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입니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제2독서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3,9ㄴ-11.16-17>
형제 여러분,
9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6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7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자아 실현이 아닌 자아 제사가 드려져야 할 성전>
영화 ‘공작’(2018)은 대북공작원인 실제 인물 ‘박채서’를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의 핵심 내용은 박채서 씨가 흑금성이라는 안기부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할 당시 김대중 대통령 선거에 있을 뻔한 북풍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안기부에서는 그동안 선거가 있을 때마다 여당의 승리를 위해 간첩 침투와 비무장지대 폭격 등의 조건으로 북에 돈을 지불해왔습니다.
남북 관계가 긴장 관계 모드가 되어야 보수 여당의 지지율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수 여당을 지지해 준 자신들도 안위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채서 씨가 야당의 김대중 씨가 빨갱이라고 하면서 그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도록 북에 도움을 요청하는 안기부와 집권 여당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충성을 바치던 박채서 씨는 ‘북한이 무력 도발 등으로 김대중 씨의 당선을 반대한다면 오히려 김대중 씨가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적합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김정일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이용해 김정일을 설득하여 폭격을 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합니다.
김정일은 그의 말을 듣고 폭격을 해주려는 마음을 접습니다.
이에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고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 셈입니다.
흑금성 박채서 씨는 그 덕분으로 이중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게 됩니다.
안기부라면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안기부가 자신들의 개인적 안위를 위해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원치 않아 오히려 자신들이 맞서 싸워야하는 북쪽의 도움을 요청했다는 내용은
물론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무엇이 조직을 오염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조직은 그 조직의 정신과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다면 오염된 것입니다.
어느 단체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단체는 본래의 정신을 잃습니다.
가족이 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서로를 이용한다면 그 가족이 오래 유지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염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정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유가 이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성전은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기도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전에서 오히려 자아 실현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권력과 돈, 명예와 쾌락 등을 추구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실현되는 장소이지 내 뜻이 실현되는 장소여서는 안 됩니다.
성전이 이렇게 오염되어 버렸다면 성전의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그 성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화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꾼들의 책상을 뒤엎고 그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각자도 작은 성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시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안위를 위하는 마음이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은 또 장사꾼들의 소굴에서 견디셔야 합니다.
레위기에는 성전에서 어떤 제사가 봉헌되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제사는 총 다섯 가지, 번제-곡식제-친교제-속죄제-보상제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지금 우리 자신의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살라 바치는 봉헌의 제사이고,
곡식제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드리며 참 주인은 주님뿐이라는 신앙 고백이며,
그리고 친교제는 친교는 나눔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현하는 제사이고,
속죄제는 자신의 죄를 위해 죄를 지은 장본인인 자기 자신을 바치고 더 나아가 그 보상으로 보상제까지 거행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제사가 성막을 지은 다음 당신 성막 안에서 드려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을 제사 지내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 안에서 자아 실현의 형태로 살아나려 한다면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제사가 봉헌되지 않는 제단은 의미를 잃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제단이 있고 그 제단에 자기 자신이 봉헌되어야 주님께서 머무십니다.
봉헌이 곧 순종입니다.
돌로 된 성전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주님께 봉헌되는 참된 성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이루려는 마음을 성령의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몰아내는 작업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소중한 성전>
한국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장상협의회에 참석했다가,
존경하는 글라렛 선교 수도회 관구장 김병진 가브리엘 신부님께서 최근 겪고 계시는 고초를 전해듣고, 마음이 참 ‘거시기’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현재 속초에서 춘천교구 산하 영북지구 무료급식소인 ‘작은 형제의 집’ 운영을 총괄하고 계십니다.
이 집은 수많은 사제, 수도자, 평신도, 봉사자들의 힘을 모아 23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집이기도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비가오나 눈이 오나 작은 형제의 집으로 출근하십니다.
수많은 노숙인 형제들과 독거노인들, 장애우 형제들에게 정성 가득한 밥 한상 차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소탈하고 서민적인 신부님께서는 사랑이 가득 담긴 한끼 식사를 차려내는 데 필요한 굳은 일들을 묵묵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신부님께서 참으로 이해할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일방적 통지에 크게 가슴 아파하고 계십니다.
지난 10월 속초시는 갑작스레, 잘 운영되고 있던 작은 형제의 집에 대한 철거 요청 공문을 내려보낸 것입니다.
이에 춘천교구 영북지구 사제 모임과 작은 형제의 집 운영위원회는, 일방적이고 부당한 시의 조치에 대응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였고, 적극 대응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작은 형제의 집은 원래 속초시의 동의를 받고 시작한 사업입니다.
또한 속초시의 지적사항과는 달리 지극히 청결한 위생상태를 유지해왔으며, 웬만한 식당보다 나은 위생 상태 속에 운영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간 작은 형제의 집은 국가나 지자체의 도움 없이 시민들의 십시일반으로 운영되어 왔고,
최근 어려워진 서민 경제 분위기 속에,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들을 위해 사심없는 봉사를 계속해왔습니다.
