위를 중단하고 주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8)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Savior)로 믿으나, 주(Lord)로 인정하여 순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로 인정하여 순종하지 않으면서 구원자(Savior)로 영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단순히 죄용서만이 아니라, 믿는 자를 죄와 사탄의 통치 아래에서 구출하여 자기의 통치 아래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자를 믿는 것과 주께 순종하는 것을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은 순종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서 종노릇함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다(1:6).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 속하여 있지도 않고, 옛 시대의 지배자들(예, 죄, 사탄)에게 속하여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주께 무릎을 꿇어 순종함으로써, 그의 이름에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한다(cf. 빌 2:9-11). 믿는다하면서도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사는 자는 주께 반역 죄를 범하는 것이다.
1:7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축복의 말이다(cf. 민 6:24-26). 여기에는 종말론적인 구원이 표현되어 있다. 곧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에로의 통로가 열리고, 지상에는 평화의 신적 질서가 수립되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9)
2. 감사(1:8-15)
인사 뒤에 보통 따라오는 감사에서(1:8-15),10) 바울은 먼저 로마 교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1:8).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계속 로마 신자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킨다(1:9). 특별히 그는 오랫동안 그들을 방문하려는 소원을 가지고 기도해 오고 있음을 밝힌다(1:10).
바울의 소원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로마 성도들을 견고케 하려는 것이다(1:11). 여기서 "신령한 은사"라는 것은 고린도전서 12:8-10, 28-30 또는 로마서 12:6-8에 나열된 성령의 은사와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11) 그러나 문맥을 고려하면, 특별히 1:15("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와 관련시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12)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로마 교인들의 믿음은 이미 온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다만 복음으로 그들을 "견고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신중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바울은 베푸는 자이고 로마 교인들은 받는 자들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즉시 자기 말을 바로 잡는다: "이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는 동안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로 격려를 받으려 함이라"(1:12, 필자의 번역).13)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서로에게 주는 복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비록 사도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도 그러한 교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한다.
1:10에 이어서, 1:13에서 바울은 로마 방문 계획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었음을 밝힌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까지 지중해 동쪽 지역에서의 전도 활동 때문에, 로마로 갈 수가 없었다(15:22 이하). 그러나 이제는 가능성이 보인다. 그가 원하는 바는 다른 이방 지역에서와 같이, 로마에서도 새로운 회심자들을 얻는 것이다.14)
바울은 모두에게 빚을 진 자이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음의 사자(messenger)로서 모든 세계가 그에게 개방되어 있다. 어떤 문화적인 제약이나 지역 간의 경계도 그를 붙잡아 둘 수는 없다. 그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지혜있는 자들에게 위압받지도 않고, 어리석은 자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도 있다(1:14).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사명에 묶임을 받은 자이다. 그러기에 1:15에서 또 다시 로마 방문 문제를 언급한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3. 로마서의 주제: 하나님의 의의 계시(1:16-17)
1:16a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23의 말씀처럼,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유대인은 신명기 21:23("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에 근거하여, 십자가를 저주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능력, 승리, 장엄을 의미하나 십자가는 연약함, 수치, 패배를 뜻한다. 한편, 헬라인(그리스인)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자기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신(god)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미친 것이다.15)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복음을 자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16b). 복음은 세상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그것은 인간의 통제 밖에 있으며, 심지어 교회와 성직자들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항상 실재(reality)가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 안에서 복음을 믿는 자는 미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확신을 얻게 되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현재적인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란 단순히 어떤 기적적인 행위가 아니라, 세계사의 전환점을 이룬 하나님의 행동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수립시킨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원이란 바로 그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dikaiosu,nh qeou/)"가 계시되어 있다(avpokalu,ptetai)(1:17a; cf. 3:5, 21, 22, 25, 26, 10:3; 고후 5:21; 빌 3:9). 3:21이하에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나타났다고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로마서 3:3-7을 보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미쁘심"(3:3) 그리고 "하나님의 참되심"(3:7)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주격적 소유격).16) 여기서 "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dikaiosuvnh)인데, 그것은 히브리어로 쩨덱(qdc)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윤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언약(covenant) 개념이다.17)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관계(relationship)를 수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쌍방에게 의무와 책임을 부과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편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일반적인 도덕의 기준에서 흠이 없을 때가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따라 행동할 때이다.18) 이에 대한 고전적인 예는 유다가 자기 며느리 다말의 행위를 용인한 말에 나타나 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롭도다)"(창 38:26). 고대 이스라엘에는 고엘 제도가 있었다. 그것은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그 형제 중의 누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도록 하는 제도이었다. 그런데 시아버지 유다는 후손을 잇는 일에 소홀하였고, 과부가 된 며느리 다말은 적극적인 집념을 보였다. 말하자면, 유다는 자기의 의무에 불성실하였던 반면, 다말은 신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다말이 자기보다 의롭다고 인정한다.
창세기 17:7-8에 의하면, 여호와(야웨)는 친히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 백성에게 복을 내리시고 또한 적들과 위험한 상황들 속에서 구출하셨다. 심지어 그들이 범죄하였을지라도, 회개하고 부르짖으면 그들을 회복시키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구약에서는 여러 곳에서 "의"로운 행위라고 묘사하고 있다(예, 출 9:27; 삼상 12:7; 단 9:16; 미 6:5). (사 45:8; 46:12-13; 51:5-6, 8; 56:1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의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언약 백성에 대한 언약적인 신실성(covenantal faithfulness)임을 알 수 있다.19) 이것은 구약에서 자주 언급된 그의 언약적인 사랑(covenantal love or loving kindness, dsh)과 비슷한 말이다(예, 창 19:19; 24;27; 32:10).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빈번히 "인자"와 "성실"로 정의되고 있다(예, 시 5:7-8; 89:13-14; 98:2-3; 사 11:5; 16:5).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전례 없는 구원의 행위이며, 그의 언약적인 신실성의 최고 표현이었다. 인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언약을 파괴하였다(cf. 호 6:7).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길 거절하고(롬 1:21, 28), 창조주보다도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말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반역한 인류를 위하여 죄 용서와 함께 관계(언약 관계) 회복의 길을 여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물에 대하여 자신을 고립시키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창조물에 대하여 은혜로운 주(Lord)로서 행동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구원)는 오직 믿음(무조건적인 신뢰)으로만 수용될 수 있다(롬 1:17b).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evk pi,stewj eivj pi,stin)의 문제이다.20) 하박국 2:4의 말씀처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1:17c; cf. 갈 3:11).21)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자는 오직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고 그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며 사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의도하신 생명의 충만을 경험할 것이다.
