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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니키쉬에서 시작한다는 소위 ‘근대 지휘자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이름들을 몇몇 발견할 수 있다. 빌렘 엥겔베르그,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레너드 번스타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와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같은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푸르트뱅글러와 토스카니니는 20세기 지휘계를 양분했던 인물로 두 사람의 갈등과 대립은 오늘날에도 끊임없는 논쟁의 요소가 되고 있다. 연주의 즉흥성을 중시하여 <새로운 음악의 재창조>를 부르짖은 푸르트뱅글러와 악보에 작혀있는 점 하나까지라도 정확히 음으로 재생시키려는 <완벽주의자> 토스카니니의 대비는 지극히 흥미롭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음악적 해석에 있어서 아직도 양극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꺼질줄 모르고 불타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지휘대에서의 카리스마적인 위엄 등은 이들을 얘기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적인 요소이다. 푸르트뱅글러와 토스카니니... 이들이 세상을 떠난 지도 40여년이 되었으나, 지금도 우리는 이들의 음악을 접할 때마다 무한감동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 두 거인의 음악속에는 확실한 그들의 음악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1. 푸르트뱅글러의 생애
푸르트뱅글러는 음악사적으로 낭만주의의 일가인 1866년 1월 25일, 베를린의 교양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돌프는 음악을 사랑하는 고고학 교수였고, 어머니 아델라는 화가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그가 태어날 당시 53세의 브람스는 바그너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거물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26세의 청년 말러가 니키쉬 아래에서 지휘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7세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고 8세인 1894년, 뮌헨으로 옮겨 안톤 빈브룬, 요제프 라인베르거, 막스 폰 실링스에게 음악교육을 받았다. 처음 그의 목표는 작곡가였다. 17세 되던 1903년에 처음으로 교향곡을 자곡했던 그는, 18세의 나이에 이르면서 지휘로 방향전환을 한다. 뮌헨에서 있은 한 연주회에서 우연히 대리 지휘자로 나섰는데, 그 반응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06년 뮌헨 카임관현악단에서 지휘자로 공개 데뷔한다. 취리히 시립가극장, 뮌헨 궁정가극장, 슈트라스부르크 가극장 등을 거치면서 그의 실력이 점점 인정받기 시작했다.
25세 때의 뤼벡가극장 지휘를 맡으면서 거의 지명도는 급속히 높아졌고, 1917년 29세의 나이로 만하임 궁정가극단의 지휘자에 앉으면서 그는 가장 촉망받는 젊은 지휘자로 꼽히게 되었다. 바로 그 해, 베를린 필을 처음으로 객원 지휘하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베를린 필을 맡고 있던 니키쉬는 29세의 청년 푸르트뱅글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22년 니키쉬의 관찰은 유언이 되어 돌아왔다. 그의 유언에 따라(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와 베를린 필이라는 독일의 정상급 두 오케스트라가 만장일치로 푸르트뱅글러를 추대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베를린 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를 거느린 푸르트뱅글러는 독일 음악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아마도 그로부터 1932년까지의 10년간은 베를린 필의 황금기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몰랐다. 모든 영광은 먹구름을 동반한다는 것을...
푸르트뱅글러가 뤼벡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장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18년 그가 베를린 필에 데뷔 연주를 가지던 그 해에 독일은 무제한 무경고 잠수함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에선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잇달아 일어났다. 비록 다음 해에 1차 대전이 종료되었지만 이것은 더 큰 불행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1922년 그가 베를린 필에 앉던 해에 무솔리니가 로마로 진군해서 진권을 장악했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1932년 베를린 필 창립 50주년 기념연주회가 성대히 열리던 그 해에 나치는 독일의 제1당이 되었고, 바로 다음해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히틀러가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세상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음악계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었다. 명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연주회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중지 당하는가 하면, 쉰베르크가 작곡가 아카데미에서 해고되었다. 베를린 필 단원이던 시몬 골드베르크가 역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화가 마티스’ 발표를 기점으로 힌데미트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고 마침내 힌데미트는 대학 강단에서 끌어내려졌다. 이 모든 문제에 푸르트뱅글러는 적극 개입하여 격분했고, 항의했고,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교묘한 형태로 푸르트뱅글러라는 존재를 이용했다.
