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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목메어 외쳐 불러도, 애타게 절규해도
서산마루를 너머 가는 저녁 해(夕陽)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그 어떤 힘도 밤이 오고 다시 아침이 오는 장엄하고 위대한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의 흐름에도 일체의 거침이 없다.
그래서 운명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할 수만 있다면 이 같은 운명적 흐름에서 한번 쯤 건져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우리시대의 빛나는 지성, 이어령이다.
누군가 노인의 죽음을 일컬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어령은 죽음의 불길이 닫기 전에 생애 마지막으로 그의 거대한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인생 미수(米壽)의 길목에서 병든 노구를 일으켜 문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감당하기 벅찬 그의 찬란한 이야기들이 여기에 모여 또 다시 한권의 책이 되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300쪽 페이지마다에는 생사의 경계선에서 토해내는 지성의 숨결이 한 뜸 한 뜸 새겨져 있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어둠의 팔목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어둠과의 팔씨름’, 그랬다. 이 책은 이어령이 죽음과 싸워 이긴 전리품이었다.
말기 암이라는 지독한 병마 앞에서도 죽음의 동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지성의 힘으로 거둔 소중한 생명의 열매였다.
하지만 작가 김지수에게는 우리 시대의 스승이 세상에 남기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었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죽음과 동행한 선생의 마지막 수업을 이렇게 정의했다.
‘선생님은 라스트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당신의 지혜를 ‘선물’로 남겨주려 했고
나는 그의 곁에서 재앙이 아닌 생의 수용으로서 아름답고 불가피한 죽음에 대해 배우고 싶어 했다.
그렇게 매주 화요일, ‘삶 속의 죽음’ 혹은 ‘죽음 곁의 삶’이라는 커리큘럼의 독특한 과외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사전에 대화의 디테일한 주제를 정해두지 않았고 그날그날 각자의 머리를 사로잡았던 상념을 꺼내 놓았다.
하루치의 대화는 우연과 필연의 황금분할로 고난, 행복, 사랑, 용서, 돈, 종교, 죽음, 과학, 영성 등의
주제를 타고 변화무쌍하게 흘러갔다.’
이 책에서 이어령은 수업의 첫 장부터 죽음의 담론으로 시작한다.
즉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그랬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동굴 앞에 서서 두려움 없이 그 동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생각의 내려놓음이 바로 인간이 지닌 가장 엄숙한 용기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죽음은 생명을 끝낼 수는 있어도 말과 영혼을 끝낼 수 없다는 그의 예지는 놀라웠다.
이처럼 그는 단 한 번도 지적 폭발을 멈추지 않았던 활화산 같은 선지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말하고 있었다.
우선 이어령의 삶과 죽음의 담론은 특별했다.
그의 죽음은 영과 육의 이원론을 넘어 육체(body)와 마인드(mind)와 영혼(spirit)의 삼원론으로 나아갔다.
이 책에서 그가 비유로 내놓은 유리컵은 그 자체가 우리네 인생이다.
부서지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 인간의 육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컵은 비어있어야 컵일 수 있으며 그 비어있음, 즉 Void가 바로 우주까지 닿은 영혼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컵에 온갖 액체가 채워지듯 우리 몸을 채우는 것은 마인드다.
예컨대 컵에 뜨거운 물이 담기면 화가 나고 차가운 물이 담기면 쌀쌀맞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육신이 무너지면, 즉 컵이 깨어져 담긴 물이 쏟아지면 마인드는 흩어진다.
그러나 그 마인드로 채우기 이전의 영혼, 즉 액체로 채우기 이전의 빈 컵 속의 ‘비어있음’,
즉 void는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다.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유리컵 안의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그러나 내 몸을 마인드로만 가득 채우면 영혼이 들어갈 틈이 없다.
돌아보면 세속의 인생들에게 영혼은 먼 나라의 얘기일 수밖에 없다.
바디 안을 마인드로 가득 채우고도 그 목마름에 못 견디는 인생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바디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없게 된다.
빵과 돈, 물질만 남길 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태초의 빅뱅은 물질과 반물질의 만남이었고 그것은 빛이 되었다.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가 사람과 동물, 지구를 채우고 있는 공간적 존재들이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이런 존재들은 지금도 그 빅뱅의 빛이 생산한 에너지로 살아간다.
그리고 물질적 존재인 우리가 바로 그 반물질을 만나면 빛이 된다.