4.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1:18-3:20)
1) 하나님의 심판과 이방인(1:18-32)
로마서 1:18-3:20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기 전, 죄의 권세 아래서 상실되고 폐기된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복음의 긴급한 필요성을 선포한다.
1:18에서는 이 단락(1:18-32)의 주제문이 제시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진노의 개념과 사랑의 하나님을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이 때문에 마르키온(Marcion)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에서 "하나님의(qeou/)"를 삭제해 버렸다. 그러나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을 죄를 심판하시는 신으로 묘사한다(예, 출 15:7; 32:10-12; 민 11:1; 롬 2:5; 5:9; 엡 5:6; 골 3:6; 살전 1:10; 5:9).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거친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악에 대한 그 분의 절대적인 반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악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아니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죄는 무엇인가? 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1:19이하에 암시되어 있는 진리, 곧 온 세계가 창조주(Creator)에게 속해 있다는 진리를 반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반역 죄이다. 이 죄는 보통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표현된다. 불경건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불의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무시하는 것이다.22)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그 창조된 만물 안에서 분명히 지각될 수 있다(1:19-20).23) 원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속성들은 감각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예술가가 자기 예술 작품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의 창조물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이다(cf. 시 19:1; 사 6:3; 행 14:14이하). 말하자면, 하나님의 불가시적인 것들에 대한 지식이 가시적인 피조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지도 않았다"(1:21a, 표준 새번역).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자와 주로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피조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아담이 피조물의 신분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배척한 것과 같은 것이다(창 3:5).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악의에 찬 반역이 인간의 죄의 본질이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인식된 주(Lord)에 대한 완고한 항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공격, 그것은 악마적이다.
반역의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1) 인간의 생각은 허망하여지고, 지각없는 마음은 어두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1:21b).24)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고의적으로 등을 돌리는 자는 빛을 잃고, 암흑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그는 사리를 분별할 수 없게 되며, 실재(reality)에 대한 통찰력을 상실하고, 환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전도된 혼돈의 영역이다.
(2)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게 되었다(1:22). 인간은 자기가 고도의 지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창조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니까 종이 엄연히 존재하는 주인을 부인하고, 주인처럼 행세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원래 위치보다 더 올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원래 위치 이하로 곤두박질하였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을 자랑하길 중단하지 못한다. 그는 더 이상 자기가 처한 상황을 스스로 진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1:23, 표준 새번역).25)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 형상의 우상으로 대치하여 경배하게 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절대 기준을 상실하고 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것을 상대화하고,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여 숭배한다. 인간이란 스스로 하나님이 될 수 없고, 무엇인가를 섬기며 살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신성을 벗어나고자 하나, 벗어날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시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신성을 저주로 체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최후의 심판자의 진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26) 이 진노는 하나님이 인간을 "내어 버려두신" 것으로 표현된다. 이 표현은 1:24, 26, 28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난다.27)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비극적인 절망에 빠져 들어가게 그냥 방치해 두셨음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자기가 의도한 대로 엄청난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며, 그것 때문에 스스로 심각한 노예 상태로 빠지게되었던 것이다.
1:25a는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를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다"는 것이다(표준 새번역). 한 마디로 말하면, 우상 숭배이다. 우상 숭배는 거짓이다. 이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1:28a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것이다(표준 새번역). 그러나 인간의 어떠한 거짓 행위도 하나님의 고유하고 불변적인 영광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다"(1:25b).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어디에 내어 버려 두셨는가? (1)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1:24). 1:26a은 이것을 "부끄러움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한다. 이 말들은 인간이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별히 성적 탈선을 말한다. 그것의 특수한 형태가 1:26b-27에 나타나는데, 곧 여인들 사이와 남자들 사이의 동성 연애이다. 간음도 비참한 것이지만, 동성 연애는 더욱 더 비참한 것이다. 그것은 성에 관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혼돈과 무질서에 넘겨졌다.
(2) "타락한 마음에 내어 버려두셨다"(1:28b). 여기서 "타락한(avjdo,kimoj) 마음(nou/j, mind)"이란 올바른 도덕적 결정을 하기에 부적격한 마음을 가리킨다.28) 피조물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의존해야 적절하게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행동을 하기에 부적절한 마음이다. 1:29-31에는 악덕의 목록이 등장한다(이것은 롬 13:13; 고전 5:10-11; 고후 12:20-21; 갈 5:19-21에 나타난 목록과 비슷하다.). 목록은 길고, 내용은 다양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질서나 구조도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악덕들이 대부분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악(수군수군하는 것에서 살인에 이르기까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우상 숭배는 악덕의 홍수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창조 세계를 무서운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29)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 되어, 자기만의 존재와 가치를 주장하다가 무차별하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는 존재의 질서에 대한 의식과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그의 죄악은 우상 숭배에서 시작하여, 남녀 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인간 관계의 붕괴(공동체의 와해)로 발전된다. 타락한 인간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처럼 아무런 제어를 받지 않고 마음껏 자기 욕심 가운데서 달리도록 허용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가!
1:32는 결론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법도(dikai,wma)"(표준 새번역), 곧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cf. 1:19 이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일을 행한다. 아담이 "네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창 2:17) 하나님의 경고를 익히 알면서도, 거침없이 손을 내밀어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말이다.30)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두둔한다.31 이것은 인간의 죄가 단순히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간적인 불복이 아니라, 아주 의도적이고 계산된 도전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2) 하나님의 심판과 유대인(2:1-3:8)
위에서(1:18-32) 바울은 이방인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묘사하였다. 이제 그의 고발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2:17이하에서 바울은 직접적으로 유대인에게 말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2:17). 그러면 2:1-16에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여기서도 그는 유대인을 대화의 상대로 삼고 있다.32) 유대인은 이방인처럼 하나님의 의의 복음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대인의 환상은 뿌리채 뽑혀야 한다. 2:1-3:8의 구조는 그런 의도와 잘 부합된다. (1) 2:1-1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의 기준, 곧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보응하실 것을 선포한다. (2) 2:12-16에서 그는 율법 소유가 안전 보장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3) 2:17-24에서는 유대인의 율법 위반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4) 2:25-29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할례는 무익하다고 주장한다. (5) 마지막으로, 3:1-8에서는 자신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의 항의에 대하여 답변한다.
종교적인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방인의 우상 숭배와 도덕적인 탈선을 혐오하며 정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확신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내세우며, 자기들은 정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태도 속에 들어 있는 자기 기만을 폭로한다.