1933년 7월, 푸르트뱅글러는 괴링에 의해 프로이센 추밀원의 고문관에 임명되었다. 물론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1934년 12월, ‘힌데미트 옹호 사건’으로 베를린 필을 사임해버린 푸르트뱅글러를 토스카니니가 베를린 필 지휘자로 추천했다. 그러자 나치는 급히 푸르트뱅글러를 베를린 필 지휘자로 다시 추대했다. 정치적인 시끄러움을 싫어한 푸르트뱅글러는 이를 수락하여 뉴욕 필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푸르트뱅글러가 나치에 항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미국 음악계는 푸르트뱅글러에게 ‘어용음악가’라는 딱지까지 붙였다.
나치는 순수 게르만인 푸르트뱅글러를 철저히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전쟁이 종장으로 치닫는 1942년 4월에는 히틀러 탄생 전야제의 축하 연주까지 담당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즈음에 이르러 푸르트뱅글러의 행동은 언제 어디서나 게슈타포의 감시 하에 있었고 당연히 모든 전화가 도청되었다. 독일이 패하기 2년 전, 푸르트뱅글러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단신으로 스위스로 망명했다. 끊임없이 그를 감시하던 게슈타포의 눈을 피해 호텔을 탈출한 것이다.
푸르트뱅글러는 독일인들을 아꼈고 그들이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은 자신의 음악을 필요로 한다는 신념을 최후까지 갖고 있었다. 실제로 전쟁 중의 독일인들에게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처럼 큰 위안은 없었다. 푸르트뱅글러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남긴 글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당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매번 최후의 연주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항상 헌신적으로 연주에 임했다. 청중 역시 유별났다. 그들은 폭격으로 파괴된 잿더미를 넘어서 찾아왔다. 1943년 이후가 되면서 연주회는 공습경보 때문에 자주 중단되었다. 당시 나는 연주회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어젯밤은 괜찮았어요?’라고 말을 걸었다. 그는 말했다. ‘아니오, 어젠 폭격으로 인해 집이 다 타버렸어요. 하지만 이럴 때에 푸르트뱅글러의 연주회를 들으러 오는 일 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전쟁 후, 모스크바 태생의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가 살아남은 베를린 필의 단원들을 끌어 모아 연습을 시작할 때, 그들은 이렇게 목표를 설정했다. “지금은 행방불명이지만 언젠가는 꼭 푸르트뱅글러가 돌아온다. 돌아올 그에게 가장 좋은 상태로 바통을 넘겨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푸르트뱅글러는 ‘친나치’라는 죄목으로 고발되었고, 연합국으로부터 연주 금지를 명받았다. 당시의 심의 법정에서 어떤 증인이 한 말이 전해 나려온다. “제3제국 지배 하에 있던 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 준 사람은 오직 푸르트뱅글러뿐이었다. 그의 연주회가 있는 한 절망할 수 없었다.”
1947년 5월 25일, 비나치 심리 결과 무죄가 인정된 푸르트뱅글러가 베를린 필의 지휘대로 돌아왔다. 전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었지만 커피나 담배, 심지어는 구두까지 팔아서 연주회장으로 몰려들었다. 마침내 ‘타티아나 팔라스트’ 무대에 푸르트뱅글러가 다시 섰다. 오케스트라가 환희에 찬 얼굴로 마치 신을 모시듯 일어섰으며 청중들의 열광은 극에 달했다. 그의 귀환을 알리는 곡은 역시 베토벤이었다. 에그몬트 서곡에 이어 교향곡 6번 ‘전원’, 5번 ‘운명’이 울려 퍼졌다. 연주가 끝나도 청중들은 홀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1951년, 푸르트뱅글러는 다시 상임지휘자로 복귀했다. 65세의 노지휘자에게 마침내 밝은 세상이 찾아왔지만, 이미 그는 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었다. 52년 잘츠부르크 연주 도중에 발병한 폐렴과 항생제 부작용으로 이어진 청각장애가 그를 자리에 눕게 했다. 1954년 다시 지휘대에 올라섰으나, 그 해 9월 20일에 있은 자작 교향곡 2번과 베토벤 교향곡 1번 연주를 끝으로 병상에 옮겨졌다. 11월 30일, 거인은 눈을 감았다.
