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40. [역경의 열매] 박희천 (1-15) 내 삶의 지침 된 어머니의 훈육과 기독교 신앙
김제교회서 찬송 배우며 신앙 씨앗 심어
각별한 사랑 속 도덕적으론 엄한 어머니께
세배보다 세뱃돈만 쫓아다니다 크게 혼나
박희천 목사가 책을 읽는 모습. 그는 31일 "지금도 고저(그저) 매일 일어나 하루 종일 성경을 읽습네다"라고 했다. 국제제자훈련원 제공
나는 지금도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간혹 후배 목사들이 나를 찾아와 감사하다. 살아온 긴 세월을 돌아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다. 나는 1927년 평양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평남 대동 김제면 외제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면 소재지마다 교회가 한두 군데씩은 있었다. 어머니는 5남 1녀 중 막내였던 나를 각별히 사랑했다. 어머니는 가족 중 유일하게 나를 교회에 데려다 줬다.
어머니는 "교회에 가면 좋은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 교회는 시골 동네 교회치고는 제법 컸다. 여섯 살부터 교회에서 배운 노래와 그 노래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름과 얼굴까지 생생히 떠오른다. 평양에 있던 숭실대 학생 선생님들이다. 대학생들은 방학에 우리 교회에 와서 두 달간 머물렀다. 3년 동안 그렇게 했다.
당시 선교사들이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농촌에 간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고집이 셌다. 어릴 때 누나가 나를 업으려고 했다. 나는 그게 몹시 싫었던 모양이다. 업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팔이 부러진 적이 있다. 젓가락처럼 굵은 동침을 맞는 데도 울지 않아 어른들이 나를 "독한 녀석"이라고 했다.
내게 기독교 신앙의 첫 씨앗을 나누어준 김제교회를 평생 잊을 수 없다. 김제교회는 작은 시골 교회였지만 평양에서 온 대학생들이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김제교회는 해방 후에는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가 부임했다. 성경을 많이 알던 그는 성경을 열심히 가르쳤다. 내가 아홉 살 때 우리 집은 평남 순천 사인면 사인리로 이사했다.
사인리는 학교가 가까웠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이사를 결정했다. 외제리는 소학교가 없었다. 형들은 30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다. 소학교에서는 일본어로 쓰고 읽었다. 여학생 숫자는 적었다. 한 반에 남자가 다섯 줄이면 여자는 한 줄에 불과했다. 이사를 가자마자 사인장교회에 나갔다. 장년이 100여명, 어린이는 40여명이 모이는 곳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도덕적으로 엄격한 분이었다. 나는 교회에서도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어머니의 훈육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설날이 되면 친구들과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니던 시절이다. 세배하면 어른들은 대개 1전을 주었다. 아이들도 어른들의 형편을 빤히 알아서 세뱃돈을 많이 주는 집을 찾아다니곤 했다. 어릴 때 집 밖에서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나눴다.
"○○네 집에 가서 세배하면 돈을 많이 주고 ○○이 집에 가면 적게 준다." 그 얘기를 들은 어머니가 나를 집 안으로 부르셨다. "세배는 돈 받으러 가는 게 아니다. 새해를 맞아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는 일이다." 어머니의 눈빛은 엄했고 어조는 단호했다. 어머니는 평소 내게 "남잡이가 제잡이"란 말을 자주 했다. '네가 남을 해롭게 한다면 그것이 너를 해롭게 할 것'이란 뜻이다. 이 말씀은 내 삶의 지침이 됐다.
약력=1927년 평남 대동 출생, 평양신학교·숭실대·고신대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Th.M.)·칼빈신학교 수학, 내수동교회 담임,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 [역경의 열매] 박희천 (1) 내 삶의 지침 된 어머니의 훈육과 기독교 신앙
* [역경의 열매] 박희천 (2)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진학… 학교 첫 시험서 2등
* [역경의 열매] 박희천 (3) 주일성수 하려 보충수업 빠져… 오지마을로 좌천
* [역경의 열매] 박희천 (4) 공산당국에 넘어간 평양신학교… 기독교 핍박에 폐쇄
* [역경의 열매] 박희천 (5) 기독교연맹 가입 거부… 빌립보서와 찬송가 40곡 암송
* [역경의 열매] 박희천 (6) "하나님이 날 살려주시는구나"… 성경 덕분에 목숨 건져
* [역경의 열매] 박희천 (7) 중공군 공세로 피란… 서울 가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
* [역경의 열매] 박희천 (8) "죽든 살든 데리고 가자"… 국군 전세 밀려 대구로 피란
* [역경의 열매] 박희천 (9) 신학공부 갈증 풀었지만 전도사 사례비 못 받아 눈칫밥
* [역경의 열매] 박희천 (10) 주일학교 선생 시절 내 재간만 믿고 우쭐대다 학생수 줄어
* [역경의 열매] 박희천 (11) 존경하던 한상동 목사님 곁에서 목회의 진면목 익혀
* [역경의 열매] 박희천 (12) 비행기 삯 없어 한 달간 배 타고 태평양 건너 유학길
* [역경의 열매] 박희천 (13) 귀국후 내수동교회 목사로… 말씀 연구·설교 준비 온 힘
* [역경의 열매] 박희천 (14) 매년 교인 가정 모두 심방… 성경 구절 맞춤 처방도
* [역경의 열매] 박희천 (15·끝) 1950년부터 매일 성경 읽어… 말씀으로 가득 채운 삶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역경의 열매] 박희천 (2)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진학… 학교 첫 시험서 2등
통학 길 2시간 내내 기차에서 공부하며 줄곧 우수한 성적 거둬 수석으로 졸업
미 선교사 헐뜯는 지독한 국수주의자인 일본인 교장 때문에 교회 출석 어려워져
박희천 목사가 1962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차진실 사모, 세 자녀와 함께했다. 박 목사는 차 사모와 동향이다.
1941년 나는 평양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땐 문과나 이과, 상고나 농고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일반인들은 그냥 통칭해 상급학교란 의미로 '웃학교'라고 불렀다. 소학교 졸업 후 중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면 소재지 전체에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다. 여학생은 한 명이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진학률이 낮았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면 중등학교에 못 간 아이들이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차이나 카라로 된 검정색 교복만 입으면 저절로 우쭐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업학교에 간 것은 순전히 어머니 의지 덕분이었다. 마침 형님이 철도국에 다녔고 집에서 평양을 오가서 기차 승차권을 마련해주었다. 내가 살던 사인면에서 다섯 번째 역이 평양이었다. 70리 길인데 기차로 1시간 정도 걸렸다. 당시 서울 평양 부산 인구는 각각 35만명, 25만명, 23만명이었다.
