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엄격한 생활과 신앙 훈련을 마친 소년 소녀를 인솔하고 1948년 봄에 이현필은 광주로 진출했다. 36세 때였다. 해방이 되었지만 나라는 조용하지 못했다.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소련군이 진주하고 이남은 미군이 진주하여 나라가 분열되었다. 나라의 분열을 막고자 지도자들이 노력했지만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며 서로 다투고 있었다. 결국 1948년에 38선 이남에서는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북에서는 9월 9일에 조선인민 민주주의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조선공화국이었지만 남쪽 백성들은 이북을 인공 또는 북한이라 하고 이남을 한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어떻게든 서로 통일을 이뤄야 된다는 주장이 강하였지만 사태는 오히려 극심한 혼란을 부추길 뿐이었다. 즉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10월에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 많은 희생자들과 고아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시기에 광주로 진출한 이현필은 해방 후 재건된 YMCA 구내에 방을 얻어서 거기에 기거했다. 그리고 몇 식구들을 데리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하였다. 당시의 민심과 시국을 살펴볼 때 이현필의 마음은 나라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였다. 머지않아 피를 흘리는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리 준비를 하자고 하였다.
남원 서리내에서 훈련을 받고 광주에서 생활하는 이현필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모든 일에 모범이었다. 도시였던 광주사람들의 눈에는 산 속에서 훈련받고 나온 어린 청년들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감동과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나이 어린 그들이지만 언제나 겸손한 예의와, 남녀 간의 엄격한 순결생활, 그리고 예배를 볼 때면 무릎 꿇고 앉아서 조용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찬양하였다. 그들의 사랑스런 겸손함과 공손한 태도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애잔하고 그윽한 영혼의 노래들은 듣는 이 보는 이들에게 크나큰 감동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