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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가 튼튼한 집을 짓는 사람
눅 6:46-49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눅 6:46-49 / [말씀을 듣고 행하라;마7:24-27] `너희는 내 말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왜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느냐? 47-48)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튼튼히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물결이 그 집에 밀어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다. 튼튼히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순종치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물결이 그 집에 밀어닥치면 무너져서 폐허가 되어 버릴 것이다.'
제자는 주되심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부르면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고,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사람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사는 마음(46-47) “주여 주여” 주님을 부르면서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겉과 속이 다른 외식의 문제를 가진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문제는 뿌리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눅 6:42-44). 우리의 모든 행동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45). 뿌리가 되는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외쳐도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게 됩니다(46).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과 욕망이 바뀌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강조합니다(엡 3:16-17; 갈 5: 16-24). 인간은 이성적, 감성적 존재이기 전에 욕망적 존재입니다. 믿음이란 지정의가 바뀌는 수준이 아니라 욕망이 바뀌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의 뿌리에서 잘라지는 회개와 예수님의 마음에 접붙혀지는 믿음으로만 주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와 믿음의 복음입니다.
제자는 기초가 튼튼한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48-49) 제자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를 집 짓는 것에 비유해 주십니다(48). 행하는 믿음이란 기초가 튼튼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야 고난이 와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믿음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고 믿음이 깊어지고 튼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하는 믿음일 때 주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경험하면서 우리 믿음은 반석같이 단단해집니다. 또한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고난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은 기초가 튼튼한 집을 짓는 삶입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해도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집, 즉 행함 없는 믿음의 집은 큰 물과 탁류라는 고난이 올 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49). 행함 있는 믿음에도 고난은 옵니다. 그러나 기초가 튼튼한 행함 있는 믿음의 집은 안전합니다.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기본기는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적용: 말로만의 믿음이 아닌 행함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당신이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은 예수님의 생명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죽음이고 겸손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겸손 안에 있는 변화의 힘이 얼마나 감미롭고 거룩한지, 겸손이 어떻게 우리 본성 속 독소를 몰아내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할 자리를 만드는지 보게 된다면 모든 세상 사람들의 발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겸손이 없다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합니다. 겸손은 다른 덕목들과 함께 나란히 둘 수 있는 은혜나 미덕이 아니라 모든 것의 뿌리가 되는 유일한 토양입니다.(앤드류 머류)
< 설 교 >
반석과 흙
눅 6장 45~49절, 고전 3:12-13 / 최응희목사
오늘 말씀은 제자를 선택하신 후 거의 6장 전체를 통해 하신 긴 교훈 뒤에 결론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 겉옷을 빼았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구하는 자에게 주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다른 이를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아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보다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 등등 긴 교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산상수훈에 들어있는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6:46
주님은 어쩌면 이렇게 정곡을 찔러 말씀하시는지.... 우리 마음을 두들기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향해서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도 행치 않는 자에 대해서 집을 짓는 자에 비유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세운 사람과 같고,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맨 땅에다 집 지은 사람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은 기초가 든든한 좋은 집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이나 실제 건물이나 겉모양으로는 그 기초를 알 수 없습니다. 맨 땅에 세운 집이나 반석 위에 세운 집이나 그저 겉모양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바람, 눈보라, 모진 폭풍 불어 올 때 그 차이는 현저하게 드러났습니다. 흙 위에 세운 집은 결국은 무너져 버리고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어떤 험악한 상황에서도 끄떡없이 굳굳하게 서서 그 역할을 다 하였습니다. 이 차이는 결국은 기초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기초를 둔 튼튼한 집과 흙 위에 기초를 세운 허약한 집의 차이를 말씀 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위에 놓은 좋은 집과 같다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강조점은 '행'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말씀을 많이 듣고 있습니까? 아마 한국교회의 신자들처럼 말씀을 많이 듣는 교인들은 세계에 없을 것입니다. 예배가 일주일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듣기만 하면서 행하지 않는 말씀은 흙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견고하지 못하고 너머진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가정에서도 말씀중심으로 생각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말씀의 권위가 살아나고, 믿음의 권위가 살아나고, 부모의 권위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돈보다 못한 예수, 명예보다 못한 예수, 오락보다 못한 예수를 마음에 품고 있다면 우리는 정품 믿음이 아니라 싸구려 덤핑의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요, 이는 결국 흙 위에 세운 믿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어떤 믿음의 권위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기초가 없이 세운 집과 같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롯의 가정을 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성을 유황불로 심판하려고 작정하였을 때, 롯의 사위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창19:14) 이것은 롯의 사위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소에 롯이 말씀의 권위를 잃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가정에서 말씀의 권위가 사라지게 될 때, 그 가정의 기초는 땅 위에 세운 집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중심을 세우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도 마치 말씀을 듣기 좋은 말, 농담처럼 여기는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실로 인생의 기초를 믿음 위에 세우십시오. 듣기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하는 믿음이 되십시오, 순종하는 믿음이 되십시오. 그것이 반석 위에 믿음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요,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은 좋은 재료로 지은 집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초가 튼튼하다고 좋은 집이 곧바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재료로 제대로 지어야 좋은 집이 됩니다. 모든 부실공사의 대부분은 재료를 제대로 쓰지 않거나 충분하게 쓰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우리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는 끔찍한 사건입니다.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납니까? 부실한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삶을 이루어 나가는 재료가 좋아야 합니다. 썩어 없어져 버릴 재료들, 속이 텅 빈 재료들로 인생의 집을 지을 때 그 삶은 부실인생이 되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린도전서 3:12-13
이 말씀에서 금이나 은이나 보석, 나무나 풀이나 짚이 의미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냐 썩어지는 것이냐, 변하지 않는 것이냐 변하는 것이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변하는 물건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인생의 집을 지으면 결국은 세상의 썩을 것들과 함께 사라지는 인생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믿음의 터 위에 이러한 변하지 않는 좋은 믿음의 재료들을 사용하여 인생의 집을 건축하여야 합니다. 마치 부실 건축공사 하듯이 신앙의 집을 그렇게 얼키설키 지어놓으면 역시 천둥 번개 치고 모진 폭풍 불때 불타거나 날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들이고, 그것들은 힘들게 얻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 인생도 조금 힘든 듯 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 참 가치가 있는 것들로 채워 나가야 아름다운 인생의 건축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모습도 그러합니다. 조금 힘든 듯 해도, 애쓰고 힘쓰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서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충성과 열심으로 최선을 다 하여 믿음의 집을 지을 때 마치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처럼 흔들리거나 불타거나 썩지 않을 것입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방향을 잘 잡아 지은 집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무엇을 듣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방향의 기준이십니다.