그 빛이 void, 즉 공허의 공간에 들어가 창조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천국’과 소크라테스의 ‘이데아’가 바로 이 같은 공허다.
이어령은 이 책을 통해 영혼의 창으로만 볼 수 있는 영원불멸의 void를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이렇게 풀어나갔다.
즉 타인의 죽음이 철창 속의 호랑이라면 자신의 죽음은 그 철창을 나와 나에게 덤벼드는 호랑이라고 비유한다.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들어올 때,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의 거리는 멀다.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몸서리치게 작은 존재인지를 말해준다.
로스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다섯 단계는 제 아무리 죽음에 훈련이 된 사람들도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위대한 성직자들조차도 ‘신의 부름’은 늘 고통의 극한점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이어령은 신의 부름을 역설적으로 마무리했다.
‘신은 죽었다.’라고 했던 초인(超人)철학자 니체를 우리 앞에 불러낸 것이다.
“니체가 어느 날 토리노 광장에서 우체국으로 편지를 부치러 가다가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걸 본거야.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려는 데 길이 미끄러우니까 계속 미끄러지는 거야.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늙은 말을 보고 니체가 달려가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네.
자기가 매를 대신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하며 울다가 미쳐버렸다지.
그리고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고는 십년간 식물인간처럼 살다가 죽은 거야.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이지. 그게 바로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이라네.”
“토리노 광장에서 얻어맞은 말이 예수야.
채찍질 당하고 허적대는 말, 그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지.
그러니까 가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던 걸세.
자기가 늙은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나. 가까우면 마부하고 가까워야지.
그런데 그 때 니체는 인간의 대열에 끼는 게 창피해서 인간을 거절했다네.
인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게 초인이거든.
” 이어령은 ‘트리노의 말’을 통해 신이 있음을 믿는 우리보다 ‘신은 없다.’는
니체가 오히려 신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역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령은 어느 해, 작가 최인호와의 대화를 소개하면서 죽음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죽음이란 어릴 때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라.’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바로 엄마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었다.
그것은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또 하나의 생명이다. 어머니의 곁으로, 아니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나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그렇다.
아기 때는 어머니 손길과 치맛자락에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안다.
그러다 자라나 문밖을 나가면 친구들과 정신없이 논다.
그러다 엄마가 부르면 화들짝 놀라 원위치로 돌아간다.
그래서 죽음이란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탄생의 그 자리로......그래서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말한다.
죽음은 결코 어둠의 골짜기, 까마귀 소리, 세상의 끝, 황혼이 아니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고향이라고 정의한다.
구약성서에서 죽음을 일컬어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라고 기록한 것도 같은 이치다.
이 책의 저자 김지수는 ‘작은 죽음들의 시간, 정적’이란 글 꼭지에서
그녀가 이어령과 함께한 마지막 수업의 현장을 정밀하게 스케치했다.
“선생 앞에 앉으면 나는 늘 눈이 부셨다. 죽음을 이야기 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으나
그가 환자나 노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더욱 싱싱한 감각으로 죽음을 감각화하는 그의 지력에 인중에 땀이 고였다.
안개 속에 있던 죽음이 생의 지각 속에서 정밀해질수록 머리가 맑아졌다.
끝을 알 수 없는 삶이 선명해졌다. 기이한 노릇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어령의 정적’을 소개했다.
어릴 때 그가 살던 온양은 분지라서 해가 빨리 졌다.
정신없이 놀다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미나리꽝 근처에서 이어령은 와글와글 울고 있는 개구리들에게 돌을 던졌다.
그러면 일제히 개구리들의 울음이 딱 멈추고 이내 찾아오는 정적,
그 정적에 소년은 반한 것이다.
시골하늘은 밝고 밤의 모판에는 별빛이 가득한데 별빛에 숨어서 울던 개구리들에게 돌을 던지면
일제히 딱 멈추면서 귀가 멍멍할 정도로 침묵이 생겨난다.
평소에는 들어보지 못한 침묵이었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소리사이에 생겨난 침묵, 소년에게 그 침묵이야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었다.
어린 날 고향 미나리꽝에서 소년의 발길을 묶어두었던 이어령의 침묵은 세상의 침묵으로 다시 살아났다.
88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반바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나올 때의 침묵,
바로 ‘silence’ 라는 제목의 굴렁쇠 침묵이었다.