바울의 고발은 갑작스럽고 거칠다: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c). 유대인의 잘못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들도 동일한 일을 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무사하다(2:2). 어느 누구에게도 특권이 인정되지 않는다(cf. 2:11). 그러므로 자기들이 정죄하는 바로 그 일을 행하는 유대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2:3).
구역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셨음이 수없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여기에서 유대인은 미래에 대한 안전을 찾고,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것과 함께 주어지는 요구를 분리시키며, 지금 관용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 마지막 날의 심판자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회개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지,33) 방종을 장려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cf. 겔 33:11; 벧후 3:9).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믿고 자기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풍성을 멸시하는 것이다(2:4).34) 만일 고집을 부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 위에 하나님의 진노는 축적되고, 그 진노가 마지막 심판 날에 쏟아 부어질 것이다(2:5).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요구에 자신을 개방하지 않고 폐쇄적인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삶을 사는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을 노획물로 간주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항하며 자신을 방어한다.35)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자기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엄중한 심판자로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시다(2:5).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자에게는 구원으로 나타나며, 반면에 반역하는 자에게는 재난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2:6). 이것은 마지막 심판이 행위에 근거할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예, 욥 34:11; 시 62:12; 잠 24:12; 렘 17:10; 32:19; 겔 9:10; 11:21; 호 12:2), 바울 자신의 서신을 비롯한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두루 발견되는 것이다(예, 롬 14:12; 고전 3:8, 13이하; 4:4이하; 9:17; 고후 5:10; 9:6; 갈 6:7-10; 엡 6:8; 골 3:23, 24; 마 5:20, 22, 27-30; 7:21; 16:27; 25:31-46; 눅 18:18-30; 요 5:29; 히 6:7-8; 10:26-31; 벧후 1:10-11; 계 2:7, 11, 23, 26; 3:5, 12, 21; 14:10-12; 20:12-13; 22:12). 어떤 사람들은 행위 심판의 교리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와 모순된다고 생각한다.36)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사건은 무엇보다도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그러니까 죄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붕괴시키고 구원의 새 시대를 도래시킨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에 동참하는 자는 죄의 통치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로 이동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와 권리를 따라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37) 그러나 불신자는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창조주의 절대 주권을 거부하고, 환상 속에서 스스로 주인의 삶을 영위한다. 행위 심판이라는 것은 인간의 업적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의 삶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주께 순종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주께 반역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2:7-10에서 바울은 예언자적으로 최후 심판의 기준에 의거하여 복과 저주를 선포한다. 먼저, 그는 2:7에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믿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자기의 최종적인 영광을 기대하고 열망하는 자이다. 그는 지상적인 가능성의 영역 저편에 있는 초월적인 목표(영광, 존귀, 불멸)를 향하여 부단한 추구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선행이라는 것은 주께 대한 소망의 표시이다.38) 그가 의지하는 것은 자기 행위가 아니고 주(Lord)이시다. 그에게는 영생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야망(evvriqei,a)에39)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좇는 사람에게는 진노가 내려질 것이다(2:8). 이기적인 야망의 지배를 받는 자는 모든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자이다. 그는 피조물은 창조주를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무시하고(cf. 1:18) 자기 자부심과 이익을 위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배척한다. 진노는 이런 반항에 대한 보응이다.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환난과 고통이 있을 것이고,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다(2:9a, 10a).40)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에게 먼저 임한다. 유대인은 구약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방인도 창조주께 순종하고 경배를 드려야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2:9b, 10b).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아니하신다(2:11).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시다는 말이다. 단순히 유대인이라고 해서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입는 것은 아니다(cf. 마 3:9). 정리하면,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절대자에게 순종이냐 반역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복이 주어지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쏟아지는 것이다.41)
죄는 심판을 가져온다.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이방인)는 또한 율법이 없이(곧 무법한 행악자로서) 멸망에 넘겨질 것이다(2:12a). 유대인은 이 진술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진술도 수용하여야 한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2:12b). 율법은 유대인을 이방인으로부터 구별해주는 배지(badge)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율법 소유 그 자체가 유대인을 정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다"(2:13).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판결을 받으려면, 율법을 행하여야 한다(cf. 마 3:9이하; 25:31-46).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성실하게 율법을 듣는 것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운 판결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2:12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방인은 모세의 율법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령하는 바를 때때로 행함으로써(예, 부모를 공경하는 것, 가난한 자를 돕는 것, 살인이나 도둑질을 금하는 것),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2:14).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2:15에 나타난 것과 같이, 율법의 요구가 그들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기 속에 낯선 손에 의해 기록된 법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들이 있다. 그것들은 자기 행동을 비판적으로 감시하는 양심과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발와 변호이다(2:15). 인간의 자기 비판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내다본다. 그 날에는 인간의 모든 은밀한 것들이 드러날 것이다(2:16).
정리하면, 이방인에게도 율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바울의 이런 주장은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공격도 된다. 율법이란 유대인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권같은 것이 아니다. 율법을 소유하고 그것을 규칙적으로 듣는다고 해서, 그것이 안전 보장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2:17-24에서 바울은 유대인에 대한 구체적인 공격으로 이동한다. 먼저, 그는 유대인의 특권을 나열한다(2:17-20).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여 "유대인"이라고 칭하면서42) 율법 소유를 하나님의 백성의 확실한 표시로 생각하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자랑한다(2:17). 또한 율법으로 교육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간할 줄 안다(2:18).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에 대하여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요 어리석은 사람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확신한다(2:19-20, 표준 새번역).
다음으로, 바울은 유대인의 삶 속에 나타난 극악한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2:21-23). 유대인은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한다(2:21a). 예를 들면, 그들은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도둑질을 하고,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간음을 하고,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신전의 물건을 훔친다(2:21b-22). 한 마디로 말하면, 율법을 자랑하는 자들이 율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2:23). 이사야 52:5의 말씀처럼, 유대인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1:24).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오히려 신성 모독의 원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2:25-29에서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고발은 절정에 도달한다. 이제 바울은 유대인의 최후의 피난처인 할례를 공격한다. 할례라는 것은 "언약의 표(the sign of the covenant)"이다(창 17:11). 그것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백성, 곧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서약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cf. 출 19:8). 그러므로 언약의 의무인 율법을 지키면, 할례는 유익하다(2:25a; cf. 갈 5:3). 그러나 율법을 어기면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 되어, 할례는 원래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2:25b). 만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 율법의 요구를 행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무할례를 할례(곧 하나님의 백성)로 인정할 것이다(2:26).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방인은 유대인, 곧 율법의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도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을 심판할 것이다(2:27; cf. 눅 11:31-32).43) 여기서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44) 참된 유대인은 "표면적(outward)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inward) 유대인"이다. 육신에만 할례를 받은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곧, 성령으로 혁신적인 내적 변화를 경험한 자)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인 것이다(2:28-29a). 이것은 결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마음의 할례는 이미 구약 성경에서 요구되고(신 10:16; 렘 4:4; 9:25-26) 또한 약속된 것이다(신 30:6; 겔 36:26-27). 로마서 8:4에 의하면, 성령으로 변화를 받은 자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 그에게는 인간의 은밀한 것을 알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주어질 것이다(2:29b).