평양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기차에서 내려서 20분을 걸으면 상업학교에 도착했다. 평양이 사인면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지만 그렇다고 굉장히 크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상업학교 한 학년은 두 반씩 100명이었고 5학년까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주산과 부기를 배웠다. 상업학교 첫 시험에서 2등을 했다. 시골에서 온 내가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다들 놀라워했다.
그다음 시험 때는 더 열심히 해서 1등을 했다. 상업학교에서 열린 주산대회에서 출전해 1등을 하기도 했다. "네가 1등을 하다니 장하다!" 어머니는 내가 좋은 성적을 낼 때 매우 기뻐하셨다. 아들이 공부를 잘하는 게 어머니에게는 낙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하루 통학 시간 2시간 내내 기차에서 공부했다. 친구들이 잡담하고 장난치더라도 나는 오로지 공부에 집중했다.
어머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름도 없었다. 호적에 이름을 올려야 할 때 아버지 이름을 따 대충 지었을 정도다. 하지만 어머니는 매우 지혜롭고 올바른 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바르게 자라도록 교회에 보냈고 공부뿐만 아니라 사람됨을 강조했다. "양심껏 살아라."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 중 하나다. 어머니는 솜씨도 뛰어나 가족들이 입는 옷을 직접 만드셨다.
상업학교에 다닐 때 어머니는 매일 도시락을 싸주셨다. 언제나 조와 팥이 섞인 밥에 반찬은 고추장 하나였다. 쌀밥은 명절이나 아플 때만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상업학교 시절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일본인 교장 때문이었다. 미국을 극도로 싫어했던 그는 "원수의 말을 뭐하러 배우냐"며 3학년부터는 아예 교과에서 영어를 뺐다.
그 교장은 평양에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를 향해 "그 나라에서 제일 못난 사람들이 선교사로 온다"고 험담을 하기도 했다. 일제 말, 정세가 복잡해졌다. 중등학교는 5년제였으나 비상조치법에 따라 우리는 4년 만인 45년 3월 졸업했다. 나는 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가난했다. 나는 동네에 있는 사인금융조합에 취직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3) 주일성수 하려 보충수업 빠져… 오지마을로 좌천
졸업 후 직장 얻고 교회에 다시 출석
은행 개편 중 파면당하고 교사로 취직
공산 당국의 기념식 때문에 못한 수업
교회 나가는 주일에 보충하도록 하자
1946년 6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노동 법령 실시를 축하하는 행렬. 박희천 목사는 소련군정이 실시 된 이후 은행에서 파면됐다. 뉴시스
내가 취직한 사인금융조합은 요즘으로 치자면 농협과 비슷한 곳이다. 면 소재지 금융조합이었지만 상당히 출세한 축이었다. 나는 이 조합에서 심상소학교 1년 선배인 신복윤 형님과 함께 근무했다. 상업학교에 다니는 동안 교회에 안 나가고 있었는데 이 형님이 내게 계속 말했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지!" 결국 그 형님 채근에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됐다.
상업학교를 졸업해 직장을 얻은 데다 교회까지 다시 다니게 돼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취직 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일본이 물러난 자리를 소련이 대신 차지했다. 당시 소련군정은 한반도 38선 이북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소련 사람들은 우리보다 민도가 낮다는 것을 체감했다. 당시에는 시계가 귀했다. 소련인들은 길에서 시계를 찬 사람을 보면 그 자리에서 빼앗았다.
소련군정은 내게도 피해를 줬다. 금융조합을 은행으로 개편한다는 명목으로 가장 최근 채용된 나를 파면했다. 조합에 들어간 지 1년 1개월 만에 직장을 잃었다. 사실상 소련군정 기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됐다. 김일성이 공산 정부를 세웠고 거의 매일 새로운 법령을 선포했다. 46년 6월엔 모든 산업의 국유화를 발표했다. 이듬해 2월 나는 사인인민학교(이전 소학교) 교사로 간신히 취직했다.
이듬해 6월 산업 국유화 법령 발표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공산 당국의 기념식 때문에 수업을 하지 못할 경우 그 전 주일에 보충수업을 하도록 했다. 기념식을 앞두고 교사로서 주일에 수업을 해야 했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주일성수를 위해서였다. 역시나 월요일에 출근했더니 학교에서 큰 소란이 났다. "담임이 수업을 하지 않다니 말이 안 된다."
그 일로 나는 평남 순천 지산면 용문인민학교로 좌천됐다. 이 학교가 있는 용문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오지 마을로 화전민들이 사는 곳이었다. 교실이 딱 하나뿐인 학교였다. 석 달간 가르치다 그만뒀다. 스물한 살 나이에 산골짝에 있기도 힘들었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48년 2월 평양 식산은행에 다니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자네를 신규 행원으로 추천했어."
그런데 독보회가 걸림돌이었다. 독보회란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직장마다 생긴 조직이다. 해당 주간 화제가 된 시사 관련 기사와 문서를 읽고 발표를 하는 것이다. 매 주일 아침 10시에 출근해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식산은행에 취업하면 그 독보회에 반드시 나가야 했다. 독보회는 기독교에 대한 실질적 탄압이었다. 주일성수를 하는 교인은 제대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독보회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에 식산은행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 친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장인에게 독보회 참석은 상식인데 그걸 몰랐나. 여기가 얼마나 좋은 직장인데 포기하려고 하는 거야." 나를 추천한 친구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은행 취직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나는 몸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4) 공산당국에 넘어간 평양신학교… 기독교 핍박에 폐쇄
목사 되기 위해 신학교 입학, 3개월 만에
공산치하 돼 학교 대신 인근 교회서 공부
목사들 거의 월남하면서 교수들 부족해져
박희천 목사가 1948년 입학했던 평양신학교 건물. 공산정권이 이 건물을 빼앗아가면서 박 목사를 포함한 신학생들은 인근 교회로 옮겨 공부했다.
식산은행에 대한 미련은 차츰 떨쳐냈지만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성경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 역시 불같이 일었다. 성경을 아는 지름길은 목사가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명감보다 성경을 알고 싶은 마음으로 목사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1948년 9월 평양신학교에 합격했다. 그런데 등록금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3일간 금식기도를 했다.