2. 토스카니니의 생애
1886년 6월 30일 이탈리아 로시 오페라단과 그 오케스트라가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아이다’를 공연했다. 막이 오르기 직전에 지휘자와 악단사이에 언쟁이 일어났고, 화가 난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떠나 버렸다. 할 수 없이 부지휘자가 대신해보려 했으나 관중들의 야유 속에 물러나야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흥행주에게 몇몇 단원이 말했다. “혹시 가능하다면 우리 젊은 첼리스트에게 지휘를 맡겨 보는게 어떨까요? 저 사람은 악보란 악보는 죄다 외우고 있거든요.”
스물 한 살의 젊은 첼리스트가 졸지에 지휘대에 서게 되었다. 관중들은 이번에도 야유나 퍼부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객석에 앉았다. 그런데 이 왜소한 첼리스트는 보면대에 놓인 악보를 걷어 버리고서 거침없이 지휘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중들은 넋을 잃었고, 결국 1막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거장 중의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흔히들 토스카니니는 동시대를 살았던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와 비교되곤 한다. 푸르트뱅글러가 유명한 고고학자를 아버지로, 화가를 어머니로 둔 것에 비해 토스카니니는 가난한, 그러면서도 바람둥이인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먹는 것조차도 곤란을 받던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의 키스 한 번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다고 그는 회고했다. 푸르트뱅글러가 어려서부터 가정교사를 통해 고도의 치밀한 교육을 받았고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힌 지적 교양인이었던 데 비해, 토스카니니는 전적으로 공적인 교육에 의존했으며 일개 첼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혼자서 이루어가야 했다.
여기에다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이라는 기질 상의 차이도 더해진다.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이 시대의 고뇌를 한 몸에 짊어진 듯 깊고 화성적인 음악 만들기에 열중한 것이라면, 토스카니니는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서도 거대한 스케일을 창조해냈다. 그는 거짓말이라곤 못하는 성격이었고, 도덕적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반 파시스트주의자였고, 반 나치주의자가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언젠가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일생동안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음악에 있어서는 독재자였다.” 무솔리니 정권이 그에게 당가인 ‘조바네차’를 연주하라고 했을 때, 그는 “이 따위 노래는 음악이라 할 수 없어.”라면서 의연히 거부했다. 나치가 유태인을 박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요컨대 그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열혈한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80의 나이에도 계단을 두 칸씩 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는 성미였으며,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 않았으며, 한 번도 큰 병에 걸린 적이 없었으며, 정히 아팠을 때는 혼자 몰래 치료를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인간이었음을 증언한다.
그 역시도 자기 성격의 단점을 알고 있었다. 80세의 토스카니니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노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17세 소년의 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브라질에서 느닷없이 지휘자로 데뷔한 후 이탈리아로 돌아온 젊은 토스카니니는 그해 토리노에서 카탈라니의 오페라로 지휘자의 길을 시작, 맹렬히 질주했다. 1898년 토리노에서 가진 43번의 연주회를 전부 암보로 지휘하여 전 단원들을 놀라게 했다. 그해 나이 31세였던 토스카니니는 라 스칼라에 전격 기용된다. 이때부터 스칼라를 떠나는 1908년까지 토스카니니의 이탈리아 오페라 개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타협을 허용치 않는 개혁정신은 결국 라 스칼라를 등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1908년 그는 메트로폴리탄으로 갔다. 그러나 경비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완벽한 상연을 하려는 그의 기질로 인해 그는 메트마저 떠나야했다. 이후 메트가 끊임없이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 했지만 토스카니니는 결코 잊어버리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의 잿더미 위에서라면 지휘하겠다.” 이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1920년 라 스칼라로 돌아온 토스카니니는 이번에도 파시스트 정부와 맞부딪혔다. 1929년 62세의 토스카니니는 다시 스칼라를 떠나 뉴욕필에 섰다. 이 시점, 그러니까 1898년 스칼라 입성에서 1929년 뉴욕필로 옮기기까지의 시기가 토스카니니의 이탈리아 오페라 개혁 시기라 할 수 있다.
