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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청 태종 홍타이지가 후계자 지목 없이 사망했다. 홍타이지의 배다른 동생이면서 그와 원한이 있는 도르곤과 홍타이지의 큰아들로 전공 면에서 도르곤과 쌍벽을 이루는 호격이 백중세를 이루고 있는 상황. 홍타이지의 후궁이자 황후인 철철의 조카이기도 한 대옥아는 친정의 이익을 지키고 도르곤과 호격간의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 철철에게 자신의 아들인 복림을 황위에 올릴 것을 제안한다. 철철에게는 비밀이지만, 혼인 전 연인이었던 도르곤의 사랑을 이용해 승부수를 띄워보려 하는데…
유연有緣 [4화]
-왜. 어째서?
-내 마음이 안 그래요, 그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직 안 끝났으면 지금 끝내줘요. 나는……나는 20년 전으로는 못 돌아갑니다. 소옥아 때문에라도 그렇고요.
도르곤이 안타까움에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우물거렸다. 무언가 말 해보려는 듯 벙긋거리는 도르곤의 입술이 헤매고 있었다. 도르곤은 대옥아를 여전히 놓아주지 않고, 대신에 그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잠깐 복도에 서 있었던 걸로는 사라지지 않았는지 여전히 묻어있었다. 대옥아는 도르곤을 더 밀어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날이 밝으면 권력다툼의 먼지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도르곤과 호격의 충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새벽이 다 밝기 전에 호격의 귀에도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아버지를 애도하기에 앞서 장자는 아버지의 힘과 권력부터 품에 갈무리하려 들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바보처럼 바라만 볼 도르곤도 아니었다. 원래 황위는 그의 것이었다. 황제의 장자라는 명분을 쥐고 양황, 양백기를 수중에 넣을 것이며 이미 정람기의 지지를 얻은 호격의 세가 우세해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양백, 정백 양기를 통솔하고 있으며 다택과 아지거 두 형제가 군왕의 자리에 있어 홍타이지에게서 황위를 되찾으려는 도르곤이 반드시 열패하다고만 볼 수도 없었다. 이제 격돌만 남은 셈이었다. 의정회의에서 말을 다툴 것이고 거기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르곤을 밀어낼 수도 없지만 안아줄 수도 안길 수도 없는 참담함에 대옥아는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굳어가고 있었다.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당신에게 마음 주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와 네 아이를 낳고 살았습니다. 아시겠어요?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는 겁니다.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형사취수가 굳이 이뤄질 수 없다는 이유가 뭐요?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이 예전 같을 수 없으니까요. 내가 당신과 부부로 살 수 없기 때문이에요.
-사랑하지만 부부로는 살 수 없다?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어요.
-내가 팔을 풀면 당장 주저 앉아버릴 거면서 그만 발뺌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내 손에 죽으러 왔소? 한 번 목숨을 들어 바쳤으면 끝까지 섬겨야지.
자기 자신조차 모를 온갖 괴로움과 자격지심이 발끝부터 온 몸을 칭칭 얽어 감고 대옥아의 숨통을 조였다. 현기증과 호흡곤란을 느끼며 대옥아는 당장 죽거나 아니면 정신을 잃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옥아는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지만, 이 순간 시공이 정지해버리거나 이대로 박제처럼 굳은 채 영혼이 꺼져 소멸될 수 있다면 또한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대옥아는 세 딸과 한 아들의 일을 생각했다. 아니 가까스로 생각해냈다.
-보내줘요. 복림의 잠자리를 보아주지 못하고 나왔어요. 당신의 조카, 나와 황제폐하의 아들 말입니다.
-나는 자식이 없으니 복림을 내 자식처럼 키울 수 있소. 약속하오.
-당신의 아이도, 당신이 상관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만 가겠어요. 놓아줘요.
복림의 말이 나오자 그는 비로소 문득 깨달았다. 대옥아가 약속을 빌미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려 들었던 이유. 경우는 두 가지였다. 도르곤에게 복림을 의탁하려는 것, 혹은 복림을 황위에 앉히기 위해 도르곤을 단념시키려는 것. 도르곤은 직감 상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가장 먼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옥아를 되찾을 것임을 대옥아 자신도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복림의 후견인도 당연히 도르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옥아가 황제가 죽자마자 한밤중에 은밀히 달려와 그에게 승부수를 던지려는 것,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대옥아는 황제가 되려는 도르곤을 막아보려 한다. 생각하기 힘든 경우였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지지하고 몽고 패륵들이 지지한다면 될 수도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도르곤은 팔을 풀었다. 그러나 대옥아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는 않았다. 도르곤은 그녀를 부축해 직접 왕부 밖에 서있던 마차까지 바래다주었고, 아무도 없는 밤거리로 마차가 딸가닥딸가닥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황제가 되는 것을 막으려 든다고 해서 대옥아를 미워할 수는 없다. 권모술수를 좀 부리려는 것으로는 미워지지 않을 만큼 깊은 감정이 대옥아를 향해 이미 너무 많이 흘렀다. 그리고 도르곤은, 오른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담배가 생각나는군.
