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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노숙 수행기(네째날)
3월 31일 수요일.
이틀째 연이어 신세 진 서면 지하도를 뒤로하고
무거운 몸을 지하철에 싣는다.
새벽차에 눈 지긋이 감고 피곤한 몸 이끌고
어디론가 움직이는 사람들...
그 사이로 노숙자들도 끼어 움직이는 세상이
그리 정겹지는 않다.
부산진역에 내려 급식천막으로 향해 밖으로 나오니
봄비가 제법 주룩주룩 내린다.
천막입구에는 낡은 그레이스 승합차 한대가 서 있었고
비를 맞으며 홍 목사님과 몇 안되는 두세명의 봉사자가 분주히 움직인다.
차 곁을 가까이 지나며 보니
앞 한쪽 해드라이트 부분이 심하게 찍혀 흉물스럽고
조수쪽 문짝도 잠긴걸 억지로 여느라 헤어져 너덜너덜한 모습이다.
마치 15년전 나의 지난 모습이 오버렙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직동 두 촛대교회 홍 목사님의 투혼이 느껴진다.
밥도 정말 가난하다.
김치국밥에 중간중간 양배추 겉절이를 반찬으로 내 놓았는데
밥은 거의 설익은 밥에다가 반찬도 부족하고...
비맞은 쥐처럼 웅크리고 그것도 두말않고 비우는 형제들.
이심전심인가 보다.
좀 있는 단체라면 투덜데거나 성깔있는 형제는 '이게 밥이냐고' 고함지를 텐데...
빗줄기를 맞으면서도 설겆이를 하시는
홍 목사님을 보고
'목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하니
'아이고, 김 목사님. 아입니더' 하시며 겸양해 하시는 모습.
모두다 떠났는데 몇몇 형제들은 가질 않는다.
왜그런지 가만히 앉아 관찰하였다.
조금있자 의자를 셋씩 붙이더니 그자리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냥 점심 올때까지 잠이나 청할 심산인 모양이다.
병호 형제는 우의를 단단히 챙겨 입더니 꼬지보러 간단다.
'아니, 이 비에?'라고 하니, 비 오는 날은 꼬지꾼들이 줄어서 '오히려 잘된다'는 거다.
역시 꼬지의 명수(?)요, 달인(?)이다.
나도 점퍼에 달린 모자만 덮어쓰고 빗속을 걸었다.
점퍼에 빗물이 젖더니 타고 내린다.
전철안에서 손님들 가까이 서기가 좀 거시기 했다.
부산역으로 갔다가 1시간 정도 머물다,
다시 점심시간이 되어 부산진역으로 전철을 타려는데,
젊은 공익직원이 통제하면서 불법승차를 막는다.
'부산진역 노숙자 점심식사하는데 가려는데...'하는데
단호하게 무임승차는 안된다고 하는거다.
이땐 다른 우대권을 들이대도 안되기에 난처하였다.
'그냥 점심을 건너 뛸까.'하고 생각도 났지만
계속 그럴수도 없고... 난감해 하다가,
저쪽 편 개찰구로 가 보기로 했다.
아뿔사, 이곳도 지켜서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마침 저쪽편 하차 손님들이 우루르 몰려 나오면서
한 분의 표가 걸려 '삐~'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 직원이 그곳에 가는 사이를 틈타 반대편 개찰구 아래로 얼른 기어들어갔다.
속에서 두근두근 거린다.
조금지나 그 직원이 따라와서 '잠시 보자'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일은 없었고 무사히(?) 부산진역으로 갈 수 있었다.
오늘 점심은 '가난안교회'에서 준비해 오셨다고 한다.
빗방울이 많이 잦아졌고 이미 배식은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은 목사님과 사모님이 안 뵈이신다.
그래서 그런지 예배는 없었고 머리흰 나이드신 형제 한 분이
식사하는 시간 계속 복음성가를 반주에 맞춰 부르고 있었다.
밥도 양껏 퍼 주시고 국은 돼지고기 살코기가 듬뿍 들어간 육개장이었다.
반찬도 무김치와 오이초무침과 잔파겉절이로 가득가득 넘치게 담아 주신다.
올핸 꼬지보러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고
이렇게 끼니끼니 안 거르고 먹어대면 몸이 늘겠다 싶다.
가나안 교회의 형제들을 인도해 오신 인도자도
나이가 지긋한데다 이도 빠져있고 한 걸 보아
아마 형제중 전도자로 나선분 같다.