요즈음 Speed 시대입니다. 무엇이든지 빨라야 합니다. 그러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현대를 3S시대라고 합니다. Speed, Sex, Sports라고 분류하기도 하고, Speed, Sex, Screen이라고 분류하기도 합니다. 좋은 뜻으로 3S를 푯대로 삼기도 합니다. 사업이나 정치를 할 때 3S로 해야된다고 합니다. Sensitive(민감하고), Speedy(신속하고), Smart(지혜롭고 멋있는).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다 Speed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Speed시대인 것이 틀림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Speed만 있고 방향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배를 운행하는 선장이 항해사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최고의 속도로 달리라' 했습니다. 그 때 항해사가 묻습니다. '어디를 향해 달릴까요?' 선장이 대답합니다. '어디든 상관 없다. 무조건 빨리 달려라' 그랬다면 그 배의 미래는 뻔한 것입니다. 빨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집의 방향을 잡아주는 기준 점--그것이 머릿돌입니다. 머릿돌은 그 집의 방향을 결정하는 잣대와 같은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편118:22-23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사도행전 4:11
예수께서 모든 인생에 머릿돌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삶의 기준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내 삶의 푯대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삶의 최고의 가치를 예수님께 둔다는 말씀입니다.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치관이란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삶의 순번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삶의 순번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본인이 모르는 순간에도 다 삶의 순번이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관은 시간과 돈이 생길 때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 그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니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6:43-45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예수님 말씀위에 서 있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생각은 예수님 말씀을 삶의 우선순위 일번에 놓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지키느냐 아니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대부분 못 지킬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와서 무릎을 꿇어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자신의 죄된 삶을 고백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욕심을 내려놓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고백한다는 말은 용서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이 고백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 결심을 담는 믿음입니다. 새 결심이 담겨있지 않는 고백은 텅 빈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는 고백을 말만하면 그냥 자동으로 없애주는 폐기물처리기계로 여기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고백이 진실한 것이 되려면 결심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주님 지금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 위에 저를 세워나가겠습니다. 주님, 저의 영혼이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나 새 힘을 얻어 다시 한번 빛된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 은혜로 제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회복하겠습니다. 그런 결심과 함께 있을 때 그 고백은 진실된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말씀 위에 자신의 가치관을 세운 사람입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말씀에 놓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완전치 못해도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런 사람을 주님은 기쁘게 세워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못합니다. 제대로 행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 듣고 행하는 사람은 깊이 파고 반석위에 그 주추를 놓은 사람과 같고, 듣고 행치 않는 사람은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다 하신 주님 말씀 마음깊이 새기고 비록 작은 발걸음이라도 주님 말씀 행하며 성화를 이루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이 됩시다
누가복음 6:46-49 / 황의봉목사(평안교회)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설교 혹은 산상보훈이라고 하듯이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한 누가복음 6:17-49은 평지설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다음 절인 7:1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결국 마태복음 7:24-29이 산상설교의 결론인 것처럼 오늘 봉독해 드린 이 누가복음 6:46-49은 평지설교의 결론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한 평생 집 한 채 지어놓고 떠나는 인생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집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먼저, 예수 믿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령한 집입니다. 성도들이 주 안에서 모인 교회가 신령한 집입니다. 그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신령한 집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2)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공사중’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종종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있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공사중, 불편을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랑스러운 교회로 세워질 수 있을까요?
1. 오늘 이 말씀은 “주여 주여” 하는 사람에게 주신 소중한 교훈입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누가복음 6:46이하의 말씀과 병행구절은 마태복음 7:21절부터 있습니다. 누가복음보다 마태복음이 더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복음 6:46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하였는데 마태복음에는 7:21-23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입술로만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입술로만 믿고 삶의 변화가 없으니 이런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무슨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말끝마다 주여, 주여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환상을 보고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는 모습은 전혀 하나님 백성답지 않고 하나님 자녀답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왜 이 사람에게 “내게서 따나라”하고 야단을 치셨습니까? “주여” 삼창을 해야 하는데 “주여, 주여” 두 번을 해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셨습니다.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2:5에는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이 보지 않을 때 적당히 반칙을 해도 되는 경기는 프로레슬링밖에 없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자기 레인을 따라가지 않고 옆 레인을 밟아도 실격입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약물테스트에 양성반응을 보이면 메달을 박탈당하고 맙니다. 운동경기가 이러한데 하물며 인생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사람들이 불법을 행합니까? 쉬운 길, 편한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 마귀의 시험과 유혹은 “십자가 고생의 길을 갈 필요가 있겠느냐? 편한 길, 쉬운 방법이 있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고생하지 않는 길이 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사람들에게 쉽게 인기 얻는 길이 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힘들이지 않고 쉽게 천하를 얻는 방법이 있다. 내게 절을 하면 천하만국을 다 주겠다.”하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들을 찾아와 속삭입니다. “꿩 잡는 게 매야. 교회가 부흥되고 보아야지, 아무리 진리를 가르친들 사람이 모이지 않는데 누가 알아주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쉽게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불법을 행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찾아가 전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교인을 빼앗아갈 궁리만 합니다. 그래서 교회 부흥시키면 뭐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면 뭐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뭐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1998년에 처음 교회당을 지을 때 앞으로 증축할 것을 예상하여 5층에 맞게 설계를 하여 기초를 든든히 하고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2012년에 5층으로 증축을 하기 위해 허가를 내 달라고 하였더니 건축심의위원회에서는 기초를 보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대형 지진이 일어나고 2011년에는 이웃나라 일본에서 지진으로 인해 한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확률 1%도 안 되는 지진을 대비하여 기초를 보강하라고 하였고 그렇게 하고도 3층만을 증축하는 조건으로 허가가 나왔습니다. 결국 본당 지하 바닥 20곳에 4cm짜리 구멍을 암반이 나오는 곳까지 8-9m 깊이로 뚫어 지반 보강공사를 하고 증축을 하였습니다. 이 비용만 8-9천만 원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요? 든든한 건물로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장을 아무리 깔끔하게 잘 하고 방송시스템을 잘 갖추었다 해도 기초가 견고하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기초를 바로 세운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늘 곁에 두고 읽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왕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19)고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도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여야 합니다. 오늘 가르침의 핵심은 여기 있습니다.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이나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이나 다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식은 행동으로 옮겨질 때 가치가 있습니다.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앞장선 사람들이 본을 보여야 됩니다. 부모가 주일성수에 본을 보이고 기도와 봉사생활에 본을 보이면 자녀들이 부모를 따라갑니다. 따라서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국가에서 앞장선 사람들이 목표가 분명하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묵묵히 그 뒤를 따라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은 환난이나 시련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이나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이나 똑같이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매” 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가정이라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나 사모도 병으로 입원할 수 있습니다. 장로님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녀들이 원하는 대학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활고로 오는 어려움, 혼돈과 타락의 큰물, 물질만능주의의 탁류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부딪쳐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하기를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 5:6-7)한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쓰러지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4-25)
3.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기는 하였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1:28-31에서 두 아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맏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 가겠나이다”하고 하더니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둘째는 “싫소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잘못을 뉘우치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당연히 둘째 아들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를 통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23-25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오늘 읽어드린 본문에서 예수님은 강조하셨습니다.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기후가 청명한 날은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이나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이나 생활하기에 그리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상시에는 신앙의 가정이나 불신앙의 가정이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두 집이 다 밥 잘 먹고 행복하게 오손 도손 살아가지요. 문제는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칠 때입니다.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은 비가 오면 올수록, 탁류가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그 진가(眞價)가 나타납니다.