꽹과리 소리와 수천 명이 돌아다니던 운동장에 일순간 모든 소리가 다 끊기고
어린애 하나가 굴렁쇠를 굴리고 나올 때였다.
세계인들이 휑뎅그렁한 빈 운동장과 귀가 멍멍한 침묵을 마주했던 순간만은
그 거대한 정적이 세상의 시간을 분명히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 많은 돈을 들여가며 보여 준 개막식 공연은 기억나지 않아도
굴렁쇠의 침묵은 지금도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힘, 그 침묵의 시간에서 문학과 예술과 철학을 일으키는
내공이 길러진다는 가르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어령은 사람이 살면서 아니 늙어가면서 점점 더 세속의
시간을 찢고 나오는 공백의 시간은 확장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정적의 시간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점령하는 순간이 바로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이어서 어린 날의 운동회를 떠올렸다.
“햇빛이 있고 만국기가 날리고 시끄럽고 그런 축제 분위기만 기억한다면 그립지 않을 거야.
내 코끝을 찡하게 하는 건 다른 이미지라네.
전교생들이 다 바깥에 나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교실은 완전히 비어 있잖나.
평소엔 그 반대거든. 교실에서 텅 빈 조용한 운동장을 바라보곤 했지.
빈 철봉대에 햇빛이 고여 있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포플러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운동장은 공백의 공간이지. 그런데 운동회는 거꾸로 된 거야.
침묵하던 운동장에 온갖 사람들, 소리들이 죄다 몰려온다네.
참 이상하지. 나는 왜 그 즐거운 운동회 날, 아무도 없는 교실이 그리웠는지 몰라.”
그는 머리가 커질수록 머릿속을 채우는 건 빈 교실의 이미지라고 했다.
방과 후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가끔씩 들려오던 선생님의 풍금소리가 그리워진다고 했다.
죽음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미수(米壽)의 지성은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넌 듯 초연해 보였다.
마침내 이어령은 죽음을 기다리며 탄생의 신비를 배웠다고 말한다.
작가 김지수의 손을 빌린 그의 라스트 인터뷰를 이 책의 말미에서 찾아 이곳에 옮긴다.
‘그는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로 기력을 다해 책을 쓰고 강연하고
죽음까지 기록할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다.
그는 ‘싱킹맨(thinking man)’은 웃지 않는다고 겁을 주더니
인터뷰 내내 ‘쫄지 마!’ 라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죽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 건강해 보이십니다. “나 같은 환자들은 하루에도 듣는 코멘트가 여러 가지야,
‘수척해보여요.’, ‘건강해 지셨네.’ 시시각각 변하거든,
알고 보면 사실 가까운 사람도 남에겐 관심이 없어요.
남은 내 생각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그 기준으로 자기를 연기하고 사니 인생이 참 허망한 거지.’
-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쓰신다고 들었는데 지난번에는 ‘마지막 파는 우물은 죽음’이라고 하셨는데요.
“죽음을 앞두면 죽음 얘기를 써야하지만 나는 반대로 써요.
죽음은 체험할 수 없으니까. 사형수도 예외가 없어요.
죽음 근처까지만 가지. 죽음을 모르니 말할 사람이 없어요.
임사체험도 살아 돌아 온 얘기지. 살아있으면 죽음이 아니거든.
가령 이런 거예요. 어느 날 물고기가 물었어. ‘엄마, 바다라고 하는 건 뭐야?’,
‘글쎄 바다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걸 본 물고기는 모두 사라졌다는구나.’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어요.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지요.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게 죽음이지요.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지를 전해 줄 수는 없는 것인지라 나는 다른데서 힌트를 찾아요.
죽을 때를 ‘돌아가신다.’고 하는데 기가 막힌 말입니다.
결국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죽음과 달리 탄생은 관찰이 가능해요.”
-죽음을 느끼면서 태어남을 복기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미지의 죽음을 탄생의 신비로 풀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모험은 미래에 있음이 아니라 먼 과거에 있어요.
진화론에 따르면 내 존재는 36억여년 전 바닷가에서 시작되었지요.
태아의 형성과정에는 물갈퀴와 아가미가 선명하게 보여요.
그렇다면 나는 36억년 플러스 88년을 살았지요. 엄
청나게 살고 나서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난 옛날부터 궁금했어요. 왜 외갓집에만 가면 가슴이 뛸까?
왜 외갓집 감나무에 열린 감조차 더 달고 시원할까.