모두 자발적이고 신앙적 분위가가 느껴진다.
연 4일을 씻지않고 노숙하며 딩굴었더니
머리카락도 끈적끈적, 몸 안도 근질근질하다.
게다가 비까지 맞으니 온 몸에 냄새가 물씬물씬 나는 것 같았다.
그냥 마칠때까지 버틸까 씻을까 두 생각이 교차하며 겨루다가
결국 씻기로 했다.
그래서 구명 역으로 향하는 전철로 갈아탔다.
몸도 씻고 속옷도 갈아 입으니
온몸이 가볍고 뽀송뽀송한게 한결 산뜻하였지만
어딘지 노숙수행이 끝난것 같다는 느낌이 있어
한쪽으론 찜찜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저녁식사는 천주교 어느성당에서 라면과 김치를 제공하고
점심때 남은 밥을 자체적으로 끓이고 말아먹는 다고 하였는데
약간 늦는 바람에 놓쳤다.
그래서 곧바로 부산역으로 향했다.
부산역사 맞이방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입구에
덕근 형제가 우산장사를 하고 있었다.
며칠전 진영이를 볼때 일보러 갔다해서 못 만났었는데
아직도 비오는 날이면 우산장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덕근 형제는 부인한테 들었다면서
'우리 진영이를 찾아줘서 고맙다'고 연신 머리를 숙인다.
맞이방 안으로 들어서니 비가 와서 그런지 형제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 북적이는 손님들 가운데엔 아마 나를 알아보고 갸우뚱 거리며
지나는 손님들도 있었을게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손님들은 들어오지 않고 형제들만 보인다.
의자에 앉아 조는 형제들, 구석에서 숨어 술마시며 떠드는 형제들,
TV를 보는 형제들, 손님들에게 다가가 꼬지보는 형제들,
괜이 서성이는 형제들 등 여러가지다.
저녁 10시쯤 되니 싸인이 왔다.
아랫층에 천주교에서 김밥을 나눠주니까 빨리 내려가보라는 알림이었다.
알려준 형제를 따라 내려가 보니
서대신성당에서 외국인으로 보이는 청년 둘과 여자청년 둘이
유부초밥 도시락에 콩나물국, 김밥, 찐계란, 커피까지 준비해 와 잔뜩 주었다.
그런데 분량이 한 20~30여명분이라 금방 동이 났다고 한다.
마침 저녁식사를 못했는데 잘 해결되었다.
1층 한 가게가 리모델링하면서 종이 박스를 여러개 내 놨길래,
오늘은 손쉽게 하나 구할 수 있었다.
그걸 가지고 2층에 올라오니 진역 급식천막서 식사할 적마다
'목사님, 스테이션(부산역)에서 같이 자입시더. 제가 보디가더 하겠심더.' 라고
쟁쟁거리는 동기 형제란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기 형제는 몸집도 큰데다가 배가 산만하고 숨을 씩씩거리면서도
성격은 낙천적이라 맨날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닌다.
그런데 씻지는 않고 몸을 너무 더럽게하여 가까이 있을 수가 없다.
말도 반복적으로 끝도 없이 하여서 귀찮을 정도였다.
하지만 앵겨 붙으니 난감하가 짝이없다.
또 옆에는 깔끔한 안경낀 형제 한분이 있는데
인상도 부드럽고 술도 잘 마시지 않는 며칠 안면을 익힌 분이 있었다.
그 형제는 핸드폰을 충전시키면서
어디선가 일할곳으로부터 전화를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11시가 조금 넘자 연락이 왔다면서 너무 좋아라 했다.
마치 복권이 당첨된 것처럼...
실내장식 업자로부터 보조공으로 한 현장 1주일 정도는 될 것같다며
일당 9만원이니까 마치면 방 하나 장만해야겠단다.
노숙 형제들 중 드물게도
이렇게 노숙생활 하면서 하루라도 용역이나 아는 분으로부터
연락이와서 일하러 나가는 걸 큰 벼슬이 떨어진양 의기양양해 한다.
하지만 대부분 일 마치면 몇푼 안되는 돈은
많은 주변 술귀신들의 등살에 곧 다 날려버린다.
동기 형제가 좋은 잠자리 구해놨다며 보채서 가보니
자판기와 현금지급기를 집중해 놓은 구석이었는데
여러 노숙 형제들이 진을 치는 곳이었다.
