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의 산주인, 법연 스님
바람을 지고 운수행각을 하며 구도의 길에 나선 선객이면 누구나 반드시 한번쯤은 찾아가는 곳이 바로 봉암사다. 옛 구산선문 사찰로서 그 오랜 전통과 선종의 가풍이 아주 잘 살아서 전해지고 있는 곳이라 선객득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가은읍에서 찻길을 따라 북상하면 희양 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에서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우회전을 하면 즉시 눈앞을 탁 막아서는 우람한 바위 하나를 만나게 되는데, 그 바위가 있는 산이 희양산이다. 주봉 효사봉이 한 마리 봉이 날개를 펴고 앉은 듯하다 해서 저 이름이 봉암사라 했다.
뒤 주봉의 빼어난 생김새는 삼각산 인수봉보다 더하고 그 웅장함은 국내의 산으로는 비견할 만한 산이 없다. 이렇게 빼어나고 웅장한 맛이 나는 산 아래 자리 잡은 절이라서 일까? 봉암사의 선객들은 자고로 산의 기상을 닮고 정기를 흠뻑 받아 기백이 넘치고 활달 자재하다.
이 절에는 또 청정가풍이 드높고 눈 푸른 구참납자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봉암사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스님이 법연 스님이다. 조실스님으로 서암 노스님이 계시고 여러 선장들이 있지만 그래도 나는 법연 스님이 이 산의 주인 같이만 느껴진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봉암사 주인이 법연 스님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스님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스님은 봉암사에 말뚝을 박고 오래 계셨고, 도량을 가꾸는 일이나 가람을 수호하는 일 등 가장 힘들고 구접스러운 일까지도 도맡아 하시는 분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남보다 나아 보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도 ‘명리를 구하는 마음은 지칠 줄을 모른다’라는 구절이 있다. 중생의 무명은 탐욕이 근본이라 했던가? 명예가 높아지고 지위가 높아져서 남보다 잘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 그것이다. 그 잘나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면 탐욕 또한 없어진 것이리라.
그 탐욕이 없어져 버린 사람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겠는가? 바로 이런 이가 도인일 것이다.
세상을 초월하였다고 하는 말이 바로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것이라는 뜻이다.
옛날 어떤 대조사는 대중을 지도하는 방장의 몸으로 있으면서도 대중이 잠든 사이 혼자 남 몰래 일어나 해우소 청소를 했다고 한다. 법연 스님의 밀행도 가히 옛날 스님의 행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옛날의 봉암사를 가 본 일이 있는 사람이 근자에 다시 봉암사를 찾아가 보면 사세가 급격하게 신장되고 가람이 웅장하게 변한 것을 보고 심히 놀랄 것이다. 옛날의 봉암사는 찾아오는 신도조차 드물어 매우 가난한 절이었다. 스님들이 직접 채마밭을 가꾸어야 했고 산에 가 나무도하고 밥도 손수 해먹어야 했다.
그 때 이런 일들을 대중들의 앞에 서서 가장 잘 해내신 분이 바로 법연 스님이었다.
봉암사는 현대 한국불교사에서도 차지하는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해방 직후 몇 년 간을 청담, 향곡, 성철 등의 스님이 주석하시면서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키셨고 다시 정화 이후 1960년대부터는 선객들이 주지도 하고 살림도 하는 순수한 선객의 도량을 만들자고 모인 곳이기도 하다.
그 때 뜻을 같이한 처음 모인 스님들 중에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시는 분이 또한 법연스님이다. 스님은 일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래서일까? 농삿일이나 토목일에는 탁월한 솜씨가 있다. 내가 언젠가, “스님은 타고난 솜씨가 있습니다” 라고 했더니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잘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여러 번 해 본 경험 덕이다“라고 하셨다.
사찰 입구의 교각이나 지금 조실 스님이 사용하시는 건물은 야성 스님과 함께 스님이 직접 지은 것이고, 크고 작은 건물과 축대들, 도량의 구석구석이 스님의 손질과 땀에 배지 않은 곳이 없다. 그저 남이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고 묵묵히 일을 하시는 분이다.
이번에 찾아뵈러 갔을 때에도 스님은 새로 짓는 건물의 용마루 위에서 일꾼들과 같이 일을 하고 계셨다. 성격 또한 소탈하시다. 나 역시 젊은 이십대 시절의 많은 날들을 곁에서 지냈는데 그 때 모시고 살아보니 마음 씀씀이가 언제나 한결 같았다. 특별히 인정이 넘치는 잔정은 없는데 담담한 듯한 그 가운데 세세한 곳까지 살펴주시곤 했다. 남이 소홀하기 쉬운 곳을 잘 보살피시는 것이다.
