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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연민
유다서 1:20-25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긴장했던 13호 태풍 돌핀이 우리나라를 비껴가긴 했습니다만, 그 영향인지 몰라도 날씨가 달라졌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확실히 바람이 달라졌습니다. 마침 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절기가 무섭다는 옛말이 다시 생각이 납니다. 지난 금요일이 처서(處暑)였습니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만큼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잡는 때입니다. 처서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 되지요. 예전에 부인들은 이때 여름 동안 장마에 눅눅해진 옷을 말리고, 선비들은 책을 말렸는데, 여러분들도 그 동안 눅눅해서 때로는 곰팡이가 핀 마음을 아주 뽀송뽀송하고 상쾌하게 말리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제 곧 가을이 올 텐데 가을은 독서의 계절입니다. 부지런히 책을 읽으시되 특별히 성경을 힘써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썼다고 알려진 유다서는 1장에 불과한 짧은 책이지만,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초대 교회는 여러 가지 이단적인 가르침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광범위하고 치명적으로 교회에 해를 끼쳤던 이단 종파는 영지주의(Gnosticism)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이 육체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귀한 것이고 영이 해방되는 영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육적인 삶은 별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의 문제가 해결되면 육의 문제에 굳이 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 가운데는 정말 고결한 영혼들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한 삶을 거리낌 없이 행하게 만드는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유다서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교회 안에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권위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이고, 교우들 사이의 진정한 사귐을 가로막는 암초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특징짓는 말은 ‘불평’, ‘욕심’, ‘허풍’, '아첨‘ 등입니다. 그들은 자기 본능을 따라 살면서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하는 까닭은 뭘까요? 그들의 가르침이 색다른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그들의 가르침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을 해방시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진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뭔가 짜릿한 것을 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리는 평범하거나 심지어는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입니다.
옛사람이 말한 것처럼 “진리는 담담하여 색다른 맛이 없습니다(淡乎其無味)”. 우리는 늘 가까이에서 대하는 사람들은 귀한 줄 모르고, 멀리 있는 사람만 바라봅니다. 가끔 먹는 것을 귀하다 하고 매일 먹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각없는 자들은 “훔쳐서 먹는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빵이 더 맛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죽음의 그늘이 바로 그곳에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잠9:17-18a)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가장 요긴한 것들은 거저 주어진 것들입니다. 공기나 물과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것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흔한 것처럼 보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우매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렵지도 않고, 신비한 것도 아닙니다. 들을 마음만 있으면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팔린 정신은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색다른 가르침에 현혹됩니다.
유다는 우리에게 우리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자들에게 넘어가지 말라면서,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한 몇 가지 조언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룩한 믿음을 터로 삼아서 자기를 건축”해야 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믿음이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믿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권능이 그 믿음의 기초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모험이고 결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적인 가치가 아닌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릴 때, 삶이 단순해지고 내적인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리도 무기력하게 사는 까닭은 영혼의 지향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 믿음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지으면 우리는 여간한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실패란 없으니 말입니다.