문제는 주추를 제대로 쌓지 않고 그냥 흙 위에 집 지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 듣지도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설령 듣기는 들어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완성품으로 보시지 않으십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래서 계속 지어져가고 있는 하나의 집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생의 건축자입니다. 각자 주어진 환경과 처소에서 열심히 집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어진 작품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수고를 인정받아 상을 받게 되겠지만 어떤 사람은 작품이 다 불에 타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고전 4:10-15).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였습니다. 생명 없는 땅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니 식물을 내었습니다(창 1:11). 죽고 썩어 냄새나던 나사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니 살아났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있는 말씀을 듣고 배우고 순종하여 신앙의 값진 터 위에 주님의 계실 집을 지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반석 위에 놓인 성도
눅 6:46-49 / 이한규목사
< 복된 팔로워가 되는 길 >
좋은 공동체가 되려면 좋은 리더도 필요하지만 좋은 팔로워도 필요하다. 팔로워는 리더의 수준을 넘지 못할 때도 있지만 넘을 때도 있다. 팔로워가 리더의 수준과 축복을 뛰어넘으려면 기본적으로 리더에 대해 잘 대해야 한다. 복된 리더가 되려면 먼저 복된 팔로워가 되어야 한다. 복된 팔로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진실한 성도가 되라
복되게 살려면 남의 작은 허물을 지적하기보다 나의 큰 허물을 성찰하는 진실한 성도가 되라(41-42절). 가정과 교회가 변하고 상대가 변하기를 원하면 남을 쉽게 비판하지 말고 나의 허물부터 돌아보고 나부터 변화되려고 하라. 자랑과 과시는 대개 외식과 위선으로 발전하기에 금물이다. 영성 자랑과 능력 과시는 더욱 주의하라. 영성 자랑과 능력 과시가 사람들에게 안 통하면 우울증에 걸리고 사람들에게 통하면 교주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서 말한다. “집사님!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문제는 그 말을 사람의 귀에 한 번 들리게 하면 기도 응답이 한 단계 낮아지고 두 번 들리게 하면 기도 응답이 두 단계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고 또 그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이 위로를 받는 것 같으니까 말하고 싶지만 어떤 사람은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위로보다는 응답이기에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꾹 참는다. 하나님이 그 진실한 모습을 기억해 주실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낸다. 그러면 사람이 보기에도 왠지 진실하게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사람에게 좋게 들리는 그런 말을 많이 하니까 진실하게 보이지 않아 기도 응답의 때를 늦추시고 싶으실 것이다. 게다가 진짜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면 그나마 나은데 별로 기도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위선이 된다. 위선적인 말은 하나님이 외면하시기에 기도 응답은 멀어지고 만약 기도 응답이 된다면 그 기도 응답으로 오히려 나중에 더 나빠질 수 있다.
하나님은 진실하고 겸손한 기도에 응답하신다. 특별한 목적이 아니면 자랑으로 들려질 말은 힘써 삼가라. 능력과 영성은 더욱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말라. 입방정을 주의해야 진짜 능력과 영성이 생기고 계속 머물러 있다. 사냥 능력이 출중한 매는 발톱을 감춘다. 돈이 진짜로 많은 사람은 돈 자랑을 하지 않는다. 돈을 보고 사람이 꼬여드는 것을 알고 진짜 친구와 팔로워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늘 겸손하고 조용히 일을 추진하되 꼭 해야 할 일은 무서울 정도로 끈기 있게 추진하고 약속한 것은 힘써 지키는 진실한 성도가 되라.
2. 좋은 사람이 되라
좋은 열매를 원하면 좋은 나무부터 되려고 하라(43-44절).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받는다. 아무리 겉으로 위선을 부려도 소용없다. 내면에 있는 것이 외적으로 저절로 나타난다(45절). 마음을 잘 관리하면 좋은 언행이 나오지만 반대로 언행을 통해서도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 마음과 언행을 잘 가꾸라. 리더는 팔로워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팔로워 자체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잘해야 한다. 그것은 위해 깊은 지혜와 전략이 필요하다.
어떤 팔로워는 리더를 기쁘게 한다. 팔로워가 리더를 위해 충성하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거룩한 비전을 위해 헌신하면 리더는 속으로는 너무 기쁘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척 기쁨의 표현과 칭찬을 절제한다. 또한 감사 표현도 절제한다. 충성과 봉사와 헌신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마음이 높아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하게 사심 없이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할수록 마음이 높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겸손해지는 팔로워도 있다. 얼마나 복된 팔로워인가?
참된 믿음은 영혼을 구원하게도 만들지만 사람 자체도 좋게 만든다. 그래서 좋은 리더는 팔로워를 계속 좋게 만들려고 하고 좋은 팔로워는 리더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기 위해 계속 좋아지기를 힘쓴다. 어떤 팔로워는 봉사하고 헌신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높아진다. 그런 사람이 헌신하면 리더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염려도 생긴다. 혹시 마음이 높아지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다. 헌신하고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본능을 따라 마음이 조금 높아져서 사람이 조금 나빠진다면 그것은 불행이다.