그게 미토콘드리아는 외가의 혈통으로 이어져서 그래요.
거슬러 올라가면 저 멀리 아프리카의 어깨 벌어진 외할머니한테서 내가 왔는지도 모르죠.”
- 탄생을 돌아보며 얻는 그 놀라운 힘으로 또 무엇을 보셨나요?
“생명은 입이에요. 태내에서도 생명은 모든 신경이 입으로 쏠려 있어요.
태어 난 후에는 그 입으로 힘껏 젖을 빨지요.
그 입술을 비벼 첫 소리를 내요.
‘므, 브.....’ 가벼운 입술소리 ㅁ으로 ‘엄마, 물’을 무거운 입술소리 ㅂ으로 ‘아빠, 불’을 뱉어요.
물은 맑고 불은 밝잖아요. 그 ㅁ과 ㅂ이 기막히게 대응을 이루는 게 바로 우리 한글이지요.”
이어령은 구강기를 정신분석의 첫 단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은 프로이트를 비판한다.
‘프로이트는 뱃속세계를 몰라요.
태어난 후의 트라우마를 적용했지만 사실은 태아 때 더 많은 트라우마가 생긴다는 걸 그는 몰랐지요.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의 후손 중 많은 사람들이 폐쇄공포증을 앓았어요.
좋든 나쁘든 유전은 내 조상의 정확한 이력서예요.
동양의 탄생학과 서양의 유전학은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한 것이지요.
뱃속에서의 10개월이 성격, 기질, 신체의 많은 부분을 결정해요.
스승이 10년을 가르친 게 엄마 뱃속에서 10개월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 지혜로운 한국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태중의 아이를 이미 한 살로 보는 거예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죽음의 담론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날짐승인 새도 몸이 무거우면 날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날개는 날개가 아니라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덮는 덮개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늙고 병들면 머리가 빠지고 이빨이 빠지고 어깨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풀린다.
하지만 마이너스 셈법으로 몸이 가벼워지면 날 수도 있다.
고통을 통과해서 맑고 가벼워진 영혼은 위로 떠오른다.
덩컨 맥두걸이라는 학자가 실험을 했다.
죽은 후 위로 떠오르는 영혼의 무게를 쟀더니 21그램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죽어갈수록 아니 나이가 들수록 더 보태지 말고 불순물은 빼내고 안고 있는 것은 내려놓고 줄여야 한다.
그래야만 21그램의 영혼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다.
이어령은 언제나 모르는 게 남아있어 즐거운 생애를 살았다.
질문 없는 사회, 물음표는 필요 없고 느낌표만 즐비한 세상,
알아도 모른 채 하고 몰라도 아는 채하며 사는 세상, 무섭고 위험한 세상을 힘들게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시대의 삐꺽거리는 지성의 바퀴 축이 되어 수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그가 남긴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하나, 필자의 눈길을 오랫동안 머물게 한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그때 그 말을 못한 것이다.
‘미안하다 할 걸’, ‘고맙다고 할 걸’, 아니 ‘그가 살아있을 때, 그 말을 해 줄걸.’.....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이별이나 죽음이나 슬픔이 아니라 그때 그 말을 못한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어령에게서 걸려온 마지막 전화를 소개했다.
‘눈감기 전에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네.
’ 오랜 전 숙명여대 신입생 강연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에 만났던 어떤 여학생이다.
주차장에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여학생이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되요.’라고 했다.
워낙 생뚱맞은 말에 당황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학생, 그게 뭔 소린가.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내 맘대로 하나.
’ 하지만 그는 그때 이렇게 말해야 했다고 후회했다.
“어릴 때 엄마가 내게 했던 것처럼 ‘걱정하지 마, 나 절대로 안 죽어.’ 그랬다면
그 학생은 얼었던 두 손을 비비며 기뻐했을 거야.
그랬다면 주차장의 차들은 생명의 찬가, 승리의 팡파르를 울렸을 것이고
춥고 멋없는 콘크리트 차고는 사방에 꽃들이 피어나는 초원으로 변했겠지.”
책을 덮으며 나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삶과 죽음의 문제가 다정하게 손잡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자 무덤의 풍경들을 언제나 불편하게 바라봤던 내 생각의 밑자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어느덧 창밖에는 짙은 어둠이 내리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다시 서재의 책장으로 되돌아갔다.
<2022.1.25 <학전통신>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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