이상의 주장처럼, 할례나 율법 소유가 유대인에게 구원을 자동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란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이라면, 육체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의 유익은 무엇인가?(3:1) 지금까지의 비판적인 논조를 떠나, 바울은 의외로 유대인의 유익이 여러 모로 많다고 답한다(3:2a; cf. 9:4-5). 유대인도 이방인과 함께 마지막 날에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해서, 유대인의 구원사적 우월성이 전적으로 무효하게 된 것은 아니다. 유대인의 특권들 중에서 첫째 가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lo,gia tou/ qeou/)"을 위탁받았다는 것이다(3:2b).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 곧 하나님이 자기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말씀이다.45)
언약을 맺을 때, 양편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서약한다. 출 19:5-8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삼겠다고 약속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2:1-29에서 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언약의 약속에 신실하지 못하였다. 원래 언약(계약) 관계 안에서는, 한편이 약속을 깨면 다른 편은 자동적으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심을 유지하신다(cf. 15:8). 사람은 다 거짓되지만,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의 신성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신실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지 못한다(3:3-4).46)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빛이 어두움 가운데서 더 밝게 빛을 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 결코 상실할 수 없는 유익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문제는 로마서 9-11장에서 상세히 취급된다. 특별히 11장에는 신실하지 않은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이 제시되어 있다.).47)
어떤 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한층 더 드러나게 하면, 인간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오히려 이익을 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옳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3:5) 바울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어리석은 반론을 즉각적으로 배척한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mh; gevnoito)"(3:6a). 하나님은 우주의 도덕적 통치자이시며, 만인의 마지막 재판관이시다(cf. 사 66:16; 욜 3:12; 시 94:2; 96:13). 만일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는가?(3:6b)
그러나 반론을 제기한 자는 수긍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말로 이렇게 항변한다: "나의 거짓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그분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아야 하는가?"(3:7, 표준 새번역) 이러한 반대를 증대시키기 위하여, 바울은 비판자들의 궤변적인 주장을 덧붙인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3:8a, 여기 비판자들은 유대인이거나 유대 그리스도인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복음은 자주 이런 식의 비판을 야기시킨다. 바울이 볼 때, 그런 비방은 단순한 중상 모략이 아니라, 하나의 신성 모독이다. 바울은 3:6에서처럼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에게 불의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변명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다만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한다(3:8b). 이것은 하나의 저주 선언이다.
정리하면, 2장에서 바울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하여 유대인의 율법 소유와 할례의 특권을 박탈한 다음, 3:1-8에서는 유대인의 항의에 대하여 답변한다. 3:1-4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 안에 있는 유대인의 유익을 주장한다. 그리고 3:5-8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방종주의의 위험을 취급한다.48)
3)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류(3:9-20)
3:1 이하에서 바울은 유대 민족에게 소속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하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우월한 것이 아닌가?(3:9a,b)49) 바울의 대답은 단연코 부정적이다: "결코 아니라(ouv pa,ntwj)"(3:9c). 물론, 유대인에게는 구원사적인 장점들이 많다. 그러나 실상은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없다. 유대인도 이방인처럼 범죄한 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선언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u`f a`marti,an)있다"(3:9d; cf. 갈 3:22). 이것은 모든 인류가 다 죄의 권세 아래(Òunder the power of sin,Ó RSV, REB)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바울에게 있어서, 단수 a`marti,a는 의인화된 세력, 곧 죄의 권세를 의미한다.) 전체 인류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인일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의 조종을 받는 노예이다(cf. 롬 6:15-23). 이 사실을 바울은 3:10-18에서 구약 성경(전도서, 시편, 이사야)을 통하여 입증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전 7:20)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 시 5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시 5:9)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시 140:3)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시 10:7)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사 59:7-8; cf. 잠 1:16)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시 36:1)."
이러한 혹독한 묘사에서 강조되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이다. 첫째,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가 다 죄인이다("…하나도 없으며…하나도 없도다"). 둘째, 인간은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모든 지체(예,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가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데 사용된다.
이처럼 율법(여기서는 로마서 3:10-18에서 인용된 책들을 포함한 구약 성경 전체)은 유대인("율법 안에 있는 자들")을50 비롯하여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3:19). "율법의 행위"(율법 준수)로51)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인간은 없다(3:20a). 달리 말하면, 율법 순종이 인간에게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율법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체적으로 회개할 능력이나 죄의 세력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율법으로는 다만 우주적인 세력인 죄(a`marti,a)를 깨달을 뿐이다(3:20b; cf. 3:9; 7:13). 인간은 율법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자신이 죄의 권세에 넘겨진 절망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52 사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의 노예로 전락되고 말았다(cf. 롬 5:12 이하; 7:7 이하).53) 죄가 다스리는 한,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그런 상태 속에서의 인간의 노력과 추구는 오히려 위험한 것이다. 인간은 밖에서부터 오는 구원을 바라 보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에게 새로운 시작을 줄 수 있다(구원이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주의 다스림 아래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더러운 죄를 씻음받는 것만이 아니다.).
5.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3:21-31)
죄의 지배 아래서 절대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율법과는 상관없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pefane,rwtai, has been manifested).54 구약 성경(율법과 선지자)의 증언처럼(cf. 1:2), 하나님이 스스로는 구제 불능인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3:21).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여전히 신실하심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의의 출현은 역사적 운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종말론적인 새 시대의 도래를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세대(aeon)가 현 시대(aeon)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인류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오직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와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 그리고 새 언약의 수립만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로마서 3:22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통하여(dia. pivstewj Ihsou/ Cristou/)55 계시되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이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한 행위를 가리킨다(3:25; cf. 5:8, 19; 빌 2:8).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을 구속하셨다(3:24; cf. 막 10:45).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셔서, 죄의 노예 상태에서(cf. 3:9; 7:14) 우리를 해방시킨 것을 의미한다. 구속이란 말은 원래 노예 시장에서 가져온 상업 용어이다. 그것은 노예를 몸 값을 주고 사서 해방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구속의 구약적인 배경은 애굽의 속박과 바벨론의 포로 생활로부터의 구출이다(cf. 출 15:13; 사 43:1).