둘째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진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비끄러매는 행위입니다. 즉 참다운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내 몸과 마음을 통해 실현되기를 소망하며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표현이 아니라 진실과 진정입니다. 유대교의 어느 랍비는 히브리어 알파벳을 쓴 종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내가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를 당신의 은총 속에서 들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 물결에 떠밀려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의붓아들 의식‘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마치 의붓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서먹서먹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 삶의 빛깔은 무지갯빛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하고, 병든 이들을 고치고, 낙심한 이들에게 희망을 일깨우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외로운 이들의 벗이 되어주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중심이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내가 이웃을 향해 걸어가는 걸음 하나하나가 영원한 중심이신 하나님을 향한 순례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누군가를 돌보고 있을 때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가족들이 근심 속에 있으면 나 또한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이 고통스러우면 목사가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웃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있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마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고난만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을 우리가 이웃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방울 속에 하늘나라가 비치게 된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유다는 성도들에게 믿음 가운데 확고히 서지 못한 사람들, 베드로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들뜬 영혼’(굳세지 못한 영혼, 벧후2:14)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지옥 불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불에서 끌어내라고 말합니다. 그냥 놔두면 그들은 스스로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하지만 가인의 후예인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 혼자 살기도 바쁜 데, 어떻게 남을 돌보라는 겁니까?” “내 코가 석 자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경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세상 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많은 것이 있겠으나 마음에 와닿는 것은 ‘자비의 사회화’입니다. 자비는 자애로움과 큰 슬픔을 뜻합니다. 이웃을 바라볼 때 자애로운 어머니의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아파하는 그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런데 자비는 개인적인 덕성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런 자비의 마음을 익히는 도량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 대해서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누군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 때 ‘오불관언(吾不關焉)’, 그것은 나와 무관한 것이라 여기지 않고 그것을 아파하는 연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판단하고 비난하고 따돌리고 외면하기보다는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드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마음이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찰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싫어했던 사람도 품을 수 있을 것 같고, 밉살스럽게 굴던 사람들도 넉넉히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됩니다. 그런 너그러움이 밀물처럼 다가올 때 나는 존재의 고양감을 느낍니다. 문제는 그것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자꾸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는, 그분과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정말로 좋은 인간으로 발전해 갈 수가 없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 안에서 천사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이번 여름, 정말 더웠습니다. 그런데 비좁은 감방에서 여름을 나기가 어떻겠습니까?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그 책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어떻습니까? 비록 덥다고 해도 이 글을 읽고 나니 견딜만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무더위 때문에 녹초가 되어 선잠이 들었는데,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더랍니다. 웬 바람인가 싶어 눈을 떠보니 어느 복역수 하나가 잠들어 있는 동료들을 위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답니다. 신영복 선생은 서슴없이 그를 천사라고 부릅니다. 원망하고 미워하고 짜증내면 뭐합니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 비록 같은 죄수이지만 무더위 때문에 선잠을 자고 있는 동료들이 딱해서 그들을 위해 부채질을 이 마음이야말로 천국에 속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각종 언론에 끊임없이 보도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그러나 아주 하찮은 이유로 귀한 생명을 빼앗는 일들이 너무나 흔히 일어납니다.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참으로 암울하기만 합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곳, 그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어디가 지옥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랑으로 돌보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 일에 투신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힘만 믿고 의지하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성서 조선>이라는 개인잡지를 내며 일제 강점기를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주셨던 김교신 선생님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매달 먹을 것을 못 먹으며 돈을 모아 잡지를 만들어 여기저기 돌리고 있는데, 과연 그 일이 의미가 있는 일인가 싶었던 것입니다.
<제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나를 속이셨습니다. 나의 어리석은 것을 기화로 하여 당신은 온갖 감언이설로 또는 위협과 책망으로 나를 몰아내어 십수 년간 이런 잡지를 발간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잡지를 정말 읽는 이가 누가 있습니까?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나 어디 있었습니까? 당신은 아실 테니 있었거든 있었다 하십시오. 어떤 이는 비웃습니다. “네가 그 비용을 모아두었다면 자녀 교육에는 염려 없을뿐더러 노후의 안정을 이미 얻었으리라”고. 그러나 아무것도 되지 못했건 말건 진정한 독자 한 사람만 있었다면 나는 당신을 원망치 않겠습니다…….
심문/ 그래 네가 손해 본 것은 얼마나 되느냐? 계산해 오라.
답신/ 내 것 손해 본 것은 한 푼도 없습니다. 당신이 주신 것으로 출판하고 먹고 입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올시다.
심문/ 그럼 또 무슨 말이냐.
답신/…….> (김교신, 『조와(弔蛙)』, 동문선, 191-2쪽)
가만히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 가운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이 삶에 눈뜬 이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품은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다면 하나님의 한없는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 위에 인생의 집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지키고, 들뜬 영혼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지옥 불로부터 건져내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위엄이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이 지옥이라고 탄식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옥과도 같은 세상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함으로 주님이 보여주신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