이토록 의미있고 아름다운 사업에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할망정, 당장 철거를 요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처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바티칸 근처에서 기거하는 노숙인 형제들을 그 누구보다도 끔찍히 생각하고 챙기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소식을 들으셨다면, 분명 크게 개탄하시고 진노하실 일이 분명합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종탑 아래,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대성전도 아름다운 성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극단적 소비주의와 개발주의 깃발 아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쓸쓸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소박하고 따뜻한 둥지인 작은 형제의 집 역시,
하느님 보시기에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분명합니다.
작고 소박한 작은 형제의 집 지척에는, 1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막 끝낸 속초시 문화회관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속초시는 발송하는 공문에 ‘시민 한 사람이라도 더 행복해 하는 속초’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습니다.
인생의 막장까지 내몰린 시민도 엄연한 시민입니다.
사방이 가로막힌 높은 벽 앞에 선 시민도 당연히 시민입니다.
병들고 소외되었지만 때로 부끄러움에, 때로 방법을 몰라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시민도 엄연한 시민입니다.
문화회관 리모델링도 좋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속초 시민들이 하루 단 한끼라도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는 작은 무료 급식 공간 하나 마련해주시면 안될까요?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성전, 작은 형제의 집이 훼손되지 않도록,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설되도록 함께 기도하고,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습니다.
노심초사하고 계시는 신부님을 위해 많은 지지와 격려를 보내드려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이 성전은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 반포되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난 후,
324년 황제가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성전은 가톨릭교회의 모교회로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주교좌성당 전체와 대등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첫째로 꼽히는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와 <화답송>의 <시편>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와 하느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강물’은
교회의 생명을 지탱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는 은총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전 정화는 교회 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고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 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려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 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을 위해, 교회와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이 고귀함과 존귀함 앞에 겸허하게 경배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몸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형제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전과 교회의 축복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축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전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웠습니다.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 교구장인 교황좌가 있는 대성당입니다. 대성전의 공식 이름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복음사가 대성전”입니다.
로마에 있는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첫째가는 지위를 가졌으며,
전 세계 모든 지역교회의 유대관계 안에서 “모든 성당의 어머니”로 불리 웁니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표현대로 “사랑의 전 공동체를 이끄는”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로써 이 날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 드리기 위해서 건축한 외적인 건물을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17)
하고 말합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이는 기도의 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곧 성전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더욱이 성체성사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에 성전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의 몸은 성전이요, 움직이는 감실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19-21)
당신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흘 안에 세우겠다.’는 말씀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도성을 얘기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시 21,22-23)
하고 말합니다.
성전이란 특정 건물만도, 내세에서 영적으로 성별된 장소만도 아닙니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만나는 곳, 함께하는 곳이니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에서의 모든 만남이 거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함으로 속됨을 정화해야 하고 우리의 거룩함이 세상의 속됨을 이겨가야 합니다.
그 힘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시고, 성체이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셔야 하고
그 주님을 모신 내가 거룩함을 지녀야 하며
그러한 준비된 마음으로 기도의 집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마지막에 하느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노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과 구원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의미는 환전상들과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에 가려져 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상점은 올리브산 언덕에 있는 산헤드린의 상점과 경쟁하기 위해 대제관 가야파가 연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네 이익과 특권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돈이 되니까 장사를 하였습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러 온 사람들을 잘 도와줘야 하는데
그들을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거룩한 마음이 모아져야 할 성전에서
정성껏 준비한 제물은 무시되고 부정과 부패, 착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장사꾼들을 꾸짖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단호하게 꾸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결국 심판 날에 ‘손과 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곳에 버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쫓겨난 것은 그들 마음 안에 하느님은 없고, 물질과 개인적인 이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가득 차 있으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전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 대신‘돈’과 물질이 들어가서 주인행세를 하니
그 결과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예루살렘성전도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썩으면 산천이 썩고 사람이 무너져서 종교도 무너지고 모두가 망그러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악한 행실로 하느님의 살아있는 성전에 흠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이라도 그곳에 거룩함을 지닌 백성이 없다면 이미 성전의 품위는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진 건물일 뿐입니다.
성전은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의 성전이 더 소중합니다.
어느 성당 기공식에서 하신 주교님의 말씀이 생생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더 큰 성전인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고 상처 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성당에 앉아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이익을 계산하고 있잖습니까?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이웃을 돌려놓기도 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시기 질투하고 ‘너 어디 잘되나 보자’ 하고 괘씸하게 생각도 하고….
남의 허물에는 ‘너 정말 그럴 수 있나?’ 하면서,
자기의 허물에 대해선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합리화합니다. 이런 마음이 장사꾼의 소굴이죠.
주님께서는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 엎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성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허물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답게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걷어내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입니다.
우리의 곳간은 천상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곡으로 만들지 않는 한 곳간은 있으나마나입니다.
따라서 알곡이 되기 위한 수고와 땀은 우리의 몫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알곡을 만드는 일입니다.
영혼의 정화를 통해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잘 입어 겉모습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 영혼의 상태를 잘 보고 가꿀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마음의 성전에 흠이 간 것이 있으면 그 흠을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고치는 방법 아시죠?
고해성사입니다.