3:25a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구속 행위가 되는지를 설명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 속죄소(i`lasth,rion)로 세우셨으니."56) 여기서 핵심적인 단어는 히라스테리온(i`lasth,rion)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는 화해(propitiation) 행위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고,57)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죄를 용서하고 제거하는 속죄(expiation) 행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58) 그렇지만 그것은 히브리서 9:5와 구약 70인경(Septuagint)에서 속죄소(mercy-seat)를 가리킨다. 속죄소는 언약궤를 덮는 뚜껑인데, 회막의 지성소 안에(나중에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보관되었다(출 25:17-22). 레위기 16장을 보면,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번 있는 대속죄일(the Great Day of Atonement)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먼저 자신을 위해 속죄 제물을 드린 다음(레 16:6), 백성을 위해 속죄제 염소의 피를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려 속죄하였다(레 16:15). 이런 의식은 A.D. 70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규적으로 행해졌다(첫 성전 파괴 후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가 놓여 있었던 자리에 희생 제물의 피를 뿌렸다.). 모든 유대인(본토에 사는 유대인은 물론이고 외국에 사는 유대인까지)은 레위기 16장을 회당에서 배워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이 볼 때,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구약 속죄소의 종말론적인 대형(eschatological antitype)이다.59)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로운 속죄소인 것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 속죄소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처리하신 것처럼, 이제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영원히 제거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성취하였으며, 따라서 이 전에 파괴되었던 관계를 다시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죄를 가볍게 취급하지 아니하신다. 자신의 거룩한 본성을 거슬려 행동하시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전에 자기 백성의 죄를 엄중하게 처벌하지 않으시고 간과하셨다(3:25b).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다윗 같은 자들의 죄를 낱낱이 찾아내어 엄하게 벌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의롭다하신 것이다. 그와 같이 지금도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아니하시고,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3:26a).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는 결코 자기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타협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근거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그리스도 이전에 의롭다하신 것은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한 것이고, 그리스도 이후에 의롭다하신 것은 과거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이것은 구약에 나타난 모든 구원의 약속의 성취이었다(3:21). 하나님이 언약의 약속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다. 실로, 십자가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의의 최고 표현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는 유대인과 이방인 중 모든 믿는 자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주어진다(3:22b). 믿음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수용하는 것이다. 로마서 1:18-3:20에 입증된 바와 같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결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인간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영광(곧 하나님의 즉각적인 임재와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에의 참여)을 몰수당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종말론적인 영광(곧 하나님의 불멸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창 3:22-24)에 이르게 되지 못한 것이다(3:23).60)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의 피조성을 면하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동반자로서의 모든 영광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이 손실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회복될 수 없다.). 그러나 믿는 자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무상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3:24). 이것은 죄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언약 회복)을 말한다(1:17에 처음 언급된 "하나님의 의"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을 기억하라.). 좀더 설명하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제삼자(재판관)에 의해 단순히 죄 용서의 선언을 받고 방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당사자(피해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그 분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61 이러한 관계 회복은 더러운 정욕에 내어 버림을 받아(1:24, 26, 28) 죄의 지배를 받는 데서 해방되어, 이제는 하나님만을 주(Lord)로 섬기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62)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자랑, 특별히 유대인이 선민이라는 특권적인 지위를 자랑하는 것은 배척된다(3:27; cf. 2:17, 23).63) 인간의 참된 안전 보장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겸손하게 의존하는 데 있다.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이다(3:28; cf. 갈 2:16; 엡 2:8-9).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킬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유대인의 하나님인 동시에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3:29). 유대인이 늘 고백하는 것처럼(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시는 것이다(3:30).64 달리 말하면,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시는 은혜는 창조주, 곧 유일하신 하나님의 전능과 자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시내산 언약 안에 있는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유대인으로부터 한 가지 반론이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이 율법을 폐하고 방종을 권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cf. 6:1, 15).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오해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결코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하여 요구하는 바를 행하게 된다(3:31; cf. 8:4; 13:8, 10).65 참된 믿음은 반드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의 통치를 수용하는 것이다(cf. 1:5).
6. 아브라함의 선례(4:1-25)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처음으로 수령한 자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그 일은 할례받기 전에 발생하였고, 또한 약속도 믿음에 근거하여 주어졌음을 밝힌다. 그러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명제(3:28-30)를 구약 성경을 근거로 입증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논쟁적인 상황에서 선택된 것이다. 서론에서 본 바와 같이, 바울의 복음은 유대인(심지어 보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까지 포함하여)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자기들의 신학적인 입장에 일치되도록 이용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온전한 자손이 되려면 할례와 율법을 수용하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돌아가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말하자면, 바울은 자기 논쟁의 상대자가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공격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구약 성경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바울이 자기의 대적자로부터 성경에 호소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아 버리는 것은 그의 논쟁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첫째로,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한다(4:1-8). 바울의 논증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런즉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4:1).66) 이 질문은 창세기 18:3("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나가지 마옵시고")을 기억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67) 당시 유대교에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 대한 완벽한 순종의 본보기로 추앙한다. 창세기 26:5를 보면, 하나님은 이삭에게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에 근거하여 유대인의 여러 전통들은 아브라함이 율법이 기록되기도 전에 그것을 지켰다고 생각한다(예, Jubilees 23:10). 그리고 아브라함의 순종은 시련의 때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표현되었다고 이해한다. 요벨서에 의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의 나라, 기근, 왕들의 부, 그의 아내, 할례 그리고 이스마엘과 하가를 통하여 시험하였을 때, 그는 충성된 자로 드러났다(Jubilees 17:17-18).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가장 어려운 시험에서도, 아브라함은 충성을 지켰다(Jubilees 18:1-16).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마타티아스는 그의 유언에서 자기 아들들에게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았을 때 충성심이 드러났고, 그것이 그에게 의로 인정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1 Maccabees 2:52). 이렇게 유대교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다(이론적으로 볼 때)(4:2a).68)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4:2b).