어떤 성도는 잘 배우고 실천해서 사람 자체가 좋은 생명나무다. 그래서 헌신하고 봉사할수록 마음이 조금 더 낮아진다. 인간적인 본능을 잘 극복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마음이 조금 더 낮아졌다는 것은 사람 자체가 조금 더 좋아졌다는 뜻이다. 결국 팔로워가 헌신할 때 마음이 높아질까 하는 염려를 끼치는 교인도 있지만 마음이 높아질 염려가 전혀 없어서 평화를 끼치는 성도도 있다. 후자의 성도가 되라.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일을 하면서 점차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짜 능력은 남을 이기는 모습보다 나를 이기는 모습에 있다.
3. 행하는 믿음을 가지라
본문 46-49절은 평지수훈의 결론 부분이다. 예수님은 좋은 교훈의 말씀을 하셨지만 그런 말씀을 많이 듣는 것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주여 주여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들은 말씀이 헛되게 되지 않도록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46절). 말씀이 입과 귀에서만 맴돌고 손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이 허무하고 위선적인 것이 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런 위선적인 신앙에 젖어 있었다.
믿음은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 행동을 보면 믿음을 상당히 파악된다. 세상적인 윤리와 도덕도 존중하라. 물론 기독교적인 윤리와 도덕은 더욱 중요하다. 위선적인 이단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너무 잘못하는 행동이 많으니까 그렇게 주장하지만 세상적인 윤리와 도덕에도 미달하는 행동을 하면서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행동이다.
입술로 “주여! 주여!” 하면서 행동을 맘대로 하고 더 나아가 몰상식적으로 하는 맹목적인 기독교인이 되지 말라. 몰상식한 기독교인은 차라리 입술로 “주여! 주여!”라고 나타내지 않는 것이 낫다. “주여! 주여!”라는 말을 많이 해도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행동에 본을 보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존재가 되도록 행동하는 믿음을 가지라.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본문 47절을 보라.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성도는 3가지를 잘해야 한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그 3가지를 잘하는 사람은 집을 지을 때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아서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혀도 잘 지었기에 요동하지 않지만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주추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아서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심하게 파괴된다(48-49절).
< 반석 위에 놓인 성도 >
반석 위에 놓인 성도가 되려면 3가지를 실천하라. 첫째, 예수님께 나아오라.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 그렇다고 독불장군으로 살라는 말은 아니다. 힘써 협력하되 두려움 때문에 남을 의지하려고 하지는 말라. 두려운 일이 있거든 예수님께 먼저 나아오라. 어떤 사람은 귀신을 너무 두려워해서 수시로 귀신 얘기를 하고 조금 이상한 일만 생기면 귀신의 역사라고 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귀신에 의연히 대처한다. 그러면 귀신은 맥을 못 추고 도망간다. 귀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성도에게 귀신은 발톱의 때 같은 존재임을 알라.
둘째, 말씀을 들으라. 예수님은 종종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다 귀가 있다. 문제는 듣는 귀가 없는 것이다. 말씀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열린 귀로 말씀을 듣지 않으면 능력과 변화가 나타날 수 없다. 실제로 귀가 크고 쫑긋 솟아있으면 소리를 모으는 기능이 뛰어나니까 소리도 잘 듣고 언어 능력도 좋아진다. 반면에 귀가 작으면 소리의 수용력이 딸려서 이해력이 딸릴 수 있다. 그러나 이해력이 딸리면 영적인 큰 귀를 가지고 이해심을 키우면 된다.
요새는 나이가 들면서 하드웨어가 계속 쇠퇴하면서 이해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인정하고 인내심을 더 키우려는 편이다. 쉽지 않지만 그런 상황 관리와 마음 관리만 잘하면 노년이 되어도 과거에만 집착하는 사람이란 이미지를 극복하고 지혜롭게 노년을 보내며 행복을 조금이나마 더 유지할 수 있다. 이해력이 딸린다고 느끼면 하나님을 붙잡고 말씀 안에서 이해심을 키우려고 하라. 말을 잘 듣는 것도 축복이지만 말씀을 잘 듣는 것은 더욱 큰 축복이다.
셋째, 말씀대로 행하라. 말씀을 듣는 것에서 끝나면 팔로워 성도는 되어도 리더 성도는 될 수 없다. 모든 팔로워는 궁극적으로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통해 좋은 리더가 되려고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행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되려는 것이다. 행동의 선한 변화가 구원받고 은혜 받는 데에는 필수요건이 아니지만 리더가 되는 데에는 필수요건이다. 하나님은 작은 선한 변화도 매우 기뻐하신다.
어느 날 한 성도의 믿지 않는 딸이 성탄절 때 처음 교회에 나왔는데 어색하고 불편해하면서 목회자 앞에서 잘 웃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도가 사업을 시작해서 심방을 갔다가 다시 그 딸을 보았는데 그때는 목회자에게 예전보다 약간 밝은 표정을 지었다. 목회자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작은 변화가 나도 기쁜데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그때 그 사업을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이 사업이 잘 되는 것으로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어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작은 선한 변화도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작은 선한 변화가 축복의 씨앗이다. 작은 선한 변화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면 축복이 따라온다. 축복이 따라오면 그 축복이 오래 머물도록 계속 겸손하게 선한 변화를 추구하라. 잘 될수록 회개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라. 자기 실상이나 모습에 비해 하나님이 은혜를 더 주시는 것을 느끼면 감사하면서도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욱 겸손하게 행동함으로 리더가 기뻐하는 팔로워가 되면서 점차 복된 리더로 자라 가라.