성사를 자주 보고 새 삶을 시작하시기 바라며 보속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집에 물이 새거나 낡아서 파손 된 곳이 있다면 놀랄만한 열성으로 빨리 복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하신다면
우리 마음이 그처럼 고귀한 손님께 부당한 거처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를 하고 집안 정돈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고해성사를 통한 영혼의 정화는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영혼에 존귀하신 그분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고 파손된 부분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그 안에 거룩함을 잃지 않으려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그 아름다움이 결정됩니다.
초라한 마구간이 빛난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웅장하지도 값진 예술품 하나 없어도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은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에 갖가지 값진 예술품으로 장식을 해 놓았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그저 건물일 뿐입니다.
결코 성전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고 거룩함을 간직한다면 대성전이든 마당이든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다면 어디에서든 거룩함으로 빛나야겠습니다.
외적인 건물의 화려함보다도 마음의 성전을 빛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기도의 찬미, 말씀선포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을 성모님의 발현장소로 강복하시길 청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시기 질투, 미움, 분노, 증오, 탐욕으로 차 있다면,
악습에 젖어 있다면,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부원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 정화 - 우리 삶의 중심인 성전>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거의 천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하여 오늘 봉헌 축일을 지냄으로 각 지역 교회는 로마의 모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이 삶의 중심임을 가시적으로 웅변하는 것이 바로 이 거룩한 미사가 거행되는 이 성전입니다.
매일 하느님의 성전인 이곳에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우리 수도자의 하루 삶입니다.
우리의 평생 정주생활도 이 성전에서 거행되는 매일의 공동전례가 우리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주기에 가능함을 깨닫습니다.
공동체 일치의 가시적 중심이 이 거룩한 성전입니다.
살아갈수록 ‘갈 곳’은 주님의 집인 '성전'뿐이요,
‘찾아갈 분’은 성전에 계신 '주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 수도형제들과의 에버랜도 소풍 때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에버랜드, 말그대로 영원한 땅,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하지만,
진짜 에버랜드는 성전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수도원임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하여 끊임없이 많은 이들이 순례자처럼 고향집을 찾듯이,
영혼의 쉼터 진짜 에버랜드 수도원의 성전을 찾습니다.
우스개 소리같지만 노년의 믿는 분들에게는 가까이에 세 장소를 갖춰야 한다고 합니다.
성당과 병원과 음식점입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성당일 것입니다.
하여 많은 분들이 수도원이나 성당 근처로 거처를 정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성전 정화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성전 정화로 표출됩니다.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세상을 성화聖化시켜야 할 성전이 세상에 속화俗化되어 타락 변질된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을 정화하실 때 예수님의 열화熱火와 같은 분노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저절로 성전을 사랑합니다.
아침 성무일도 시 시편도 생각납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시편 84,2-3)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거룩한 성전입니다.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는 성경말씀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을 절절히 체험합니다.
이어지는 화두같은 말씀이 성전의 심오한 비밀을 보여줍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바로 참 성전임을 알려줍니다.
이 보이는 가시적 건물로서의 성전이 성전일 수 있는 것은 매일 성체성사가 거행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산티야고 순례때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하루의 순례가 끝나 알베르게 숙소에 도착하면 우선 물색한 것이 다음날 새벽 미사드릴 장소였습니다.
식당, 안내실, 휴게실, 숙소 밖 식탁 등 그 어디나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그 자리가 거룩한 성지요 성전임을 깨달았습니다.
가톨릭 교리서도 이를 분명히 아름답게 설명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4) 드리는 신약의 예배는 어느 한 특정 장소에만 매이지 않는다.
온 땅은 거룩하며, 사람의 자녀들에게 맡겨졌다.
신자들이 한 장소에 모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영적 집”으로 세워지도록 모인 “살아 있는 돌”(1베드2,5)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생수가 솟아나오는 영적인 성전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한몸이 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6,16)이다.
- 교리서 1179항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과 더불어 가시적 건물로서의 성전도 그에 걸맞아야 함을 교리서는 언급합니다.
“기도의 집은 성찬례가 거행되고, 성체가 보존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모이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단에서 봉헌되신 우리 구세주이신 하느님 아들의 현존을 공경하며 도움과 위로를 받는 곳이므로,
아름다워야 하고 기도와 장엄한 성사에 알맞아야 한다.”
-교리서 1181항
이와 관련된 오늘 감사송 중 아름다운 대목을 인용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집에 자비로이 머무르시며,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저희가 성령의 성전이 되고, 거룩한 생활로 주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나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 이어 우리 각자가 성전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보이는 성전 정화가 상징하는 바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할 각자의 성전입니다.
다음 성경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17)
그러니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기에 각자 자중자애自重自愛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는 성전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세상을 살리는지 보여줍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이요 세상에 ‘살아 있는 성전’으로 파견되는 우리를 통한 은총을 상징합니다.
실감나는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그대로 이 거룩한 성전에서의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미사를 통한 은총의 강물이 세상 곳곳에 스며들어 죽어가는 세상을 살립니다.
사실 이 미사 한 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소원이 담겨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양식이 되고 약이 되어 우리를 치유하고 살리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입니다.
새삼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시고 성화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