그러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등록금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신학교에 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별말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한 경험이었다. 평양신학교 건물은 붉은 벽돌로 멋있게 지은 양옥이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3개 층에 강의실이 각각 3개씩 있었다. '이렇게 멋진 건물에서 성경을 배우다니….' 나는 정말 기뻤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간 지 겨우 3개월 만에 학교 건물은 공산당국의 손에 넘어갔다. 학생들은 인근 교회에서 공부해야 했다. 평양신학교는 한국 장로교 유일의 신학교였다. 당시에는 서울 서대문 영천에 감리교 협성신학교, 아현동에 성결교신학교까지 전국에 세 곳뿐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도 학생들이 평양신학교로 와서 공부를 했다. 학교는 1년 3학기제였다. 나는 이듬해 12월까지 공부했다.
아쉬운 마음이 많았다. 공산치하가 되자 웬만한 목사는 모두 월남했다. 교수가 부족했다. 일제강점기 때 미국 선교사와 함께 강의했던 교수는 딱 한 분 밖에 없었다. 미국 프린스턴신학대를 나온 이성휘 박사는 마지막까지 남아 평양신학교 학생들을 위해 강의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계속할 수 없었다. 공산당국은 49년 12월 평양신학교 폐쇄를 결정했다.
일제 때는 그래도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있었는데 북한 공산정권은 교회를 마구 핍박했다. 정부에 반대하는 말 한마디만 해도 잡아들였고 여차하면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 끔찍한 시절이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1000만명이 땅과 재산을 버리고 월남했겠는가. 공산정권은 한 가족 같은 마을 사람들을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둘로 갈라치기했다. 서로 반목하게 했다.
우리 가족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나는 교회까지 다녔으니 늘 불안했다. 그 살벌한 환경 속에서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 전도사로 일했다. 교인이 30명 남짓한 평남 대동군 용악면 하차리 하차리교회에 부임했다. 집에서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토요일 저녁이면 교회로 가서 주일 새벽예배, 낮 예배, 저녁 예배를 드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
공산당은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선(민전)'을 조직하고 김일성정부 지원을 강제했다. 민전 산하에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농업동맹 예술인동맹 불교동맹 천도교동맹 기독교연맹이 있었다. 누구나 이 중 한 곳에 가입해야 했다. 기독교 연맹은 '기독교가 하나가 돼 김일성 정부를 받들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진실한 성도라면 누가 이 구호에 동의하겠는가. 그런데 49년 12월까지 평양 시내 모든 목사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하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5) 기독교연맹 가입 거부… 빌립보서와 찬송가 40곡 암송
연맹 가입 불복 땐 투옥 되거나 순교
공산정권 강제 징집 피해 숨어 지내며
잡혀갈 경우 대비해 성경과 찬송 외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성구가 담긴 빌립보서. 어용 기독교연맹 가입을 거부했던 박희천 목사는 1950년 감옥에 갈 각오로 빌립보서 전체를 암송했다.
공산정권은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잡아가겠다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졌지만 나는 다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을 받드는 조직에 가입할 수 없다.’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결국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켰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다. 돌아보면 북한에서 세 가지를 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스럽다.
기독교연맹 가입, 공산당이 설립한 신학교 입학, 결혼. 월남해 목회자 지원서류를 낼 때마다 교회에서 물어봤다. “장로교에서 세운 평양신학교를 다녔나요 아니면 공산정권이 세운 기독교평양신학교를 다녔나요?” 나는 늘 당당하게 평양신학교에 다녔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기독교연맹 가입 여부를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도 자신 있게 “아니오”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들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결혼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내가 남쪽으로 왔을 때 24세였는데 북한에서는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노총각이라고 했다. 기독교연맹 가입 문제로 숨어 지낸 나로서는 결혼을 꿈꿀 수 없었다. 북쪽에서 결혼하고 남쪽에서도 결혼하면 중혼이다. 교회 초빙될 때 문제가 됐다. 중혼 사실이 알려지면 교회를 사임할 정도로 당시 교회법 치리는 엄격했다.
1950년 초부터 북한은 드러내놓고 전쟁을 준비했다. 2월부터 27세 이하 청년을 강제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낮에 훈련하다가 저녁이면 트럭에 싣고선 바로 군부대로 가버렸다. 우리 집은 하필 파출소 맞은편이어서 늘 조마조마했다. 20대인 나는 눈에 띄기만 하면 바로 끌려갈 판이었다. 청년들을 소집하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파출소 코앞 우리 집은 수색을 하지 않았다.
6월 25일 기어이 전쟁이 시작됐다. 북한의 남침이었다. 나는 토요일 하차리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몰래 집으로 돌아와 일주일 내내 숨어 지냈다. 교인들은 신기해했다. “젊은 사람이라면 다 잡아가는 마당에 전도사님은 무사하네요.” 나 역시 연유를 알 수 없었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연맹 가입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투옥되거나 순교를 각오해야 했다.
나는 빌립보서 암송을 시작했다. 믿음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최원초 목사님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 감옥에 갈 준비를 하면서 빌립보서를 암송하셨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쓴 서신이다. 나도 최원초 목사님을 따라 빌립보서를 다 외웠다. 그다음 감옥에서 힘을 얻을 찬송가 40곡을 골라 암송했다. 그러고 나니 다소 마음이 놓였다.
나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온종일 빌립보서를 외고 찬송가를 암송하며 잠자리에 들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모래성처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회개하고 힘을 얻어 잠자리에 들어도 아침이면 역시 흔들렸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있는데 군사증 문제가 불거졌다. 군사증은 남한의 병적계와 같다. 공산정권은 청년들에게 50년 8월 5일까지 반드시 군사증을 받으라고 공표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6) “하나님이 날 살려주시는구나”… 성경 덕분에 목숨 건져
체포될 바엔 산에 들어가 지낼 결심하고
집 나서다 빠뜨린 성경 가지러 온 동안
순찰 중이던 순경들과 마주칠 고비 넘겨
국군이 1950년 10월 평양 수복 직전 대동강을 건너는 모습. 박희천 목사는 국군이 평양을 수복할 때까지 석 달가량 산에 숨어 지냈다.
군사증을 받지 않고 있다 체포될 바엔 집을 떠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가서 금식하며 성경을 읽으면 최소 40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수님도 40일 금식을 하지 않았는가. 1950년 8월 6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쌀과 콩 한 말을 자루에 넣어 등에 졌다. 성경과 영어 교과서는 습기가 배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말아 보자기에 따로 쌌다.
