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소장전에 다녀와서
모처럼의 겨울방학인 만큼 괜찮은 전시 한두 군데 정도는 다녀오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에 2학년 후배와 함께 서울대학교 소장전을 찾았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은 2017년 2월 기준으로 653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기증 혹은 구입을 통해 모아진 것으로 각 작품들의 수집 경위를 최대한 꼼꼼하게 하나하나 찾고 기록하는 등 보존 과정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전에 엄마와 함께 서울대학교 신소장전에 와 본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소장 중인 100개 작품을 미술관 전체에 전시해 공개하고 있다기에 주저 않고 관람 코스에 서울대학교를 넣었다.
워낙 교통이 괜찮은 곳에 위치하는지라 교통 문제 관련해선 거의 걱정 하지 않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줄곧 쾌청하던 날씨는 어디로 가고 당일 비가 잔뜩 내렸다. 도로는 막히고, 비는 내리고, 콜택시도 지독하게 잡히지 않아 가는 길 오는 길 정말이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빗속에서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40분이 넘도록 서있기도 했다. 짜증 한 마디 하지 않는 후배에게 너무 미안해서 변명 거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전시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소장전인 만큼 다양한 주제, 다양한 개성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작품 하나하나의 이미지가 워낙 강력해 어디에 눈을 둬야할지 모르겠을 정도였다. 무슨 의미와 의도를 갖고 작가가 작업을 하였는지는 대부분 알기 어려웠으나 캔버스(혹은 조소 작품)앞에 서 있으면 작가가 작품을 하며 담아낸 감성과 감정이 맞바람 불 듯 확 와 닿았다. 정말 많은 좋은 작품들 가운데 그 앞에서 발을 떼고 싶지 않았던 작품들이 있었는데, 박영성 작가의 <Still life>, 정탁영 작가의 <잊혀진 것들>이 내게 그러했다. 버스 시간 때문에라도 한 작품을 너무 오랫동안 보고 있기 곤란했는데, 그 앞에서 보낸 십 몇 분이 너무도 모자라게 느껴져 도록을 사와 집에 도착해서도 그 두 작품만큼은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정탁영 작가의 <잊혀진 것들>은 작은 종이 조각들을 불규칙하게 화지 위에 올려놓은 뒤 그 상태에서 먹을 번지고, 나중에 올려둔 종이 조각들을 떼어내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은은하게 퍼져있는 잿빛 먹은 불규칙하게 군데군데 결여되어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장면이 되고, 장면이 세피아색 기억 조각이 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무리 생생하게 기억하려 애써본들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이야기엔 선명한 구멍이 남는다. 무언가를 완전히 기억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그렇게 놓치고 마는 이야기는 대부분 어느 정도 왜곡된 다른 이야기로 메꾸어 지게 된다. 원형 그대로 남는 일은 없다. 그렇기에 은은하고 유기적인 그 흐름을 끊어놓는 하얀 빈칸들이 더욱 공허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잊고 있던 수많은 면적을 모아두면 필시 그 넓이는 가득 메워져 있는 보통의 공간의 몇 배에 달하리라. 그것을 새삼 인지했을 때 스스로가 놓친 수많은 기회와 인연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작품의 앞에서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고 나니 온전히 보존될 수 없는 매 순간의 소중함이 손에 와닿았다.
매 순간의 가치를 되새기다보면 후일 이 날이 잊히더라도 순간에 부여된 의미만큼은 고스란히 내게 남으리라. 멋진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소장전이 열린다면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엔 좀 더 여유를 갖고, 작품 앞에서 내 스스로를 찬찬히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