반석 위에 기초를 놓은 집
눅 6장 46~49절 / 성홍모목사
세계에서 가장 고층 빌딩들이 많이 모여 있는 대표적인 곳을 말하라고 하면 뉴욕의 맨해튼을 들 수 있습니다. 제가 학생 때 미국에 대하여 공부할 때에 뉴욕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층 건물인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다고 했습니다. 뉴욕의 맨해튼에는 1931년에 완공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비롯한 세계적인 건물들이 수없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일종의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지역에 이렇게 세계적인 건물들이 들어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그곳 지반이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층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쓰촨 성에서 2008년 5월 12일 현지시각 오후 2시 28분경에 발생한 진도 7.9 의 지진으로 인한 사상자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사망자, 실종자가 8만 명에 이르고, 부상자가 30만 명, 졸지에 부모를 잃은 고아가 400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재민은 약 1천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구촌의 대재앙을 바라보며, 인간의 과학문명이라는 것이 자연 앞에서 정말 무력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홍콩신보는 중국의 최대의 댐인 쌴샤댐이 이번 지진을 유발한 원흉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쌴샤댐을 건설할 당시에 과다한 저수량과 수압의 영향으로 지표층에 변화를 가져와 인근 지역에 지진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제기했던 전문가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재지변이라고만 여겼던 이번 대지진의 원인을 두고 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싼샤댐이 지진을 불러왔다는 주장에 대하여 중국은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만리장성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로서 무려 25조원을 들여 만든 세계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쌴샤댐, 이 댐이 대지진의 원인이라고 하면 참으로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거대한 댐과 댐에 가두어놓은 물의 무게를 못 이기고, 암석층이 깨지고 그 깨어진 틈새로 스며든 물이 지각 단층활동의 윤활유 역할을 하면서 지진을 유발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홍콩신보는 댐을 건설할 당시부터 지질학자나 지진 전문가들은 댐건설이 인재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지난 3월에는 미국의 한 과학 잡지도 쌴샤댐이 지반을 약화시키고 있다며, 지진과 해일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서는 이번 지진의 진원지로부터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쌴샤댐이 지반을 약화시켜 지진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하고 있으니, 대지진의 원인을 놓고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갈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간 신문과 TV 보도를 보면서 가장 마음이 안타까운 것은 학교 건물들이 너무나 부실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린 학생들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이 초고속으로 성장하면서 수많은 건물을 지었지만, 내진설계를 하지 않고, 얇은 철근과 콘크리트, 벽돌로 지은 것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중국의 지진이나 미얀마의 재난을 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는 지진에 있어는 안전지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웃에서 발생한 지진의 영향으로 해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쓰나미 같은 것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예상해야 합니다. 오래된 건물들은 재건축할 수 있도록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번 중국에서 일어난 그런 끔찍한 대지진이 우리 한반도를 강타한다면 우리 집이나 학교 건물은 안전하다고 할 것입니까? 우리 서울의 20년 전, 30년 전에 지은 다세대 주택이나 연립주택 같은 것은 지진에 전혀 무방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건물 중에 오래 된 건물은 내진설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진 설계가 필요한 이유는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대형 토목구조물의 경우 사회적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감안할 때 구조물이 지진으로 인하여 기능을 상실하거나 파괴되거나, 붕괴되었을 경우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재산 피해로 막대한 손실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글을 보니 과거 일본 고베 지진 때 고베 항이 파괴되었는데, 고베 항을 이용하던 환승 화물이 우리나라 부산항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이것은 한동안 부산항이 세계 1, 2위의 자리를 지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이 고베 지진을 복구하는데 세계 경제 2위의 일본도 7년 정도의 시간을 소비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은 재난에 대비한 예산을 편성하고, 인력을 항시 배치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이 다른 것은 재난에 대비하는 능력에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서부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 당국에서는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가상하면서, 지진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질학자들, 정부 관계자, 구조대원, 업계 관계자들 300여명이 모여 지난 1년간 연구하고 토의한 것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지진에 대비하여 많이 연구하며 대비하는데, 우리는 지진에 대비한 예산도 전무하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치, 사회,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인 부실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각계각층에 깔려 있는 기초의 부실이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누구나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아니면 말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이 난무합니다. 누구의 말도 정직한 말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복선을 깔고 앞뒤를 재면서 하는 말이라고 접고 듣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기초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을 예로 들면서, 두 사람은 각기 자기의 집을 건축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지혜로운 건축가였으며, 또 한 사람은 어리석은 건축가였습니다. 한 사람은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위에 놓았으며, 한 사람은 주추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마태복음7:24-28에 보면 지혜로운 한 사람은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이었고,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두 본문이 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인데, 어느 것이 더 예수님의 말씀에 근접한다고 볼 수 있느냐고 하면 누가복음의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을 쓰는 첫 장에서 “그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고 순서대로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상수훈, 산상설교의 결론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두 집을 비교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지은 집과 같고, 예수님에게 나아와 말씀은 들었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놓고 한 주간 동안 깊이 생각하는 중에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두 사람은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지은 집과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두 집을 비교해보면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지었다는 점에 있어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실 집이란 결코 사치품은 아니고, 누구나에게 가장 필요한 의식주의 하나입니다. 남자라면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살고 싶은 좋은 집을 건축하고 싶어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집을 지어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집이란 사치품은 아니지만 정말 튼튼하게 지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장식이나 가구는 나중의 문제입니다. 집이란 튼튼하게 지어야 들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지은 집을 비교해보면 외형적인 모습은 거의 같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추를 놓을 때에 깊이 파고, 반석 위에 놓은 집이나, 그냥 땅 위에 지은 집이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때, 평안할 때, 일기가 좋고 기상이 좋을 때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건물의 외형적인 모습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건물의 외형이란 피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과 진실이 중요한데, 건물의 외형이란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이요, 내용보다는 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용보다는 외모양이 좋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좋은 때에는 거의 같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집을 지으면서 땅을 깊이 파고 주추를 놓으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땅을 파는데, 반석이 나올 때까지 파고 들어가서 주추를 놓으려고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혜로운 사람이 아직 기초공사도 끝내지 않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집을 거의 다 지었습니다. 그 집도 외형적으로는 그럴듯하였습니다. 아주 쉽게 집을 짓는 사람도 있는데, 고집스럽게 땅을 깊이 파고 반석이 나올 때까지 파고 들어가니 비용도 많이 들고, 인력도 많이 필요하였습니다.
언제 두 집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까?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은 탁류가 부딪치면서 곧 집이 무너져 내리는데, 파괴됨이 심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였다”고 했습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우리는 다 신앙의 집을 건축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은 가져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취미삼아, 오락 삼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같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외형적인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오래 믿었다는 것도 하나의 외형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외형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 믿은 것, 그것은 외형에 불과하고, 그것을 가지고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수박 겉핥기라는 말입니다.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 교회 생활에 익숙한 것, 사회도 잘 보고, 회의도 잘 진행하고, 아주 예리하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럴듯하게 발언하는 것도 잘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그의 성숙한 속사람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찬송도 잘하고, 기도도 유창하게 하고, 교회 안에서 어떤 장 자리에 있는 것도 피상적인 평가에 불과합니다.