찌린내도 나고 퀴퀴한 냄새가 가시질 않는 곳이다.
그런데다 같이 자자고 하는 동기형제의 몸에서까지 냄새가 진동을 하니
속에 갈등이 인다.
'어떡하지? 이 냄새속에서 몸 비비며 잘까 말까?'
백짓장 한장 사이로 수백번 생각이 번개처럼 왔다갔다 하다가 말기로 했다.
아마 오늘 씻고 오지 않았다면 반대로 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동기 형제한텐 냄새땜에 도저히 숨을 못쉴 것같아 따로 다른 곳을 찾아본다고 했는데
동기형제는 천연덕스럽고 능청맞게
'아이고 목사님도, 발냄새 쪼금가지고 머 그라는교?' 하였다.
아까 그 일자리 생겼다는 형제가 자리하나 있다고 안내한다.
2층 가게와 가게 사이의 틈새 공간에 세광 형제가 맡아놓은 명당(?) 자린데
이상하게 그곳이 비어있었다.
그 형제가 내게 귓속말로 '오서방(세광 형제의 별명)은 오늘 사우나에서 잠니더'하며
그곳에 박스를 펴란다.
아닌게아니라 그곳에 박스를 한장 펴니 정말 10문 7이었다.
너무 자리가 안성맞춤이었고 누워 잠을 청하자마자
단잠에 깊이 빠져버렸다.
12시경 부터 잠이들어 새벽 4시경 부산역 직원들이 순회하면서 깨울때까지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그자리에서 잘 수 있었다.
2010.4.1 아침 8시 경, 복지관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2010년 노숙 수행기(닷새째날)
4월 1일(목)
이상하게 오늘은 일어나니 4시가 다 되었다.
자다가 일어나 오줌한번 누지 않고
줄곧 잠을 잘 수 있었다.
오늘 아침식사는 우리 복지관의 차례 날이다.
밤새 비가 내리더니 새벽길도 빗발이 여전히 굵고 끝이 없다.
비오는 날이면 의례 식사 손님들이 좀 떨어진다.
오늘도 부산진역 전철역에서 개찰구를 나오는데
우리 집 성곤형제와 영일 형제가 건너편에서 거의 같이 도착했는지
반가이 만났다.
복지관 지하로 들어서자 박 간사님이 먼저 도착해
국을 데우고 있었고 형제들은 상닦고 반찬과 수저를 놓는다.
조금있으니 좋은나무교회 박철목사님와 사모님도 들어오신다.
박 목사님께 일전 목요일과 토요일 부탁을 했더니
사모님까지 모시고 내려왔나보다.
박 목사님은 나의 친구라며 고난주간 노숙수행 관계로 기도하러 나왔다고 소개하고
사모님은 부엌에 들어가 국자를 잡고 국을 푸신다.
한참 국밥이 배식되면서 박 목사님은 형제들 틈에 앉은 나를 발견하시고
손짓을 하며 반기신다.
그리고 크 큰 몸집에 어울리지안게 밥쟁반을 들고 써빙도 해본다.
거의 배식이 끝나가자 사모님이 아이들 아침을 챙겨줘야 해서인지
미안해 하며 목사님과 함께 조용히 빠져 나간다.
조금 후 박 간사님도 역시 아이들 챙기느라 떠나고
우리 식구들만 달그닥거리며 설거지와 청소를 다 마무리 한다.
난 사무실에서 어제의 일기를 부지런히 두드리고...
9시가 넘고 10시가 가까와서야 글작업이 끝나고
영일 형제만 남긴채 사무실을 나선다.
'비는 종일 올거라고 하는데 오늘은 어디로 간다지?'
올해는 무릎이 아파서 꼬지행을 생략했더니 갈 곳이 없다.
그래서 다시 부산역을 찾았다.
부산역에서 1시간 반 정도 머물다가 다시 점심먹으러 돌와야 한다.
부산역에서 봉희 형제를 만났다.
봉희 형제는 얼굴 형색이 좋았는데 술꾼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한동안 부산역 바닥에 안보였는데...
얼마전 정신병원으로 들어가 생활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답답하면 나와서 술을 실컷마시고를 반복했다는 거다.
10년이 아마 넘었을 게다.
봉희 형제가 대전에서 첨 내려와 우리 부활의집으로 들어왔을 때.