바울은 4:3에서 창세기 15:6을 인용하여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cf. 갈 3:6). 창세기 15:5장을 보면, 하나님은 상속자(아들)가 없어 염려하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히 많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인간적으로 보면 도저히 성취 불가능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굳게 신뢰하였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피조물의 겸손한 수용이었다. 이 믿음을 보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자기 언약의 합당한 파트너로 인정하였다(cf. 시 106:31). 이것은 아브라함을 자기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믿음에 대한 바울의 새로운 이해가 나타나있다. 믿음은 미덕이나 어떤 종교적인 태도가 아니라, 말씀을 들음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인간은 오직 믿음 안에서 아니면 미신 안에서만 살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듣고 믿음으로 살든지, 아니면 다른 주(lord)의 거짓된 약속을 듣고 미신 속에서 살든지 둘 중의 하나만 있을 뿐이다. 신앙이란 미신에 대한 부인 속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은 원래 미신의 실존과 세계에 속해 있어서 스스로는 올바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말씀은 선포되고 그 말씀을 들음으로 신앙은 발생한다. 신앙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돌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구원을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믿음은 모험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과 함께 모험을 감행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 이외의 어떤 것도 원치 않으며, 그것만을 인정하신다. 신앙의 자리에서만 창조주는 창조주로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은 불합리하다.69)
4:4-5에서는 믿음과 행위의 상호 배타적인 대립이 전제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행위라는 것은 당연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노동자에게 있어서 임금은 은혜가 아니고 노동에 합당한 대가이다(4:4). 그러나 믿음은 업적의 행함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지하여 내세울 만한 아무 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롭다하신다. 그러니까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것이다(4:5). 이것은 전적으로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살 수 없다.
아브라함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유일한 실례는 아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제외하고서 유대교의 최고의 권위인 다윗의 경우에서도 그러한 실례를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4:7-8에서 다윗의 시라고 여겨지는 시편 32:1-2를 인용한다. 시편 인용은 진실을 증거하는데는 두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유대교의 원칙과 토라 외에도 예언서나 성문서를 인용해야 한다는 랍비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사죄를 확신하고 이렇게 노래한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죄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용서는 죄인에게만 발생한다. 그러기에 시편 인용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4:6, 특이한 것은 바울이 사죄라는 말을 3:25에서 "죄를 간과한다는" 말을 사용한 경우와 4:7-8에서 인용된 시편 외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단순히 지나간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울이 "죄들"이라는 복수형을 회피하는 것에 암시되어 있다.).
둘째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이전에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4:9-12). 유대교에서는 위의 시편에서 노래하는 사죄의 복이 할례받은 유대인에게만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사실, 그런 가르침이 랍비들의 전통 안에 발견된다.70 이런 전통 속에 있는 유대인은 믿음에 의한 의와 할례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확신의 근저에는 창세기 17:4가 있음이 분명하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들이 볼 때, 할례는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들어가는 핵심적인 입문 의식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원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할례받은 자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다시금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자기의 주장을 증명한다. 4:7-8에서는 에서는 시편을 통하여 창세기 15:6을 지지한 반면에, 이번에는 거꾸로 창세기 구절을 통하여 시편의 선언을 입증한다. 바울은 질문을 던진다: 창세기 15:6에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것이 "할례시냐 무할례시냐?"(4:9b-10a). 이 질문은 시간의 순서에 관한 것이다. 답은 오직 하나이다. 곧 할례받기 전이다(4:10b). 이미 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일은 창세기 15장에 기록되어 있고, 그가 할례를 받은 이야기는 창세기 17장에 나타나 있다. 이 두 사건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은 최소한 14년이다(창 16:16).71 이것은 아브라함이 먼저 의롭다함을 받고,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할례라는 것은 하나의 "표(shmei/on)"이다.72) 그러니까 그것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얻은 의를 확인하는 외적인 표시에 불과한 것이다(4:11a).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할례받기 전, 곧 이방인의 상태에 있을 때의 일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를 위하여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할례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다. 먼저, 아브라함은 할례받지 않은 신자들의 조상이다(4:11b).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에는 그 자신이 할례받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신자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가졌던 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12).
세째로,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4:13; cf. 갈 3:17-18). 여기서 "세상"이란 원래 가나안 땅을 가리켰다(창 15:7). "상속"이란 말이 거의 예외없이 "땅"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것이 그것을 말해 준다.73) 그런데 가나안 땅은 나중에 개념이 확대되어 온 땅을 가리키게 되었고(예, Ecclesiasticus 44:21;74 Jubilees 17:3; 19:21; 22:14; 32:19; 1 Enoch 5:7), 심지어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오는 세상(the world to come)도 의미하게 되었다(예, 2 Apocalypse of Baruch 14:13; 51:3; cf. 고전 3:21-23). 이 "세상"의 약속에는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상실하였던 신분의 회복, 곧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관리 책임자로서의 회복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다.75) 창세기 15:6-8을 보면, 그러한 "세상"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된 바로 다음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4:14의 말씀처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진다." 약속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 율법은 오히려 진노를 불러일으킨다. 율법은 새롭게 범법(para,basij", violation of the law)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으면, 그것을 범하는 것(범법)도 없는 것이다(4:15; cf. 갈 3:19). 약속은 율법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다. 약속은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의 선물이다(4:16a). 그러기에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원리는 그의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들도 아브라함처럼 오직 믿음으로 약속에 참여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단순히 그의 육체적 후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76)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한다(4:16b).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시면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하신 말씀에 그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4:17a).
네째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을 규명한다(4:17b-22).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또한 믿음에 근거하여 땅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것인가? 창세기 15:5를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자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롬 4:18b). 그 때 아브라함은 아직 아들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들을 낳을 수 았는 연령이 훨씬 지나 있었다. 심지어 그의 아내 사라까지도 너무 늙어 생산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몸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현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4:19; cf. 창 17:17).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절대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는 희망이 전무한 상황("바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이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곧,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었다(4:17b-18a). 무와 죽음 보다 인간을 더 절망시키는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에 존재를, 그리고 죽음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믿음에 더욱 견고하여져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로 확신하였다(4:19-21).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로 과격하였다. 그것은 약속 안에서 주어진 기적에 대한 신뢰요, 가능성에 기초를 둔 모든 지상적인 희망을 초월하는 희망이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전혀 이해가 안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4:20). 하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정받을 때 영광을 받으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며 절대 주권을 가지고 홀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인정될 때만, 하나님은 높임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보편적인 인간의 반역 행위, 즉,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는 행위(롬 1:21)와 정반대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에서 나온 진리를 독자들에게 관련시킨다(4:23-25).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다. 그는 단순히 역사상의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정해주는 원형(prototype)이다.77) 아브라함은 분명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역사 안에 머물러 있지도 않고 종말을 지시한다. 그는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현재를 새롭게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신앙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4:23). 그 원리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된다. 특별히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4:24,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양자는 모두 죽은 자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이사야 53:11-12에 암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예수는 자기 백성의 "범죄 때문에(dia. ta. paraptw,mata)" 죽음에 넘기워졌고(cf. 막 9:31; 10:33이하; 고전 11:23; 롬 8:32), 또한 그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dia. th.n dikai,wsin)" 하나님에 의해 살리심을 받은 자이다(4:25).78)
여기에는 흥미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 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이 칭의(justification)의 기초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로 인정된 아브라함의 믿음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사실, 하나님의 의롭다하시는 은혜는 생명을 부여하는 창조의 능력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이삭)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헛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다면, 그리스도의 믿음은 헛될 것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새 창조(곧 새 시대의 도래)를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아브라함 안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이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도 역사하시고 또한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부활 생명을 주실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79
로마서 1-4장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의 노예로 전락되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 이방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하였고, 유대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불순종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에 신실하심을 나타내셨다. 구약의 많은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세상의 죄를 처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죄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 아브라함은 구속사의 초두에 할례와 율법과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로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천안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교수
1)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셈어식(Semitic)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로마식(Greco-Roman) 이름이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전자에 속하고 "바울"이라는 이름은 후자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 이름과 관련해서 바울의 겸손함을 생각한다든지 또는 총독 서기오 바울과의 만남(행 13:6 이하)을 개명의 동기로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2)예, E. Käsemann, Commentary on Romans(ET; London:SCM, 1980), 6; J. A. Fitzmyer, Romans(AB; New York:Doubleday, 1976), 229
3)evn δυna,mei는 ο`risqe.ntoj("임명되셨다")보다는 υι`ου/ θεου/를 수식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4)Cf.A.Nygren, Commentary on Romans(ET; London:SCM, 1949),51.