우리 주님이 46절에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마태복음7:21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적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찬송을 잘 부르고, 기도 잘하고, 봉사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교회 생활 모든 것이 자연스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그는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집을 짓는데, 자기만이 압니다.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기만에 빠질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으로부터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라는 책망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 가면 고대 7대불가사이의 첫째인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현재 80기 정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800년 전에 그런 무덤을 세우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큰 피라미드를 어떻게 세웠을까 연구한 학자들이 있습니다. 먼저 피라미드를 세울 장소를 선택하는데, 아무리 홍수가 나도 물에 잠기지 않을 땅을 선정하고, 땅 속에 바위가 들어날 때까지 모래와 자갈을 파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땅 속 깊은 곳 반석 위에 무덤을 설치하고 반석 위에 피라미드를 쌓습니다. 10만 명의 사람이 2개월 씩 동원되어 20년 동안 일하여 만든 것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최고의 피라미드는 140m의 높이에 환기 구멍까지 내었고, 북극성의 방향과 일치되게 무덤을 안치한 것을 보면 정말 세계적인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건축가들입니다. 한 사람이 일생 살아가면서 ‘자아’라는 인격의 집을 짓습니다. 신앙인이라는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건축하는 예를 들어 신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터를 닦아두었습니다. 마치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두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터를 닦을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터전이 되십니다.
고전3:10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나아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 주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 주님의 말씀이 곧 그의 가치관이 되고, 주님의 말씀이 곧 길이 되는 사람, 주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만세 반석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기초가 되고, 터전이요, 성전의 모퉁이돌이 되고, 성전의 산돌이 되십니다.
행4:11-12에서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요,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살아가는 이유가 되시고, 예수님은 나의 가치관이요, 예수님 때문에 살아가고,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죽어도 그대로 살아갈 것이요,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면 죽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알아준다고 하여 우쭐 거릴 것도 없으며,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내가 알고, 우리 주님이 알고, 하나님이 알아주시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입니까? 우리는 하루하루를 은혜로 살고 주님과 의논하고,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것입니다.
1970년 서울 신촌의 로터리 근처에 와우 시민아파 5층 건물 한 동이 붕괴되어 33명이 죽고, 40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형 사고가 있었습니다.
아파트가 오래 된 아파트가 아니라, 지은 지 불과 4달밖에 되지 않았고, 주민이 입주한지 20일 밖에 되지 않은 아파트였습니다. 그런 새 아파트가 폭삭 주저앉았습니다. 왜 그런 대형 참사가 일어났는가에 대하여 건축전문가들이 나중에 알아본 결과 이 아파트는 기둥 하나에 19㎜ 철근이 70개씩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정에 1/12 밖에 안 되는 5개 정도씩밖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으며 또 콘크리트 배합비율도 시멘트를 알맞게 넣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멘트 비용은 업자들이 다 떼어먹고 정작 넣어야 할 시멘트는 넣는 시늉만 내었기에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뜯어먹다보니 모래성을 쌓아놓은 것이었습니다.
에이브라함 메슬로우(Abraham Maslow)가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과 궁극적으로 평화를 맺으려고 하면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만 하고, 시인은 시를 써야만 하고, 음악가는 곡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읽으면서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면 자신 자신과 화해하여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봐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 안에서 주인이 되시고, 내 안에 모시고 있는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게 하시고, 진리로 이끌어 가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유명한 의사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는 처방만 내려줄 뿐이고, 병은 환자 자신이 고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특히 당뇨나 혈압 같은 성인병들은 그렇답니다. 의사가 처방해준 대로 정시에 약을 잘 먹고 하루도 걸리지 않고 운동하고, 의사의 지시대로 순종하는 환자는 치료가 잘 되고, 약을 제대로 먹지 않고, 지시사항을 준수하지 않는 환자는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치료가 된 환자는 담당 의사를 실력 있는 명의라고 하고, 치료가 안 된 환자는 똑같은 의사인데, 돌팔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신학자 윌리엄 버클레이는 “건축 재료는 인생과 비슷한 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인생을 제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재료를 제공해 주시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서 자신의 인생을 지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성된 건물처럼 인생을 살게 하시지 않고, 인생의 재료를 제공해주신 대로 우리 자신이 지어가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쉽게 집을 지으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예수님을 앞장 세워 그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쳐서 말씀에 복종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좀 힘들지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여기서 나아와 듣는 것보다 강조하신 말씀은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생이란 집을 잘 짓고, 신앙이란 집을 잘 짓는데, 말씀 중심으로 행하는 중에 아름다운 집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눅 6장 46~49절 / 이병일목사
삼월이 시작되는 첫 주일이면서 공교롭게도 사순절 첫 주입니다. 삼월과 사순절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봄입니다. 삼월은 긴 겨울이 끝나면서 봄이 시작되는 달입니다. 봄 ‘春’의 자의(字義)는 햇볕을 받아 풀이 돋아나오는 모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화적 해석으로도 봄은 시작과 풍요, 부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계절의 시작, 한해의 시작, 다시 농사 준비의 시작으로까지 봄은 모든 만물이 생명의 근원을 다시 얻어 소생하는 계절인 것입니다. 봄은 절기상으로 입춘을 시작으로 곡우까지 왕성한 생명력의 근원을 바탕으로 희망과 소생을 표현하기에 충분합니다. 아울러 봄은 오행(五行)으로 볼 때 ‘목(木)’에 해당하고 방위는 ‘동(東)’, 오색(五色)은 ‘청(靑)’에 해당됩니다. 또한 봄은 처녀의 계절로 표현되듯 여자의 계절로도 불립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들의 이름처럼 달에도 각각의 특징을 붙여서 말합니다. 그들은 3월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체로키 족), “연못에 물이 고이는 달”(퐁카 족), “암소가 송아지 낳는 달”(수우 족), “개구리의 달”(오마하 족),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아라파호 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삼월은 긴 겨울동안 마치 죽었던 것처럼 보였던 만물이 기지개를 켜면서 생명활동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삼월은 봄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달입니다. 봄은 시작과 풍요, 부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계절의 시작이며, 한해의 시작이고, 또한 농사 준비의 시작으로 까지 봄은 모든 만물이 생명의 근원을 다시 얻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농경사회의 삶이 뿌리 깊이 박혀 있고, 새로운 학년과 학기가 시작되기에 그 의미는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내일(6일)은 경칩(驚蟄)이라고 하는데, 날씨가 따뜻해져서 싹이 돋고 겨울잠을 자던 동물이 깨어나는 날입니다. 개구리들은 번식기인 봄을 맞아 물이 괸 곳에 알을 까놓는데, 그 알을 먹으면 허리 아픈 데 좋을 뿐 아니라 몸을 보한다고 해서 경칩 일에 개구리 알을 먹는 풍속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단풍나무를 베어 나오는 물을 마시면 위병이 낫는다고 해서 약으로 먹기도 합니다. 경칩에는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해서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기도 하고, 경칩 일에 보리 싹의 성장을 보아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합니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四旬節)로 번역합니다. 이는 부활 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입니다. 한편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서에서는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나옵니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며,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입니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두 주간의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부활절에 있을 세례식을 준비하는 세례 예비자들은 물론 이미 성도로 영접된 사람들 모두 금식과 기도 생활에 힘썼습니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습니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습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해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합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습니다.