그때 50대 중반이었는데 한쪽 다리를 의족을 하였지만
성격은 깡깡하며 야무졌다.
헌데 수급자가 되더니 스스로 나가 방얻어 지내다가
부산역 술 귀신들과 오랜 교제를 하면서 몸이 많이 쇠약해 졌었다.
봉희 형제는 목사님이 병원에 보내주시면 좋겠다고 사정을 한다.
내일 병원에 가실거라면 차를 부르겠다고 약속도 하였다.
점심은 서대신동의 중앙성당에서 준비해 올 차례였다.
굵은 빗줄기 속에도 12시에 딱 맞춰 도착했다.
이런 빗발 속에서도 5열로 줄을 서야한다.
우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섞여서 줄서있는 동안
비를 흠뻑 맞아야 밥 한 그릇을 받을 수 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쌀밥에 된장두부국,
그리고 반찬도 제육볶음, 오뎅볶음과 무김치인데
모두 식판에 넘치도록 주신다.
점심도 잘 먹고 다시 부산역을 찾는다.
아마 부산역에서 나처럼 식사때마다 움직이는 식구들은
한 20여명 되나보다.
돌아오면 자동 앉아서 취침시간이다.
오늘은 거의 이 틈에서 졸다 TV 시청하다를 반복하며 오후를 보냈다.
저녁식사는 연산동 예수중심교회라고...
점심의 중앙성당도 그렇고 내가 잘 모르는 곳이다.
역시 식판에 중앙성당과 약속이나 한듯 밥과 국 반찬을 잔뜩씩 올려준다.
국은 미역국이요 반찬은 또 제육볶음과 김치와 무생채다.
여기도 목사님이 인도하지 않고 교인들만 와서 그런지
예배는 없고 기도만 간단하다.
오늘 저녁은 좋은나무교회에서 '부산예수살기' 주최로
에큐메니칼강좌를 열기로 한 날이다.
노숙하는 처지라 냄새도 그럴꺼고 참석을 안하려고 했는데
새벽에 박 목사님의 말도 있고, 또 우중에 사람들도 많이 안올것 같아
천막 형제들에게 우산 하나를 빌어 가 보기로 했다.
오늘의 제목은 '에큐메니칼 선교의 현황과 그 실천적 대안'이었고
강사는 독일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WCC에서 일한적 있는 젊은 참신한 교수였다.
내용이 참 좋았고 부산 NCC 총무의 논찬이나 질의응답 등이 좋았다.
마치고 사회자가 남루한 차림과 형색을 한 내게 마침의 기도를 부탁해와
좀 당황스러웠던데다 대부분 아는 면면들이 형색을 보고 다들 묻는다.
고난주간 7일간 노숙수행중이라는 답변이 좀 쑥스러웠다.
강사와 서울서 내려온 스탭 두어분과 몇몇 중요 인사들은
부산역앞 아리랑 호텔에 숙소를 잡아드리고
간단한 뒷풀이를 갖기로 하고 우리의 아지트 '부산정거장'을 찾았다.
막걸리와 삼합 등 안주로 점점 대화는 무르익어가고
결국 12시쯤되어 마칠 때는 배가 너무 부르고 남는게 많아
내가 챙겨서 노숙 형제들에게 갖다 주기로 허락을 받았다.
나는 서울서 온 손님들이 아리랑 호텔로 가야하기에 역 광장에서 헤어지고
곧장 2층 맞이방으로 올라갔다.
마침 '화끈' 형제와 여인 그리고 몇몇 형제들이 있어서
얻어온 막걸리와 안주들을 드렸더니
'아니, 목사님이 웬 이런걸...' 하면서도 반색이다.
형제들은 나를 옆에 앉으라고 재촉하였지만
그냥 자리를 피하여 맞이방을 한바퀴 돌았다.
벌써 1시 가까이 밤이 깊었다.
잠자리를 위하여 가까운 편의점에 들러 종이 상자를 얻으려고 찾았다.
비가 이틀을 내리 왔던터라 박스들이 모두 동나고 구하기 어려웠다.
겨우 하나를 구해 가게를 막 나오는데 앞 택시타는 곳에서
개인택시 하나가 후진을 천천히 하다가
행인 한분을 치어 넘어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순간 넘어진 젊은이는 일어나서 경찰에 전화를 하고 다시 드러눕는 등
좀 오버액션이 지나친 것 같아 경찰이 오면 운전자의 과실도 과실이지만
너무 오버하는 젊은와 어쩔줄 몰라하는 나이드신 운전자 사이에
목격자로서 한마디 거들려고 서 있었다.