5)G.D.Fee, God's Empowering Presence;The Holy Spirit in the Letters Of Paul(Peabody:Hendrickson, 1994), 481-82; cf. Käsemann, Romans,12 이하.
6)G.N.Davis, Faith and Obedience in Romans:A Study in Romans 1-4(JSNTS;Sheffield:JSOT,1990), 25-30; D.B.Garlington, "The Obedience of Faith": A Pauline Phrase in Historical Context(WUNT; Tübingen:Mohr, 1991);D.B.Garlington, "Part II: The Obedience of Faith and Judgment by Works," WTJ 53(1991), 47-72
7) R.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ET;London:SCM, 1952),184 이하
8)Käsemann, Romans, 15.
9)Käsemann, Romans, 16.
10)갈라디아서는 예외이다. 갈라디아서 1:6-10에는 감사의 말이 없다. 대신에 갈라디아인들이 갑자기 다른 복음으로 돌아선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고 있다.
11)예, W.Sanday and A.C.Healam,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ICC; Edinburgh: T.&T.Clark, 1859),21.
12)예,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488.
13)Cf. 개역 성경: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4)Fitzmyer(Romans, 250)는 1:13의 "열매를 얻는 것"을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15)M. Hengel, Crucifixion(ET; London: SCM, 1977), 1 이하.
16)C.E.B. Cranfield(Romans: A Shorter Commentary[Grand Rapids:Eerdmans, 1985], 23)는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uv,nη Θεου?)를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인정하여 하나님께서 수여하신 의라고 생각한다.
17) 이것은 Η. Cremer의 연구(Die Paulinische Rechtfertingungslehrre im Zusammenhange ihrer geschichtlichen Voraussetzungen. 2nd ed. [Gütersloh: Bertelsmann, 1900]) 이래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온 것이다.
18) B. Byrne, S.J.(Reckoning with Romans: A Contemporary Reading of Paul's Gospel [Wilmington, Del.:Michael Glazier, 1986], 43)에 의하면 그 히브리어 단어는 "fidelity within the demands of a relationship"이라고 정의된다.
19)우리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학자들이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면, J.D.G.Dunn, Romans 1-8(WBC; Dallas:Word Books, 1988), 41 이하를 보라.
20)εvvvvvvvκ pi,stewj eivvj pi,stin 이라는 표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원하면, Fitzmyer, Romans, 263을 보라.
21)이것은 하박국 2:4를 바울이 기독교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22)일부 학자들이 하는 것처럼 불경건과 불의를 하나님께 대한 비종교성과 인간에 대한 부도덕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불경건과 불의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23)로마서 1:20-32는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 13-15에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죄를 비판한 것과 비슷하다.
24)주목할 것은 1:21b에서 동사가 능동태에서 수동태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마음이 어두워진 것"이 죄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25)Cf. 시편 106:20: "자기 영광을 풀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예레미야 2:11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26)Käseman, Romans, 43.
27)Cf. 사도행전 7: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28)Cranfield, Romans, 36.
29)Käseman, Romans, 49.
30)Cf.M.D.Hooker, "Adam in Romans I," NTS 6(1959-60), 297-306; M.D.Hooker, "A Further Note on Romans I" NTS 13(1966-67), 181-83.
31)Cf. 아셀 계약서 6:2: "그들은 악을 행하며 악을 행하는 자들을 승인한다."
32)이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이다. 예, Cranfield, Romans, 41;Käseman, Romans, 52-53; Dunn, Romans 1-8, 77 이하; P. Stuhlmacher, Paul's Letter to the Romans: A Commentary(ET;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4), 38.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2:1-16에서 바울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에서 비판적인 도덕가들을 상대로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 C.K.Barrett, The Epistle to the Romans, 2nd ed. (BNC; London: Black, 1991), 41ff; J.Stott, Romans:God's Good News for the World(Downers Grove: InterVarity, 1994), 80-81.
33)"회개(μeta,νοια)"라는 말은 헬라 세계에 생소한 말이다. 그것은 바울의 선교 설교(missionary preaching)에서 "믿음"으로 대치된다. 이 때문에 그 단어는 고린도 후서 7:9에서만 다시 등장할 뿐이며 고린도 후서 12:21에서는 그 동사가 나타난다.
34)Cf. 솔로몬의 지혜서 11:23: "그러나 당신은 만민에게 긍휼을 베푸시나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나이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들의 죄를 간과하심으로 그들을 회개하게 하시나이다."
35)Käsemann, Romans, 56.
36)D.J.Moo, "Romans," New Bible Commentary: 21st Century Edition(Downers Grove: InterVarsity, 1994), 1124.
37)Furnish, Theology and Ethics in Paul, 120-21.
38)Barrett, Romans, 45.
39)evriθεi,a는 당을 짓는 것 보다는 이기적인 야망을 의미하는 것 같다.
40)2:7-10의 구조는 a-b-b-a의 구조(chiastic structore)이다.
41)로마서 2장에 나타난 심판의 교리에 대해서는 K.R. Snodgrass, "Justification by Grace- to the Doers: An Analysis of the Place of Romans 2 in the Theology of Paul," NTS 32(1986), 72-93을 보라.