쌀을 지고 대문까지 나갔을 때 뭔가 허전했다. 성경을 넣은 보따리를 놓고 온 것이다. 그 보따리를 가지러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놀란 눈으로 야단쳤다. “한시가 급한데 왜 다시 왔느냐.” 얼른 책 보따리를 챙겼다. 대문에서 집안으로 들어가 성경책을 들고나오는 데 대략 12초가 걸렸을 것이다. 막 대문을 나서려는데 심장이 멎을 뻔했다.
순경 두 명이 총에다 총검을 꽂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벽 쪽으로 몸을 숨겼다. 만약 내가 성경을 가지러 다시 집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길에서 순경들을 만났을 것이다. 순경들은 나를 바로 체포했을 테고 나는 전쟁터에 끌려갔을 것이다. 그야말로 성경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하나님이 날 살려주시는구나!’ 용기가 났다. 순경들이 지나간 뒤 바로 나가서 산으로 피했다.
하차리교회 근처에 숨을 곳을 정했다. 심심산골 하늘 아래 첫 동네라 숨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산으로 숨어들 때 하차리교회 집사님에게 내 행방을 알렸다. 감사하게도 집사님은 그날부터 밥을 날라주었다. 그렇게 국군이 북진해 평양에 들어온 10월 하순까지 산에서 지내며 성경을 읽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반겨주었다.
11월 말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미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내려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공산당이 내려오면 전도사인 나는 무사할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고초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조카들까지 모두 합쳐 가족 25명이 피난을 가기로 했다. 처음 우리 목적지는 남한이 아니었다. 평양 조금 아래에 가 있으면 금방 전세가 또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설마 국군이 평양을 내주겠나. 평양은 사수할 거야.” 12월 2일 피난길에 올랐다. 한 사람이 보퉁이 몇 개씩을 짊어진 데다 젖먹이부터 겨우 걸음마를 뗀 조카들까지 있었다. 남쪽으로 가는 길은 더디기만 했다. 500m쯤 걷다가 쉬고 또 걷고 쉬기를 반복했다. 하루에 고작 30리밖에 이동하지 못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중공군이 쏘는 대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쾅쾅! 쾅쾅!” 점점 그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러다 군대와 맞닥뜨리면 스물넷인 나는 바로 전장으로 가야 했다. 전도사라는 게 들통나면 바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12월 5일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먼저 가야겠습니다.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만 해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7) 중공군 공세로 피란… 서울 가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
언 대동강 위를 겨우 건너 사리원 도착
서울 가는 큰길 국군 헌병이 막고 있어
농로 따라 걷다 곧 출발하려는 기차 타
1950년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중구 저동 일대와 영락교회. 박희천 목사가 1950년 12월 서울로 피난해 처음 찾아간 곳은 영락교회였다.
가족과 헤어진 후 평양으로 향했다. 국군이 평양을 거점 삼아 다시 북쪽으로 밀고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양으로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은 다 서해안 진남포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왜 진남포로 가냐고 했더니 실망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대동강 건너 선교리에 이미 중공군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평양으론 못 갑니다. 피할 곳은 진남포밖에 없어요.”
별수 없이 진남포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걷기 시작했다. 500m쯤 걸었을까. 청년 서너 명이 씩씩하게 무리를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디 가는지 물었다. “어쨌든 평양에 한번 가봐야죠.” 나는 그들의 결연한 표정에 용기를 냈다. 나도 그들을 따라 평양에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역행해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 도착해보니 중공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꾸 피난을 가자 공산당이 인적 자원을 남한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 같았다. 대동강은 인산인해였다. 철교는 이미 부서졌고 나무다리 하나가 유일한 통로였다. 그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백사장에 가득했다. 몇 날을 기다려도 다리를 건널 수 없을 정도로 줄이 길었다. 꾀를 냈다. 얼음이 언 강 위를 조금 걸어가 나무다리 중간에서 위로 올라갔다.
12월 8일 황해도 사리원에 도착했다. 거기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서울로 가느냐, 서해안 해주로 가느냐.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구름 떼처럼 몰려가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더니 면박이 돌아왔다. “그저 남들이 가는 길로 따라오구려. 무얼 그리 꼬치꼬치 따집니까?” 다시 여기저기 물어보니 그 길은 해주 가는 길이라고 했다. 서울로 가는 큰 길은 국군 헌병이 막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큰 길 옆 농부들이 사용하는 농로를 따라갔다. 헌병이 막은 길을 우회해 내려가 보니 또 다른 사람들은 서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리원을 지나 신막이란 곳에 도착했을 때 마침 서울로 가는 열차가 막 출발하려는 중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다. 그 열차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였다. 그 기차를 타고 12월 9일 토요일 서울역에 도착했다.
12월 5일에 출발해 단 나흘 만에 서울에 도착한 것이다. 아마 그 전쟁통에 평안남도에서 서울로 온 사람 가운데 내가 최단 시간을 기록했을 듯하다. 마지막 열차를 타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첫날 밤을 서울역 대합실에서 보내고 1950년 12월 10일 주일을 맞았다. 서울역 광장에서 만난 사람에게 “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내 북한 말투를 알아본 사람이 “명동에 가면 이북 사람이 많이 다니는 영락교회가 있다”고 알려줬다. 서울역에서 물어물어 영락교회에 가보니 평양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한 학우들이 많이 있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얼싸안고 한참 인사를 나눴다. 해방 직후 월남한 피난민들이 영락교회를 세웠다고 했다. 영락교회는 피난민 임시 처소를 마련해 이북에서 온 사람들을 정성껏 대접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8) “죽든 살든 데리고 가자”… 국군 전세 밀려 대구로 피란
영락교회서 만난 부모 잃은 고향 아이들
지뢰 밟고 크게 다쳐 생사 불분명하지만
가여운 마음과 책임감으로 피란길 동행
1951년 대구 대영의원 주변. 박희천 목사는 영락교회에서 만난 고향 소년 2명을 데리고 대구로 피난한다.