1936년 그는 뉴욕필도 떠났다. 69세의 나이였고 모든 사람들은 이제 토스카니니가 은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37년에 데이비드 사르토프의 NBC 방송국이 밀라노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손짓했다. 내용인 즉 토스카니니만을 위한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그 연주를 전국에 라디오 방송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계획에 마음이 움직였고, 마침내 1937년 12월부터 다시 지휘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이 악단은 기존의 NBC 방송국 오케스트라에서 31인을 선발하고 나머지는 일반 공모하여 세계 각지의 유명연주자들을 끌어 모았다. 최종적으로 92명으로 편성된 오케스트라가 결성되었다. 12월 25일 70세 된 토스카니니의 지휘봉이 다시 움직였다. 이날 라디오를 통해 이 전설적인 연주회를 청취한 사람들은 4천 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1948년부터 52년까지 10회의 콘서트는 텔레비전에 의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자료를 보면 일생동안 그가 다룬 레퍼토리는 53명의 작곡가가 남긴 117개의 오페라와 175명의 작곡가가 남긴 480개의 관현악곡으로 집계되었다. 토스카니니의 작업을 지켜본 지휘자 피에르 몽퇴는 ‘한사람의 머리 속에 그 만큼의 양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푸치니의 표현을 따르자면 토스카니니는 ‘기적과 같은 사람’이었다.
토스카니니의 천재성을 이야기할 때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신비스러운 암보 능력이다. 1886년 그의 데뷔사건부터 1954년 그의 마지막 공연 때까지 항상 그의 암보력은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토스카니니가 악보를 외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간단했다. “나는 눈이 너무 나쁘거든...”
1954년 4월 4일, 84세 생일을 막 넘긴 날, 그의 마지막 공연이 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는 이 공연에서 ‘탄호이저’의 바하날을 연주하는 도중에 갑작스레 그 정확하던 지휘봉이 멈춰 버렸다. 순간적인 의식 장애였다. 통제실에 앉아 있던 그의 제자 귀도 칸텔리가 엔지니어에게 방송중지와 함께 브람스의 음악을 틀라고 했다. 다행히 30여초가 지난 후 토스카니니는 기력을 되찾아 다시 바하날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 누구보다도 토스카니니에게 충격이었다. 평생을 통해 완벽을 추구했던 토스카니니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87세의 이 열혈한은 결국 그 유명한 고별사를 끝으로 지휘대를 떠났다. “본의 아니게 지휘봉을 놓고 나의 오케스트라와 작별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될 슬픈 때가 왔습니다.”
지휘대를 떠난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57년 1월 16일 뉴욕, 그는 역사 끝으로 잠들었다. 90세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시신은 밀라노 성당으로 옮겨졌고 베르디의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 거장의 전설이 막이 나려졌다.
토스카니니는 단 한명의 제자도 배출하지 않았다. 귀도 칸텔리가 있었지만 36세로 요절했다. 그러나 그가 심어준 악보의 중요성과 명확하고 힘있는 리듬은 많은 작은 토스카니니들을 만들어냈다.
그가 죽자 17년간 활동해 온 NBC 심포니도 자진 해산했다. 이 악단은 어디까지나 토스카니니를 위한 악단이었던 것이다. 이후 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심포니 오브 더 에어’라는 이름으로 재결성하여 순회공연을 마쳤는데, 그때에도 지휘대는 공석으로 비워두고 공연했다. 토스카니니만한 지휘자는 없다는 뜻에서였다.
3. 레코딩에 관하여
직관주의자였던 푸르트뱅글러에게 있어 음악은 기본적으로 즉흥의 산물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연주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르다. 푸르트뱅글러의 경우에는 어느 것이 좋은 연주인지 아닌지를 연대순으로 판단할 수 없다. 모두 다 서로 다른 연주고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각기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다.