42)"유대인"이라는 이름은 마카비 시대 이래 "이스라엘인"이나 "히브리인"이라는 옛 이름을 대신하여 사용된 유대인의 자기 호칭이다.
43)Cf. 누가복음 11:31-3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4)예, Cranfield, Romans, 58; Dunn, Romans 1-8, 122; Cf. Käsemann, Romans, 73; Fitzmyer, Romans, 322.
45)λo,για τοu/ qeou/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원하면, Fitzmyer, Romans, 326을 보라.
46)문맥에서 볼 때, 3:3의 hvpi,σthsan과 avpisti,a는 불신앙(unbelief)보다는 불신실을 의미하는 것 같다.
47)W.S.Campbell, "Romans iii as a Key to the Structure and Thought of the Letter," NovT 23(1981), 22-40을 보라.
48)3:1-8에 대한 더 상세한 논의를 원하면, P.J.Achtemeier, "Romans 3:1-8: Structure and Argument." Christ and His Communities: Essays in Honor of Reginald H.Fuller, ed. A.J.Hultgren and B.Hall(ATRS; Clincinnati: Forward Movement Publications, 1990), 77-87;G.Bornkam, "Theologie als Teufelskunst: Römer 3,1-9," Geschichte und Glaube II: Gesammelte Aufsätze, vol 4(BEvT; Munich:Kaiser, 1971), 140-48; C.H.Cosgrove, "What If Some Have Not Believer? The Occasion and Thrust of Romans 3:1-8," ZNW 78(1987),90-105; D.R.Hall, "Romans 3.1-8 Reconsidered," NTS 29(1983), 183-97; H.Räisänen, "Zum Verständnis von Röm 3, 1-8," SNTU 10 (1985), 93-108을 보라.
49)C.Maurer("προe,cομαι," TDNT, VI, 693)에 의하면 προe,cομαι는 "우월하다"를 의미한다. Cf. Dunn, Romans 1-8, 146-47.
50)Cf. 개역 성경: "율법 아래 있는 자들"
51)"율법의 행위"라는 표현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알기 원하면, In-Gyu Hong, The Law in Galatians(JSNTS; Sheffield: JSOT, 1993), 133-35; 홍인규, 바울의 율법과 복음(서울:생명의 말씀사, 1996), 153-56을 보라.
52)Stuhlmachr(Romans, 56)도 우리와 이해를 같이 한다.
53)3:20의 죄는 헬라어로 a`marti,a인데 3:9에서 언급된 죄(a`marti,a)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범죄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귀적인 세력으로서의 죄를 의미한다.
54)동사 pefane,rwtai의 시제는 완료인데 그것은 과거의 결정적인 행동으로 시작되었던 새로운 상태가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55)이 헬라어 구조는 3:24의 dia. th/j avpolutrw,sewj th/j evn Cristw/ Ihdou/와의 병행 관계를 고려할 때, 목적격적 소유격(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보다는 주격적 소유격(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 같다(cf. 4:16 "아브라함의 믿음"). D.A.Campbell, The Rhetoric of Righteousness in Romans 3.21-26(JSNTS; Sheffield:JSOT, 1992), 58-59를 보라.
56)Cf. 개역 성경: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57)예, Cranfield, Romans, 75-77; L.Morris, "The Meaning of Hilasterion in Romans iii.25," NTS 2(1955-56), 33-43.
58) 예, Barret, Romans, 73; Dunn, Romans 1-8, 171; Fitzmyer, Romans, 349.
59) 예, Stuhlmacher, Romans, 58-61; R.P. Martin, Reconciliation, rev.ed.(Grand Rapids:Zondervan, 1990), 81-89; J.M.Gundry-Volf, "Expiation, Propiation, Mercy Seat,"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282-83; 변종길, "로마서 3:25의 hilasterion," 신약신학저널 1(2000), 57-76; cf.G. Breytenbach, Versöhnung: Eine Studie zur paulinischen Soteriologie(WMANT 60;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89), 167-68.
60) Dunn, Romans 1-8, 178.
61) Cf. J.D.G.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Grand Rapids: Eerdmans, 1998), 385-86.
62) P.J.Achtemeier, Romans(Interpretation; Atlanta: John Knox, 1985), 61-66에는 로마서의 의의 개념이 잘 정리되어 있다. 또한 Dunn, Theology of Paul, 340-46을 보라.
63)3:27의 "믿음의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64) dikaiw,sei는 의롭다하심이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논리적인 미래가 된다. 예, Käsemann, Romans, 104. 그러나 H. Schlier(Der Römerbrief[HTKNT; Freiburg: Herder, 1977], 118)는 그것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65)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진술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로마서 3:27-31이 유대인의 비판을 염두에 둔 바울의 변호라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Cf.C.T. Rhyne, Faith Establishes the Law(SBLDS; Chico: Scholars Press, 1981).
66) 원문상 4:1의 질문은 난해한데 개역성경의 번역은 다수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원하면 예, Fitzmyer, Romans, 371-72를 보라.
67)Käsemann, Romans, 106.
68)Cf. J.Lambrecht, "Unreal Conditions in the Letters of Paul:A Clarification," ETL 63(1987), 153-56.
69)Käsemann, Romans, 107-10.
70)H.Strack and P.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III(Munich: Beck'sche, 1926-28), 203.
71) 창세기 17:25에 의하면 이스마엘이 출생한지 13년 후에 할례 명령이 주어졌고 할례가 시행되었다.
72)창세기 17:11에서는 할례를 "언약의 표"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바울은 로마서 4:11에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할례의 표"라고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미 구약 원문의 역사적인 의미를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73) J.D.Hester, Paul's Concepts of Inheritance(SJTOP; Edinburgh: Oliver & Boyd, 1968), 22-36.
74)Ecclesiasticus 44:21: "[하나님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그리고 그 강[유프라테스강]에서 땅끝까지 상속하도록 하실 것이다."
75) Dunn, Romans 1-8, 213.
76) 4:16의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보다는 유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77) Cf. Genesis Rabbah 40:8: "All that is recorded of Abraham is repeated in the history of his children."
78) 많은 주석가들은 첫 번째 di,a를 원인을 나타내는 것으로("범죄 때문에"), 그리고 두 번째 di,a를 목적을 표현하는 것으로("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이해한다. 예, Cranfield, Romans, 97; Käsemann, Romans, 129.
79) Dunn, Romans 1-8, 241.
[출처]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믿음(로마서 1-4장) |작성자 성산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