영락교회에서 사흘간 지내다 고향 사인장에서 온 사람을 만났다. 해방 직후 이남해 서울 중구 필동에 집을 마련해 잘 살고 있었다. 그 집에서 지내며 피난길의 피곤을 풀었다. 매일 영락교회로 가 건물에 잔뜩 붙어 있는 벽보를 읽었다. 하차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때 주일학교를 다닌 학생 2명이 부모형제를 찾는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내게 그 아이들까지 돌볼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아이들을 모른 체하면 서울까지 무사히 오게 해주신 하나님이 가만히 계실 것 같지 않았다. 두 아이는 17세, 사촌지간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피난 오다가 폭격을 맞아 다 흩어졌다고 했다. 한 아이는 지뢰를 밟아 크게 다친 상태였다. 배가 갈라져 창자가 밖으로 조금 나와 있었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가여운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죽든 살든 내가 데리고 가야겠다.’ 국군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서울에서도 피난을 가야 할 상황이 왔다. 가마니와 이불을 둘둘 말았다. 화물열차 지붕에 올라탄 채 대구까지 왔다. 대구역에서 두 아이와 셋이 가마니를 깔고 잤다. 겨울인 데다 바람이 세서 추웠지만 셋이 의지하고 견뎠다. 나를 하늘같이 믿고 따라다니는 녀석들을 보면서 큰 책임감을 느꼈다.
어느 곳이든 교회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구 남산교회에서 고향 사인장에서 온 사람 여섯을 만났다. 그곳에서 고향 선배이자 금용조합에서 같이 일했던 신복윤 형을 다시 만났다. 형의 도움으로 미군 육군병원에서 노무자로 일하게 됐다. 내가 맡은 일은 화장실 청소였다. 나는 청소 후 화장실에서 내내 성경을 읽었다. 그 이상 좋은 독서실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있다가 환자용 화장실 청소도 맡게 됐다. 환자용 화장실은 건물 안에 있으니 난방이 돼 성경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생활비는 쌀값 밖에 안 들었다. 반찬은 소금이면 족했다. 예전에는 쓰고 짰던 소금이 피난 다니며 먹으니 고소하기 그지 없었다. 함께 지낸 두 아이의 자립을 위해 뭘 할지 궁리했다. 당시 대구에는 엿이 많았다. 1000원에 열다섯 가락이었다. 두 아이에게 각각 목에 걸 수 있는 엿판을 만들어주고 엿 한 가락에 100원씩 받으라고 일렀다. 열다섯 가락을 팔면 500원이 남았다. “사람들 만나면 피난 오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고아가 됐다고 해. 그럼 불쌍히 여겨 엿을 사줄 거야.” 아이들은 엿을 곧잘 팔았다. 어느 날 한 녀석이 명함을 받아왔다.
대구 서부교회 박명훈 목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 목사는 불쌍하다며 아이들에게 1000원을 주고 엿은 받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서부교회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바로 전도사로 채용됐다. 교회로 가면서 아이들과는 헤어지게 됐다. 떠나는 날 셋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는 주일 유년부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설교했다. 그런데 풍금이 없어서 찬송가를 가르치기 어려웠다. 개척 교회 형편에 풍금을 살 여유는 없었다. 풍금을 놓고 철야 기도를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9) 신학공부 갈증 풀었지만 전도사 사례비 못 받아 눈칫밥
교회 사역 중임에도 신학 공부 갈증 커져
동향의 한 목사님께 학업 문제 고민 토로
박희천 목사가 편입한 1952년 당시 고려신학교 교수진.
어려울 때마다 금식기도나 철야기도를 했던 내게 풍금을 위한 기도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주변에서는 “기도한다고 풍금이 생기냐”며 웃었다. 그런데 서부교회 성도가 어느 집에 놀러가서 내 얘기를 했다고 한다. “스물다섯 된 우리 교회 전도사가 풍금 생기게 해 달라고 철야 기도를 하고 있다”고.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부인이 선뜻 풍금을 사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다음 주 교회로 풍금이 배달됐다.
서부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신학 공부에 가 있었다. 평양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갈증이었다. 1951년 9월 초 총회신학교가 다시 문 연다는 소식이 들렸다. 같은 해 9월 중순 이북에서 같은 동네에 살았던 강진선 목사님을 만나 학업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9월 말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고려신학교 교장인 박윤선 목사님이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왔다. 박 목사님에게 인사를 드렸고 이후 고려신학교로 가게 됐다.
10월 15일 서부교회 사임 후 부산으로 갔다. 1952년 1월 첫주부터 부산남교회 유년부 전도사로 일하게 됐다. 강진선 목사님이 한명동 목사님에게 나를 소개해 채용됐다. 당시 고려신학교는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광복동 한복판에 있었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 집을 나선 50년 8월부터 부산에 안착한 52년 1월까지 하나님은 내게 기적과 같은 일들을 계속 일어나게 해주셨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땅에서는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2~25).’ 고신대 전신인 고려신학교는 지금과 달리 예과 2년, 본과 3년 과정이었다. 26세 나이에 어렵게 들어온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이제 고생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복병이 있었다.
전도사로 있던 부산남교회에서 ‘1년간 사례비는 없다’고 통보했다. 한명동 목사님이 새로 온 전도사를 두고 보기로 한 것이다. 식사도, 일도 편치 않았다. 교회에선 제과점을 운영하는 집사님 댁에 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교회에서 쌀도 주지 않고 하루 세끼를 해 먹이라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사흘 째 되는 날 점심 때 집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부산에서 꼬박꼬박 점심 먹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다음 날부터 점심은 거르고 아침과 저녁만 얻어먹었다. 한창 나이에 점심을 먹지 않고 공부하고 일을 하려니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돈이 있으면 뭐라도 사 먹을 텐데 월급을 못 받으니 그러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말을 옮겼다간 자칫 목사님과 집사님 사이가 갈라질 수 있으니 그냥 참았다. 1년 6개월 동안 꼬박 점심을 걸렀다.
점심을 거른 10월 어느 주일 오후 1시, 너무 배가 고팠다. ‘하나님, 정말 못 견디겠습니다. 병 나서 죽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불평하는데 이 말씀이 떠올랐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너는 죽는 날까지 충성할 의무만 있는 자’라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눈물로 회개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10) 주일학교 선생 시절 내 재간만 믿고 우쭐대다 학생수 줄어
찬송가 외우게 하고 모든 문제 바로 해결
주위에 입소문 나며 학생수 늘다가 급감
그제야 무릎 꿇고 교만함 회개… 다시 부흥
1952년 7월 고신 전국 중·고등·대학생 연합수련회 참석자들. 일부 학생들은 박희천 목사가 맡고 있는 부산남교회 주일학교를 견학하러 왔다.