곁에 시립해 서 있던 종자가 허리를 숙여 보이고 곧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르곤은 아무도 없는 성경의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홍타이지가 성경성을 공략할 때도 앞장섰던 것은 자신이었다. 시종이 곧 다시 뛰어나와 백동연죽을 가져다 바쳤다. 종자가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긴 담뱃대를 따라 연기가 부드럽게 올라왔다. 담배 연기를 입으로 뱉으며 도르곤은 왕부 안쪽을 향해 돌아섰다. 장죽 끝과 도르곤의 입술에서 담배연기가 흩어졌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연죽의 반짝반짝하는 백동 장식이 어둠속에서 희붐하게 빛났다. 감상에 사로잡혀 얇은 비단 침의만 입은 상태의 도르곤은 깊이깊이 장죽을 빨아들였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여 송구하오나, 왕야, 별채 안에 예군왕豫君王께서 들어계시옵니다.
-……들어가자.
(*주: 누르하치의 아들 중에는 왕작이 우리말로 ‘예친왕’으로 발음상 동일한 사람이 세 사람 있습니다. 남자주인공 ‘睿親王’ 도르곤, 도르곤의 동생 ‘豫親王’ 도도 외에도 도르곤과 도도의 배다른 장형, 누르하치의 맏아들 ‘禮親王’ 다이샨입니다. 그러나 이당시 도도의 작호는 친왕이 아니라 군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극중 도르곤의 호칭은 역사상의 흐름에 따라 조만간 바뀔 예정이며 다이샨의 호칭은 도르곤과 구분하여 ‘례친왕’이라고 쓰겠습니다.)
도르곤은 소리 없이 웃었다. 즐거웠다. 물론 세월, 지나간 20년에 대하여 괴롭거나 씁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여전히 대옥아는 도르곤에 대해서 무정해지지 못한다. 차마 그에게 황제가 되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갔지 않은가. 순진하게 떨고 있던 입술, 그리고 차마 그대로 감겨버리던 눈꺼풀을 생각하며 도르곤은 장죽을 있는 힘껏 빨아들였다. 숨을 다시 내뱉자 담배연기가 도르곤의 입술에서 사납게 흩어졌다. 비록 그에게 사랑한다 말해주지 않았지만, 도르곤은 그런 것을 말로 아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미안합니다, 중형仲兄. 형수하고 얼레리꼴레리 하는 걸 본의 아니게 다 들었어요.
응접실 탁자에 앉아있던 도도가 장난스럽게 도르곤을 놀려댔다. 이제껏 즐거워하던 도르곤의 미간이 동생의 놀림 한 번에 팍 찌푸려졌다. 도도는 그것이 민망함을 가리려는 형의 얼버무림임을 다 알고 있었다.
-형의 속을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첫정이라, 좋지요. 사랑을 못 믿는 이 아우 대신 첫정에 목숨 걸어 사시렵니까? 아이구, 잘나고 걸출하고 군공 높고 이제 황제 자리가 눈앞인데도 더할 나위 없이 딱하신 우리 형님. 예?
도도가 악의 없이 도르곤을 한껏 비꼬아 놀리며 허허 웃어댔다. 이미 한 잔 걸친 듯 탁자 위에 술병과 술잔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을 본 도르곤은 미간을 살짝 더 찌푸렸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도도가 다시 술이 넘치도록 잔을 채워 넘실거리는 잔을 도르곤에게 내밀었다. 도르곤은 다른 때보다 비교적 얌전하게 술주정을 하는 도도에게 굳이 화내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그 술을 받아 마셨다. 잔을 비우고 딱 소리가 나게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도르곤은 다시 백동연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오, 그게 조선에서 짠하고 나타난 큰손 세자빈이 선물한 백동연죽이오, 형님?
-그 소문은 또 어디서 들은 거냐. 사인을 시켜 조용히 주기에 아무 말 없이 그저 받았거늘.
-중형이 이 막냇동생에게 숨기는 게 있으셔서는 안 되지요. 내가 우리 중형을 이해해드리지 못한 게 뭐가 있다구.
