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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9 / 심어야 거두게 됩니다 (갈6:6-10)
식당을 운영하던 한 아버지가 4남매를 다 출가시켜 놓은 후 노년에 아들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를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내가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하다 보니 3억 정도의 빚을 졌는데 건강도 안 좋고 능력도 없으니, 너희가 얼마씩이라도 갚아다오.’라고 하면서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며 ‘이 종이에 각자 얼마씩 갚겠다고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간 아버지께 재산이 좀 있는 줄 알았던 자식들은 아버지가 내민 종이를 들고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각자 정한 액수를 써서 아버지에게 내밀었는데, 큰아들 천만 원, 둘째 아들 5백만 원, 딸이 백만 원을 적었고, 그나마 가장 형편이 어려울 것 같았던 막내가 5천만 원을 적어 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가 자식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는 말하기를 ‘내가 식당을 팔아 재산을 정리하여 너희들 몫의 유산을 정하여 공증을 마쳤으니 그리들 알아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각자의 유산은 지난번에 너희가 적어준 액수의 5배를 주는 것으로 하여 재산상속은 끝이다.’라고 했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런 걸 공평하다고도 하겠지만 더 정확히는 ‘심은 대로 거둔다.’입니다.
세상 이치로 그렇겠지만 성경에서는 이미 이런 원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은 알겠는데, 앞서 기록된 ‘스스로 속이지 말라’와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심은 대로 거두는 것’과 ‘스스로 속이는 것’. 그리고 ‘심은 대로 거두는 것’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는 것은 상호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말입니다.
먼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속지 말라’는 말인데 이를 의역하면 ‘스스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는 말의 헬라어 원뜻은 ‘하나님 앞에서 코를 치켜올리지 말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하나님은 바보 취급을 받지 아니하시나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어쩌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혀 엉뚱한 부탁이나 요구를 해오면 ‘내가 바보냐?’라고 할 때의 그런 뉘앙스를 말하는 겁니다.
원래의 이런 의미로 7절 초반부를 재해석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를 앞세워 자신이 심은 것이 없는데도 마치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이 있는 양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렇게 심은 것도 없는데도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그게 소위 하나님이 ’내가 바보냐?’는 생각이 드시게끔 취급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유로 7절 후반부에서는 우리에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심은 게 있으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인 동시에 ‘심은 게 없으면 거둘 것도 없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생에서는 내가 무엇을 심는가에 따라 거두게 되는 결과도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하는 동시에 하나님도 바보 되신 기분이 아닌 정녕 나를 축복하고 싶으신 마음이 드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사는 중에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심는 것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으면 거둔다는 건 알았다 쳐도 늘 말씀드리듯이 문제는 무엇을 심어야 하는가입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심어야 실망이나 낙심이 아닌 기쁨으로 단을 거둘 수 있게 되는가 말입니다.
이에 대해 본문 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인즉 우리가 이 땅에서 심어야 할 것이 ‘선’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또 다른 문제는, 심으려 해도 심어야 할 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심을 텐데 통상 ‘선하다’라고 하면 ‘착하며 곱고 어진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선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선하다’고 할 때는 그 의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에서 심어야 할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또 알아봐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그리고 어떤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인지를.
뭘까요? 우리가 심어야 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한마디로 답을 하자면, 우리가 심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입니다.
흔히 본문은 6절에 있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과 10절에 나오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는 말씀을 들어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이 남을 대접하는 것이라든가, 이웃을 구제하는 거나, 서로 교제하라는 것을 강조한다던가 심지어는 심어야 거둔다면서 헌금과 관련한 얘기로 이어가기도 합니다만, 이는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굳이 인간적인 관점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에도 소위 ‘순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접하는 거나 구제하는 거, 교제하는 거며 심지어 헌금하는 것도 다 하나님이 좋아하실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의 일 순위는 바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보면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가 광야에 심어졌기에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오병이어 즉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묻습니다.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내어놓은 것이 도시락뿐이라고 생각하면 해석을 잘못하는 겁니다. 해석을 잘 못하다 보니 일부 목사들 중에는 ‘그러니 여러분도 하나님께 많이 드리세요. 드려야 받습니다.’라며 봉사나 헌금 강조만 냅다 할 뿐이고, 일부 성도들도 ‘있는 것이나 가진 게 없으니 드릴 것도 없다.’는 식으로 믿음 없음을 변명하거나 아예 복 받기를 체념한 듯 살아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예수님께 내어놓을 게 있습니까? 교회와 교우들 그리고 이웃들을 위하여 심을 것이 있으신가요?
(한 번 따라 하세요.) “나는 있다.”
일단은 잘 따라 하셨는데, 그럼 한 번 꼽아 보세요. 예수님께 그리고 교회와 이웃을 위해 내가 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던가요?
언제 어디서든 믿음을 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앞서 여러분이 따라 하셨던 ‘나는 있다.’는 말을 완성형 문장으로 하자면 ‘나는 믿음이 있다.’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시지요?
그렇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내게 있는 믿음. 그걸 심으라는 겁니다.
그럼, 이쯤에서 아까 드렸던 질문 곧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어린아이는 예수님께 ‘신뢰’ 곧 ‘믿음’을 드린 것입니다.