비록 1년 반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나 다니엘서 1장 15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내게 건강을 주셔서 별 탈 없이 지냈다. 1년 반이 지나자 부산남교회에서 제과점 집사님 댁에 쌀을 지급했다. 그 집사님이 점심 도시락을 싸주면서 비로소 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왜 그렇게 굶고 살아야 했을까 의문이 들곤 했는데 나중에 신학교 강단에 섰을 때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부산남교회같이 큰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면 신학생들에게 “충성하라”는 말을 자신있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사례비 없이 굶으면서 긴 시간 사역했다고 하면 신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부산남교회 주일학교를 맡았을 때 유치부에서 국민학교 6학년까지 200명 정도가 모였다. 나는 찬송가를 1절부터 4절까지 전부 외도록 했다.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혹시 방탕한 길에 들어서더라도 어릴 때 부르던 찬송가 가사에 이끌려 바로 돌아서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1952년 7월 전국 중·고등·대학생 연합수련회가 고려신학교에서 일주일간 열렸다. 시골에서 온 학생들에게 대도시에 있는 부산남교회 주일예배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은 자기 교회로 돌아가 “남교회 유년 주일학교 대단하더라. 잘한다”는 소문을 냈다.
53년 6월 주일학교 학생은 360명으로 늘어났다. 곧 종전이 됐고 주일학교는 부흥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일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바로 해결했다. 나는 속으로 ‘내 손은 약손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우쭐댔다. 그런데 그해 9월부터 학생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면 곧 회복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학생 수가 점점 줄었다. 54년 1월 첫 주 예배에 참석한 학생은 130명이었다.
처음 맡았을 때보다 70명, 가장 많았을 때보다 230명 줄었다. 그제야 머리가 아팠다. 그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바로 교회에 갔다. 무릎을 꿇고 앉으니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원인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제쳐두고 내 기술과 재간을 믿고 덤비다가 이 꼴이 됐구나.’ 금식하며 종일 기도했다. “하나님은 없고 내가 전부였습니다. 회개합니다.” 그날 내가 무력한 존재란 걸 깨달았다. 교만하면 망한다는 것을 마음 판에 새겼다. 54년 6월 하나님의 은혜로 학생 수는 다시 360명 선으로 회복됐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내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매사에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나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내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나는 고신신학교를 다니며 박윤선 목사님에게 설교를 배웠다.
과거 내가 다닌 평양신학교에서 배운 설교는 풍유적 해석이었다. 여러 비유와 예화를 들어 풀이하는 방식이다. 박 목사님은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훗날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칠 때 문자적 해석법을 충실히 전수했다.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는 본문과 상관없이 풍유적 설교를 하는 이들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11) 존경하던 한상동 목사님 곁에서 목회의 진면목 익혀
고려신학교 재학 중 설교 듣고 큰 은혜
부교역자로 부름 받아 댁에서 하숙
정직·겸손·용기의 목회 몸소 배워
박희천 목사가 전도사로 사역하던 1956 12월 23일 삼일교회 학생신앙운동(SFC) 성탄축하 음악예배. 박 목사는 담임 한상동 목사로부터 목회 정신을 배웠다.
1950년대 고려신학교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한상동 목사님이 단에 오르셨다. 56년 2월 ‘참되게 살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실 때였다. “하나님은 참되시기에 참된 자를 들어 쓰시니 참되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한 목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로 6년간 옥고를 치르신 분이었다. 평소 참되고 정직한 목사님의 삶을 아는 학생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학생들 120명이 다 울었다.
나도 그날 마룻바닥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날 흘린 눈물은 평생 내 가슴에서 마르지 않는다. 같은 해 3월 고려신학교 졸업 후 두 달 뒤 남교회를 사임했다. 다른 교회에서 경험을 쌓고 싶었다. 당시 고려신학교 학생 120명의 소원은 신학교 졸업 후 한 목사님 교회에서 목회를 배우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내게 그런 기회가 왔다. 한상동 삼일교회 목사님이 나를 부교역자로 부르셨다.
나를 추천한 사람은 남교회 한명동 목사님이었다. 한상동 목사님은 내게 “동생이 자네를 소개했네. 내 동생과 제수씨 밑에서 4년 넘게 견뎠다니 대단하네. 우리 교회로 오라”고 하셨다. 당시 미혼이었던 나는 56년 6월부터 연말까지 한상동 목사님 댁에서 하숙을 했다. 하루 세끼를 한 목사님과 겸상했다.
목사님은 함께 일하는 모든 동역자를 인격적으로 대하셨다. 목사님과 난 27세 나이 차가 났으니 그 분은 내게 아버지뻘이었다. 목사님은 고려신학교 설립자이자 고려파 총회 증경총회장이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늘 나를 존중하셨다. 한 목사님은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 도우심 없이는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졌다. 늘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셨다. 그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48:11)’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셨다.
57년 7월 어느 주일 새벽 한 목사님이 내가 사는 사택으로 찾아오셨다. “아직 오늘 주일 아침 설교 준비가 안 됐는데 전도사님이 저를 대신해 설교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놀랐다. 한 목사님의 그런 정직, 겸손과 용기에…. 목사님은 토요일 온종일 설교 준비를 하시며 밤을 새우셨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자 주일 새벽에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어떤 당회장이 주일 설교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을 전도사에게 알리고 부탁하겠는가. 하지만 한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설교 준비가 안 된 당회장이 나서 교회에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는 전도사가 전하더라도 교회에 유익을 준다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 목사님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과 모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계셨다. 노회나 총회에서 회의를 할 때 아무리 방해를 받아도 절대 흥분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끝까지 침착과 평정을 유지하셨다. 나는 2년 7개월동안 한 목사님에게 목회 정신을 배웠다.
고려신학교 재학 중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성경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 실력도 문제였고 돈도 없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12) 비행기 삯 없어 한 달간 배 타고 태평양 건너 유학길
웨이터 등 알바하며 아내에게 생활비 송금
유학 후 귀국해 박윤선 목사님 도움으로
목회 시작하고 대학서 헬라어 강사 생활도
박희천(오른쪽 여섯 번째) 목사가 1962년 인천항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행 배를 타기 전 환송하러 나온 이들과 함께했다.
유학을 하려면 대학 졸업과 어학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다. 하지만 부산 삼일교회에서는 영어를 공부할 방도가 없었다. 서울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때 내겐 식구도 있었다. 1957년 고향이 같은 차진실 자매와 결혼했다. 한상동 목사님이 서울에서 사역할 곳을 알아봐 주셨다. 숭실대 영문과에 편입해 61년 3월 졸업했다. 이듬해 4월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내 경제 사정에 비행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시 주한 미군의 모든 수송은 로스앤젤레스와 인천항을 한 달에 두 번씩 왕래하는 미 해군 수송선이 담당했다. 한미재단에 108달러를 내면 유학생에 한해 이 수송선을 탈 수 있었다. 이 돈을 겨우 마련해 62년 11월 29일 인천항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유학 떠날 때 내게는 6살, 4살, 2살짜리 아이가 있었다.