도도가 다시 껄껄껄 웃었다. 여전히 웃음에 악의나 가시 돋침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도르곤은 도도가 좀 서운해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의 동복형제 셋이 모두 자존심이 지독히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 탓으로 도르곤은 지금 중외의 모두가 그를 지지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지거의 속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홍타이지의 술수에 의해 도르곤과는 알력이 생긴 탓이었다.
도르곤은 도도가 뭔가 작심하고 말을 하려고 술을 잔뜩 마신 모양이니 그가 직접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도도는 세상에 잘난 사람이라고는 제 중형밖에 없는 줄 아는, 도르곤에게만큼은 착한 동생이었다. 그것은 무조건 승리만을 지향해 사후 처리가 허술한 그의 전투 방식이나 무도하게 양민 아녀자를 겁간하고는 하는 못된 버릇과는 별개였다. 어쩌면 정치적으로 순진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고 다닐 수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형님. 정홍기가 성경성 밖 30리 까지 와 있습니다. 숲속에 매복하듯 숨어가지고는 숙영지에서 한 발짝도 안 떼는 눈칩니다만, 정홍기 뻘건 갑옷이 눈에 안 뜨일 리가 있나. 안 그러우, 형님?
도도가 말을 하면서 또 한 차례 웃었다. 도르곤도 그 말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례친왕 다이샨, 그 늙은 너구리가 이렇게 시간에 대어 재빠르게 행동해주다니 의외일 정도였다. 이로써 무혈로 황제 자리를 얻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졌다. 유혈 충돌의 참극을 내고서라도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청의 앞날과 전체적인 대국을 고려하여 황제 자리를 과감히 보기할 것인가. 그러나 자신이 포기한다고 해서 호격조차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르곤은 청의 빛나는 미래를 이끌어 올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믿었다.
-도도.
-예, 형님.
-내일 일찌감치 다이샨을 찾아가서 어머니 일로 화를 내고 와라. 긴장국면이 조성될 수 있도록. 사나울수록 좋다.
-예, 예. 망나니 예군왕 도도 깽판치기 좋아하는 성격 어디 가겠수?
아바하이가 자결하게 된 내막에는 다이샨이 홍타이지가 아바하이를 압박하는 것을 묵인 내지는 동조한 탓도 있었다. 도르곤은 그런 옛날의 앙금을 일부러 꺼내어 다이샨과의 사이에 더욱 긴장국면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도도가 시원스럽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르곤은 일어나는 도도에게 황후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주문했다. 무엇을 어찌 전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도도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도르곤은 도도에게 호격의 양 날개를 꺾어버리는 역할을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정궁 황후인 대복진 철철이 그만큼의 일도 처리하지 못할 만큼 허술한 사람이었다면 모르거니와, 철철은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홍타이지의 아내, 채상의 누이, 곧 대청의 황후이며 몽골 커얼친 패륵의 손윗누이였다.
도도가 나간 후에야 비로소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도르곤은 어깨와 등허리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탁 풀렸다. 장죽을 다 태우고도 다시 담배가 당겨 도르곤은 시종을 불렀다. 시종이 작두에 썬 담배를 담아둔 종이갑을 들고 들어왔다. 시종은 장죽에 남은 재를 딱딱 털어 버리고 다시 담뱃잎을 채워 넣었다. 부싯돌이 시종의 손에서 딱딱 몇 번 소리 내며 부딪치더니 담뱃대에 불이 붙었다. 시종은 담뱃불을 붙여주고 다시 나갔다. 도르곤은 새로 불붙인 장죽을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나리, 소인 하락회입니다.
-들라.
탁자에 엉덩이를 걸치듯 앉은 도르곤이 길게 연기를 뱉었다. 하락회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방안의 장등이 파팍 타오르더니 휙 꺼졌다. 하락회가 기름을 가지러 방을 나가려 하자 도르곤은 그럴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막았다. 작은 황촉 몇 개만 방안에서 타고 있었다. 훨씬 어두워진 조명 때문에 도르곤의 얼굴에 짙게 음영이 깔렸다. 높은 이마와 짙은 눈썹, 깊고 검은 눈의 윤곽이 촛불에 일렁였다. 그 얼굴이 깊이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고민이 있으십니까.
-아니, 괜찮다.
말 하는 도르곤의 목소리가 낮았다. 하락회는 나가지 않았고 도르곤은 탁자에 걸터앉은 채 침묵하며 담배를 피웠다. 촛불의 희미한 빛에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는 것이 간신히 보였다. 침묵하는 동안 도르곤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떨리기만 하던 대옥아의 어깨를 생각했다. 떨고만 있는 작은 사람이여, 해야 할 말을 다 하지 않는 사람이여. 곁을 지키고 앉은 하락회는 침묵을 깨어 어두운 응접실을 채웠다.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도도와 똑같이 묻는구나.