사람들도 여럿이 운집해서 이런말 저런말이 오가고 소란스러웠다.
이윽고 경찰은 도착했고 역시 젊은이는 호들갑인데
늙은 아저씨는 말이없다.
그때 나와 다른 한 목격자는 약간의 증언을 하여주고 연락처를 경찰에 남겼다.
그런데 그때 다른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다짜고짜로
'아저씨, 혹시 어디서 주무시는 겁니까?' 하고 묻는다.
다소 서울말씨와 도시스런 인상착의로 보아 대충 알만한데
이 사람은 나를 보고 한 눈에 노숙자 같은데 나서서 똑똑하게 경찰에게 말하는 걸 보아
좀 의아했던 모양이다.
'왜 그런걸 묻습니까?'
'아뇨, 그냥요.'
'전 여기 부산역에서 노숙하고 있습니다.'
'아, 예. 그렇잖아도 좀 궁금해서요. 한 말씀 여쭤도 될까요?'
그 젊은 사람은 30대 후반 쯤 되어보이는데,
나에게 노숙생활을 어떻게 하게 되었냐는 둥
어쩔수 없이 이럴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느냐는 둥
아니면 나름 일부러 노숙하는 이유가 있느냐는 둥
질문공세가 심하게 비집고 들어온다.
그래서 그렇게 궁금하면 잠시 시간내어
서로 충분히 통성명과 연락처를 교환하고 이야기 나누자고 하니,
꼬리를 내리고 바쁘다며 총총 사라진다.
어제 잠자리를 했던 곳이 비어있어서
다시 그곳에 박스를 깔고 잠을 청하려고 누워있으니
건너편에서 술판을 벌이던'화끈' 형제가 다가와
불쌍한 이 화끈이를 도와달라고,
이 화끈이 주님께 바로설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산역 간판인 이 화끈이가 주님께 돌아왔다하면 목사님께도 도움될꺼라고,
칭얼칭얼댄다.
그리고 말미에 곧 수급자 결정되면 갚을터이니 20만원만 빌려달랜다.
그냥 아무 말 안하고 듣다가
잠이 오고 피곤하니 내일 이야기하자고 해도 끝이 없다.
좀 있으니 부인 여자까지 밀고 들어와
비좁은 그곳에 드러눕는다.
할수 없이 박스를 두고 그 자리를 나와야 했다.
다시 밖을 나왔지만 박스를 또 구할수는 없었고 난감하였다.
시간은 흘러 벌써 2시가 지나가고 있었고
그냥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어보니 잠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구석구석 작은 종이 조각이라도 없나 살펴보기로 했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날이 새도록 서성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화장실 옆 쓰레기통 옆에 말짱하고 좋은 종이상자가 두개나 있질 않는가?
눈을 의심하였다.
'이건 주인이 있는 걸까?'
'아니지, 우리 세계에는 손으로 꼭 쥐고 있지않으면 이미 제것이란 없는 동네이지. 하물며...'
그래서 슬그머니 그것을 쥐고 가져가도 아무도 내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결국 박스를 들고 후미진 곳에 깔고 고단한 몸을 뉘었다.
단잠이 금방 들었을까?
역 직원이 돌면서 노숙자들 모두를 깨운다.
눈 비비며 일어나니 4시다.
정확히 4시면 모두 일어나 자리를 정리해야한다.
2010. 4. 2 아침에 사무실에 들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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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난 수행하시느라 정산님 고생 많으셨네요...
일년에 한번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시는 것은 말릴수는 없겠지만, 중세 수도자들의 고난수행의식이 생각납니다...
정산님은 안 그러하시겠지만, 루터가 그러한 자기기만적인 가톨릭의 고난수행의식에서 깨달음을 얻고 종교개혁을
주창한 계기가 되었다고 들었읍니다.
어떤 빈민봉사 목회자들처럼 변질되기 쉬운 것이 우리 인간이기에 늘 깨어 있을 목적이시기도 하지만, 방법을 바꾸어 봄도 생각 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 저의 부족한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음..부족한 단편적인 생각.. 춈 그러시네염. 휘리릭~!
용인님의 글은 어떤 면에서는 정산님의 수행을 오해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되네요..아니 어쩜 용인님의 생각이 그러한지도(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요...