경제 사정이 허락되길 기다리면서 유학을 하려면 평생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감행한 것이었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로스엔젤레스에서 학교가 있는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까지 가는 데는 버스를 이용했다. 밤낮을 달려 사흘 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아내로부터 생활비가 떨어졌다는 편지가 왔다.
돈도 없이 아이 셋을 돌보고 있을 아내 생각에, 막막한 유학 생활 걱정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기도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외국인 학생들을 잘 돌봐주는 좋은 학교였다. 등록금을 면제하고 기숙사비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유학 온 첫해에는 식비도 학교에서 대줬다. 기숙사 식당에서 웨이터로 아르바이트를 하면 밥을 공짜로 먹을 수도 있었다.
웨이터로 일하면서 받은 52달러를 아내에게 바로 송금했다. 52달러는 우리 가족 한 달 생활비로 충분했다. 한 학우의 제안으로 방학 중에 친구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유학 내내 가족에게 생활비를 넉넉히 보낼 수 있었다. 준비해주신 ‘여호와 이레’(창 22:14)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학교에서 신약 주임교수인 존 해밀튼 스킬톤 교수님으로부터 헬라어를 배웠다. 교수님은 나의 헬라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길 원했다. 나는 솔직히 다 잊어버렸다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구나. 지금부터 하면 된다. 내가 개인 교습을 해주겠다”고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헬라어 귀신’이란 별명을 가진 스킬톤 교수님은 정성껏 개인 교습을 해주셨다.
68년 6월 그렇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고려신학교에서 총신대로 자리를 옮긴 박윤선 목사님이 내가 일할 곳을 알아봐 주셨다. 목사님 소개로 목회를 시작했고 총신대에서 헬라어 강사로도 일했다. 71년 4월 신학교에서 교내 부흥 집회가 예정돼 있었다. 박윤선 목사님이 강사였는데 갑자기 입원하시면서 강단에 설 수 없게 됐다. 학우회에서 느닷없이 나를 강사로 요청했다. 박윤선 목사님이 설 자리에 내가 서게 된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일주일 내내 금식하면서 집회를 인도했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13) 귀국후 내수동교회 목사로… 말씀 연구·설교 준비 온 힘
“영적·질적 최고의 주일 만들 것” 다짐
결석 교인 챙기며 전원 전화·심방
부임 4년 만에 교인 4배로 늘어
박희천 목사가 1995년 강원도 철원 김화수양관에서 열린 설교학 세미나에서 강의하고 있다. 내수동교회는 설교 요약이 담긴 주보와 설교 테이프를 무료로 나눴다.
‘이번 집회에 실패하면 나도 망신이지만, 박윤선 목사님에게도 폐를 끼치는 일이다.’ 죽을 각오로 일주일간 11차례 설교를 했다. 다행히 학생들의 평가도 좋았다. 1975년 4월 내수동교회 6대 목사로 부임했다. 전임 신복윤 목사님이 나를 천거해 오게 된 것이다. 신 목사님은 사임 후 총신대 교수로 일하다 후일 합동신학대학원대 총장을 역임했다.
유학을 다녀와서 몇몇 교회에서 시무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 교회에 부임할 때 “내수동교회에 뼈를 묻겠다”고 단단히 각오했다. 오로지 설교를 잘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었다. 설교는 성경을 얼마나 봤느냐에서 판가름이 난다. 나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교인들의 주일을 영적인 면에서, 질적인 면에서 다른 어떤 날보다 나은 하루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리 교인 중에는 경기도 안산에서 출석하는 성도도 있었다. 이런 성도를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설교에 주력했다. 엘리야가 먹던 진리의 떡과 진리의 고기(왕상 17:1~7)를 대접하려고 애썼다. 나는 교인들에게 주일 성수(출 20:8~11), 온전한 십일조(말 3:7~12), 매일 성경(행 17:11), 매일 기도(살전 5:17), 열심 전도(행 5:42)를 강조했다. 설교 준비와 함께 결석 교인도 열심히 챙겼다.
1950년대 주일학교 유년부를 맡았을 때 빠진 학생을 점검한 경험을 살린 것이었다. 내가 부임할 당시 내수동교회 장년은 140여명이었다. 각 구역에 출석부를 배부해 예배 참석 여부를 꼼꼼히 점검했다. 5시에 교역자 회의에서 출석부를 재점검하고 7시 회의에서 그날 결석한 교인 한 분 한 분에게 전화 심방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통화하다 보면 밤 9시가 됐다.
그제야 집에 와서 저녁밥을 먹었다. 부임 2년 차에는 교인이 290명으로 늘었다. 4년 후에는 530명으로 성장했다. 나는 장년 교인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이름도 다 외웠다. 매 주일 교회 문 앞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면 모두 좋아했다. 담임목사가 자기 이름을 안다는 것에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교인 500명까지는 출석 점검이 9시 무렵 끝났지만 800명으로 늘어나니 사무가 많아졌다. 밤 9시가 넘어 전화를 걸면 실례라 하는 수 없이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했다. 월요일 오전 9시부터 전화했다. 오전에 체크가 끝나면 전화기가 없는 집은 직접 방문했다. 그 일을 하느라 월요일에도 쉴 수가 없었다. 월요일에 교인들 집을 돌고 오면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이 편했다.
나는 ‘목자들이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란 성구가 있는 말씀(겔 34:2~6)을 떠올리며 철저히 결석 점검을 했다. 내가 과한가 생각을 하다가도 이사 간 교인들의 안부 전화를 받으면 힘이 났다. “목사님, 지금 나가는 교회는 제가 한 달을 빠져도 아무 말이 없어요. 내수동교회는 한 주일만 빠져도 목사님이 전화하시는데 여기는 관심이 없나 봐요.”
***[역경의 열매] 박희천 (14) 매년 교인 가정 모두 심방… 성경 구절 맞춤 처방도
심방 동행 하종부 목사 “배워야”
설교 내용 요약해 실은 주보 인기 폭발
오정현·김남준·송태근 등 전도사 지내
박희천 목사 부부(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세번째)가 2009년 내수동교회 출신 목회자 부부들과 야유회를 갔다.