-외람되오나, 장비께오선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거짓말. 그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는 애초의 말부터 거짓이었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도 거짓이었다. 마음 주기 싫다는 말도 거짓말. 살기 위해 왔고, 그러나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갔고, 그건 다시 말하면 이미 마음에 한 사람 뿐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그렇지가 못하다는 그 말만큼은, 그 한 마디만은 진실이라면.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세월이, 풍상이 많이 내렸으니까.
만약 무리해서 황제 자리를 얻는다고 하면, 대옥아를 한 번 더 무리하여 얻을 수 있을까. 어려울지도 모른다. 도르곤은 신중하게 계산해보았다. 중신들은 모두 홍타이지의 사람들이었다. 내무대신 색니는 홍타이지의 최측근이었고 육부의 수장들도 홍타이지와 가까운 왕공친왕들이었다. 팔기 도통들은 저마다 왕작들을 받은 자가 많으니 각기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다. 만주의 풍습에 처첩을 물려받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선황의 후궁을 차지하려 든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여염 사가의 풍습과 왕가의 풍습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더 큰 문제는 황위를 차지하는데 유혈 분쟁이 발생하면 그에 따른 숙청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숙청을 하면 자연히 조정에 무인 세력은 줄어들고 수수방관하던 한관들의 비율이 높아질 것이다. 산해관으로 남하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족의 풍습으로는 선황의 후궁을 맞아들이는 게 불가능했다. 조정의 태반이 반대하고 나머지도 뜨악하다면. 일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아버지 누르하치의 사랑받는 아들이었던 도르곤이었다. 도르곤은 전쟁이 좋아서가 아니라 누르하치에게 쟁쟁한 형들처럼 인정받고 싶어서 군공을 세우기 시작했다. 언젠가 힘을 키워 대옥아를 되찾기 위해 본격적으로 전쟁 통에 뛰어들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대옥아 없는 황위를 꿈꿔본 일이 없었다. 잃었던 사람을 되찾겠다는 집념 하나로 군영에서의 풍찬노숙과 사람이 죽어나가는 역겨운 광경을 견뎠다. 그에게 황제와 대옥아는 동의어였다. 그러나 정작 이제 알맹이 없이 허울뿐인 황위를 가질 수도 있다니.
도르곤은 말없이 담배연기만 뿜었다. 흐리게 흩어지는 흰 연기가 어둠 사이로 퍼졌다.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대옥아를 얻기 위해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이고 강력한 힘이었다. 누구도 그를 제어하지 못할 강력하고 온전한 힘이 그에게 필요했다. 도르곤은 복림의 나이가 겨우 여섯 살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속아줘야겠지.
-…….
-……어쨌거나 사랑하니까.
오래 침묵하고 고민하던 도르곤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탁하게 잠겨 갈라지는 목소리로 결론짓듯 말했다.
-홍타이지가 그 사람을 망쳐 놨다.
-…….
어둠속에서 하락회는 소리 없이 곁을 지키며 도르곤의 말을 들었다.
-세월이라는 게 그냥 뛰어 넘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시간이 곧 상처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지, 특히 대옥아에게는. 그리고 우리의 틈도 벌려놓았지.
도르곤의 담뱃불이 꺼지고, 마지막으로 깊게 담배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도르곤은 탁자 위에 장죽을 던지듯 내려놓고 내당으로 들어갔다. 등허리가 시리게 만드는, 눈물 흘리는 그 얼굴을 밤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르곤은 여종에게 방을 따뜻하게 데우라고 명하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런다고 도르곤에게 그 눈물이 잊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종은 도르곤의 침실에 향초를 태우고 총총 사라졌다. 왼쪽 얼굴을 베개에 묻고 도르곤은 오래도록 눈물을 참으려는, 그러나 눈물이 그렁한 대옥아의 눈과, 바들바들 떨리던 어깨와, 바로 보지 못하고 자꾸만 흔들리고 아래로 떨어지던 시선에 대해 생각했다.
다 빠지지 않은 멍울처럼 어딘가 앓는 듯 보이는 창백한 얼굴, 어딘가 그 마음에는 앓는 구석이 있었다. 자꾸만 흘리던 눈물, 안아주었을 때 떨림을 멈추지 못하는 가슴과 너무 오래 지탱했다는 듯 쓰러지던 몸에서 불행의 냄새가 났던 것도 같았다. 도르곤은 하긴 행복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뼈마디가 시려오고 마음을 괴롭히는 그 심약한 얼굴에 대해 묻어버리지 못했다.