누군가 “푸르트뱅글러의 진가는 ‘ㅂ’으로 시작하는 작곡가들에 있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그러나 이 때 바흐는 아닌 것 같다) 물론 푸르트뱅글러는 바로크에서 현대음악의 바르토크, 힌데미트에 이르는 여러 가지 곡들을 폭넓게 다루었다. 그러나 푸르트뱅글러의 본령은 역시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브루크너로 이어지는 낭만주의 흐름 위에 놓여있다. 이를 빼 놓고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을 이야기하기에는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특히 베토벤에 대한 그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베토벤은 절대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성품은 격렬하고 힘참에도 불구하고 법칙에 맞고 솔직하여 자연과 그대로 어울리는 것이다. ... 단순하면서도 위대한 것, 그것이 베토벤의 교향곡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토스카니니도 독일 태생의 푸르트뱅글러와 마찬가지로 베토벤을 장기로 하고 브람스를 사랑했으며, 바그너에 열성을 보였다. 레온카발로 같은 자국의 리얼리즘 작곡가나 바그너, 베를리오즈, 드뷔시 등의 외국 작품들을 과감히 상연하기도 했다. 세계 초연을 했던 오페라로는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푸치니의 ‘라 보엠’, ‘서부의 아가씨’와 ‘투란도트’, 조르다노의 ‘몽유병의 여인’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당시의 새로운 작품을 보수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계에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토스카니니는 아름다움의 극치야말로 정확함에 있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결국 끝까지 이 신념대로 연주과정에서의 주관적 해석을 일체 배제한 채 작곡가의 시도만을 재현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가 1926년 베토벤의 3번 교향곡 <영웅> 리허설에서 남긴 한마디로 그의 고집스런 음악관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나폴레옹을 가리킨다고, 어떤 이는 히틀러, 어떤 이는 무솔리니를 가리킨다고들 한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이것은 단지 ‘알레그로 콘 브리오’일 뿐이다.”
20세기가 낳은 두 거장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는 견원지간으로 어느 한 곳에서도 통했던 점이 없었다.
이 음반 ‘푸르트뱅글러 vs. 토스카니니’는 두 거장의 바그너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도록 커플링 하였다. 푸르트뱅글러의 연주는 1954년 3월에 빈필과 녹음한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 중 3막 ‘지그프리트의 장송음악’과 1938년 3월에 베를린 필과 녹음한 바그너 악극 <파르지팔>의 ‘전주곡’과 ‘성 금요일의 음악’을 담고 있다. 반면에 토스카니니는 1935년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런던 퀸스 홀에서 실황 녹음한 위 두 곡을 담고 있다. 여기에 푸르트뱅글러가 연주한 <발퀴레의 기행>은 바그너 음악을 이해함에 있어 청량제와 같은 선곡이라 할 수 있다.
최전성기를 굳이 말할 수 없는 두 거장이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시점의 녹음들로 그들의 극명한 음악적 대립을 느낄 수 있다. 푸르트뱅글러가 표현하는 바그너의 음악은 처음부터 커다란 위엄으로 압도해 간다. 이것이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이구나’를 저절로 중얼거리게 한다. 첫마디의 첫소리가 울려 퍼지면서부터 음과 음의 연결을 통해 생동하여 발전되어가는 꿈틀거림을 느끼게 한다. 반면에 토스카니니의 바그너는 티없이 맑고 완벽하여 정확한 음의 세계에 작은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악보에 적혀있는 모든 것을 소리로 옮기려는 그의 확고한 의지는 전체적으로 커다란 규모 위에 굵직한 선들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바그너다운 음악인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어떤 해석을 선호하고 비판하는가는 이 음반 역시 전적으로 청자의 몫인 것이다. 글: 조회창 월간 ‘객석’ 기자
해설---푸르트뱅글러의 2차세계대전중의 연주들은 독일의 패전뒤 베를린을 점령한 러시아군에 의해서 약탈됐다가 그후 40년이 지나서야 독일에 그 테입들이 반환됐었는데 어찌된 이유인지 러시아제 MELODIYA의 CD에는 4악장 도입부 직전의 두번의 ff가 다른 녹음을 땜질한 듯 이 음반처럼 온전하지 못하고 이미 저작권을 상실한 녹음이기에 MUSIC & ARTS등에서 내놓은 CD들도 그런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음질도 푸르트뱅글러가 남긴 "전쟁중 녹음" 한 것 중 가장 우수하다. DG는 푸르트뱅글러의 전쟁중 녹음들을 원래 씨리즈물로 발매했었으나 (라이센스 LP가 흔하다) 모두 폐반시키고 이 음반만 유일하게 DG의 카달로그에 남겨두고 있다. 이 음반을 듣지 않고 푸르트뱅글러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의 위대함이 한장에 압축되어야 한다면 바로 이 베토벤 5번 & 7번 음반이 될 것이다.