한편 어떤 곳에서는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3일 정도의 ‘사육제’(canival)가 거행되었었다. 이 사육제는 원래 ‘육이여’(carni), ‘안녕’(val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교적인 영향을 받은 이 축제의 기간 동안에는 금식하는 사순절과는 대조적으로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가장 행렬 등의 인간의 쾌락 본능을 자극하는 행사들이 행해졌습니다. 그러다가 1517년 종교 개혁이후 종교 개혁자들은 형식적이며 지나치게 많은 교회의 의식 철차들을 폐지했는데, 이때 사순절에 관계된 많은 의식들도 간소화 내지는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시기로 지켰던 중세 교회의 사상은 받아들여 공동기도문 중 사순절 기도문의 주제를 회개로 삼는 등, 계속해서 이 절기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봄의 절기와 사순절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둘 다 모두 새로운 일을 추진하고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개인적인 일상이나 공동체적인 삶에 있어서 크고 작은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일을 할 때에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90%이고 실제로 행하는 것은 10%이다.” 경험상으로 볼 때에 이 말은 맞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90%의 기도는 행사를 위해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일을 진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준비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거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평지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들음과 행함의 관계에서 들은 것을 행동으로 옮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가슴으로 느끼고 몸으로 알게 된 일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반석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을 말하면서 집을 짓는 장소, 즉 집을 어디에 짓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누가는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것과 기초 없이 집을 짓는 것을 말하면서 집짓는 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집을 완성하는 과정을 말하면서 일의 준비와 행함의 방법을 강조합니다.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
지난 해 말부터 각 부서와 신도회 별로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준비합니다. 열심히 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새롭게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것이 완성되고 그 결과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땅을 깊이 파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그 다짐을 묻어야 합니다.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반석이 되고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반석과 기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의 반석과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땅을 깊이 파서 반석에 기초를 세우고 잘 지은 집은 큰물이 몰려와 부딪히더라도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초 없이 맨 땅 위에 지은 집은 곧 무너지고 파괴됩니다. 광야에 우기에는 갑자기 비가 내려서 마른 땅에 물이 흐르는 자리인 와디(wadi)로 흘러갑니다. 남쪽 사막지대에서는 날이 화창하고 비가 내리지도 않는데, 갑자기 와디에 급류가 밀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만일 이 급류를 피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와디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고 맙니다.
집을 짓기 위해 땅을 파는 것은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의 시작입니다. 무엇으로 땅을 파든지 시작이 있고 계속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로는 어려움도 만나거나 파 놓은 구덩이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파내는 한 줌의 흙이 기초를 든든히 세워줄 수 있는 반석으로 가는 길을 만듭니다. 시작은 과정이고, 과정은 길이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이미 잘 지은 집을 볼 것입니다.
땅을 깊게 파서 반석위에 기초를 놓는 일은 이 봄날에 땅을 갈아엎고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봄날에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씨를 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발산하기 위한 씨앗의 아우성을 듣는 사람은 그 씨앗을 뿌리기 위해 한 고랑씩 한 고랑씩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 일 또한 시작이고 과정이고 결과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준비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기 위해 오늘도 시작과 과정을 오고갑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뿌린 씨앗을 세지 말고 씨앗이 뿌려질 땅을 잘 살피십시오.
몇 개의 씨앗이 피어날지 너무도 궁금하지만...
그냥 누군가 물어 오면 땀 흘린 자의 미소로 대답하십시오.
씨를 뿌리는 것은 단지 시작임을 잊지 마십시오.
햇볕 잘 드는지, 물은 적당한지, 알맞은 양분이 있는지 살피십시오.
흙으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의 은혜와
이 땅에 생명의 씨앗, 해방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시원한 바람으로 와서 집 짓는 사람의 땀을 식혀주고
따뜻한 바람으로 와서 뿌려진 씨앗의 싹을 틔우시는 거룩한 영의 역사가
시작과 준비의 봄, 나를 돌아보는 사순절을 맞이하여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으려는 사람들
생명의 아우성을 듣고 땅을 갈아엎는 사람들의 삶 속에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순종의 길
눅 6장 46~49절 / 이종윤목사
오늘 본문 중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여는 선생도 아니고 소유주도 아니며 바로 하나님을 뜻합니다. ‘네가 나를 보고 주여 주여 한다만은 내 말대로 행하지 않고 있구나.’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정작 생활 속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측량할 수도 없으며 헤아리기도 힘든 매우 큰 분이십니다. 역사와 만물을 창조한 분으로서 그분의 말씀은 깊고 심오합니다. 그 속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확실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하라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순종도 없고 순종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그 것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1. 행함이 없는 고백만으로는 참 제자 될 수 없다.
입술로 아무리 고백을 하고 좋은 말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것, 이것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위선자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예수 안에 우리가 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전혀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제 길로 가면 그것은 흙 위에 집을 짓는 사람,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곧 무너질 인생밖에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재앙밖에 가져올 것이 없습니다.
2.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보고 깨달아야 할 것인데 어느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첫째로, 성경을 통해서 주십니다. 성경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 이 성경을 조명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성경이 역사서, 소설책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말씀을 읽고 삶속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과 성령. 이 두가지로 우리는 비로소 거듭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청결한 마음으로 그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할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뿐임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3. 성경을 배워야 순종이 올 것이다.
성경 안에서 순종이 가능합니다. 성경을 모르고서는 무엇을 순종해야하는 것인지 전연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잘 앎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행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찾으며 먹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성경을 조직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가끔 읽고 또 어떤 사람은 여기 띄엄띄엄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끝까지 여러 번 읽어야 읽을 때마다 말씀이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또 성경을 이해하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내 영혼과 인생 걸음에 아주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깨닫고 이해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키워나가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규칙적으로 연구하고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순종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들은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순종의 자유. 참 순종은 진정한 자유를 가져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을 하면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죄뿐만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참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참된 제자가, 순종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믿음의 기초가 든든한 사람
눅 6장 46~49절 / 김흥규목사
「올해 최고의 바보들」(Top Idiots of the Year)을 뽑은 재미있는 리스트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천하의 얼간이같은 사람들이 벌인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전부 다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라고 합니다.