도르곤은 만약에 대옥아가, 마음이 예전 같지 못해서 안 되는 거라면, 어딘가 자신에게까지 느껴지는 그 상처 때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유연有緣 [4화] 完
* * *
+역사 속으로 02
유목민족의 혼인풍습
동아시아 역사, 특히 중국사에는 다양한 갈래의 유목민족들이 등장했습니다. 우선 한나라 때는 흉노와 오손이 있었습니다. 한나라 이후 초래된 위진 남북조의 혼란기에는 다섯 갈래의 북방민족들이 제각기 북조의 패권을 차지했는데, 한나라 초기부터 강성했던 흉노를 포함하여 선비, 갈, 저, 강 다섯 이민족이 중국 정치의 중심이라 할 수 있었던 황하 일대를 차지하고 차례로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이후 선비족 탁발씨의 태무제 탁발규가 북위를 세워 강력한 왕권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문화적 기반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뤘던 당나라 때는 우리 나라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는 돌궐, 말갈 등이 자주 언급이 됩니다.
이후 송나라때는 여진과 거란이 각각 금과 요를 세워 북송을 밀어내고 남송을 압박했습니다. 사막에서 일어난 인구 백만의 몽골은 역시 이민족이었던 탕구트의 서하와 무너져가던 남송을 멸망시키고 거대한 원 제국을 수립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 유목 이민족은 이 소설 주인공들의 민족인 여진족입니다.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의 후예들이 후금을 세우고, 그 후금이 중국 전역을 통치한 통일왕조 청으로 발전한 거지요. 흔히 만주족이라고도 많이 일컬어집니다.
이 북방계 유목민족의 비슷비슷한 결혼 풍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형사취수제'입니다. 영어로는 levirate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는 거지요. 우리의 시각으로 보자면 충격적이지만 '수계혼'이라 하여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들을 물려받던 풍습도 있습니다. 중국 4대 미인으로 유명한 왕소군은 흉노 선우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죽은 후 선우 자리를 물려받은 친아들에게 수계혼을 강요당하자 자결했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물론 수계혼은 생모를 제외하므로 이 일이 사실로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풍습이 있었다는 것만은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흉노와 오손에는 수계혼 풍습이 있었고 선비족과 우리의 조상인 부여·고구려에는 형사취수혼 풍습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지방의 일부 사회는 근현대까지도 이 취수혼 풍습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유태인들의 성경에는 형사취수제를 금하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도 죽은 형의 아내와 혼인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중부와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형사취수가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고 하네요. 남아공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여 형사취수가 많이 줄고 있지만 니제리의 경우엔 자식이 아버지의 상속권을 인정받고 혈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일부지역에서는 형의 죽음으로 형수와 결혼생활을 하게 된 경우 그 동생을 형 대신으로 여겼다고도 합니다.
형사취수혼이 이뤄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사회진화론 측면에서 보자면 적장자승계 내지는 부자승계의 전통이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 행해졌던 형제상속의 일부라고 여깁니다. 여성도 재산의 일종이자 상속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거지요. 반면에 문화지표로써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처럼 중국 동북방에 거주했던 북방민족의 공통적인 혼인 풍습으로 이해하는 거지요. 혹은 기능적인 측면에 치중하기도 합니다. 여자가 자기와 남편에게 상속받은 재산을 이끌고 친정으로 돌아가버리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동이 잦은 유목사회에서 여자와 아이들만 남았을 경우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에 혈족이 부양해준다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P.S
굳이 형사취수혼을 설명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만, 지금 공개하지는 않을 게요.ㅋㅋ
첫댓글 와우 재밌어 ㅋㅋ 기다린 보람이 있네 ㅋㅋ
빨강언니 쌩유베리감사!ㅠ
역시 언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 나 역사공부까지 되는거같은 느낌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나 저딴 건 시험에 안 나온다ㅠㅠㅠㅋㅋㅋㅋ
아! 원래는 수정을 해야겠지만... 귀찮아서 리플로 알립니다-ㅁ- 업쪽을 원하시는 분은 '위알'이라고 남겨주세요ㅋㅋㅋㅋ
잘 읽었습니다ㅋㅋㅋㅋ 도르곤 좀 불쌍하네여ㅋㅋㅋㅋㅋ
우흐흐 송선배도 안녕ㅋㅋㅋㅋㅋㅋ 우리 도르곤 원래 촘 불쌍한 남촤예열~ㅋㅋㅋㅋㅋ
도르곤씨...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