당시 아이가 도시락을 내어놓을 때의 아이의 생각을 가정해 보면, ‘내가 먹어야 할 도시락이지만 예수님께 드려 예수님이 시장기를 면하셔도 좋고. 그게 아니라도 예수님이 그걸 가지고 뭘 하시든 내가 먹는 것보단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것은 도시락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신뢰를 드린 것이고 믿음을 심은 겁니다. 그랬기에 그 믿음의 결과가 기적으로 나타난 겁니다.
여러분도 당시의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자기 도시락 하나로 수많은 사람이 먹고 배불러 하는 모습을 보는 어린아이의 기분과 그런 기적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감동을.
이런 맥락에서 본문 9절에 기록된 ‘선을 행하되’라는 말은 ‘선을 심으라’는 말이고, 이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심으라.’는 말이며, 그게 곧 ‘믿음을 가지라.’는 의미란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9절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기에 9절 후반절에서는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도 해석이 중요한데,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도 단지 감정이나 심리 상태로만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의 논점이 ‘무엇을 심든지’라는 것을 기억하신다면 ‘낙심하지 말지니’는 살면서 ‘낙심을 심지 말라.’는 말씀이며, ‘포기하지 아니하면’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를 심지 말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본문에서 우리가 가장 새겨야 할 중요한 단어는 ‘무엇이든지’와 ‘거두리라.’입니다.
그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실제로 인생에서는 무엇을 심으며 사셨던가요?
혹시라도 걱정이며 염려며 두려움이나 불안 등을 심으며 살지는 않으셨는지요?
행여라도 욕심과 좌절, 분노와 비관을 심으며 살진 않으셨습니까?
제가 자주 인용하는 요한복음 14:1절 말씀을 다시 보자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근심하지 말라.’와 ‘믿으라.’는 말씀을 오늘 본문의 논리대로 다시 쓴다면 ‘근심을 심지 말라.’와 ‘믿음을 심으라.’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에서는 물론이고 세상에서의 원리도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왕에 심을 거 이제부터 여러분의 인생에서는 오직 믿음만을 심으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니 이제 하나만 더 아시면 됩니다. 사실 오늘은 아셔야 한다는 것이 너무 많다 보니 헷갈리실 수도 있겠지만, 믿음을 심는다는 것이 무엇을 심으라는 것인지, 이거 하나만 더 알면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수시로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그게 믿음을 심는 걸까요?
물론, 그렇게라도 매사에 믿음을 고백하며 살 수만 있어도 대단한 믿음 생활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선 생각을 해보자면, 농부가 콩을 심는다면 왜 심을까요?
100% 콩을 추수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콩이 아닌 팥을 심었다면 그건 팥을 얻으려 했기 때문일 겁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믿음을 심는 것’도 ‘믿음대로 얻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이를 신앙생활에 적용하자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걸 심되 하나님께 심으라는 겁니다.
이때 얻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심는 마음!’. 이게 믿음이고, 얻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심는 방법!’. 이게 기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믿음이 단지 ‘믿습니다.’에서만 멈추고 말면 안 됩니다. 믿는다면 ‘기도합니다.’까지로 이어져야 믿음이 심어지는 것이고, 심어졌기에 ‘믿음 대로 거두리라’의 응답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라면 만족하고 감사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나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을 심는 것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도 우리가 심은 믿음을 보시고 또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있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믿음 대로 될지어다.’와 ‘기도한 대로 받으리라.’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믿음을 심는 것’이 ‘믿음대로 얻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를 세상에서의 삶에 적용하자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걸 심되 사람에게와 세상에서 심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론 어떻습니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열심을 다해 심을지라도 사람이 과연 내가 원했던 대로 내가 원한 것들을 얻게 해 줄까요?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하나님 사랑은 신앙 행위이고 이웃 사랑은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신앙과 윤리 및 도덕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생활만 잘 하면 윤리나 도덕은 따질 필요가 없단 말인가요?
본문 9절을 다시 보세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에서 윤리 얘기는 어딨으며, 도덕 얘기는 어디 나오나요?
성경엔 오직 ‘선을 행하되’라는 말 한마디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라.’는 말뿐입니다.
푸시킨의 시 중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이를 오늘 본문에 적용해 보면 사람이나 세상이 여러분을 속일지라도 낙심하지 말며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생에서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사람이나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약속하시기를 반드시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과 윤리, 도덕은 구분되는 게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속에 윤리며 도덕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행실이고, 행동이고, 말이고, 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씨를 땅에 심어도 거두게 하는 것은 하늘이듯이, 믿음을 사람에게 심어도 결국 거두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람에게 한 일이나 세상에서 한 일들은 절대 헛수고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은 나를 속이고 세상은 나를 슬프게 할지라도 하나님이 때가 이르러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서든 거두게 하시겠다는 하나님 말씀을 믿으셔서 살면서 필요한 것이나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시다면 그 원하는 걸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기도로 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 육 간의 모든 이치가 ‘심어야 거둘 것’이기에 이후로는 매 순간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심으셔서 신앙적으로든 세상적으로든 모든 분야에서 원하는 무엇이든지를 거두기 위해 현재의 상황을 낙심하지 말며 피곤해 하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