대중이 여럿 살다보면 청규를 깨고 미움을 사는 사람도 가끔은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스님은 한번도 미워하는 티를 내는 것을 못 봤다. 오히려 대중들의 미움으로부터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절의 살림이 점차 좋아져서 수용이 풍부해졌을 때도 스님의 개인 수용은 항상 검소했다. 지금은 해 넣었지만 한동안은 늘 앞니가 빠진 채로 다녔고, 옷 한 벌 반듯한 것이 없었다. 모양내는 것을 싫어하는 탓인지 평소 검소한 차림으로 다니시고 두루마기 하나가 없었다. 학문을 하는 분은 아니지만 학문하는 스님들을 늘 칭찬했고, 무심히 하는 말에 깊이가 있어 새겨들을 만한 말이 많았다. 그러니 대화 중에 하시는 말도 정곡을 찌는 말이 많다.
한번은 객실에서 여러 구참 스님들이 모여 좌담을 하고 있는 중에 일간지에 크게 난 어느 유명싸한 스님의 대담 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그 기사 중에 기자의 질문이. “스님은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었고, 그 스님의 답변은 “나이 많은 여자는 어머니 같이. 나이 젊은 여자는 누이 같이 생각합니다.” 이었다. 이 말을 두고 여러 스님들이 진실 여부를 따지며 입방아를 찧고 있는데 법연 스님은 그저 잠잠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누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이런 경우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니까, 즉시 ”어떻게 보기는 여자를 여자로 보지.” 라고 말하시는 것이다. 그저 무심히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 같지만 얼마나 간결하고 명쾌하고 솔직한 말인가. 그저 평범한 말 같지만 스님의 높은 경지가 엿보이는 격조 있는 말씀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봉암사를 좋아하고 또 오래 살았다. 그러나 근자에는 봉암사를 자주 찾아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옛날 전깃불도 없던 때부터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봉암사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할 만큼 엄청나게 변했다. 이 변화를 발전이라고 해야 할지 어떤지는 아직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 놀랍도록 변한 모습에서 받은 충격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뒤 주봉의 우뚝 솟은 웅장한 산세이며, 법연 스님의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이다. 그것만이 내 마음에 위안이 되며 또한 반가움이다.
내가 나를 점검해보아도 그렇고 또 요즘의 우리 승가의 돌아가는 모습을 살펴보아도 그렇다. 모두가 도를 닦고 불과를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점차 쇠퇴해져 가고 있다. 그런 세태에 관계없이 초지일관 변하지 않는 스님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얼마나 우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가. 절집 안의 살림살이가 돈이 제일이 아니고 먹고 입는 것이 제일이 아닌데, 그것이 풍족해지니까 모두가 그것에 매몰되는 사람들이 많다. 갈수록 사치가 늘고 세인들도 경계하는 오락 같은 것들을 스님들이 즐겨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자기 양식을 지키는 스님들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비웃음을 당한다. 그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난 체 하며 뽐내고 돈을 많이 가지고 설쳐대는 사림이라야 겨우 대접을 받고 인정을 받으며 자기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혼탁한 때에 그저 좋은 일들, 칭찬받고 명예가 될만한 것을 다 남에게 양보하고 욕먹고 비난받을 것은 자신이 선뜻 앞에 나서서 다 받아 버리는 스님이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는 일인가?
법연 스님의 거처는 봉암사에서도 백련암이다. 매일같이 이 암자에서 큰절을 오르내리면서 온갖 일을 총괄하시는 것이다. 아직도 도감소임을 보고 계신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스님은 후배들이 주지를 하지만 그 아래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도감을 하고 계신 것이다. 옛날에도 도감이고 지금도 도감이며 또한 먼 훗날도 여전히 도감일 것이다.
언젠가 스님이 출타하고 안 계실 때에 백련암에 함께 있던 스님이 일꾼들을 시켜 화목을 장만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꾼들이 일을 쉽게 하기 위해서 암자 주위의 소나무를 잘라버렸다. 그것이 큰절 선원의 스님들이 경행하던 중에 발견되어 큰방에서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큰방 스님들은 일을 시킨 스님이 책임이 있으니 참회를 하라고 했고, 그 스님이 자기는 잘못이 없으며 잘려진 나무는 배상을 하고 그 자리에 식목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큰방 대중이 모두 자기보다 후배들이고 보면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이다. 거기에다 일꾼들이 한 일을 자신의 잘못으로 책임지기도 싫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점점 커져서 급기야 대중의 감정은 악화되고 서로 팽팽히 맞서게 되어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자칫 그 스님은 산중에서 쫓겨나게 될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때 출타했던 법연 스님이 돌아오셨다. 급히 큰방 스님들께 대신 참회를 하고, 암주(초암의 주인)로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까지 했다고 한다. 지심으로 참회하는 스님을 보고 큰방 스님들은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큰방에서 살았다는 스님으로부터 전해들을 이야기다. 말이 그렇지 젊은 스님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잘못했다고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법연 스님은 그런 것을 당연한 일로 하시는 분이다.
법연 스님은 이미 연세가 오십이 넘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봉암사에서 무척이나 많은 일들을 해오셨다. 그래도 그런 공로를 한번도 자랑하는 법없이 언제나 큰방 스님들께 참회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사시는 것이다. 아주 하찮은 일로도 말이다
그러면서 봉암사를 지키고 있는 큰 주인이시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