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를 찾아서
나에게 같은 생활권에서 정서적 공감대가 있으면서도 얼굴을 자주 대하지 못하고 지내는 사이가 있다. 이분들이 다름 아닌 내가 유일하게 문학이라는 이름에서 엮어진 가락문학 동인들이다. 회원 가운데는 고령으로 나들이가 쉽지 않은 원로 문인이 몇 분 계신 가운데 나의 위치는 나이로나 문학적 역량으로나 막내급이다. 구성원들이 여성이 남성보다 많아 내게는 운신의 폭이 좁았다.
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와 성큼 여름이 된 듯한 오월 하순 월요일은 가락문학회에서 순천 일대로 기행을 떠났다. 코로나 역병이 닥치기 이전엔 회원들이 봄이나 가을이면 문학 기행을 다녀왔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이삼 년 멈추었다가 다시 기획되었다. 나는 코로나 이전의 문학 기행에 매번 동참하지 못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퇴직 이후엔 머뭇거릴 명분이 없어 기꺼이 길을 나섰다.
정한 시각에 창원실내체육관 만남의 광장에서 회원들을 반갑게 만나 출발했다. 동마산과 내서 중리 나들목에서 몇몇 분이 더 승차해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진주로 잠시 들어가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내려오는 특별 회원 두 분이 합류하면서 기행단은 완전체가 되어 섬진강을 건너 광양을 비켜 순천으로 향했다. 내가 여러 차례 다녀온 남도였지만 녹음이 무성해진 계절은 처음이었다.
우리 행선지는 선암사와 드라마세트장이었다. 먼저 선암사를 탐방하기 위해 조계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도립공원 조계산 서쪽에는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송광사를 품었고 동쪽에는 태고종 총본산인 선암사가 위치했다. 서울과 수도권에 흩어진 조선시대 왕릉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듯이 해인사를 비롯한 선암사와 같은 산중사찰도 세계문화유산이다.
회원들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서 고사목이 버티어 선 선암사 들머리 비포장 흙바닥 길을 걸었다. 선암사는 한때 대처승 본거지로 일제 강점기 시조 시인 조종현이 승려 생활을 보냈던 절이다. 내가 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조 시인의 작품을 배웠는데 그분의 아들이 조정래다, 조 작가가 유년기를 보낸 선암사와 순천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 배경이다.
선암사는 우수 절기 매화 화신을 맨 먼저 전하는 곳이라 서울의 탐매객이나 사진작가들이 때를 놓치지 않고 찾았다. 시인 정호승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했다. 그 유명한 ‘뒷간’ 해우소로 가 실컷 우라고 했다. 나에게 선암사는 늦가을 송광사에서 조계산을 넘으면서 굴목재 보리밥집에서 막걸리를 한 사발 비우고 낙엽길을 걸어 산문을 나섰던 젊은 날이 있었다.
숲길을 따라 걸어 승선교를 앞두고 계곡물이 줄어든 개울로 내려섰다. 무지개처럼 원호를 그린 돌다리를 사진으로 담으려는데 회원들이 다리 위로 향하고 있는지라 얼떨결에 일행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경내로 들면서 일주문 앞에서도 사진을 남기고 범종루를 지날 즈음 마침 정오라 젊은 비구가 종루로 올라 당목을 가볍게 밀쳐 점심 공양을 알리는 범종을 울리고 내려왔다.
법당 앞뜰에는 망자의 혼을 위무하는 49재 의식으로 유가족들의 꽃 공양 행렬이 있었다. 몇몇 회원과 법당을 돌아 사찰의 원로들이 머문다는 무우전으로 향했다. 돌담으로 둘러친 무우전 담장 밖 그 유명한 매실나무들은 철이 철인지라 열매가 영글어 과육이 여물어 갔다. 그곳 매실나무는 수목에서 드물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보호수였다. 종무소 앞을 지나다가 샘물을 받아 마셨다.
문화재급 해우소를 둘러 절간을 벗어나니 산문 밖 개울 건너 식당에는 조촐한 점심상이 차려져 있었다. 야채 비빔밥에 도토리 묵무침과 파전이 곁들여져 나왔으니 취향 따라 곡차와 맑은 술을 비우기도 했다. 코로나로 여럿이 마주해 식사를 자리를 가져본 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스크를 벗은 회원들의 얼굴을 모두 일상에서 지친 피로를 잊은 채 환하게 밝은 모습이었다. 22.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