제일 먼저 어떤 여자 분이 독극물 통제 센터(the Poison Control Center)에 전화를 했습니다. 자기 딸이 몇 마리의 개미를 삼켰으니 어떡하면 좋겠냐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의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곧바로 자기 딸의 뱃속에 있는 개미를 없애기 위하여 살충제를 먹였다고 말했습니다. 의사가 기절 초풍을 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Bank of America를 털기 위해서 줄에 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Bank of America의 deposit slip 종이 위에다가 강도 짓을 하기 위하여 위협적인 글을 적어 놓은 stickup note를 손에 들고서는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줄이 너무 길어서 자기 차례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길 건너 편 Wells Fargo 은행의 직원에게 그 stickup note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은행의 직원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는데 이 강도 노트가 Bank of America의 deposit slip 위에 쓰여졌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남자는 Bank of America로 되돌아갔는데 그 사이에 경찰에 연락을 취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체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남자가 구멍 가게에서 스카치 위스키 한 병과 돈을 요구했습니다. 강도 짓을 벌이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 가게에서 일하던 사환은 손님이 음식을 주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현금이 들어있는 금전 등록기를 열 수 없다고 버티었습니다. 그러면서 손님이 도저히 21세라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술을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강도는 자기의 나이가 21세 이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신의 운전 면허증을 순순히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이 강도는 술과 돈은 얻었지만 구멍 가게의 사환이 이 강도의 신원을 기억했다가 경찰에 보고하는 바람에 2시간 후 잡히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도 많지만 어리석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기초를 어디에 두고 집을 짓느냐에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가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48-49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건대 지혜로운 사람은 그 기초를 반석 위에 놓고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집을 짓되 기초도 없이 흙 위에 짓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초도 없이 얇은 흙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46절을 보세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입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은 다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약 1: 23-2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야고보서 기자는 여기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을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는 사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대 희랍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검사하거나 화장하기 위하여 광택이 나는 철제 거울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유리 거울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희미한 거울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명치 못한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본 사람은 당연히 거울 속에 비친 얼굴 모양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없습니다. 행위로 검증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을 본 다음 쉽게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자취가 사라지는 그림과 같이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굳건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47절에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그렇습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를 굳건한 반석 위에 놓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세 가지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첫째로,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의 제일가는 기초는 주님께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말하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합니다. 말씀이 있고 기도가 있고 찬양이 있는 자리에 나아갑니다. 예배드리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믿음의 기초가 든든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주일성수(主日聖守)를 꼭 하십시오. 아무리 바쁘고 급한 일이 있어도 주일에는 꼭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수요 저녁 예배나 금요일 밤 기도회, 새벽 기도회 등등에도 힘써 나오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반석 위에 튼튼한 기초를 두는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는 말이 있는데 말의 귀에 동풍이 분다는 뜻입니다. 남이 하는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고 쉽게 흘려버리는 것을 말하지요. 주님께 나아오기는 했지만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나아오실 때마다 주님의 말씀을 잘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 소식을 알려드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교회 행사며 여러 가지 계획을 광고했는데 어떤 일에 대하여 나중에 되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못 들었다고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든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든 무슨 말씀이든지 간에 잘 경청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기는 잘 나왔습니다. 말씀도 정신 차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하나도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들은 말씀을 반드시 실행에 옮기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의 존재(being)와 행동(doing)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찾아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어서 구원받고 은혜 받았다면 그 행동에 있어서 변화가 찾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기는 했는데 그 행동에 전혀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분명히 자신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독일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제자도의 댓가」(The Cost of Discipleship)라는 책에서 '값싼 은혜'(cheap grace)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값싼 은혜는 실천이 동반되지 않은 은혜입니다. 행위의 수고는 전혀 따르지 않은 지적 동의나 교리, 원리로서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회개를 수반하지 않는 용서, 제자됨의 희생 없는 은혜,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 없는 싸구려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살려고 애씀으로서, 다시 말해 실천이 뒤따르는 믿음과 은혜가 값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고통과 풍파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요즈음 한국에 태풍 매미와 수해로 인하여 많은 분들이 큰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와 같은 고난으로부터 면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태풍이 몰아닥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이들은 이 고통을 더 잘 견디어 내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믿음의 기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를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두었기 때문에 그 어떤 풍파도 거뜬히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월트 디즈니(Walt Disney)는 "어려움이 어떤 사람들은 더 열악하게 만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더 낫게 만든다"(Difficulties make some men bitter, and others better.)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기초를 예수님 위에 두는 사람은 어려움 때문에 더 나아집니다. 더 발전합니다. 더 융성하게 됩니다.
조지 메티슨(George Matheson)은 아주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고전학과 논리학, 철학에서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장차 훌륭한 학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20세가 되던 해에 메티슨은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메티슨은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에서 제일 크고 제일 아름다운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수많은 신학 서적을 저술해서 많은 명예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영예로운 학회에 나가서 눈부신 강연을 수없이 많이 했으며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영국 학술원(Royal Society)의 정회원까지 되었습니다. 이런 메티슨이 올렸던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내가 가진 가시에 대해서는 당신께 한번도
감사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장미꽃에만 수천 번도 더 당신께
감사했지만 내 가시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에게 내 십자가의 영광에 대해서 가르쳐 주소서,
내 가시가 지니는 가치에 대하여 가르쳐 주소서.
내 고통의 길에 의하여 당신께 올라갔음을 보여주소서.
내 눈물이 나의 무지개를 만들어 냈음을 보여주소서. 아멘."
(My God, I have never thanked thee for my thorn.
I have thanked thee a thousand times for my roses,
But never once for my thorn.
Teach me the glory of my cross,
Teach me the value of my thorn.
Show me that I have climbed to thee by the path of my pain.
Show me that my tears have made my rainbows. Amen.)
믿음의 기초가 든든한 사람은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그 가시에 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가시를 통하여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합니다.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는 믿음의 기초를 반석 위에 두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초를 반석 위에 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위에서 세 가지를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첫째로, 하나님 앞에 힘써 나오십시오. 둘째로,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그리고 셋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십시오. 마음 밭에 깊이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온 몸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활신앙으로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복을 받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 11: 28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