교회마다 부흥의 비결은 다르다. 다른 교회에서 시행한 것이 우리 교회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많은 교회 부흥 비결을 탐구해보았지만 우리 교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역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수동교회는 충실한 말씀 준비, 결석자 점검, 전 교인 전도대회를 통해 교인이 늘었다.
나는 매년 교인 전체의 집을 방문하는 대심방을 실시했다. 대심방을 하면서 각 가정을 방문할 때 빈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백지상태로 방에 앉아 사람들과 3~4분 대화를 나누면서 집 상황을 파악했다. 의사가 왕진 갈 때와 똑같다. 진찰하기 전에는 확실한 병명을 모른다. 가정을 진단한 뒤 ‘뇌리 성경 일람표’에서 각 가정에 맞는 성경 구절을 처방했다.
당시 화종부(현 남서울교회) 목사가 나와 함께 심방을 하다가 내가 그 집안에 딱 맞는 성경 말씀을 찾아서 전하는 걸 보고 교회로 돌아가 부교역자들에게 말했다. “오늘 박 목사님이 말씀 주시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요. 당번을 짜서라도 박 목사님을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내수동교회에 부임한 첫 주일부터 주일 설교 내용을 요약해 주보에 실었다. 다음 주 설교 본문과 제목도 예고했다. 주보 요약 설교는 나중에 찾아볼 수 있어 좋았다. 교인들은 주보를 전도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설교를 담은 우리 교회 주보는 이래저래 인기가 많았다. 1975년 부임할 때 내수동교회 교인은 140여명이었는데 얼마 안 가 매주 1000부 이상의 주보가 다른 교회로 나갔다.
주보를 우편으로 보내 달라는 요청이 점점 늘어났다. 주보를 보내 달라는 곳이 많아 주보 발송을 전담하는 사무원 한 명을 따로 채용했다. 한국교회를 위해 이 정도 봉사는 감당하자는 생각이었다. 설교 테이프도 함께 보내 달라는 요청이 많아 아예 그때부터 카세트테이프에 설교를 녹음해 함께 우송했다.
내수동교회는 대학부가 유명했다. 내가 부임했을 때 오정현(현 사랑의교회 목사) 학생이 대학교 1학년이었다. 당시 대학부 학생은 서너명에 불과했다. 그는 누가 따로 맡긴 것도 아닌데 열심히 전도했고 78년 대학부 여름수양회 참가자는 80명이 됐다. 우리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회 중 교인이 가장 많은 충현교회도 대학부 학생이 50~60명이던 시절이었다.
79년 “네가 만들었으니 네가 책임자로 일하라”며 오정현 학생을 대학부 전임 전도사로 임명했다. 그는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다. 그러다 나의 강권에 “정 저에게 직책을 주시려면 전도사 말고 간사로 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는 81년까지 3년간 대학부 책임자로 일하다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때 대학부 학생 수는 150명이었다. 당시 내수동교회 전체 교인이 450명이었는데 3분이 1이 대학생이었다.
내수동교회에서 전도사를 지낸 목사들 중에는 큰 교회를 담임하는 이들이 많다. 오정현 화종부 목사를 비롯해 김남준(열린교회) 송태근(삼일교회) 오정호(대전 새로남교회) 박성규(부산 부전교회) 이관현(대구 내일교회) 목사 등이다.
***[역경의 열매] 박희천 (15·끝) 1950년부터 매일 성경 읽어… 말씀으로 가득 채운 삶
작은 오해 쌓여 위기 내몰려
시편 말씀대로 침묵·기도로 돌파
“성경을 먹어야 성경 나온다”
목숨 걸고 연구… 좋은 설교 비결
내수동교회 예배당에서 함께한 박희천 목사와 차진실 사모. 박 목사는 “성경을 먹어야 성경이 나온다. 목사는 자신을 매일 성경으로 가득 채워야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목사님이 잘해서 내수동교회에서 많은 목회자가 배출된 것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 외 다른 답은 생각나지 않는다. 혹시 비결이 있다면 담당 교역자들에게 부서를 맡긴 뒤 일절 간섭을 하지 않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목회할 때 내게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82년 말부터 83년 초였다. 내가 교회를 사임할 정도로 심각한 난국에 처했다. 작은 일이 중첩되고 오해가 쌓이면서 위기에 몰린 것이다. 나는 그때 ‘결코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때 떠오른 말씀이 시편 38편 13절이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 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온갖 험한 말이 들려올 때 다윗은 귀먹은 자 같이 듣지 않고 입을 열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어려움을 아뢰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때 스스로 붙인 별명이 ‘말하는 벙어리’였다. 하나님께만 말하고 사람 앞에서는 언어장애인이 되자는 결심이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괴로움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신학교에 있는 내 연구실로 갔다. 3일 금식기도를 했다. 금식기도가 끝나는 새벽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무거운 걸 끌어올리는 윈치가 뭔가를 들어 올리는 환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구석에 몰린 나를 하나님이 윈치를 이용해 위로 끌어올리시는 걸까.’ 실제로 그다음 주부터 문제가 해결됐다. 많은 목회자가 ‘목회는 기도로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라 생각하기 쉽다. 어려움이 없을 때는 이 말이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큰 어려움에 부닥쳐 간절히 기도하고 그 기도에 응답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목회는 기도로 한다는 말을 실감했다.
목회자는 평소 말씀을 가까이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1950년 1월 1일부터 성경을 순서대로 읽으면서, 매일 시편 5편과 잠언 1장씩을 따로 읽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하고 있다. 거의 10시간 안팎이니 한 달이면 1독(讀)을 할 수 있는 속도다. 나름 열심히 읽었어도 나는 그저 태산 같은 성경의 한 모퉁이를 손가락으로 긁다 만 정도라고 느껴진다.
성경은 간단하게 점령되는 책이 아니다. 그러니 온 힘을 다해 읽어야 한다. 나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항상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학을 공부하는 3년 동안 최소한 하루에 구약 3장, 신약 1장을 읽어야 한다. 신대원 3년을 마치면 전문가가 된다고 착각하지 마라.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고시 마친 다음 날 여러분은 ‘성경 유치원’에 재입학해야 한다. 그때부터 목숨을 걸고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참기름병을 기울이면 참기름이 나오고 석유통을 기울이면 석유가 나온다. 성경을 먹어야 성경이 나온다. 목사는 매일매일 성경으로 가득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후배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다. 나는 목숨 걸고 성경 읽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여러 은인 덕분에 그렇게 살 수 있었고 여기까지 왔다. 모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