1악장을 여는 도입부의 f를 들어보라. 이는 일종의 굉음에 가깝게 들리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트럼펫과 팀파니를 뼈대로 하고 현과 목관이 살이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지휘자들이 이런 울림을 만들어 낼려고 노력했으나 어설픈 모조품외엔 성공하지 못했다. 다른 지휘자라면 이런 강인한 f가 과연 '뒷감당'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럽게 만들 수도 있지만 곧이은 최초의 ff에서 눈부시게 뿜어져나오는 무시무시한 트럼펫은 팀파니로 마무리될 때까지 초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의 직구가 볼 끝이 살아있듯이 그 소리의 끝이 살아있다.
이런 해석은 카라얀의 마지막 녹음에서 비슷하나마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의 것으로 푸르트뱅글러의 해석에선 전쟁중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행해진 연주가 아니면 불가능할 몸서리쳐지는 공포가 서려있다. 저현의 또렷한 크리센도 후에 34번째 마디부터의 두번째 ff는 더욱 장관이다. ff후의 관의 sf들은 뒤로 갈 수록 거대한 크리센도 (악보에는 없다)를 만들면서 초반엔 목관과 트럼펫이 공존하다 중반이후엔 트럼펫이 오기로 밀어부치는 듯 관현악의 최상위에 올라앉더니 후반엔 다시 한번 불같은 강렬함을 쏟아내면서 한껏 웅대한 호연지기를 살리고 있다.
이 도입부는 이 음반전체 중 가장 위대한 해석으로 비록 고악기를 쓴 녹음들에서 -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긴 했지만 - 비슷한 밸런스를 찾을 수 있긴하지만 푸르트뱅글러의 전쟁 중 녹음만한 것은 앞으로 몇십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제시부 직전의 ff에선 (53번째 마디) 처음 ff는 현이 중심이되고 바로 다음 ff에선 (55번째 마디) 금관이 중심이 되는 것은 묘하게도 번스타인/빈 필 음반과 꼭 같다. 제시부를 여는 플룻의 노래는 43년 녹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음색이 또렷하게 살아있다. 89번째 마디의 제시부 첫 ff는 모노 음반의 한계 때문인지 약간 포화된 울림으로 디테일이 잘 구분되지 않는 점은 옥의 티다. 제 2주제는 토스카니니의 음반을 듣지 않은 한 악보대로 강인하게 연주된 음반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역시 이 음반도 그 점은 어쩔 수 없다. 푸르트벵글러가 이렇게 해버림으로 해서 다른 후배 지휘자들이 자연스레 그를 따랐을 지도 모른다는 것은 뒤에 EMI에서 행했던 음반에서도 이 부분의 해석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종결부는 예의 그 흰색으로 빛나는 트럼펫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마무리도 매우 훌륭하다.
전개부에서 호른과 목관의 ff에 트럼펫이 ff로 길게 답하는 205번째 마디 이후도 물론 확실하게 강조되어 있다. 이후 254번째 마디에선 실로 무시무시한 클라이막스를 만날 수 있다. 이 당시 베를린 필의 금관주자들의 기교는 현대 베를린 필의 그것 이상으로 투티의 안정감은 그 어느 연주보다 돋보인다.
재현부 초반의 16분음표와 4분음표로 된 리듬을 연주하는 관들의 밸런스는 역시 훌륭한 것으로 관들이 용인될 만큼의 시간차를 두고 살짝 어긋나게 등장하는 것이 강인한 울림에도 많은 악기소리가 들리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 2주제는 제시부와 다르게 트럼펫으로 리듬을 만들어가는데 쓰고 있는 것도 후의 지휘자들이 많이 따라한듯하다. 곧이은 ff에서 계속된 짜릿한 ff를 만들어 주며 재현부 끝의 트럼펫의 번쩍이는 음색과 또렷한 기교도 완벽하게 코다로 넘어간다.
코다는 확실한 크리센도후에 ff로 장대한 클라이막스를 만든 후 432번째 마디 이후의 트럼펫과 호른의 대화를 완벽하게 만들어낸다. 엔딩 직전에 트럼펫이 약간 음량을 낮춰서 대신 호른과 현을 강하게 울리면서 스케일을 풍부하게 한 후 곧 이를 더 큰 음량으로 뚫고 트럼펫이 재등장하면서 실로 장쾌하게 끝난다. 이 또한 둘도 없는 매력적인 엔딩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 하늘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